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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인사와 축도 (고후 13:8-13)

* 마지막 인사와 축도

* 고린도후서 13:8-13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 오직 진리를 위해

바울은 자신의 기준이 진리 수호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진리란 복음 자체를 말하나 특별히 복음 안에 있는 참된 교의를 말합니다. 복음은 그 가르치는 바 체계와 교리가 있습니다. 말씀 몇 구절을 선택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는 체계화된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면 복음을 들고 다른 복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 등이 우리와 같은 성경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복음을 사용하나, 참된 교의를 갖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 복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자신을 등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사역자는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진심을 알아주기는 커녕 비방하고, 모함하고, 참소하면, 사역자의 마음은 갈갈이 찢겨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들도 진리보다 앞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진리만 고수되고 선포될 수 있다면, 자신이 버림받는 자처럼 되고, 자격없는 사도라 모함을 받고, 옳은 자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기거이 감수할 것을 고백합니다.

 

2. 오직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바울은 9절에서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해질지라도 성도들이 영육간에 강해지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성도들이 온전해 지기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성도는 지속적 성화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성도들은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또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온전치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받는 성도가 되지만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늘 유혹을 받으며 넘어지곤 합니다. 마음이 연약하여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상하고 깨지고 다쳐서 헤매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거룩해지기보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느라 바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으로 온전치가 못합니다. 영적으로도 성숙하지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요동치 않고 살라고 우리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우리 자아를 깨고 새로워지기 위한 신앙의 분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만 의지해도 안됩니다. 아무런 노력이 없이 성령님께 간구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 믿음의 분투를 할 때에만 강해지고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오직 은혜 가운데 서게 하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쓰는 목적 중 일부를 성도들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대면할 때에 성도들을 징계하지 않고 세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악을 일삼는 성도들에 대하여 사도적 권위로 징계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한으로 성도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십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로서 권징의 권위를 갖습니다. 성도들이 은혜 가운데 스스로 설 수 없다면, 교회와 성도들의 순결성을 위해 교회는 권징을 베풀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가장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징계는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합니다. 특별히 현대 교회는 성도들의 자아가 강하여 징계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징계를 가하려 들면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자기 멋대로 살 수 있는 교회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또한 징계를 받아 들인다 하더라도 징계가 지배하는 교회는 율법주의와 정죄의 문화가 고착되어 버립니다.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원리가 아닌 원칙과 법의 원리가 통치하면서 메마르고 기쁨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최상의 모습은 징계가 아닌 은혜로 서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고 거룩을 지향해야 하나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발적으로 돌이키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니 징계라는 수단이 사용되고 맙니다.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4.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

바울은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 몇 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1) 기뻐하라

바울은 먼저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뻐하라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기쁘려고 마음을 먹는다 해서 기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라는 말은 사실 “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못할 상황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좌절할 만한 상황이 되면 성도들 역시 어김없이 좌절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그것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 성도의 영적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온전하게 되라

바울은 또한 온전케 되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분쟁과 음행과 교만과 자기 자랑에 묶여서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불의에서 벗어나 이제는 영성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고 의에 머물러야 하며 세상으로부터 떠나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위로 받으라

위로 받으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라칼레이스데’로서 ‘격려하다, 위로하다, 탄원하다, 권면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들을 갖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다툼, 분냄, 파당, 중상, 험담 등의 죄악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성도들은 서로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격려와 위로는 주는 사람이 있어야 받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아야 합니다.

 

     4) 마음을 같이 하라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습니다. 성격과 기질과 태도와 문화와 입장과 상황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신앙을 고백할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성령님도 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한 세례를 받고, 한 몸과 한 피를 먹고 마셨으며, 한 복음을 믿고 있음을 인정할 때에 성도들은 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화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회와 사람 사이에 화목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한 마음이 되어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 가능합니다. 자기 판단, 자기 지혜, 자기 입장을 죽이고, 온전히 하나됨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자 할 때에 비로소 이룰 수 있습니다.

 

     5) 평강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하며, 성도 개인의 내면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 없이는 인간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늘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 안에 거한다면 성도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임하며, 성도들 사이에도 평화가 임합니다.

 

     6)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문안하라

입맞춤은 고대 근동의 인사 형식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입맞춤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거룩한 입맞춤으로 발전시켜 사용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입맞춤은 제의적 의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만찬 전에 서로에 대한 용서와 화목의 표시로 서로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주님 안에 한 가족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문화권에서 거룩한 입맞춤을 제의적으로 사용한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의도는 고스란히 고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문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 자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돌보고 아낍니다. 서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알고, 서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5. 축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들에게 함께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하는 축도의 근거가 된 구절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하심 안에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 때에 성도는 성도다워집니다. 인격과 태도와 판단과 언행과 능력이라고 하는 모든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매 예배 때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향해 그러한 축복을 비는 기도를 함으로써 예배를 마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축도를 예배 때마다 사용되는 멘트가 아닌 진심으로 듣고 받아들이며 삶에 구현해야 할 것입니다. 축도는 상투적 멘트가 아닌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축도대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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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있는지 확증하라 (고후 13:1-7)

*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확증하라

* 고린도후서 13:1-7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1. 죄는 수용해서도 용납해서도 안된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을 앞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고린도를 방문하여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양육했던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 방문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려고 했으나 무산된 것을 두 번째 방문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가슴아픈 방문과 눈물의 편지가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는 후자의 견해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와 음행과 우상숭배, 바울의 사도권 논쟁 등의 문제들이 생겨나자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이 돌이키지 않자 바울은 에베소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잠시 고린도를 방문할 짬을 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일그러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아픈 방문’이라 부릅니다. 가슴 아픈 방문 이후에 바울은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의 손에 들려 고린도로 보냅니다. 원래는 바울이 직접 가기로 약속된 것이었지만, 바울이 직접 가면 성도들에게 가혹하게 대할까봐 두려워 약속을 깨면서까지 방문을 미루었습니다 (1:23). 디도를 고린도로 보낸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와 만나기로 했으나, 오기로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 예정지인 마게도냐에서 사역하며 디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정된 기일을 훌쩍 넘겨서 돌아온 디도는 염려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린도의 성도들이 회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도 고린도 성도들을 만날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이킨 반면, 고린도 교회에는 여전히 바울의 대적자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쓴 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논조는 고린도전서보다는 훨씬 밝지만, 소수의 회개치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전히 징계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양면성이 함께 드러납니다. 바울은 화평 가운데 고린도 성도들과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을 좌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화목한 만남을 위해 바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 교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한다는 말은 그러한 배경에서 쓰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범죄자를 재판할 때에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신 19:15). 바울은 율법의 정신에 의거하여 합법적이면서도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징계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성도와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가지 않고 디도를 보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엄중히 대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엄중한 처벌에 대한 결단이 섰습니다. 이미 한 번의 방문과 두 통의 편지를 통해 충분히 회개할 기회를 주었고, 이제 고린도후서 13장을 통해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면 징계없이 웃으며 화목하게 만나겠지만, 회개치 않으면 서로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교회는 죄를 수용해서도 용납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순결성을 잃는 순간에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2.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표준으로 삼으라

바울이 죄인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바울의 사도권이 바로 서고, 그로 인해 바울이 표준으로 내세운 그리스도의 삶이 성도들 안에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대라고 바울을 몰아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바울을 통해 강함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의 사역에 강력한 능력과 표적과 이사로 함께 해주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강함은 그 누구도 아닌 고린도 교인들에게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함이 이미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나타내어 졌지만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강력한 징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내실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능력으로 교인들을 징계하실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약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곧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을 보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된 약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나약하거나 무능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으며, 자기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함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위한 약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함은 결국 부활의 능력과 승리로 귀결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약함과 강함을 따를 것임을 선포합니다. 바울의 삶과 사역의 표준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약함을 선택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약함을 선택했습니다. 환난과 곤고와 기근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 등을 모두 감수하며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냈습니다. 바울을 통해 수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대적자들과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징계를 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로 죽어 있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게 될 것이며, 대적자로 펄펄 살아 날뛰던 자들은 바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강함 앞에 죽어 엎어지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6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3.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 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이라 자부했지만,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가 구별된 삶을 살기는 커녕 세상 사람들도 짓지 않는 죄악을 범하기까지 하면서 그리스도의이름을 더렵혔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스스로 점검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끼가 좋은 도끼인지를 점검하고 확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앉아서 겉모양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으면 확증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끼를 들고 나가 나무를 찍어봐야 좋은 도끼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잘 찍어내야 하고, 도끼날이 빠지거나 자루가 부러지지지 않아야 하며, 도끼질에 그 날이 무뎌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의 여부는 삶의 현장에서 결정됩니다. 믿음이라는 도끼를 휘두르면 세상이라는 나무, 영혼이라는 나무가 찍혀야 하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자가 와도 빠지지 않아야 하며, 시련이나 위험이 와도 부러지지 않아야 하며, 영적으로 무뎌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배당이나 기도실에 앉음으로가 아니라 삶의 현장을 섬과 걸음과 달림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버림받은 자입니다. 이는 우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명확한 체험이 없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도 구원의 감격도 없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 세뇌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적 동의는 있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에 세뇌되어 진정한 믿음도 갖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믿음이 있다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것으로 참 믿음임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울 일행은 확증을 마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음은 물론 진정한 사도로서도 인정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명확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과 능욕을 감수했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그리스도의 권능이 사역 가운데 나타내어진 자들이었습니다.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4. 악은 버리고 선을 행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악을 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옳은 자 됨을 나타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인들이 선을 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버림 받은 자 같이 보여지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인들은 바울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사도권을 주셨음으로 이를 좌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이 참 사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 가운데 역사하여 그 대적자들은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바울의 옳음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대적자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악에서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행해지지 않게 되고 당연히 바울의 옳음도 증명이 될 수가 없게 됩니다. 그처럼 바울을 대적하고 힘들게 했는데도 그 대적자들을 심판하지 않는 것을 본다면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버림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버림 받은 자처럼 보여진다 할지라도, 교인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오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늬만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늘 스스로를 점검하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심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고 명확한 삶의 열매를 가진 구원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고 있는지, 마귀에게 미혹된 자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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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위한 두려움 (고린도후서 12:11-21)

* 성도들을 위한 두려움

* 고린도후서 12:11-21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 칭찬받을 사역자를 비방하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방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넘어가 바울을 오해하고 비방하고 모독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실성을 흔들어 놓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쳤지만, 복음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자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일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칭찬해야 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이고, 바울은 실제로는 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님께서 이방을 위해 세우신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배견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스스로도 자부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12사도들을 지극히 크다 숭상하였습니다. 반면 바울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고 위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자중에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현재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바로 부정할 수 없는 사도의 징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들을 참아냈고, 비방과 조롱과 오해와 모독과 수치 등을 오래 참음으로 모두 이겨 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영광과 자기유익을 위해 일하는 존재들이므로 바울이 감내했던 일들을 참을 수 있는 그릇들이 못 되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많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 증명해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그저 인간이 적어준 추천서 나부랭이 한 장 들고 와서는 입으로 율법에 대해 나불거리며 성도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떠한 사도의 표도 나타내지를 못했지요. 그야 말로 혀만 날름거리는 혀사도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비견할만한 어떠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존재들이 바울을 비방하며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인들이 그 말에 미혹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자신을 변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역자를 오히려 비방하고 모독하고 있으니 교인들의 수준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지요. 개들도 자신을 누가 사랑하고 아껴 주는지를 아는데, 자신들을 탈취하려는 자들은 쉽게 용납하면서, 자신들을 진정으로 사랑해주고, 능력으로 사도됨을 증명한 사람은 적대시 하고 있으니, 교인들의 행위가 개보다 낮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4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2. 사랑을 받으면 비방이 아닌 사랑으로 돌려주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성실히 부어주었습니다.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서 부족할 것이 없는 애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로부터는 재정적인 후원을 받은 바 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로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책임졌지만, 사역비가 늘 부족하여 자신의 생계비마저 사역을 위해 썼습니다.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그러한 실정을 잘 알고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바울 개인을 도왔다기 보다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후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한 푼이라도 받았다가는 당장 오해와 비난이 쏟아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지요.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받은 후원금을 고린도 교회를 위한 사역에 사용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베이비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할 만한 깜량이 아직 안되었던 것이지요.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 아이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어른 취급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이 취급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게도냐 교회에 더 많은 애정을 쏟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경우는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자들로 인해 겨우 3주 복음을 전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반면 고린도에서는 1년 반을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양육했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에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 마게도냐 교회는 고린도 교회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더 부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장성한 신앙이었기에 바울은 그들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동참할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 유아신앙이었으므로 그동안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울이 고린도를 세 번째 방문할 때에도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후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타락했다는 가슴아픈 소식에 고린도 전서를 써서 보내고, 가슴아픈 두 번째 방문을 했으며, 눈물의 편지까지 써서 보낸 후, 교인들이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소식을 디도로부터 전해 듣고 기쁨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 아이로 대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어린 아이로부터는 돈을 받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만들어 어린 아이에게 제공하지요. 고린도 교인들은 사실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었습니다. 마게도냐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뛰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이 초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그들을 재물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내어 준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큰 사랑을 베풀었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으로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은 아픈 사랑이요,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사랑으로 돌려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3. 진심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베풀었지만, 일부 교인들은 그러한 바울을 오해하고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이 교인들에게 짐을 지운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교활한 속임수로 성도들의 환심을 얻는 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뿐 그들로부터 이득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응당 받는 생활비와 사역비마저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보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사람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대한 오해와 비방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바울은 급기야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마저도 바울 일행이 변명을 늘어놓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가장 강력한 표현을 써서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일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신을 해명했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을 받을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아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한다 부를 정도로 진실된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진심을 알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진심은 줄곧 오해와 악의에 찬 비방으로 인해 짓밟혀지고 있었습니다.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4. 성도들을 위해 두려워하게 하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를 세 번째 방문하면서 두려워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1) 성도들과 오해가 풀린 상태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

바울은 두 번째 방문 때에 이미 가슴 아픈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해명을 해도 이미 바울에 대한 더러운 프레임이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만남은 서로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서도 이러한 일을 되풀이할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과 헛소문에 의한 오해가 풀린 상태로 교인들을 만나는 것을 원했습니다.

