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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옆자리 (눅 23:26-31)

* 십자가의 옆자리

* 누가복음 23:26-31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험난한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을 오르기 전에 이미 탈진상태였습니다. 십자가 형벌을 받는 사형수들은 모두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진 채 1.5km나 되는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라는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심문받고 고문 받고 심지어 온몸의 살점이 찢기도록 채찍에 맞은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그 긴 길을 걸어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십자가의 무게는 100kg이나 되었습니다. 수평대가 40kg, 수직대가 60kg이나 되었습니다. 수면부족에, 이미 몸이 너덜 너덜해질 정도로 고초를 겪으셨고, 피를 많이 흘리신 몸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힘들고 지치고 곤하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수치를 당해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 특별히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일에 기쁨이 없고 열매가 없으면 일을 내려놓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시 됩니다. 현대 크리스쳔에게서 십자가를 지는 한 사람을 찾기란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쿼터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실제로는 억지로 져야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편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열매를 보고 싶고, 행복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 억지로 지킨 십자가의 옆자리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 하나를 소개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있듯이 그는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살다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잠시 방문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놀라운 기적의 사람이 처형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중들에 섞여 그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번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의 눈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가차없이 가해지는 채찍질에도 도무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군인들은 십자가 행렬을 구경하던 건장한 청년 시몬을 불러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는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말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1-22).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마가가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는 것이 특이합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 소개를 하는 것이지요.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입니다. 마가는 로마의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으므로 로마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된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은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함께 지는 과정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접한 구레네 시몬은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을 위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아들 루포도 교회의 핵심적인 일꾼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한 가정의 구원을 가져온 것이지요.

3. 억지로라도 져야 할 십자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교회를 고르는 기준은 십자가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리더들마저도 십자가를 지기 보다는 면류관을 쓰기를 기뻐합니다.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성도들이 모여 행복하게 교제하고 누리고 놀다가 한 세상 마감하는 것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십자가가가 실종된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를 찾을 때에 내가 질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없이 묻혀서 하는 일없이 왔다갔다 하며 교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늘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감당이 안될 때에는 쉬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섬기는 물질이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과 힘듬을 모두 이해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에 기쁨이 없고 힘만 들다 할지라도, 그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자신이 회복에도, 하나님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 죽도록 섬겨도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욕얻어 먹을 것이 뻔한 일, 그런 일들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십자가는 숙명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상이지만, 가끔은 억지로라도 지고 가야 합니다. 처음엔 억지로였던 것이 결국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악용하여, 십자가를 버린다면, 진정으로 힘들고 고독한 그 십자가는 누가 지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탈진한 상태에서도 졌던 십자가, 주님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십자가를 이제는 우리가 지고 갑시다. 십자가를 온전히 못 지겠거든 십자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따라갑시다. 십자가에 흘려진 피와 땀은 단 한방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은혜로 갚으십니다.

4. 슬피울며 지켰던 십자가의 옆자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실 때 그 뒤를 따라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절대적 약자인 여인들이었습니다.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자신들을 찾아와 사랑으로 감싸주고, 삶의 무게를 덜어주었으며, 절망을 지워주신 그 분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분, 은혜를 베푸신 분이 땀과 피로 얼룩진 채 비틀거리며 십자가를 지고 걷다가 수도 없이 넘어지는 광경을 봐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5. 십자가의 옆자리에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여인들은 죄 없는 분이 학대를 당하고, 선하신 분이 십자가의 저주를 지며, 의로우신 분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닌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으로 울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에 대한 경고요, 회개에 대한 권고였습니다. 심판의 날이 올텐데 그 날에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 걱정할 것없이 자기 몸만 챙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차라리 산사태가 나서 자기들을 묻어 버리기를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가 너무 심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위하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자손들의 죄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있을 진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가르키고, 마른 나무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가르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신 것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그 죄들의 원 주인인 마른 나무같은 우리에게 가해질 진노는 도대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경고입니다. 심판날의 엄중함은 차라리 산사태가 나서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길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울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르며 가슴을 치던 여인들처럼 예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의 가시 하나 하나, 예수님의 몸에 내리쳐진 채찍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의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것을 우리는 왜 가슴 아파합니까? 고통받는 한 인간의 아픔때문입니까, 그 아픔을 야기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까?

