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누가복음 24:13-35)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누가복음 24:13-35

본문이 길므로 해설과 적용도 깁니다. 본문은 직접 성경을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1. 실의와 낙망의 땅 엠마오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제자들에겐 믿기 어려운 허황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해 하던 두 제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실의에 빠져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도들과 함께 머물던지 아니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갈릴리를 향해 가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땅 엠마오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엠마오는 히브리어 하맛을 헬라어로 바꾼 것입니다. 온천이란 뜻이지요. 그들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의 꿈을 떠나 자신들의 몸이나 덥힐 곳 엠마오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를 향하는 시점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가 아닌 부활하신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빈무덤에 대한 소식,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천사들의 등장에 대한 소식,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빈무덤을 확인한 사실까지 이들은 모두 들은 후였습니다. 이쯤 되면 부활을 믿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만 3번, 논쟁 중에 말씀하신 것 포함 총 6번이나 예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회복의 땅 갈릴리가 아닌 자아의 땅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네, 천사를 보았네 하는 허탄한 소리를 지껄이는 동료들을 보며 ‘야~, 이제 다들 맛이 갔구나. 갈 때까지 갔네’ 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잠식한 낙망은 그들의 발걸음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2. 예수의 개입으로 구원의 샘이된 엠마오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안이 열려 멀쩡히 세상을 바라보며 걷고 있지만 영안이 가리워 가야할 길도 분별하지 못하고, 길을 인도할 예수님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을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것이라는 세밀하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낙망에서 벗어나 소망 안에서 새 비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는 온천이란 뜻이지만, 오늘날은 구원의 샘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곳의 온천에 몸을 담그면 치유가 일어난다 믿어져 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천물의 치유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온천의 의미가 구원의 샘의 의미로 전환된 것이 엠마오에 대한 이미지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몸을 덥히는 온천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구원의 샘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엠마오로 치닫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함께 손잡고 주님을 위해 뛸 동역자들이 있는 곳,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예수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전혀 중요한 인물들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입니다. 글로바가 누구인지 성경은 정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글로바와 함께 했던 다른 제자의 이름은 언급되지조차 않습니다.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엑스트라 같아 보이는 두 제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온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친히 찾아 오시고 말을 건네기를 원하십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믿음의 땅을 떠나 자아의 땅을 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메시야라고 오해된 채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추억 속의 스승’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믿음의 땅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더라도 그들이 향해야 하는 땅은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는 첫사랑의 장소요 회복의 땅입니다. 믿음이 사라져 버리고 소망도 날아가 버렸을 때, 그들이 찾아야 하는 땅은 갈릴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회복의 소망마저도 끊겨 버렸습니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가 아닌 엠마오를 향합니다. 엠마오는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아의 땅입니다. 이제 그들은 엠마오를 향해 발걸음을 하나씩 옮길 때마다 예수님께 걸었던 소망의 단편들을 하나씩 떨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절망되고 낙심되는 일이 생겼을 때 너무도 쉽게 믿음의 땅을 떠납니다. 애써 회복의 장소마저 피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 꼭꼭 숨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실망했어요. 이제 절 내버려 두세요.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할거에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래 오셨던 것처럼, 제 인생에서 빠져 주세요. 언제부터 저한테 관심이 있었다구…”

이렇게 중중거리면서 갈릴리의 반대 방향인 엠마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믿음의 땅으로 회복의 땅으로 돌리시길 원하십니다.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시고 우리 옆에서 나란히 동행하시며 말을 걸어 오십니다.

 

4. 영의 눈이 닫힌 제자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옆을 동행하시며 늘 말씀을 걸어 오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믿음의 땅, 회복의 땅, 소망의 땅, 사명의 땅으로 돌려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의 눈이 닫혀서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닫힌 이유는 눈을 가리는 지성의 커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간적인 지식이 눈을 가린 것이지요. 사람의 상식이라고 하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린 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지성의 커튼을 지성으로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풀어 주신 것이지요. 말씀을 알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눈을 가리워 버립니다.