 

2) 고린도 교인들에게 징계자로 비춰지는 것

바울의 방문과 관련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줄 정도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채찍을 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세상보다 더 타락한 모습을 보일 때에 진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한다면, 성도와 교회의 순결을 위해 목회자는 강력한 권징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사랑의 일부이지요. 그러나 죄를 짓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징계로만 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죄의 심각성을 모르거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에 대해 둔감하니 죄를 짓고 사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에서 징계가 가해지니 징계 뒤에 숨겨진 사랑은 보지 못하고, 그저 채찍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신의 진심이 보여지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가 아닌 징계하는 냉엄한 자로 비춰지게 될까봐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 자신이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는 일이 없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이 있다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3) 바울의 방문으로 인해 일어날 수도 있는 폭풍들

바울의 세 번째 방문 목적은 고린도 교인들을 바로 세우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두 번째 방문 때와 같은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많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일들이 생길 수 있는 상황입니다.

 

4) 하나님이 교인들 앞에서 낮추실 것

바울은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입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고 양육을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거나, 세상 사람보다 악한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에 대해 목회자가 느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수치심에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5) 성도들의 회개치 않음으로 슬퍼질 것

마지막으로 바울은 성도들이 이전에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지 않아 바울이 슬퍼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은 범죄를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세상 사람들도 지탄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근친 상간자들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2장에서는 그러한 자들을 품어주고 용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는 징계를 가하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든지 용납하라는 것이지요. 징계는 바로 용납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다시 옛 습성으로 돌아가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회개는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에만 회개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회개한다고 하고선 다시 범죄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은 개같은 자라 일컫습니다. 개는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핥아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같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 회개하면 반드시 그것은 교정이 되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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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10)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고린도후서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 환상과 계시

바울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으며, 무익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자기 자랑으로 인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자신들을 최대한 포장했습니다. 추천서로, 율법의 지식으로, 세상의 웅변술로, 출신 성분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신비로운 체험으로 스스로를 과대포장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에게 미혹되고 말았으며, 바울이 전했던 것과는 배반되는 거짓복음에 속아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득불 자신이 거짓 사도들보다 더욱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깊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본 환상과 계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표현을 합니다. 계시와 환상을 얘기하는 것이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거짓 사도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았으므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환상이란 볼 수 없는 실체를 초자연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계시란 ‘베일을 벗긴다’는 뜻으로 감추어진 비밀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는 환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계시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감지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환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므로 대부분 계시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모든 계시가 환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십 사년 전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시점을 대략 AD 57년 경으로 본다면, 14년 전은 AD 43년 경이 됩니다. 바울은 AD 35-43년에 길리기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길리기아에 머무는 동안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거의 기록이 되어있지 않는 시점 동안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리기아에서의 생활이나 사역이 철저히 침묵의 시간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길리기아에 있는 동안 하나님도 바울도 침묵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길리기아 지방에 교회들을 개척하였습니다.

 

2. 셋째 하늘

바울이 이끌려 갔다는 셋째 하늘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 등에서는 7개의 하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교의 사상을 빌려와 7층천 중 하나로서의 삼층천을 말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일곱 개의 하늘이 있다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데다, 일곱 개의 하늘 중 세 번째의 하늘을 본 것이라면 바울이 본 환상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 하늘은 세 개의 하늘로 나뉘어 졌음이 분명합니다. 첫째 하늘은 우리가 거하는 대기권의 하늘, 즉 sky입니다. 둘째 하늘은 우주공간, 즉 space이며, 흑암의 권세를 잡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봅니다. 둘째 하늘은 첫째 하늘을 지배합니다. 셋째 하늘이란 하나님과 천사들과 의인들이 거하는 공간, 즉 heaven입니다.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둘째 하늘에 거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지배 하에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예수를 믿는 순간 기도를 통해 셋째 하늘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존재들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둘째 하늘을 뚫고 셋째 하늘에 닿으며, 셋째 하늘의 통치는 기도를 통해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 순간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3. 신비한 체험으로 인한 교만의 우려

신비한 체험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셔서 보여주신 것 뿐인데, 자신이 잘나서 그런 것으로 착각을 하고 맙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라고 표현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의지나 자기 능력으로 셋째 하늘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혀서 이끌려 졌던 것 뿐입니다. 성령에 완전히 지배된 상태에서 천국을 보고 왔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말합니다. 자신의 상태 조차 하나님만 아신다 말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나서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닫혀진 계시가 열리는 것일 뿐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열리면 열릴 수록 우리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높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한 만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하지도 않은 체험을 들먹이면서 스스로 거룩한 자임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적대자들은 그저 어리석고 허망하고 불경건한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4. 성도의 자랑거리는 강함이 아닌 약함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 말합니다. 낙원이란 앞에서 말한 셋째 하늘을 일컫는 다른 용어입니다. 바울은 낙원에서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이지요. 그것은 또한 감추어진 신적인 비밀의 세계입니다. 만약 계시된 세계였다면 바울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 삼층천은 적어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에는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세계가 신비롭고 오묘하여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내용들이었지만 그것들에 대해 함구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구체적으로 늘어놓으며 스스로를 큰 자로 포장하는 적대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적대자들과 그들에게 미혹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환상을 보았다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줄곧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계속 ‘그가’, ‘이런 사람을’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내가’ 봤다고 자랑하는 적대자들의 교만함과는 달리 바울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환상의 내용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숨기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왜 이처럼 자신을 숨기고, 환상의 내용을 감추었던 것일까요? 환상의 내용을 말하면 너무나도 신비로워서 자칫 환상을 본 바울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설사 자신이 본 내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말을 말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거짓으로 체험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환상을 보는 것이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범죄 행위입니다.

 

성도의 영광은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닌 약함을 통해서 취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약함이 드러나야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순간 하나님의 강함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르므로 성도는 약함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강함으로 채우실 수가 있습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5.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그리스도의 능력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바울은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혹자는 그것을 안질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에 강하게 임한 빛으로 인해 눈이 멀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를 보내 안수함으로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시력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혹자는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혹자는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질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육체의 가시란 후메네오나 알렉산더 같은 인물들을 가시로 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사탄의 사자라 할 만큼 큰 고통을 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제거해달라고 세 번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Go, No, Slow, Grow 등입니다. 성도의 기도 중 응답되지 않는 기도란 없습니다. 다만 응답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의 바람과 하나님의 바람이 맞다면 Go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이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 때에는 No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Go라 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Slow입니다. 성도들이 수준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께서 철 좀 들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Grow로 응답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간구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간구가 응답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바울에게 가장 좋은 응답은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 허락된 계시가 지극히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은 자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기에 어마어마한 계시와 능력이 임해도 바울은 그것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늘 잊지 않고 사역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가 No로 응답되었음에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약함은 성도의 자랑입니다. 성도의 약한 데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이 약한 그 때에 강함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과 능력은 커집니다. 우리가 더 작아지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과 능력은 더 커집니다. 우리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리스도의 형상과 능력은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하찮은 강함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약함을 자랑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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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 (고후 11:16-33)

* 약함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

* 고린도후서 11:16-33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바울의 안타까움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 말합니다. 자기 자랑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자랑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거짓 사도들과 그에 미혹된 성도들로 인해 자신이 전한 복음이 손상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1-6)에 대해 언급한 후, 자신이 복음을 위해 사례를 받지 않고 일했음을 자랑했습니다 (7-15).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는 것이 바울 스스로 자격없음을 뜻한다고 모독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한 바울은 돈을 받지 않는데, 거짓 사도들은 하는 일도 없이 성도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길 원했습니다. 바울이 돈을 받아야 돈을 받는 자신들이 합리화가 되는데 바울이 돈을 받지 않으니, 깎아 내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지요.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자기 합리화하는 것을 막고, 성도와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사례를 받지않고 사역해왔음과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임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랑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기에 1절에서는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라고 말했는데, 16절에서는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라고 말합니다. 두 개의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랑해야 하는 처지에 있으므로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랑은 자랑을 위한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을 폭로하고, 성도들의 신앙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일이었으며,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주님을 본받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기 자랑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현혹된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거룩한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어리석은 자와 소통하기 위해 어리석은 자처럼 됩니다. 사실 바울에게 자랑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체를 따라 자랑하자면 바울에게도 거짓 사도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자랑거리들이 있었습니다.

 

타고난 혈통(22절)과 이루어 놓은 업적(10:13-16)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나타나는 권위의 표징(3:1)과 삼층천까지 올라 갔다 온 신령한 체험(12:1-6)과 자고해질까봐 약함을 줄 정도로 드러났던 능력들(12:7-10) 등 그야말로 자랑할 것 투성이었지요. 거짓 사도들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여 교회를 더럽히니 바울은 그들의 기를 꺾고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하게 육신을 따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 성도들의 어리석은 역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혜롭다면서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어리석은 자들을 용납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나 실상은 지혜롭지 못한 자신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거짓 사도들이 성도들의 위에 군림하며 상전 노릇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여 율법의 종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잡아먹는다는 말은 기생충처럼 다른 사람의 피와 땀을 가로채서 빨아 먹는 행위를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결실을 따먹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빼앗는다는 것은 미끼를 던져 함정에 빠트리거나 사로잡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성도들을 미혹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아 마귀의 편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높인다는 것은 교인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용납한 결과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에게 뺨을 맞는 꼴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뺨을 치는 행위는 당시에는 극도의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웃기면서도 슬픈 성도들의 역설은 짓밟고 빼앗는 자들은 용납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바울에게는 완고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의 일꾼인 거짓 사도들이 자신들을 광명한 천사로 위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현대 교회에서도 그대로 벌어집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위장한 사탄의 일꾼들은 늘 성도들을 무너뜨리기를 원합니다.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3. 약함이 곧 하나님께서 일할 여백

바울은 자신을 약한 것처럼 욕되게 말합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처럼 희생 강요하지도 않았고, 위압적 태도로 성도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럽지 않은 약함이었습니다. 약함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여백입니다. 우리가 약할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바울은 약하므로 강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약함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어리석은 자가 되고자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처럼 바울 역시 담대하게 스스로를 자랑합니다.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4. 이상한 자랑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의의 일꾼을 가장한 사탄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미혹되어 적대자들이 그리스도 일꾼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바울은 더욱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자처하는 것을 정신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셔야 하는 문제인데 그것을 감히 스스로 입밖에 내고 있으니 정신이 나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바울은 적대자들과는 달리 지극히 겸손하고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바로 적대자들의 삶과 바울의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적대자들은 바울이 흘려 놓은 피땀을 기생충처럼 갉아 먹으려고만 했지 주님을 위해 그 어떠한 고통도 감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위해 넘치도록 수고하고 옥에 갇히며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는 위기들을 넘겼습니다.