죄인인 우리에게는 죄가 하찮게 여겨지지만 절대선이신 하나님께 죄란 너무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공의를 행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죄를 진 죄인들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임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인생의 해가 저물고, 그 날이 오면 영혼에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쓰나미를 죄인인 인간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할 길은 오직 하나 은혜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법에 등록을 하는 자는 은혜에 의해 산다는 법입니다. 푸른 나무인 예수님께 가해졌던 진노와는 비교될 수 없이 참혹할 진노를 피하고 싶다면, 은혜의 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6.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

만약 은혜의 법안으로 이미 들어와서 마른 나무에 임할 진노를 이미 피했다면, 우리의 눈물의 의미는 달라져야 합니다. 동정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사와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 결단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오르시는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울고 있습니까?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품어 보신 적이 없다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향한 감동이 죽어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그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아야 할 세가지의 물이 있습니다. 눈물, 땀, 피입니다. 주님을 위해 땀을 흘려 헌신하고, 피를 흘려 순종하기 전에 반드시 흘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물입니다. 죄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 죄를 용서받아 흘리는 감격의 눈물, 주님을 사랑하여 흘리는 사랑의 눈물, 주님을 향하여 살겠노라는 결단의 눈물로 우리의 심령이 촉촉히 적셔져야 합니다. 그 눈물없이 흘리는 땀과 피에는 열매도 기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헌신의 땀을 흘리고, 눈물이 있기에 고난의 피,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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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악자(?) 예수 (요 18:28-32)

* 행악자(?) 예수

* 요한복음 18:28-32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본문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씌워 사형을 선고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갑니다.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밤을 꼬빡 새도록 심문과 구타와 모멸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한숨도 못 주무신 채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직접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가 사형 집행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때는 유월절이라 유월절 음식을 먹어야 했으므로, 예수만 관정에 넘겨지고 자신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더렵혀진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성경의 예표가 현실이 되는 장면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평소에는 총독의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으나 유월절 축제기간이라 민란이나 소요를 대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가이사랴에 있었다면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말한 예수의 죄목은 행악자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언도했지만,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통하는 범죄 사실이고 로마의 법은 그것이 통할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런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는 "행악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이 고발한 예수님의 죄목은 백성을 미혹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자라고 몰아 세워 로마법으로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흥분된 감정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을 처리해 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형태는 로마의 형벌 방식이 아니었다면 성취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손과 발이 뚫리고, 옆구리가 찔리며,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신포도주를 마시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행악자의 하나처럼 죽고, 부자의 묘실의 장사되고, 다리뼈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수많은 예언들이 십자가 사건 하나를 통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적용

1. 나의 죄로 인해 행악자가 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예표된 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잡히시고 죽으시는 날마저 정확히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란 이스라엘 백성 대신 희생이 된 희생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행악자이기는 커녕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셨지만 행악하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진 어린양이 되셨으므로 행악자가 되었습니다. 행악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우리의 죄목이 예수님께로 전가된 것이지요. 하루에도 수없이 범하는 우리의 죄악들이 예수님을 행악자로 만들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악자가 되셨기에 우리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로 이전되었습니다. 죄의 이전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기꺼이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겠다고 결단하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께 빚졌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예속된 삶과 생명을 우리의 뜻과 바람대로 계획하고 행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뻔뻔한 행위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피값을 주고 산 목숨을 가지고, 마치 자기 것인 양 주물럭 거릴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걸음도, 우리의 모든 소유도, 우리의 모든 재능도, 우리의 모든 호흡마저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끊임없이 이어져 온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유대법에 의해 처형되셨더라면 돌에 맞아 죽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로마법에 의해 처형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역사의 시간과 공간이 모두 성경을 이루기 위해 맞추어지는 모습에 그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미리 수많은 예언을 주시고,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켜 가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미 예비된 그 죽음의 길을 걷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 놀라우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충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가 죄악을 범하고 타락하는 그 순간부터, 더 정확히는 태초 이전부터,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온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행악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확증되어 졌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은 로마서 8:33-39에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간구를 해주시는 존재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마저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행악자가 되신 예수님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예표와 예언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역사를 움직여 가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멈추지 않는 사랑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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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의 심문 (마 26:57-68)