 

눈을 가린 또 하나의 커튼은 감성의 커튼입니다.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 때문에 결국은 그 어떠한 소망의 메시지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감성의 커튼 역시 말씀을 통해 함께 걷어 내십니다. 말씀을 듣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고 그들을 잠식했던 절망은 이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5. 미련하고 믿음 없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예수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불쾌해 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미련하고 믿음 없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뭘 믿는지도 모른 채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자기의 의견, 자기의 생각대로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란 이름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련하고 믿음없는 그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의 무지와 불신을 거두어 주십니다. 이 때에도 역시 말씀이라고 하는 툴을 사용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우리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두사람은 우리에겐 소망을 던져 줍니다. 결코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 쉽게 믿음의 땅을 떠나 자아의 땅을 찾아 나서는 사람, 영안이 가리워져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도무지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옆에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첫사랑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소망을 되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감지할 수 없을 뿐이지요. 그 분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만져져야 합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이미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저 지식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만져져야 합니다.

 

말씀이 완벽한 진리가 되어 우리의 지성을 완전히 장악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뜨겁게 하여 우리의 감성을 완전히 장악해야 합니다. 더이상 내 생각 내 뜻이 내 삶을 지배하여 엠마오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삶을 이끌어 믿음의 땅으로 되돌아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진정 말씀이 각주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번호가 달리고 그 번호마다 각주가 매겨져야 합니다. 그 각주에는 우리의 언행 하나 하나가 어떤 말씀에 입각한 것이었는지가 성경구절로 적혀져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좌절과 낙망과 무지와 불신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도 말씀이 각주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6.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말씀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풀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두 제자는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10km를 걸어온지라 이미 해는 저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행을 하려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그 곳에서 유숙해달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양하셨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졸라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매달린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계속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탁월한 성경 학자 쯤으로 알고 존경하며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풀어 주시는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더 듣고 싶어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끈질기게 졸라대는 그들의 성화를 예수님은 이기지를 못하십니다. 가끔씩 엠마오의 두 제자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이 든데, 말씀을 전해달라 초대하는 사람도 있고 성경공부를 시켜달라 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다가도 끈질기게 졸라대면 더 사양할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을 내어 말씀을 전해도 귀에 막대기가 꽂혀 있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시간과 열정이 참 아까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알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영의 눈이 열린 제자들이 달려갈 길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그들과 함께 마을에 머무셨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고 축사하신 후에 그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오병 이어의 기적과 유월절 만찬의 데칼코마니이지요. 물론 두 제자는 최후의 만찬에는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순간에는 있었겠지요. 떡을 떼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뾰로롱하고 사라지십니다. 부활하신 몸은 우리의 육신과 달라서 시공의 제한이 없습니다. 또한 부활한 몸은 생전의 겉모습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나그네로,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은 어부 중 한 사람 쯤으로 오해하기도 했으니까요.

 

두 제자는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이미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까지 열려,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당장 일어나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 갑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고 이미 10km를 걸어온지라 육신은 지친 상태이지만 그 위험한 밤길을 지친 몸을 이끌고 앞뒤 잴 겨를 없이 급히 나섭니다. 그들이 향하는 예루살렘은 믿음의 성이지만 또한 위험의 성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를 잡아죽인 대제사장들의 무리가 여차하면 예수님의 잔당들을 잡아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린 자리입니다. 위험을 피해, 절망 가운데 도망나왔던 그 성을 향해 이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8. 함께 손잡고 뛰어야 할 동역자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했을 때에는 제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보았고, 여인들이 보았으며, 베드로까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저 빈무덤으로 예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 역시 엠마오 도상에서 자신들을 만나 주신 예수님에 대해 간증을 나눕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부활은 점점 만져지는 사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 중에 예수님을 깨닫게 되고 삶을 통해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면 그냥 앉아만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위험한 밤길도 지친 육신도 타이트한 스케쥴도 제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이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뛰는 심장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저 표본실의 박제처럼, 박물관의 모형처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이들로 교회는 넘쳐 납니다. 마음의 평안, 개인의 위로와 안식을 얻으면 그것이 다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정적이거나 개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뛰어 다녔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그 삶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두 제자는 자신들의 부활의 첫 증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시라도 빨리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들은 밤길을 마다 않고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또 다른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네번째 증인들이었을 뿐임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들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에이 1빠 놓쳤네” 그랬을까요?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려고 결심만 하면 그 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할 자를 예비해 놓으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기나긴 여정은 결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함께 하며 서로 나눔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함께 가기 위함이고, 외롭지 않기 위함이며 힘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 주며, 아껴주는 귀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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