 

사십에서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는데, 당시에는 40대 이상을 치면 죽기 때문에 39대까지만 때리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또한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는데, 당시의 태장은 끝에 금속이 달린 채찍으로 때려 살점을 뜯어내는 가혹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태형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바울은 로마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태형을 받았습니다. 강의 위험이란 마르거나 얕아진 강을 걸어서 지나다가 폭우가 쏟아지면 급류에 휩쓸려 사람들이 죽는 일이 빈번했었는데, 바울 역시 그러한 위험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족의 위험이란 바울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교자로 몰아 세워 죽이려고 했던 것을 말하고, 이방인의 위험이란 유대인이나 기독교를 배격하여 죽이려 했던 이방인들에 의한 위협을 말합니다. 시내의 위험이란 루스드라, 에베소,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의 시내에서 겪었던 살해 위협을 말합니다. 광야의 위험이란 복음을 전하느라 통과해야 했던 여정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험한 길이었음을 말합니다.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이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받은 위험으로서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껴야만 했던 위험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여행하는 험준한 여정을 통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굶주리고 잠을 잘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근사하고 화려한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위해 능욕당한 것을 기뻐하는 이상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지요.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만약 자랑해야 한다면 이러한 일들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5. 바울의 진짜 고통

바울은 더욱 더 많은 자랑거리들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중단합니다. 바울에게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짜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분쟁과 음행과 탐욕과 타락에 빠져 있었고, 거짓사도들에게 미혹되었으며, 심지어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태도는 늘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들 정죄하고 질타하기 보다는 그들을 보고 아파하며, 그들이 돌이키는 것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또한 실족한 자를 보고 애타했습니다. 애탄다는 말은 마음이 불타는 것을 말합니다. 불을 뜻하는 헬라오 피로에서 파생된 피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실족하는 것을 보고 불타는 마음으로 그들을 안타까워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목회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일의 하중이나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이 성도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쌈박질이나 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순결성을 잃으며, 심지어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몰라주고 오히려 대적할 때에 목회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6. 자랑하려거든 약함을 자랑하라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성도와 교회의 순결성을 위해, 복음의 신뢰성을 위해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면 주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볼품없는 자신의 풍체와 외모를 자랑했고, 육신의 허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를 통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약할 때에 강함되시는 주님께서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상적인 것을 못 가진 것을 자랑했습니다. 궁핍함 가운데에서도 풍요와 만족을 주시는 주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주님을 위해 고난의 여정을 걸었던 것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는 광주리를 타고 창문으로 도망가야 했던 굴욕적인 사건마저 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제자로서의 순결함을 살고, 그리스도를 따른 삶을 살았음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이 참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세상적 약함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할 때 강함되시고, 가난할 때 부요함 되시는 주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자로서의 순결한 삶과,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써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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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일꾼을 가장한 사탄의 일꾼 (고후 11:1-15)

* 의의 일꾼을 가장한 사탄의 일꾼

* 고린도후서 11:1-15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1. 자기자랑을 할 수 밖에 없는 바울의 처지

바울은 10장에서 자기자랑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랑을 하는 자는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자신의 좀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하면서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기 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어 바울을 오해하고 모독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거짓 사도들을 폭로하고, 자신과 자신이 전한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 자랑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만든 것은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된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 위해 자기를 자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말합니다.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언 젤로는 질투를 뜻하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를 하노니’입니다. 바울은 왜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서야 할 성도들이 악한 자들에게 미혹되어 신부의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남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고린도의 성도들이 그 성결함을 잃고 진리에서 떠나 있기에 하나님께서 질투하실 수 밖에 없고, 바로 그 하나님의 질투로 바울도 질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결한 처녀들의 순결을 위해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뱀과 같은 자들입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미혹하여 범죄하게 했던 것처럼, 바울의 대적자들도 자신을 거룩한 자로 위장하고 성도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에게 넘어간다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을 떠나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부패한 성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정결한 처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중매장이가 되어 성도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세우는 것을 삶의 이유로 삼고 있었던 바울에게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2.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사도들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은 다른 예수를 전했고,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반신반인의 존재가 아니라, 완벽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유기적으로 조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예수님을 도깨비처럼 인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예수님을 한 명의 선지자 수준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성령님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시며,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은 두려움과 종의 영을 전했습니다.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게 하는 영,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을 전한 것이지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의 죄를 단번에 씻어버린 대속의 도였고, 그것을 믿음으로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대속과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면서, 사람의 공로와 율법적인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성도들이 용납하였다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자를 용납한 신부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신부는 미혹하는 자를 쳐내야 합니다. 바울은 적대자들을 용납한 고린도의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자기 자랑하는 것을 용납했다면, 바울이 자기 자랑하는 것도 당연히 용납해야 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3. 말에는 부족하나 계시받은 지식은 심오한 바울

바울은 스스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말로 본격적인 자기 자랑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12사도와 비교하면서, 12사도들은 지극히 크며, 바울은 그에 비견할 자가 못된다며 바울을 깎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12사도가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추천서를 받은 자신들이 오히려 더 탁월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성도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결코 12사도에 비해 뒤지지 않음을 변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뢰성을 옹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12사도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한 직후 자신이 말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을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특별한 웅변술을 활용하여 말하지 않았음을 말할 뿐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자들은 탁월한 웅변술을 가지고 자기 철학을 설파했습니다. 아예 웅변술을 따로 훈련했지요. 그러나 바울은 웅변술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거짓 사도들은 화려한 웅변술을 사용하는 달변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바울의 지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지식은 세상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심오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바울을 이길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린도보다도 훨씬 탁월한 웅변술사들이 넘쳤던 아테네에서도 바울은 논리에 밀리지 않았습니다. 웅변술을 구사하는 탁월한 철학자들에 둘러 싸여 일대 다수의 논쟁을 펼쳤으나, 논쟁에서 이긴 것은 바울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웅변술만 탁월할 뿐 계시된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말을 수려하게 잘한다고 하여 그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비진리를 화려한 말로 포장하여 진리처럼 위장하는 것은 마귀의 특징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얼마나 간드러진 말로 미혹을 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그러한 자들의 미혹에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미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외적 기준에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계시받은 지식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모든 일로 증명된 사실이었습니다. 고린도 뿐 아니라 모든 지방에서 바울의 지식이 검증되어졌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능력이 나타나 그 지식이 참임을 모든 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외적 기준에 집착하다가 그 사실을 망각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4. 자격이 안되어 사례를 안 받는 것으로 오해함

바울을 가슴아프게 한 것은 바울이 성도들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춘 것까지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했습니다. 사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음의 진보에 방해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바울의 노력을 바울이 사례를 받을 자격이 안되어서 그런 것처럼 폄하를 했습니다. 12사도들은 충분한 자격이 되어 사례를 받지만, 바울은 자기 스스로 자격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사례도 받지 않고 일한다고 바울을 모독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중간에 사역비가 부족하였는데도 그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서 충당하지 않고 마게도냐의 성도들에게서 후원받은 돈으로 충당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물질을 탈취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사역비는 고린도 성도들이 충당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더 풍족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과 태도가 마게도냐 성도들과 같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였고, 앞으로도 조심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5. 사랑하지 않아서 사례를 안 받는 것으로 오해함

사례를 받지 않고 고린도 교회의 사역을 감당했던 바울에 대한 또 하나의 가슴아픈 비난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일입니다.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은 이유는 아가야 지방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방해를 받지않고 퍼져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아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례를 안받는 것이 이처럼 비난을 받을만한 제목이 된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자기들을 위해 사례를 받지 않는 것인데, 자격이 안되어서 사례를 받지 않는다, 또는 사랑하지 않아서 사례를 받지 않는다 하며 정반대의 이유를 들고 비난을 하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6.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

그러므로 바울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왔던 대로 할 것이라 말합니다. 틈만 나면 바울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려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의 기회를 끊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자랑하여 바울처럼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인정받고자 한 이유는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면, 적대자들이 인정받고자 한 이유는 그를 통해 성도들 위에 위압적인 태도로 군림하며, 정치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에 대하여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라 칭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했지만 사실은 사탄의 일꾼이었습니다. 사탄의 일꾼이 거룩한 척 자신을 포장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이상한 일도, 대단히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사탄 자체가 광명한 천사로 위장을 하고 나타나 속이는데, 사탄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위장을 하고 속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마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척 의의 일꾼으로 포장하고 들어와 성도들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일꾼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또한 그들은 평강과 자유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속박과 사망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가져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를 갈라놓고, 목회자와 성도 사이를 갈라놓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무리 거룩하게 포장하고 있어도 실상은 마귀의 일꾼입니다. 그들에게 미혹되면 공동체로부터 갈라지고, 목회자와 멀어질 뿐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진리로부터도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실력자요,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 그런 자들을 분별하고 대적하며, 용납치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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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만 자랑하라 (고후 10:7-18)

*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

* 고린도후서 10:7-18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1.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바울의 적대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바울의 모습을 가지고 바울을 깎아 내렸고, 많은 성도들은 그에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늘 온유와 관용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악 가운데 무너져 있을 때에는 ‘준엄한 편지’를 써서 그들을 신랄하게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적대자들은 편지로는 담대하나 대면할 때는 비굴한 것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겉모습으로만 볼 때에 이 말은 설득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동기를 볼 줄 안다면 그런 비방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성도들을 대하는데 외양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우유부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바울이 글은 잘 쓰나 수사학적 언변이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3대 교육 도시 중 하나인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세상 지식에 탁월한 사람이고, 가말리엘 학파에서 율법을 배웠으므로 율법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언변과 세상지식이 난무하는 아테네에서도 논쟁에서 이길만큼 탁월한 언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화려한 미사어구로 꾸며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언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전파를 위해 불필요한 치장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겉모양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눈에는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자라고 모함하였습니다. 바울이 기근에 시달리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금하였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더 날카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 것을 사랑하거나 자기 유익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가족도 없이 복음에만 정진했고, 사례를 받는 것이 복음에 지장을 줄까봐 자비량 선교를 했던 사람입니다.

 

적대자들은 바울은 인간이 써준 추천서가 없는데, 자신들은 있다고 치켜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손으로 쓴 추천서 나부랭이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들은 자신들은 율법에만 정통할 뿐 아니라 신비적 체험까지 있다고 자랑질을 했으며, 성도들을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로 대하면서, 바울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율법의 해박함에 있어서 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신비적 체험에 있어서는 인간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간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싶지 않았지만, 신비한 체험을 자기자랑으로 삼는 자들을 눌러 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까지 자랑해야 했습니다. 바울 역시 사도권을 가졌고,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요 양육자로서 얼마든지 권위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으나, 성도들을 온유와 관용으로 대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작은 키와 왜소한 체형을 가졌고, 다리는 'O'자형으로 휘어 있었으며, 찌부러진 눈썹에 매부리 코를 가졌습니다. 외형적으로 흠모할만한 꽃미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만성적인 질병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에 만성질환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간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능력을 행하는데 정작 본인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는 모습이나, 치유 집회 중에 갑자기 간질 발작을 하여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외형상 도무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을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고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정면도전을 한 것이고, 이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2. 주께서 주신 권세는 세우라고 주신 것

적대자들은 자신들만 그리스도의 사도라 주장을 합니다. 반면 바울은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인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역의 태도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사도권을 주신 이유는 성도들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주신 것이 아니고,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적대자들은 성도들을 망치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성도들을 세워주며, 교회를 튼실히 하는데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인가요? 당연히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리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을 위해 목숨을 건 고난을 감수했으며, 사심없이 진리만을 전했고, 모든 일에 공정을 기했습니다. 성도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성도들과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반면 적대자들은 성도들을 망치고, 교회를 무너뜨리면서, 자기들의 권세를 내세워 성도들의 머리 위에 위압적으로 군림했습니다.

 

권위는 세우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슴아픈 방문’ 이후 ‘준엄한 편지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내어 교회의 죄악을 준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 역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적대자들은 ‘눈물의 편지’에 대하여 바울이 직접 대면할 때에는 외모도 약하고 말도 수려치 않으면서, 편지로만 권위를 부린다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눈물의 편지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늘 일관성있게 대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세를 성도들을 세우는데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양적으로는 편지 속의 바울과 대면하여 만나는 바울의 모습이 서로 달라 보일지라도 실상은 동일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진심과 권위라는 양측면에서 모두 그렇습니다. 바울은 대면할 때도, 편지를 쓸 때에도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에 보인 사도로서의 권위를 실제로 대면할 때에도 그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교회를 올바르게 치리해야 교회가 제대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3. 바울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적대자들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감히 자신과 짝하여 비교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당당하게 밝힙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자신의 분수 이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요, 오직 복음이었습니다. 사역을 할 때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한계안에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만큼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직접 이방의 사도로 세우신 이방을 위한 그릇이었습니다. 이는 12사도들과 합의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복음을 전하라 명령하신 곳에서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로 인도하여 교회를 개척하게 하신 것도, 고린도에 구원받을 백성이 많으므로 1년 반을 머물며 고린도 사람들을 구원케 하신 것도 모두 주님이셨습니다. 바울은 그 선을 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바울의 적대자들은 선을 넘어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 허락된 곳이고, 유대에서 온 자들이 추천서 나부랭이 들고 들어와 어지럽히도록 허락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명백히 그들의 정해진 선을 넘어 침범한 침입자들이었습니다.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4. 타인의 수고를 가로채려는 자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수고를 가로채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교회였으며,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바울의 사역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피도 땀도 눈물도 흘린 적이 없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수고를 자신들의 것인 양 가로채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압적인 태도로 성도들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양 행세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을 자랑하는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은 성도들의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바울의 사역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넘어 로마로, 스페인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기대했으며, 자기 스스로 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스스로 달성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졌던 당시로서는 스페인이 땅끝으로 여겨졌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로마를 보고 싶었던 이유로 로마를 발판 삼아 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확대되길 원했습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존경도 커지길 원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존경을 받아야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신뢰성이 더해지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입니다. 바울이 존경을 받아야 복음이 신뢰를 얻고, 복음의 지경이 넓어지기 때문이었지요.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5.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얼마나 권력이 쎈지, 얼마나 좋은 가문에서 자랐는지, 왕년에 얼마나 잘 나갔는지 따위는 모두 헛된 바람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한방에 주실 수도 있고 일초만에 터뜨려 버리실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 하는 자랑입니다. 자랑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돈자랑하는 자는 돈을 사랑하는 자요, 힘자랑하는 자는 권력을 숭배하는 자이며, 인맥을 자랑하는 자는 사람을 의지하는 자이고, 출신성분을 자랑하는 자는 출신성분 빼고도 아무것도 없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로 허망한 세상 것들을 통해 스스로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주님 안에서 예수만 자랑하고 복음만 자랑했습니다. 자신을 자랑할 때도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만 자랑을 했습니다. 적대자들은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인 반면, 바울은 주님께서 칭찬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중 옳다 인정함을 받을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당연히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입니까, 주님께서 칭찬하는 자입니까? 세상 안에서 하는 자기 자랑을 접고, 주님 안에서 하는 예수 자랑, 복음 자랑으로 넘치게 하여, 주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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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 (고후 8:1-5)