* 대제사장의 심문

* 마태복음 26:57-68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 본문해설

예수님을 잡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미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아직 체포되기도 전에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있는 죄목을 찾아 면밀한 분석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야바와 공회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진술에 대한 정확성 여부보다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는 것과 서로 일치하는 증언을 하는 최소 두 명의 증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두 증인은 율법을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거짓증인들이 자원하여 나섰지만 단 두명의 일치하는 증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증인들이 거짓 증언을 남발하는 거짓 법정에 드디어 증언이 일치하는 두 증인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증언도 사실은 일치만 했을 뿐 거짓 증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요2:19)고 하셨던 것이지 "내가" 헌다고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지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으킨다”의 원어 “에게로”는 “깨우다, 일어나다"의 뜻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성전을 다시 짓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무너뜨리라는 성전 역시 헤롯 성전이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즉, “너희가 나를 죽이라 그러면 내가 삼일만에 부활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으므로 그 목적에 부합하는 대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죄목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노력하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죄목은 없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헐겠다니 이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성전을 헐라”고 했다는 죄목의 증거를 잡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야바는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으시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만은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며, 그것을 위해 심문당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물어본 것은 궁금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해주신 예언대로 이루어져가는 필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심문당하시고, 고통 당하시다가 곧 죽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곧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할 것이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지금 심문을 당하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이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 모습을 모든 산 자와 죽은 자가 볼 것입니다. 물론 지금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있지만, 그 날에는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그들이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옷을 찢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의 표시였지만 사실 가야바는 속으로 큰 소리로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야바는 공회 중에서 일어나 회중들에게 묻습니다.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공회의 의장인 가야바의 말을 들은 모든 공회원들은 일제히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터무니 없이 사형을 언도한 그들은 급기야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수님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를 맞춰 보라고 합니다.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를 맞춰 보라며 마음껏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 적용

1. 거짓증언하는 성도들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증거들을 수집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인간의 죄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성결해야 하고 가장 정직해야할 무리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서 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계명의 제 9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늘상 율법 율법 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율법이고 뭐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립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습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 사랑, 말씀 말씀, 은혜 은혜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틀어지거나, 자신의 신앙관에 맞지 않으면, 사랑도, 말씀도, 은혜도, 모두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립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한줌의 가책도 없이 한 사람에 대해서 마음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부풀려지고 또 부풀려져 3일 후면 그 사람은 도마 위에서 흔적도 남지 않을만큼 난도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또 형체없이 짓뭉게 진 한 사람에 대한 요리를 너무나도 맛있게 즐겨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가십거리만 나오면 눈이 번쩍 트이고 귀가 활짝 열립니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일은 참 쉽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거짓 사실 하나만 말해 놓으면 “카더라” 통신을 타고 그 말은 일파만파 번집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순식간에 “죽일 인간”이 되어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나서서 자신을 항변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러한 믿음이 생기고 나면 그 사람이 했던 모든 정황들이 또 그런 것처럼 오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그런 정황들이 붙어지면 한 편의 소설이 써집니다. 소설의 제목은 “쥑일 놈 열전”이고, 저자는 “익명의 다수”, 출판사는 “카더라 통신”, 결말은 “나가 죽어!” 입니다.

2. 거짓증언을 감당할 능력이 안되는 성도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난도질 당하는 것을 즐기다가도 자신이 도마 위에 오르는 순간에는 또 아파 죽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법한 모든 사람들을 만나 결백을 증명해야 하고, 소문의 근원지를 밝혀내어 앙갚음을 해야 하고, 짐작 가는 인물이 있으면 다짜고짜 따지다가 그 사람이 아니면 사과 한마디 없이 “아님 말고” 하며 입을 딱 씻습니다. 누구인지 밝혀지기라도 하는 날엔 동일한 고통을 주기 위해 그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폭탄을 터트립니다. 사람들은 양쪽에서 빵빵 터지는 폭탄 놀음에 머리 아파 하면서도 은근히 싸움 구경을 즐기곤 합니다.

3. 거짓증언하지 말라

교회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짓 증거와 거짓 심문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소문만 듣고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옮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깨어진 상처를 안고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받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오히려 세상에서도 받지 않았던 상처를 안고 돌아 갑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너도 나도 상처를 받았다는데,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서 교회가 힘들다는데 상처를 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유익이나 감정의 해소를 위해 없는 사실을 꾸미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을 갈갈이 찢어 발기는 행위입니다. 상처를 받을 때에 나는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이 없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정이 상할 때에 그 사람이 하지 않은 일까지 만들어서 복수하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이며, 그 행동의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4. 그래도 교회니까 이 정도지

한편 그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보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죄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짓 증언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종교지도자들도 당대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죄인인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나마 교회이니까 그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교회같은 집단이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면 그 모임은 피바람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악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세상의 모습이 집결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빠졌느냐가 곧 그 교회의 실력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때가 빠진 실력있는 교회는 그 누구도 아닌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어주고 품어주는 아름다운 교회, 그런 교회의 시발점은 바로 “나”인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어쩌려고 그러나?

사람들은 한 치 앞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유한한 존재가 죽음 후에 벌어질 일들을 알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 모든 것들의 대략을 말씀해주셨지만, 사람들은 아쉽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입으로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가르침과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은 모두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었으며,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얼마든지 깨달을 수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메시야에 대해 기대했던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심문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내가 다시 올 때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우리의 뜻과 계획대로 살아가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위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구원주로 오셨기 때문에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가장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버리는 이유는 그 날에 대한 무지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예수님의 뜻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이유는 세상 끝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에 대한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하늘에 기록된 두 가지 책에 근거해 이루어집니다. 바로 생명책과 행위책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행위책에 기록된 행동들에 근거하여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6.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살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심판대 위에 서서 선악간에 행한 모든 일들을 자신의 입으로 읊어야 합니다. 심판대 위에 서는 자마다 온통 눈물 범벅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고백해야 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행위에 대한 치욕의 눈물이요,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의 눈물일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에 의해 그 죄가 씻기워진 것을 보면서 흘릴 감격의 눈물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루어낸 큰 일들을 고백하며 흘리게 될 추억의 눈물도 있을 것이고, 억울한 일들을 겪으며 아팠던 마음들을 털어 놓으며 흘릴 위안의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수천가지도 넘을 그 눈물의 의미들을 어찌 다 나열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자에게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을 결정짓는 심판이라기 보다는 구원 얻은 자들이 얼마나 충성으로 그리스도를 섬겼는지에 따라 보상 받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지상 대명령을 얼마나 순종했는지, 얼마나 죄 가운데 승리했는지, 말과 행동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형제들을 섬겼는지 등에 따라 심판 받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각자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섬겼는지에 따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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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잃지 않을 자들 (요 18:3-13)

* 결코 잃지 않을 자들

* 요한복음 18:3-13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장면은 각 복음서마다 매우 다르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술은 잡혀간다기 보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잡혀가 주시는 것이 너무도 명확히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잡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주시지 않으면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유다가 데려온 사람들이 '대제사장, 장로들이 보낸 무리라고만 기록하지만, 요한은 '군대'가 왔다라고 기록합니다. “군대”란 군단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인들을 말합니다. 12절에 천부장이 이끄는 군대인 것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군사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몇 십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한 군대가 이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000이다”라는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성호(성스러운 칭호)를 물을 때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했던 것과 동일한 답변으로, 이 대답에는 신적 권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신적 권위 앞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물러가 땅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걸어가신 것이라는 것이 잘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아가는 대신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제안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둠을 틈타 도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보호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부장의 군대가 도망가는 제자들을 놓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것도, 제자들이 도망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각본을 제시하신 대로 연출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9절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군대는 왜 잡아가지 않았을까요? 이름이 “말고”라 잡아가지는 “말고” 한 것일까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르자 예수님께서는 “검을 집에 꽃으라” 명령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원수를 치료하시는 사랑을 보이심으로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대비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이미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실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그 대속의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 적용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의 명확한 대조가 등장합니다.

1. 잡히시는 예수와 보호받는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그 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를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비록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가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잡혀가시며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이 장면은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도록 우리를 놓아주고 대신 예수님께서 잡혀 죽으시는 십자가의 사건과 너무나도 흡사한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 안에 있으며, 끝까지 보호받을 것입니다.

2. 원수를 공격하는 자와 원수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를 공격하여 칼로 그 귀를 쳐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참으라고 하시며 그의 귀를 고쳐 주십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될 때, 그 공격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악한 짓을 하는 자를 내 스스로 응징하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마저도 참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원수의 귀를 고쳐주시는 것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혈기와 자기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칼을 휘두르지만 사실 칼질을 할 능력도 못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작 귀를 잘라내는 수준의 칼질이었지요. 덕분에 우리 주님만 보이지도 않는 어둠속에서 말고의 귀를 찾아 붙여 주는 수고를 하셔야 했습니다. 600이 넘는 군대 앞에서 변변치 못한 칼질을 해댄 베드로는 주님의 보호하심이 아니었다면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마지막에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본 사람은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괜히 나대다가 죽을 고비를 맞이하고 예수님마저 부인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지요.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공격하는 본성을 거슬러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원수를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3. 의인을 해치는 자와 죄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말고는 죄없는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마저도 치유하십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단 사람마저도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그 죄와 허물을 덮으려 했던 예수님 사랑의 또 다른 작은 그림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가 귀가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흐르는데, 그것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말고가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4. 결론: 자기 양을 결코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를 위해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위해 일부러 찾아오셨고, 또 일부러 죽으셨습니다.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순간,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백성들 중 단 한사람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천명의 군대에게 둘러싸여 있는 듯한 상황에 계십니까?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피할 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파기할 수 없는 계약” 안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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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기도