*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

* 고린도후서 8:1-5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1. 헌금은 은혜로 하는 것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한 모범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보다 남쪽인 아가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하는 관점에서 접근을 합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분에 넘치게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대가없이 베푸는 관대한 자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며,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손잡고 동행해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그 은혜를 뼈속 깊이 새기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넘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깨닫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은혜를 깊이 깨달은 정도가 신앙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돈 몇 푼 내어 놓고 폼잡는 행위가 아닙니다. 헌금은 은혜받은 사람이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구제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관대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관대함을 베풀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2. 헌금은 마음으로부터 하는 것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살전 2:14절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유대의 성도들이 받은 환난과 동일한 환난 가운데 있었음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일단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피식민지 백성으로서 받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 자체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을 것이고, 또한 그들로부터 사교네, 세상을 소동케 하네, 로마에 반역하는 집단이네 등의 모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시련들도 마게도냐의 성도들에게서 넘치는 기쁨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시련에 대한 반응이 성숙한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야 말로 바울이 말한 바 있었던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성도의 본색을 제대로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풍성한 연보를 한 것이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많은 시련 중에도 기쁨이 넘치니 헌금을 많이 했다는 부분은 납득이 가지만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의 동기가 되는 것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가난한 자의 괴로움은 가난한 자가 아는 법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돈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벌레 보듯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난을 겪어본 부자라 할지라도 일단 부자가 되고 나면 가난했던 시절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돈으로 하기 이전에 먼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재물도 있는 법입니다.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금광, 은광 등의 채굴권은 물론 선박 제조를 위한 채목권까지도 모두 로마제국에 수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인 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박해로 인해 일반 시민들보다 도욱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성한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은 부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 ‘하플로테토스’의 뜻 자체가 ‘소박’, ‘단순’, ‘순수함’ 등의 뜻을 갖습니다. 즉 마음의 순수함이 헌금의 동기라는 것이지요. 부유함과 관대함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함과 인색함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색한 것은 돈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아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는 가난함 가운데 더 가난한 자를 섬길 줄 아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난이 오히려 풍성한 연보의 동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울이 말했던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자’,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걸맞는 마음과 행위와 품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3. 헌금은 자원하는 것

헌금은 누군가가 요청하거나 명령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그들의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되 자원하여 하였습니다. 헌금은 자발적으로 힘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하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욱 귀한 것은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는 사실 구제헌금을 하는 곳이 아니라, 구제헌금을 받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도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었기에,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도 가난하지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더 가난함을 알기에 자신의 쓸 것을 줄이며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던 것입니다.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4. 헌금은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

로마제국의 글라우디오 황제 (41-54) 때에 제국 전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흉년은 예루살렘 지방에서 심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아가보라고 하는 성도에 의해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도들은 극심한 기근과 핍절한 삶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원래도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갈릴리 사람들이 많았기에 삶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지위도 비천한 자들이 많았기에 도와줄 이들도 없었습니다. 바나바 같은 재력가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이 마음껏 가져가게 했던 배경에는 극도의 가난에 처한 성도들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때는 흉년으로 인해 예루살렘 전체의 가난이 극심해졌습니다. 누군가가 재산을 내놓고 나눌 수 있는 처지마저 안되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성도들은 유대인으로부터의 박해를 겪어야 했기에 더욱 궁핍했습니다. 성도들은 기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성도들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도는 이방인 형제들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태동이 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왜 이토록 처절한 가난을 허락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궁핍과 이방 성도들의 도움이 맞물려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하나됨이 튼실해져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서로 별개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고 머리로만 동의하는 상태였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 반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을 통해 이방인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기꺼이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형제라고 하는 사실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인들이 전해주는 구제헌금으로 인해 기근으로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의 하나됨이 공고해 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헌금은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이고, 성도와 성도의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와 돕는 자의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5. 헌금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은 곤경에 처한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성도의 특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일행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섬길 특권에 참여하게 해달라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간청했다는 말은 바울이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걱정스러워 했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헌금을 독려했다면 간청할 이유가 없지요. “여러분도 힘들텐데, 이렇게 헌금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려고 그러세요?” 정도의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난했기에 오히려 가난한 자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분에 넘치게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가운데 굶어 가면서까지 헌금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특권이고,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이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 헌금은 헌신

마게도냐 성도들은 헌금을 드리기 전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헌금을 하는 자세입니다. 헌금은 돈 몇 푼 내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헌금하고 이름을 내고 싶다면 헌금하지 않는 것이 유익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인정받고 싶고, 교회에서 행세하고 싶다면 헌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헌금이 오히려 자신을 파멸시키는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헌금보다 중요한 것은 헌신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은 헌신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먼저 주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궁핍할 때라도 헌금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 사랑을 드리고 있고, 은혜를 돌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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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뜻대로 한 근심 (고후 7:8-16)

* 하나님 뜻대로 한 근심

* 고린도후서 7:8-16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분열되어 분쟁하며 음행과 자기자랑으로 더럽혀져 있을 때에 바울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편지를 써서 보냈고, 편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자 55년경에는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함하며 몰아 세웠고 성도들은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 또는 방임하며 바울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진보는 없이 마음의 상처만 안고 돌아온 바울은 56년 봄, 한 통의 편지를 더 써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불리우는 편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눈물의 편지 역시 사랑의 편지였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고통을 준 편지였습니다. 편지으 어조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보내는 바울도 눈물로 썼지만, 읽는 성도들도 눈물로 읽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성도들이 근심할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근심했을 뿐 이내 회개하고 돌이키는 최상의 반응을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은 회개로 전환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의 후회는 기쁨으로 전환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은 편지가 가진 설득력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 근심을 회개로, 후회를 기쁨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2. 두 가지의 근심

성도에게는 두 가지의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성결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근심’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근심이란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하는 근심, 세상 것들에 대한 근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좌절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 등을 낳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자기를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고 소극적으로는 자기 정당화로 이어집니다. 지나친 자기 정죄로 인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옹색한 변명들을 늘어 놓다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상대방을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험담하게 되고, 소극적으로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 근심은 성도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게 되며, 결국 영적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근심을 영적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3.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맺은  7가지 회개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1) 간절하게 함 –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죄를 교정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성결하게 만들고자 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해졌습니다.

 

     2) 변증하게 함 –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지만,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서는 적극 변증을 했습니다. 그들은 변명한 것이 아닙니다. 변명은 죄로 인해 오는 결과를 모면하려고 늘어놓는 것일 때가 많은 반면, 변증은 자신들의 진심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에 그에 넘어가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바울을 옹호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방조했습니다. 이는 바울로 하여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등을 돌렸다는 극도의 외로움과 복음의 진리가 퇴색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진심은 바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표현했던 것 갖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음을 변증했을 것입니다.

 

    3) 분하게 함 –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진심을 변증하는 한편 바울을 모함하고 비방했던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했습니다. 가슴아픈 방문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4) 두렵게 함 –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바울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하나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5) 사모하게 함 –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일그러진 바울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열망했습니다.

 

    6) 열심있게 함 – 성도들은 성결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바울 일행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7) 벌하게 함 –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성결을 위한 열정을 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을 공의대로 처벌하였습니다.

 

4. 죄에 대한 침묵과 방임은 죄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냈습니다. 깨끗함을 나타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적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방조했을 뿐 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제 회개하고 돌이켰으니 깨끗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독하고 비방할 때에 고린도 성도들은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의 마음을 찢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더라도, 죄에 동조하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죄를 침묵하거나 방임하는 것도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악한 자에게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악한 자를 묵인하거나 방임해도 안됩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 묵과하지 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비방자와 적대자에 대한 용납은 사랑이 아니라, 무고한 자에 대한 배반이요, 죄에 대한 동참입니다.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5. 눈물의 편지의 목적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불의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음행자의 배우자는 불의를 당한 것이 됩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바울은 불의를 당한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편을 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최대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유는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진심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막힘없이 설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바울의 의도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디도를 통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특히 디도가 안전하게 돌아왔고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바울을 더욱 기쁘게 하였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로 파송을 받을 때만 해도 디도의 마음은 무거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환대했고,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6.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

바울은 회개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한 자체도 기뻤지만, 자신이 성도들에 대해 디도에게 했던 자랑이 증명되었기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비록 죄에 대한 동조와 침묵과 방임을 통해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어도 그들 안에 있는 진심과 가능성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죄를 짓고 있어도 그들 안에 심겨진 복음으로 인해 결국 돌이키게 될 것을 믿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강점들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향하는 디도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자랑스러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울은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태도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가슴 아프게 하고, 미흡하고,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 있는 장점을 보며 그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디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대할 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했으며,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디도는 어린 사람이었고 12 사도 중 한 명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떨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도들은 그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자세는 순종의 행위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며 그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위대하고 잘 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도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디도의 마음이 깊어지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7. 회복은 회개의 아들

바울은 죄에 빠진 채 자신을 대적하는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는 했으나 성도들을 향한 온전한 신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죄를 청산했으며, 악한 자들을 축출했기에, 그들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습니다. 회개는 회복을 낳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나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그리고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회복이 있게 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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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7:1-7)

*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 고린도후서 7:1-7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1) 하나님의 요구, 거룩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룩이란 성별을 말합니다. 즉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이고, 죄로부터의 구별이 거룩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거룩에 대해 바울은 1절 말씀을 통해 세 가지로 압축합니다. 바울이 1절에서 얘기하는 세 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 약속’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6장에서 말한대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하고 두루 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더러우면 안됩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거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대한다는 율법주의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과 의와 능력과 주권을 모두 인정해드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거나, 우리 앞에 서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는 인식이 없기에 거룩함을 망각하고 세상과 연합하여 죄짓고 사는 것입니다.

 

셋째, 영혼과 육신, 즉 성도의 전 인격이 모두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과 육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인간의 전 인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성도의 전 인격적 성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흠없이 서야 합니다. 말과 행동은 물론 생각과 의지까지도 성결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외면은 물론 마음으로도 온전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 나열한 바 있습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 우상의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음행,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의 일들이 모두 온갖 더러운 것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도덕적인 성결이 무너져 육신으로 이상과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육신적인 죄악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적 성결만을 지나치게 강조를 하다보면 신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육적 성결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율법주의와 금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 가지 극단 모두 옳지 않습니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2)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공동체

바울은 대적자들이 퍼뜨린 헛소문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성도들에게 불의를 행하며, 성도들을 해롭게 하며, 성도들을 미혹하여 금품을 갈취해가는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았으며,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지 않았다는 사실을 변호합니다. 그는 오히려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자기 자녀처럼 사랑했습니다. 모든 일을 성도들을 위해 행했고, 성도들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고자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바울을 등졌을 때에도 눈물로 참고, 인내하고, 사랑으로 품고, 권면하며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마음으로 영접하기를 원했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들어갈 자리를 만들다’는 뜻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거할 장소를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는 목회자를 위한 거처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도 서로가 거할 장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할 운명공동체이고 사랑공동체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했던 이유 역시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길로 성도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죄악과 반목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회개할 것과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설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 것 등을 사랑과 눈물로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저 세상 모임과 다를 바없는 죄인들의 집단일 뿐입니다. 그런 교회 세우자고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3) 환난 중에도 넘치는 위로와 기쁨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각별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런 마음은 담대한 것과 자랑하는 것이 많은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담대한 것이 많았다는 것은 바울이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감추는 비밀이 없이 다 말했다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디도를 통해 들려 보냈을 거라 믿어지는 ‘눈물의 편지’는 그 내용에 있어 한층 더 신랄했을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담대함을 필요로 합니다. 성도들은 지적을 받을 때에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실족하거나 대적자로 서게 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했기에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성도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견인을 통하여 성도들이 반드시 성화의 자리로 나아갈 것을 확신했습니다. 현재는 거짓과 위선이 득세하나 결국은 진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확신했지요. 그래서 디도를 보낼 때에 디도에게 성도들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은혜를 받아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깨고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에 대한 기대를 안고 성도들에 대해 자랑을 했지요.

 

바울은 그동안 끊임없는 환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 가운데에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현재의 삶에서도, 앞으로의 삶에서도, 바울은 끊이지 않는 환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넘칠 것을 기대하고 누리며 환난을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가까이 사역을 해왔습니다. 고린도전서도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써서 보냈지요. 그러나 에베소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된 우상 사업가들이 연합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눈물의 편지를 들려 고린도에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지나도 드로아로 오지 않으면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디도를 고린도에 보낸 바울은 디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 자신마저도 험하게 대하는 성도들이 아들처럼 여기는 디도를 악하게 대하고 해를 입힐까봐 염려가 되었습니다. 디도의 안전으로 인한 염려와 두려움이 너무 커서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사역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열매없이 시간이 흘렀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디도가 드로아로 오지 않자 바울은 약속대로 마게도냐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마게도냐에서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적자들의 박해가 상존하였고, 디도는 시간이 흘러도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바울은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는 말로 요약을 합니다. 밖으로는 적대자들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안으로는 디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4)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인 낙심되는 상황 속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단 안전을 염려하였던 디도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위로입니다. 그러나 위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디도의 위로의 다발을 들려서 바울에게로 보내셨습니다.

 

두번째 위로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이킨 것이었습니다. 디도는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고, 바울도 그 소식을 듣고 디도가 받은 동일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셋째 위로는 바울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배척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역시 바울을 몹시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자신만의 외사랑인 줄 알았는데, 성도들 역시 바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들은 바울을 사모할 뿐 아니라 애통해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죄악을 애통해 했고, 또한 바울을 공격하는 대적자들의 미혹에 넘어간 것을 애통해 했으며, 바울을 사랑하면서도 대적자들에게 맞서 바울을 변호해주지 못했던 것을 애통해 했습니다. 바울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편지를 통해 그러한 사람이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을 향한 열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을 적극 변호하고 바울을 심히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번져 나갔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소식을 디도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이지요.

 

5) 환난을 이겨내는 성도의 방식

하나님은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사실 희망의 메시지요, 절망의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가 온다는 희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어도 낙심되는 상황과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절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절망은 육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낙심할만한 상황도, 위로가 필요한 상황도 없을 것이라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오해입니다. 세상은 환난 덩어리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인간의 본색은 환난을 품고 사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드는 자에게는 위로가 가득합니다. 그것은 위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내 넘치는 기쁨이 됩니다. 환난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인생은 아름답고 멋진 인생입니다. 우리는 장차 환난이 없이 기쁨만 넘치는 완성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환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아갸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거룩함을 가지고 환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다발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기쁨의 다발도 허락하시지요. 위로 하나, 기쁨 하나가 아니라 다발입니다. 오늘도 위로와 기쁨을 다발로 보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거룩한 성전으로 서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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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하나님의 성전 (고후 6:14-18)

*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

* 고린도후서 6:14-18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 세상과 섞이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바울 일행에게 마음을 넓게 하라고 말한 직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로 전환합니다. 바울과 성도와의 관계를 성도와 믿지 않는 자와의 관계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성도들이 바울의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하는 이유를 믿지 않는 자와의 교제에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적자일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 불신자일 수도 있으며, 넓게는 세상과의 타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와 문맥을 고려할 때에 불신자나 불신세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만, 대적자들 역시 이미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므로 세상에 속한 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진실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혼탁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섞이는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신명기 22:10-1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소와 나귀가 함께 밭을 갈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까요?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옷을 입는 것이 도덕적인 문제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섞이면 안된다는 영적인 의미를 날마다의 일상에서 각인코자 하신 것입니다. 레19:19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두 가축을 교미시키는 것, 밭에 두 종자의 씨를 뿌리는 것, 두 재료를 섞어서 옷을 만드는 것 등은 도덕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찾을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별이라고 하는 것을 피조 세계에 심어 두셨습니다. 빛과 어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남과 여 등의 창조가 모두 구별입니다. 동물들과 식물들을 모두 그 형상대로 만드셔서 서로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별은 곧 하나님 백성의 성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섞이면 안됩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짐승도 섞지 말고, 두 종류의 씨도 한 밭에 파종하지 말고, 두 종류의 실을 섞어서 옷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밭을 갈 때마다, 가축들을 번식할 때마다, 파종할 때마다, 옷을 만들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섞지 말라는 하나님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섞이지 않고 거룩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멍에를 같이 하면 그 순수성은 파괴되고 맙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 일행에게 마음을 닫고 복음에 대해 혼탁해져버린 이유는 바로 세상과 섞여 순수성이 무너져 버린 결과였습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 (11:4), 불신자와의 결혼 (고전 7:39), 우상숭배 (고전 10:14), 도덕적 타락 (고전6:8) 등에 적용된 말씀이었습니다. 교제권의 혼탁은 정체성의 붕괴를 가져 옵니다. 누구와 살고, 누구와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 정체성의 유지에 극단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2)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

바울은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안타까워 합니다. 의와 불법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불법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사람은 결코 의롭지 않으며 모두 하나님의 법을 떠난 불법자요, 범법자요, 무법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법자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죄를 지우시고 하나님의 의을 전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가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의를 전가받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불법에 속한 자 입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듯, 성도와 불신자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구원의 빛을 주신 세상의 빛이십니다. 성도는 그 빛을 소유한 존재이며, 세상을 밝히는 빛의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반면 세상은 아직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 사귈 수 없습니다. 사귄다는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로 성도들간의 교제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 성도와 세상은 함께 교제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결코 교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 섞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는데, 성도는 세상과 너무나도 친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공존해서도 안되는 존재들이 서로 엉키고 섞여서, 누가 의이고 누가 불법인지, 누가 빛이고 누가 어둠인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3)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벨리알의 사람인가?

바울은 심지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다는 말로까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함께 할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벨리알은 마귀에 대한 다른 용어입니다. 벨리알은 원래 불량자, 악한 자, 방탕자 (삿 19:22;삼상 10:27)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불량자요, 악한 자인 마귀를 뜻하는 말로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벨리알의 말’ (신 15:9;시41:8;101:3)은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고, ‘벨리알의 증인’ (잠 19:28)은 ‘거짓 증언자’를 뜻하며, ‘벨리알의 충고자’ (나 1:11)는 ‘음모를 꾸미는 자’를 뜻합니다. 악심을 품고 허위 선전을 하고, 거짓 증언을 하며, 음모를 꾸미는 것은 누구의 일일까요? 바로 불량자 악당 마귀의 일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일들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마귀가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는 병립이 불가능하며, 운명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와 전혀 교제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와 교제를 해야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향력 하에서 불신자의 사고와 풍속에 오염되면 안됩니다. 또한 불신자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도모해서도 안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벨리알에게 속한 세상과는 성별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4)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 ‘나오스’는 사실 ‘지성소’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지만, 그 중에서고 가장 거룩한 장소가 바로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죄인이 설 수 없어 양의 피로 죄를 씻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죄인이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죄인이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지성소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성도들의 심령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시며, 그러므로 성도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 그것도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 지성소에 우상을 가져다 두고 맙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우상이 존재할 수 없는 법인데,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은 너무도 쉽게 우상을 그 마음에 들여 놓습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 힘, 사람 등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거나 의지하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우상 천지로 만든 자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레 26:11, 12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주시고 그곳에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두루 행하시며,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라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성도들 중에 거하고 운행하시며 성도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사랑하는 것을 두어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 천지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이요 눈물이요 한숨인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5) 세상의 탐욕과 부정으로부터 떠나라

하나님의 성전이 성도는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어 져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 52:11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벨론을 떠나 이교의 우상들과 단절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벗하였으며,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공의와 인애가 아닌 불의와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풍요를 사랑하는 탐욕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있는 동안,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떠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탐욕과 풍요의 우상으로부터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는 복된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당연히 복음으로 연결되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이라는 우리만의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한 존재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의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성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선결 조건은 바로 백성들의 순결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참 성전이 되고 싶다면 세상과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음행과 우상숭배와 탐심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접해주실 것이라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탐욕과 부정을 떠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실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죄를 속함 받았고,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명함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되, 실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고 자녀 삼아 주시겠다는 말씀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미 아버지가 되셨고, 이미 자녀 삼으셨는데, 이런 말씀을 왜 하시는 것일까요?

 

무늬만 하나님의 자녀이지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별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성전, 참 자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딱 그만큼만 우리를 대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늬만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나님도 무늬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다 누리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성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구별되지 않고 섞이고 얽혀서 혼탁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부정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결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빠를 진정으로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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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3)

* 마음을 넓히라

* 고린도후서 6:1-13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1) 하나님의 동역자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규정을 합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은 자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업에 기꺼이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기에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결단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려 절대자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헛되게 받아서는 안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공짜로 주어진다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도무지 값으로 매길 수 없기에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무지 값을 치룰 수 없기에 하나님 편에서 공짜로 주시는 것이 은혜이지요. 그런데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를 우리는 값어치 없는 은혜로 전락을 시켜 버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은혜받지 못한 자와 차별없는 삶을 살았으며, 은혜의 복음에 비진리를 섞어버렸고, 미혹하는 자들에 속아 비진리를 받아 들였습니다. 이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지금 이 순간

은혜 베풀 때와 구원의 날이라는 표현은 사 49:8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포로귀환 역시 예언했지요. 포로귀환의 순간을 이사야는 은혜 베풀 때요, 구원에 날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기도를 듣고, 그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복음에 적용시킵니다. 복음이 주어진 순간부터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은 지금 이 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부터 어느 때고 해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 베풀 때와 구원의 날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고난과 슬픔이 잠식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여전히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찾으십시오. 지금 구하십시오. 지금 두드리십시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직분을 맡은 자의 삶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 직분은 하나님과 세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위대한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격이나 행동으로 인해 그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행동했지요. 거리낀다는 것은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때문에 실족하지 않게 하려 혼신의 힘을 쏟았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의 비툴어진 인격이나 잘못된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비방받았고, 너무도 순결했기에 도전 받았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받은 직분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로 인해 복음이 비난을 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의 인격과 행위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5)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겪는 고통

바울은 앞서 스스로를 자천할 뜻이 없음을 밝힌 바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는 늘 자신이 일하겠노라 스스로를 추천하고 나섰습니다. 자기를 위해 자천하는 자는 결코 고통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스스로 나서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견뎠습니다. 환난은 육신을 쇠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말합니다. 궁핍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등의 결핍을 말합니다. 고난은 어디로 가야할지, 어찌해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도무지 분간이 안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 등을 견뎠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에 의해 주어진 고통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등을 늘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극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들을 견디고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만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오늘 무엇을 감수하고 있고, 무엇을 견디며 이겨내고 있습니까?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6)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내적 자질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신이 가진 내적 자질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 자질들은 모든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질들입니다. 깨끗함이란 영적인 순결과 도덕적 순결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순결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순결하여 옳은 행위를 해야 합니다. 지식이란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성령님을 아는 지식, 복음과 구원을 아는 지식, 삶의 지침으로서의 말씀에 대한 지식 등을 말합니다.

 

오래참음이란 4절의 많이 견디는 것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미성숙하여 분열하고 분쟁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데다, 심지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위해 사역했던 바울을 배신하였어도 여전히 참고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끝까지 품고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오래참음과 자비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성령의 감화에 의해 일했으며, 거짓없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대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꾸미게 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사랑을 흉내내는 것이지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서 그 사랑을 고스란히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없는 사랑이 됩니다. 바울은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붙들었고 전파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했습니다. 그는 의의 무기를 양손에 들었습니다.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성령의 검을 들었겠지요.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을 모두 죽여 없애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품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한 내적 자질들을 가지고 외적인 고통들을 견디며 이겨 나아갈 때에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성정을 가졌고, 바울을 구원하시는 바로 그 주님을 동일하게 우리 구원의 주로 모시고 있습니다. 바울이 해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7)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일꾼은 두 얼굴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영광의 순간도 오고 욕됨의 순간도 옵니다. 또한 악한 이름으로 불리울 때도 있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어 우리를 칭송하며 우리를 영광스럽게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욕을 하고 비방을 하며 악한 이름으로 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갈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속이는 자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실상은 참된 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은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어떻게 7일만에 세상이 만들어져, 어떻게 짐승이 말을 해, 어떻게 처녀가 애를 낳아,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등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속이는 자처럼 여겨지지요. 그러나 우리는 참된 자들입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무시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같이 지상사역을 한 적이 없는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유명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한 그릇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셨고, 예루살렘의 주요 사도들이 인정을 해줬으며, 고린도의 성도들이 인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유명이지요.

 

바울은 죽은 자 같았으나 살아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는 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고,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버젓이 살아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 그는 날마다 자아를 죽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역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신학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죽은 자같으나 살아있는 자입니다.