* 겟세마네의 기도

*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요한복음 18:1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예수님의 번민과 슬픔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께서는 기도하기를 마치신 후 습관에 따라 (눅22:39)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올리브 산에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의 동산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에 도착하시자 예수님께서는 8명의 사도들을 동산 입구에 남겨 두신 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더 깊이 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몹시 괴로워하며 세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죽을만큼 마음이 고민스러웠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한 사람의 어깨에 지고 죽어야 하기 때문에 오는 죄의 무게때문이요, 그 죄책의 중압감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본 적이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 너무도 민감하십니다. 죄의 경험이 없으신 분이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게 되었으니 그 무게가 너무나도 괴로웠던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받게 될 십자가 형벌의 참혹함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와 똑같이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감당하셔야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완전한 인성을 입고 인간이 되신 것도 모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무게는 죄인을 향한 사랑의 무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깊이를 깨닫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죄인임을 더 깊이 느낄수록, 그 죄때문에 받는 마음의 고통이 무거운 사람일 수록,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인임을 깨달은 깊이가 바로 영성의 깊이가 되곤 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있습니까?

2. 나의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해야 하는 번민과 슬픔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무릎을 꿇고 (눅22:41)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앞으로 불과 몇 시간 이내에 죄책을 감당해야 하는 시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절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낮아짐이 고스란히 표현된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처럼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고통의 잔을 지나치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잔은 고통스러운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결코 피할 수 없으심도 아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바로 그 잔을 마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해 주시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고통과 번민의 시점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손수 보여주십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나의 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의 원”은 고통의 순간이 오면 그것을 모면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도, 죄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버지의 원”이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기꺼이 “아버지의 원”이 아닌 “나의 원”이 깨어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인류의 죄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나의 원”을 버리고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하는 “아버지의 원”을 택하겠다 고백하고 계십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연약한 인간 예수가 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수난이 더욱 빛나게 대조되어 우리의 가슴에 박히는 위대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원”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아버지의 원”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3.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한 시간 가량의 기도를 하시고 돌아온 예수께서는 세 제자가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을 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특별히 베드로를 꼭 집어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죽겠노라 호언장담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겠다더니 졸리는 것 한 시간을 못 견디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나머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 역시 베드로와 뜻을 같이 하겠노라 말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에게 함께 깨어서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시간도 깨어서 함께 기도를 해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능력이 안되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는 그들의 마음도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마음을 살아낼 육신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육신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지요. 기도는 육신의 연약함을 이겨 내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마귀의 지속적인 공격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화가 터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놀이터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기 저기 터지는 폭탄을 마치 폭죽 바라보듯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상하고 찢기어도 왜 상했는지 왜 찢겼는지 영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터 안에 있고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전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최종병기는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물으십니다. 한 시간의 기도도 결코 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 시간의 기도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고작 한 시간입니다. 오늘날 하루 한 시간의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니 가끔이라도 한 자리에서 한 시간을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도가 없는 신앙 생활은 성도들을 창백하게 만듭니다. 아무런 능력도 역사도 경험하지 못한 채 표본실의 박제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요.

4.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누가복음 22:43절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 44절에서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대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그 기도에 힘을 더하였습니다. 기도는 숨을 쉬듯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전력을 쏟을 때는 중노동처럼 힘든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영적전쟁으로서의 기도가 되면 천사가 와서 힘을 더해야 할 정도로 고역이었습니다. 그 돕는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혹자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때문이었다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는 일이 그만큼 큰 부담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사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입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천사의 돕는 힘까지 모두 쥐어짜서 더욱 힘쓰고 더욱 간절히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것을 짜내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겟세마네의 뜻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산에서 채취된 올리브로부터 기름을 짜내는 장소가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기름짜는 틀을 통해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올리브가 으깨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한 알의 올리브로 으깨지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시는 기도를 하셨고,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으깨기로 최종 결단을 하신 장소였습니다. 올리브가 으깨져서 기름을 제공하듯, 예수님께서 으깨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제공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짜내시는 기도를 하시고, 스스로를 으깨어 성령의 기름을 주신 예수님께 우리는 과연 우리를 으깨어 그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역시 우리를 짜내는 기도, 우리를 으깨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겟세마네로 올라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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