 

바울은 또한 징계를 받는 자처럼 여겨졌습니다. 대적자들은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고난을 받는 것이라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과거의 죄과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죽었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가끔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그것은 징계가 아니라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다 성숙하고 보다 멋지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가게 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에게는 근심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말을 안듣고 거역하며 미성숙합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받아 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바울을 핍박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바울의 근심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기뻐했으며,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앞에는 늘 근심거리가 산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또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또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많은 순간 세상의 것들을 접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세상의 눈길을 끌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아빠로 보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유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빠이신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8)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입을 열어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다 말하였고, 자신의 순전한 사랑의 마음을 모두 전달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린도 성도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사랑이 가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바울이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는 좁은 마음을 가졌다 믿게 하였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미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가 바울 일행에 대하여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바울일행이 성도들에 대하여 마음을 좁게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의 성도들이 마음을 좁게 하여 바울 일행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 해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모가 자녀에게 대하듯 거짓없는 사랑을 베풀어 줬습니다. 부모에 사랑에 대해 자녀 역시 사랑으로 부모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대하시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의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아비의 마음으로 사랑했다면, 성도는 자녀의 마음으로 목회자를 대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대한 것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마음이 좁거나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목회자의 사랑과 성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 있어서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인간은 모두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사랑의 탱크가 비어있기에 나눠줄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을 요구하기만 하고 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비어 있는 사랑의 탱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다시 채워집니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넓혀지지 않으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순간은 보지 못하고, 아프게 한 순간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짓없이 부어지는 순도 100%의 사랑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부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거짓 사랑으로 오해했습니다. 마음이 좁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랑에 대해 그랬다면 우리들의 온전치 못한 사랑을 어떨까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더욱 넓은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물론 목회자의 부족한 사랑, 성도들 간의 미미한 사랑마저 감지하고 누리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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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고후 5:17-21)

* 하나님의 의

* 고린도후서 5:17-21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 화목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땅에 속했던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고, 일시적 육체를 가진 자에서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육체를 가질 자가 되었으며, 육에 속한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죽어 주셨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새로운 창조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로 된 것은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시고 새 것이 되게 하시는 모든 새 창조가 하나님으로부터 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가 화목하게 하셨고, 또한 성도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또한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로 인한 담이 있었고, 그 담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여 버렸습니다. 인간에게는 그 담을 헐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원수되게 하는 죄를 씻기 위해 속죄제로 드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죄로 인해 생긴 담을 허무는 효력이 있기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드리신 제사는 속죄제이면서 동시에 화목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화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는 수직적 화평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회, 사회와 사회를 화목케 하는 수평적 화평까지 이루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2.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성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된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맡으셨던 직분을 이제는 성도들에게 넘기신 것이지요. 성도들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형제 자매가 서로 화목하지 못한 채,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또한 성도는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은 성도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때라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일그러진 이웃과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3.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받은 성도

하나님께서는 화목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셨으며,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된 세상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에 개입하신 이유입니다. 세상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는 죄없는 인간이 죄인들의 죄를 감당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전가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는 대신 의로우신 예수님께 돌리셨습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담당할 그리스도를 보내주겠다는 내용을 기록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화목을 이루셨다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았을 뿐 아니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 화목하며, 무엇보다 아직 화목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맡았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4.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은 자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전권 대사입니다. 바울은 그와 그 동역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한 하나님의 사신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을 통해 성도들을 권면하시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간청하는 사람들입니다. 권면과 간청의 제목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맡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권면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간청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권면과 간청의 제목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존재임에도 하나님가 화목하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답게 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파를 지어 싸웠으며, 자기영광을 구하느라 시기와 질투에 빠져 서로 물고 뜯었습니다. 심지어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되어 자신들의 구원과 양육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도 바울마저 반목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일지라도 세상의 핍박이 올 수 있습니다. 제대로 하나님과 화목할수록 핍박이 강해질수도 있지요.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과 화목이 깊을수록 마귀의 일군들은 더욱 거센 공격을 날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반목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사랑하고 품고 용납해야 할 성도들끼리 자기 유익과 자기 영광을 구하느라 화목이 무너진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화목케 하는 직분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위선일 뿐입니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5. 성도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 즉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상대적 의를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불의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의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절대적 의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구원자의 자격은 절대의, 절대선을 가진 이라야 합니다. 절대의를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절대선의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습니다. 죄로 삼으셨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표하여 인간 대신 죽으셔야 하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죄로 삼아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전가받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전가받는 대신, 예수님의 의를 그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셨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성도는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고,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죄인이었는데, 죄를 옮겨 버리고, 의를 전가받았으므로 의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감당케 하신 이유는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칭의라 부릅니다. 의롭지 못한 죄인인데, 예수님의 의를 통해 그저 의롭다 불러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도는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성도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여전히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성도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달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의에 의해서 더해지지도 않고, 자기불의에 의해서 감해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의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전권대사답게 살아야 하며,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다운 삶입니다. 모양만 하나님의 의가 되면 안됩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하나님의 의로 서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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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고후 5:11-17)

* 새로운 피조물

* 고린도후서 5:11-17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 주의 두려우심을 기억하며 행함

바울은 인간의 육체가 일시적인 것이며 썩어질 것이라는 것이므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위해 살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10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은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각자가 한 행위들을 자기 입으로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스스로 자백한 범죄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위해 죽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또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공의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유한자의 본능적인 두려움이나 떨며 그 앞에 서지 못하는 공포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라, 친밀하면서도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 줌의 악의 없이 순결하고 진실하게 성도들을 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도망하도록,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준비하도록, 그리스도 앞에서 진노가 아닌 영광을 얻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부정한 의도를 가지고, 불의한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악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준비하며 사역했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의 사역은 진실무망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에만 집중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 역시 그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어떠한 태도와 방식으로 사역했는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종이 되어 일하면서도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2. 진실됨과 순수함을 밝히는 의도

바울이 자신의 순결함을 변호하는 것은 스스로를 추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대적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를 과시하고 높이기 위해 바울에 대해 악평과 악소문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대할 때에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을 직접 육안으로 봤으며 (16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3:1), 환상까지 봤다고 (12:1-7) 자랑질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스스로를 자랑하는 동기는 자신들이 교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고 싶은 욕망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 위에서 대접받고 군림하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대해 성도들은 바울의 진심을 알면서도 바울을 변호할 만한 논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바울과 동역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적자들의 논리에 반박할 변증의 논리를 제공해주고자 자신의 순수하고 진실된 의도와 방식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한낱 인간의 권위로 추천을 받았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어주시는 권능으로 추천서를 삼았습니다. 대적자들이자기자랑을 늘어 놓을 때에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대적자들이 대접받고 군림하기 위해 자기 영광, 자기 유익을 구할 때에, 바울은 모든 인간을 섬기는 종으로서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처럼 자신도 성도들을 섬기는 종임을 선포하며, 스스로 자기영광, 자기유익을 버렸습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3. 오직 하나님과 성도를 위하는 마음

바울의 대적자들은 심지어 바울과 동역자들을 미쳤다고 비방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쳤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는 엑스타시스입니다. 영적 황홀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단순히 정신이 나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정신이 온전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소프로누멘은 ‘분별력있는’, ‘자제하는’ 등의 뜻을 갖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한 황홀경에 임하거나, 환상 등을 통해 받은 계시를 성도들에게 예언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스스로 삼층천에 올라갔던 신비로운 일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깨달은 바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교육시키기도 했지요. 영적인 가르침과 이성적인 가르침을 섞어가며 성도들을 인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에 대해 미쳤다고 평가를 했던 것입니다. 마치 성령의 권능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미쳤다고 조롱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에 대해 바울은 미쳤어도 온전하여도 다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목숨걸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 헌신한 사역자마저도 미쳤다고 악평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의 일군들이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군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많은 경우 스스로 마귀의 일군인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 유익에 덫에 걸리면 영이 마비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4. 하나님과 성도를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이유

바울과 동역자들이 핍박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서 미친 듯 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도 선인도 아닌 죄인들을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화평을 회복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스스로를 바치셨습니다. 그를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대표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므로 모든 인간들 역시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살아나셨으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즉 예수와 함께 자아는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정신으로 살며 사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자신도 예수와 함께 죽었으므로 철저히 자아를 죽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사셨으므로 그 삶을 예수님을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영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육체의 소욕만 있던 자들이 이제는 성령님의 소욕도 함께 갖춘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철저히 육으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적 아집에 빠져 있었으며, 자기자랑과 자기유익과 자기영광만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적으로 유대인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불과한 인간이 써준 추천서에 의존했지만, 영적으로는 그 어떤 능력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육안으로 직접 본 것을 자랑했지만, 예수님의 영이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높아지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바울과 같은 진실된 사역자를 모독하고, 교회를 쪼개며 분탕질을 치는 마귀짓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이 철저히 육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안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며, 사람의 손으로 쓴 추천서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마저도 육신을 따라 아는 것이 아니라 영을 따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것은 그들의 구원과 성화에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이 심령안에 거하는 것만이 인간의 구원과 성화에 실질적인 유익을 줄 수가 있습니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착한 행위, 선한 공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사람은 육체의 소욕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 사람의 심령에는 성령님이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로 인해 성도의 심령 안에는 성령의 소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도 여전히 육체의 소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실수를 범할 수있고, 죄로 인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있어 언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히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는 육체의 소욕만을 따라 살던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수 있는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펼쳐졌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우리 안에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라고 함성을 지릅니다. 범죄해도 괜찮다고, 짜릿함을 누리라고, 편안함과 풍요를 누리기 위해 욕심을 부리라고, 니 인생의 주인은 너 자신이라고 빽빽 악을 쓰며 마음을 장악합니다. 그에 반해 성령의 소욕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자기정욕, 자기유익, 자기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 성도들과 영혼들을 위해 살라고 속삭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의지와 결정을 존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쉽게 넘어지는 이유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질러대는 함성에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남겨진 숙제입니다. 우리가 육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 영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전 것으로 살것인가, 새 것으로 살것인가? 옛 자아로 살 것인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 것인가? 우리는 분명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아닌 새 것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것답게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육체의 소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아를 죽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아를 통해 일합니다. 자기 유익, 자기 탐욕, 자기 영광, 자기 만족, 자기 행복을 통해 일하지요. 그것에 묶이면 육에 속한 옛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죽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입니까, 영의 사람입니까? 우리는 옛 것으로 살고 있습니까, 새 것으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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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 5:6-10)

* 그리스도의 심판대

* 고린도후서 5:6-10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1. 연합과 분리의 혼재

성도는 주님과의 연합과 분리가 혼재하는 상황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분명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주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 땅위에 40일을 머무시다가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그 예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분명히 연합되어 있는데, 또한 실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주님과 따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함께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주님을 얼굴 대 얼굴을 대면하여 교제할 것이며, 보고, 만지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2. 혼재의 상황을 사는 방식, 믿음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행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한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영향과 통제받는 것을 말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장차 받을 영광을 직접 눈으로 보았는지 말았는지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우리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즐비하여도 그런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해서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고,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들을 보이지 않게 해두셨습니다. 보이게 되면 이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을 때에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가리워져있습니다. 그러나 답답하게 가리워져 있는 영원한 것들은 믿음의 눈을 열면 보이는 일종의 씨스루(see-through look)같은 것입니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3.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유익

바울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꿈꿨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영광의 몸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간이 감에 따라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으면 바로 영광의 몸을 얻게 되니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러지 못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주님 품에 안기고 싶은 것이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육신의 장막을 지고 사는 것이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살아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돌이키고 돌봐야 한다는 사명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실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땅의 고통을 벗어나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질고도 없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기를 고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 성도의 유일한 관심은 주님의 기쁨

성도에게 있어서 죽은 것이 더 유익하지만, 성도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열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보장받은 우리를 이땅에 두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돕든 것이며, 이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에게 있어서 재림 시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영원한 영광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심의 초점이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에 집중되게 됩니다. 삶은 담대하고 당당해지며, 거룩하고 경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창백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이 너무나도 흐릿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부활의 소망 위에 견고하게 서있다면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소망으로 인내하며 신실하게 서있을 것이고, 모든 삶과 육신을 주님을 위해 쓰게 될 것입니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5. 선악간에 행한대로 받을 심판과 상급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상급과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는 두 가지의 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책과 행위책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주님의 재림 이후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지옥불에 떨어져 꺼지지도 타지도 않는 불길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위책은 모든 사람들의 선악간 행동을 모두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 모든 사람은 각자의 행위를 자기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행위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말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그리스도의 심판대

성경은 크게 세 가지의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심판은 1) 양과 염소의 구별을 위한 심판, 2) 그리스도의 심판대, 3) 백보좌 심판 등입니다. 양과 염소의 구별을 위한 심판은 생명책에 기록된 여부에 따라 구원받을 사람과 형벌받을 사람을 분리하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선악간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상급과 책망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백보좌 심판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따라 형벌을 선고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이러한 심판들이 세 개의 다른 심판인지, 또는 한번의 심판에 세 종류의 심판으로 분류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세 개의 각기 다른 심판으로 보는 사람들은 주로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심판과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은 후 천년왕국이 펼쳐지며, 천년이 지나면 백보좌 심판에 의해 마귀와 마귀에 속한 모든 자들, 그리고 사망까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는 견해입니다.

 

어떤 견해가 맞을지는 그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명확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선악간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무엇이건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썩어질 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가 영원한 삶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날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지은 죄들만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행하라는 선과 의를 행하지 않았나이다, 가난한 자를 외면하였나이다, 도움을 청하는 자를 내쫓았나이다”를 고백해야 합니다. “행하지 말라는 악을 행하였나이다, 탐욕을 위해 타인을 아프게 했나이다, 생각으로 입술로 행동으로 이런 죄와 저런 죄를 지었나이다”를 또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 하루는 치열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었던 얘기를 회상하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미소 짓고, 주님도 미소지을 만한 이야기들을 추억을 나누듯 고백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고난의 순간을 넘으며, 환난을 견뎌내고, 모욕을 이겨냈던 장면들을 웃으며 재잘거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을 모두 들은 주님께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보좌에서 뛰어 내려와 우리를 안아 주시며, “수고했다 내 사랑아. 이제 고통도 슬픔도 질고도 없는 나의 영원한 나라에서 나와 함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감격스럽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썩어질 육신으로 어떠한 미래를 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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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영원한 처소 (고후 5:1-5)

* 하늘의 영원한 처소

* 고린도후서 5:1-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 육신의 천막, 영원한 집

바울은 우리가 거하는 집을 ‘장막 집’, 즉 천막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천막은 영구적인 처소가 아닙니다. 잠시 머물기 위해 쳤다가 때가 되면 다시 해체하여 거두는 것이 천막입니다. 천막을 거두지 않고 집처럼 쓰려고 한다면, 비바람과 태양빛에 낡고 닳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역자였기에, 천막과 집의 비유를 써서 이 땅의 일시적인 것과 하늘의 영원한 것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집들은 천막이 일시적이듯 모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처소는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며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기에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하늘에 존재하는 집은 영원한 집이며 구원얻을 성도들을 위하여 제공될 것입니다.

 

바울의 장막 집과 영원한 집의 비유는 우리의 육체에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지을 때마다 우리의 육체가 마치 천막 집과도 같다는 사실을 늘 묵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장막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육체의 유한성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말할 수도 있겠지요.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 있다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육신의 천막은 거두어집니다. 우리에게 영광스럽고도 영구적인 몸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덧입고 사는 몸이 일시적인 천막 집인데 비해, 주님 오실 날에 우리가 덧입게 될 몸은 낡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영구적인 몸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주님께서 재림하기 이전에 죽음을 맞이하여 주님의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바울은 주님께서 오실 날에 영원히 존재할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게 될 것을 이 짧은 구절에 함축해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영원히 살 몸을 덧입고, 영원한 처소로 들어갈 것이기에,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에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2. 영원한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함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 거하며 탄식으로 하늘의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탄식은 인생의 고난때문에 터져 나오는 신음섞인 한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고통 너머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오는 염원과 소망의 탄식입니다. 하루만 고통을 견디면 내일부터는 기쁨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고통의 하루를 견딘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바로 그럴 때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일시적인 멍에를 지고 영원한 자유를 바라보는 탄식이요, 곧 썩어질 육신을 지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기대하는 탄식이며, 일시적인 수욕을 지고 영원한 영광을 목전에 둔 탄식입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탄식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바울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의 몸을 덧입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현재의 장막을 벗는 것이 아닌, 영원한 몸을 덧입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마감할 때에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발생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죽는다면, 육신의 장막을 벗은 채, 새로운 몸을 입지 않은 상태가 되므로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것이지요. 바울은 벗은 자로 발견되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의 몸을 덧입은 채 주님을 뵙고 싶은 것입니다.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3.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됨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코앞입니다. 조금만 견디면 새로운 몸을 입고 짐도 멍에도 없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무거운 짐을 지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신음을 넘어 염원을 담은 탄식이지요. 그러나 그 탄식의 소리는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육신의 장막을 벗는 죽음을 위해 탄식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을 덧입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죽기 전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죽기 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되는 셈입니다. 언젠가는 죽을 죽음의 몸이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영원히 살 생명의 몸으로 대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죽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타락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주님 오실 때에 죽었거나 살았거나 부활하여 영원한 몸을 덧입을 것을 명확히 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유익합니다. 성도는 이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빨리 재림하실수록 좋습니다. 영광스러운 몸을 더 빨리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죽음을 맛보기 전에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영광의 몸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것들을 위해 투자하며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과 육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제멋대로 방탕함에 내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4. 성도의 보증, 성령

우리가 우리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광의 몸을 얻게 될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에 모든 사람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물론 불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영광의 부활로, 불신자는 치욕의 부활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몸이나 치욕의 몸이 입혀지는 표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유무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셨던 영혼들은 영광의 몸을 덧입고 예비된 영원한 처소로 들어갈 것입니다. 반면 성령님께서 내주하신 흔적이 없는 사람들은 치욕의 몸을 덧입은 채 영원한 형벌 가운데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의 심령 안에는 성령님이 들어가셔서 내주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죄많고 썩어질 육체를 영광스럽고 영원한 몸으로 대체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며 성도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성도들이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실패하였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보증인 것이지요.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땅에서 흔들림 없이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썩어질 것이 아닌 썩지 않을 것을 바라보며 살도록 보증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도 염려도 근심도 없습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위선을 부려 분에 넘치는 것을 탐할 이유도 없습니다. 잠시 이땅의 무거운 짐을 진 채,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버티고 이기면, 곧 새로운 장막이 옵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이요,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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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을 새롭게 (고후 4:8-18)

* 속사람을 새롭게

* 고린도후서 4:8-18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 어떤 상황에도 쓰러지지 않는 성도

성도의 정체성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7절). 모든 인간은 질그릇이기에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이라는 보배를 그 질그릇에 담았기에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말합니다. 욱여쌈을 당한다는 말은 헬라어 ‘들리보메노이’로서 ‘포도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를 때’ 쓰는 말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군사용어로 사방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을 말합니다. 바울 일행이 당하였던 고난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바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보배와 연합되어 있는 한, 질그릇 같은 성도라 할지라도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험했던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했으며,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육신적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될 뿐, 어떠한 고난도 성도를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진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망하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죽음마저 뛰어넘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2.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 –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의 영성과 부활의 확신으로 갖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 지고,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고, 죽음을 통해 생명에 이르는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따나토스와 네크로신입니다. 따나토스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반면, 네크로신은 죽음의 전 과정을 포함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따나토스 대신 네크로신을 썼습니다. 성도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한 순간 죽는 것이 아닌 지속되는 죽음의 과정들을 통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려고 하면 안타깝게도 지속적인 죽음의 과정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 하고, 숨막히는 답답함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을 맞아야 하며, 살 소망이 끊어져 버리는 환경을 이겨야 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삶이야말로 선명한 십자가의 흔적이 남겨진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바울은 그 삶을 그대로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바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흔적,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낸 흔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예수와 연합하게 되며, 예수님의 재림 시 부활을 통해 영원한 승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결코 패배의 표징 아닙니다. 성도의 삶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은 예수의 생명을 담은 승리의 표징이요, 하나님께서 나눠주실 영광의 표징입니다.

 

성도의 삶과 죽음에는 늘 역설이 존재합니다. 성도는 모든 인간들과 같이 살아있는 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사실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몸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죽을 육체에 채우는 행위일 뿐입니다. 산 것 같으나 죽을 몸이고, 몸이 죽는 것 같으나 실상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삶과 죽음의 역설 안에서 성도는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삶을 통해 재림시 생명을 얻는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삶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의 영혼은 유익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성도들이 누리는 은혜는 커졌습니다. 사역자가 죽을수록 성도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살았듯, 바울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은 사역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삶의 표본입니다. 모든 성도가 곧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3. 영광으로 이르는 길

바울은 시편 116:10의 말씀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함 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16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낙심되는 상황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좌절하거나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으 삶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기억하고 헤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까, 어떻게 하면 서원을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시편 116편의 기자는 15절에서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성도는 그 죽음마저도 귀중한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영원한 생명과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시편 기자의 믿음이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고 감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소망을 굳게 붙드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졌기에 복음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고전 9:16) 여겼습니다. 복음을 믿었으므로, 복음을 말한 것이지요.

 

성도는 부활의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었던 바울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그가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날에 예수님 앞에 서서 구원과 영광의 감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그 영광을 바라보고 살 수 있도록 영광의 길을 제시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 중 일부는 영광의 길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죽음과 같은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전도하고 개척하고 양육하고 고난을 모두 이겼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많이 받을 수록 많은 사람들의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낳고, 넘치는 은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은혜가 오며, 은혜는 감사를 낳습니다. 주어진 은혜에 감사를 하면 은혜가 더해집니다. 은혜가 지속적으로 더해지다 보면 은혜는 넘쳐 흐르게 되고, 은혜가 넘쳐 흐를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4.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성도

바울은 숱한 고난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1) 하나님의 은혜로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맡았기 때문; 2)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 3) 고린도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하게 하여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는 마음 때문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이 죽어 버린 존재들입니다. 속사람은 죽은 채 겉사람으로만 살아가는 것이지요. 겉사람이란 흙으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게 될 아담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살아계신 성령님께서 믿는 자의 심령 안으로 들어와 내주하시게 되며, 그로 인해 사람 안에는 속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이 죄로 인해 죽어가는 아담적 실존을 말한다면, 속사람은 믿음으로 중생한 영적 실존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눍고 병들고 죽습니다. 성도들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지요.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날고 죽어가는 것은 겉사람일 뿐입니다. 성도는 고난과 노화로 겉사람이 낡아가지만, 그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통해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또한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5. 썩지 않을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

성도는 장차 올 영광을 위해 현재의 환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다보면 성도의 삶에는 환난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그 환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성도는 1의 환난을 통과하여 100의 영광을 누리는 자입니다. 바울이 겪어야 했던 환난은 사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환난은 살 소망까지 끊어져버린 환난이었습니다. 그러한 환난이 가벼운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겁습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하면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환난이 가볍다는 고백에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잠시요, 영광은 영원합니다. 현재의 환난과 장차 올 영광을 저울에 나란히 올려 놓는다면, 환난은 가볍고 영광은 무거운 것입니다.

 

성도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목한다는 헬라어 단어 스코페오는 소망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즉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장차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들입니다. 우리는 썩어질 육신을 입고 사라질 세상 속에서 환난을 받으며 살아가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에 물질과 육신과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며, 간증이며, 매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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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고후 4:1-7)

*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 고린도후서 4:1-7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1.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

바울은 목숨을 걸고 모든 고난을 견디며 주님의 일에 정진하였습니다. 핍박과 조롱과 비난과 모욕이 와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다는 말은 마음의 영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장애물들을 뚫고 흔들림 없이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바울은 의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율법의 정죄의 법이고, 복음은 의의 법입니다. 율법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복음은 더 큰 영광입니다. 율법이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바울이 모세를 능가하는 직분을 가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맡았고, 바울은 복음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모세보다 위대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맡은 직분 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 부른 바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그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부르셔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의의 직분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았기에 그는 낙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의 대적자들과 바울의 차이

바울은 자신이 영광스러운 의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대적자들의 죄악을 꼬집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겉으로는 율법, 율법하며 율법을 강조하지만 사실 숨어서 부끄러운 짓을 자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법을 들이밀며 성도들에게 멍에를 씌우려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은밀히 죄악을 범하는 범법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오래 전에 은밀히 행하는 죄악을 벗어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은밀히 숨어서 죄를 지으면서도 거룩한 척 위선을 떨고 성도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려던 자들과는 전혀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속임으로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듯 광명한 천사로 위장을 하고 성도들에게 접근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는 하와를 생각하는 것처럼 접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간을 봅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말하면서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는 것을 확인하자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로 확 사로잡아 버립니다. 마치 하와에게 하나님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자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지요. 그들 역시 성도들에게 광명한 천사들로 위장하고 접근하였습니다. 화려한 추천서로 미혹을 하고, 있어 보이는 율법 지식으로 현혹하며,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거짓 삶으로 속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고 결국은 바울이 전한 복음마저 흠집을 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처럼 속임으로 행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투명하고 늘 진실하게 다가가서 진리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혼잡케 한다는 말은 불순물을 섞어 순수한 것을 더럽힌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 질 낮은 포도주를 같은 가격에 팔던 불량한 장사치들이 하는 수법대로 그들은 복음에 율법의 행위를 자꾸 가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순수한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3. 오직 진리만을 나타낸 바울

거짓과 속임수와 위선으로 일관한 대적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오직 진리만을 나타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복음’이란 용어 대신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바울이 대적자들로부터 소수만을 위한 밀교를 전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소수만 알 수 있는 은밀한 종교를 퍼뜨린다고 헛소문을 내며 비방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 앞과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 스스로 추천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천한다 해도 충분한 것을 ‘각 사람의 양심’을 걸고 말을 합니다. 그는 대적자들이 양심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는 조롱의 의미를 담기 위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양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타락 이후 많이 일그러졌지만 아직 그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판단과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선한 양심의 흔적이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많이 망가진 채 예수르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양심이 덜 망가진 불신자가 더 선한 판단과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만나게 됩니다. 그 선한 양심이 있기에 사람은 진리를 어느정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양심에 대하여 바울은 스스로를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이 양심이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자천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의 진실됨을 계속 헐뜯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양심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세상의 신

바울이 밀교를 전한다는 비난과 연결하여,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일부 영적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모호한 말로 말씀을 전한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단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구약과 연결하여 명확하고도 쉽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말이 아니고, 누구라도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복음이 가리었으면,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망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 졌습니다. 그것을 외적인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을 부르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가리워진 것입니다. 오직 영의 눈을 뜨고 진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사람만 부르심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적인 부르심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만인구원론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입니다. 모든 자에게 열려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마음에 완악함의 수건이 씌워져 있다는 말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앞에 값진 것이 주어졌어도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면 값진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눈을 가리우는 수건을 씌우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을 바울은 세상의 신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세대를 붙잡고 있는 마귀를 말하는 것이지요. 마귀는 하와를 미혹했던 바로 그 놈입니다. 마귀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종말의 날까지 활동을 하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마귀는 미혹하는 영이고, 혼미케 하는 영입니다. 성도들을 미혹하여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더 중요하게는 불신자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혼미케 한다는 말은 더 정확하게는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나타났으나 눈이 안보이니 영광의 빛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귀는 지속적으로 불신자의 눈을 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발견할 수 없게 가로 막습니다.

 

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눈이 가려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Icon’입니다. 컴퓨터 화면의 아이콘이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컴퓨터에 있는 아이콘은 그저 한 장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콘을 누르고 들어가면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세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아이콘을 누르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무한정한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태내는 하나님의 보이는 초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할 때의 형상 역시 아이콘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아이콘을 누르고 들어가면 제한적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속성들을 알아볼 수 있게 창조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라는 아이콘을 누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모습들이 즐비하게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닮아가면 닮아갈 수록 우리를 통해 투영되는 하나님의 세계는 넓혀질 것입니다.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예수를 위해 성도의 종된 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스스로를 전파하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높이려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들이었고, 화려한 추천서와 율법적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으로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예수님의 따라쟁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을 섬겼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함이며,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고난의 종으로 죽으신 것이지요. 성도는 그런 분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종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예수님을 닮아 성도들의 종이 되었음을 전파했노라고 천명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한 자의 특징은 바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에 묶여 억지로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고 자유인이 되었지만 주님을 본받아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고, 높임받는 자가 아니라 높이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서있습니까?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 보배를 담은 질그릇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모두 어두움에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습니다. 마치 흑암 뿐이었던 태초의 상태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시니 빛이 나타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우리 마음에도 “빛이 있으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의 눈이 가리운 사람들은 여전히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안을 연 사람들은 그 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않아도 되고, 낙망과 좌절과 염려와 근심 가운데 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보배란 어두움에 빛을 비추어주는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복음보다 더 값지 보배란 있을 수가 없지요. 그 보배를 품게 된 것은 우리가 금그릇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스스로를 빚을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지요. 질그릇은 연약하여 깨어지기 쉽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기에 그렇게 가치가 나가는 귀한 그릇도 아닙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그 질그릇을 빚은 토기장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깨어지기 쉽기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창조의 목적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깨지기 쉽고 가치없는 그릇이라도 깨끗한 그릇으로 서면 됩니다.

 

질그릇이 갑자기 값이 치솟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보배를 담는 것입니다. 그 보배는 질그릇에 유착이 되어 결코 꺼낼 수가 없습니다. 보배가 질그릇의 일부이고, 질그릇이 또한 보배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그 보배 안에는 보배의 정수인 그리스도가 담겨 있지요. 그것이 우리의 가치를 극도로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보배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로 여기십니다. 보배와 연합된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원래 정체성은 가치없는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그릇같은 연약함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질그릇을 보배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우리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이유이고, 또한 우리가 우리를 자학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아, 보배가 된 질그릇입니다. 우리의 삶은 질그릇이 보이는 삶입니까, 보배가 보이는 삶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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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주시는 성령 (고후 3:7-18)

* 자유를 주시는 성령

* 고린도후서 3:7-18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 의의 직분이 갖는 영광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 중에는 율법주의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추천서를 들고 와서 사람들을 미혹한 후 자유케 하는 복음에 멍에를 얹는 율법의 행위를 섞으려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추천서 논쟁을 율법과 복음의 논쟁으로 진화시켰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이고, 추천서 문제는 그로부터 파생된 부수적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선 율법을 돌판에 새긴 죽게하는 율법 조문으로 규정합니다. 율법은 원래 살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매 죽을 수밖에 없으나 율법을 따라 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기에 율법이 그만 정죄의 법, 멍에의 법, 사망의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악해서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표준이 들어 있는 것으로서 선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담은 것이었기에 그것을 맨 처음 받은 모세에게는 영광의 빛이 임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춰졌고, 그 빛 가운데에서 모세의 얼굴 역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이 너무도 빛났기에 백성들은 감히 모세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이내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유대교 전승에는 모세의 얼굴에 임한 광채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바울은 이것을 정면으로 부인합니다. 모세는 정죄의 직분을 가진 율법의 영광을 받았음에도 그처럼 얼굴이 빛났습니다. 그렇다면 의의 직분을 받은 복음은 어떠할까요? 당연히 그 영광이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정죄의 기능을 했던 율법은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자신의 의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고, 그리스도가 오면 그 기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기쁨을 소식을 알리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과는 달리, 죄인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하여, 죄인을 의롭게 해주는 생명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오면 율법은 이제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일시적입니다. 반면 복음은 영원한 것이지요. 율법에 비해 복음이 더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2. 태양이 뜨면 보이지 않게 되는 달의 영광

태양빛이 환할 때에 달빛을 의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두움이 칠흑처럼 짙을 때에는 작은 손전등의 불빛도 의지할 만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손전등은 손에 들기마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어두움과 죽음 뿐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달빛처럼 어슴푸레한 영광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영광인 복음이 태양빛처럼 주어지자 달빛의 영광인 율법은 더이상 영광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인한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감히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은혜의 법, 생명의 법인 복음이 도래하였으므로, 정죄의 법, 사망의 법인 율법은 더이상 구속력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복음이 올 때까지 복음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일시적 영광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이 올 때까지만 필요한 시한부 영광이었고, 결국 복음으로 대체될 것이었습니다. 반면, 복음은 영원한 영광으로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습니다. 복음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영원한 의와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는 달의 영광과 뜨는 해의 영광을 감히 비교할 수 없듯, 율법의 영광과 복음의 영광도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3.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소망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가진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영광이 율법의 영광보다 탁월하며, 일시적인 율법의 영광에 비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광을 가졌다는 소망입니다. 그 영광으로 인해 성도는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벅찬 소망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소망에 대해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직후 그의 얼굴에 임한 영광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 수건을 썼습니다. 그는 왜 수건을 썼던 것일까요? 모세는 자신에게 임한 광채가 곧 사라질 광채일 뿐 아니라 율법 역시 결국 사라질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장차 영원한 광채가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시적인 광채를 가리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주목할까봐 그 영광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일시적인 율법을 대체하며 영원한 영광을 갖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모세처럼 가릴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것이므로 숨김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소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지요.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4. 완고함의 수건을 벗으라

모세 얼굴이 영원히 빛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평생 수건을 쓰고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신격화하고 율법을 우상시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완고함의 수건입니다.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가 가리워지고 말았습니다. 수건을 쓴 사람이 앞을 볼 수 없듯, 그들은 완고함의 수건을 썼으므로 그리스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쓴 수건은 영적 무지와 오해와 편견의 수건이었으며,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순종과 불신앙의 수건이었습니다. 이 수건은 장차 그리스도에 의해 벗겨질 수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왔을 때에 어떤 이들은 수건을 벗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건을 벗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유대교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완고함의 수건을 벗지 못한 채 말씀을 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으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결과를 맺게 된 것이지요.

 

율법과 구약은 온통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입니다. 율법과 구약은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며, 실체인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고 모형입니다. 실체인 그리스도가 오면 우리는 율법이 얘기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수건으로 가려져 있으면, 그리스도가 와도 도무지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수건을 벗겨주시고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인생들 역시 자기만의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문화의 수건, 전통의 수건, 합리적 이성의 수건, 미신과 신비의 수건, 감정과 쓴뿌리의 수건, 의지적 완고함의 수건, 불순종과 불신앙의 수건 등 각자의 수건을 쓴 채 복음을 대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보일 리가 없지요.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하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수건이 벗겨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는데,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으면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끊임없는 충격과 고통과 아픔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를 통해 수건이 일시적으로 벗겨지면 헤매고 헤매다 결국 가야할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곳에 도달하여 보면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기만 하면 그 수건은 벗겨지게 되고 온전히 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5. 자유를 주시는 주의 영

돌판에 새긴 율법은 구속의 법이요, 정죄의 법이며, 사망의 법입니다. 그러나 마음판에 새긴 복음은 자유의 법이요, 용서의 법이며, 생명의 법입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심령에 주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주의 영은 자유함을 주시는 영입니다. 주의 영은 빛의 원천이므로 어두움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성령은 생명의 원천이므로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성령님은 정죄함으로부터 자유케 하며, 자기 학대로부터 자유케 하며,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바울은 주의 영을 소유한 자였기에 추천서에 대한 의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자기를 자랑하는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거짓교사들은 성령이 주시는 자유가 없기에 추천서에 의존했으며, 자기 자랑과 자기 이름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듯 주의 영광을 봅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라는 표현을 통해, 복음을 통한 자신의 사도직의 영광을 변호하던 자리에서 전체 성도가 지닌 영광으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복음은 거울 속에 비취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온전한 주님의 영광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보게 될 것이며 우리 역시 그날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부릅니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 칭하셔서 생명의 영광 안으로 초대하신 주님께서는 장차 우리를 영광의 끝인 영화구원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는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주님의 영광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영광 앞에 거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담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복음 안에서 살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영광에 영광을 더하고, 더한 영광에 또 다시 영광을 더해가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칭의 영광을 받은 순간부터 영화의 완전한 영광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영광에 영광을 더해가야 합니다.

복음의 거울 속에 비취는 주 영광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이 아닌 주의 영입니다. 우리는 자기 공력이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의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주님의 영광 앞에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복음의 광채 앞에서 자신의 어두움을 쫓아내야 합니다. 복음의 광채 앞에 선다는 것은 은혜 충만, 말씀 충만, 믿음 충만, 예수 충만, 성령 충만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잡동사니들을 쓸어내고 오직 말씀과 은혜와 믿음과 성령으로만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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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1-6)

* 그리스도의 편지, 새 언약의 일꾼

* 고린도후서 3:1-6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1. 하나님의 일꾼을 비난한 사람들

오늘 본문은 추천서와 관련하여 바울에 대한 두 가지 비난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추천서 한 장 없는 거짓 선지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추천서도 없는 주제에 자기 업적에 대하여 스스로 지나치게 반복해서 선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추천을 해줘야지 자기 자신이 항변하고 있으니 가짜라고 헐뜯은 것이지요.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일꾼이 흑색 선전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격과 위로를 동시에 줍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며, 근거없는 말을 퍼트립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유한하여서 헛소문이나 근거없는 비방에 놀아나고 맙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이유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헛소문을 인해 비난을 받았다면 우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해 바울은 ‘어떤 사람’이라고만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 상 아마도 그들은 유대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추천서를 들고 와서 그것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복음으로 변질시키는 악질적인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격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은 인간이 쓴 추천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님을 말합니다. 더 이상 스스로 자천할 필요 있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서를 받아서 너희에게 부칠 필요가 있느냐, 너희에게 추천 받아서 다른 곳에 추천서를 낼 필요가 있느냐 등을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대적자들은 인간이 쓴 추천서가 있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위임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바울의 자기 영광과 유익을 구하지 않은 성결한 삶과 그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능력, 그리고 그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 자체가 그리스도로부터 온 추천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사실을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왔기에, 바울은 더이상 무슨 추천서가 필요한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2.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

추천서가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곧 자신의 추천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자체가 사역자들의 추천서라는 것이지요.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이야말로 사역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추천서가 됩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고린도교회를 세웠고, 정성을 다해 양육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성도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은사를 누리고, 변화된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바울과 동역자들의 마음판에 새겨진 것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적자들은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만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에 마음판에 기록된 추천서, 그리고 뭇 사람들의 눈에 각인된 추천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은 물론 형제 자매를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며, 형제 자매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흔적이 있고, 우리의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은 그런 멋진 일들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을 얻게 되고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편지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편지를 보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까요?

 

대적자들이 가졌던 추천서는 유한한 인간이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 역시 추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2 사도들이 회심한 바울을 믿지 못할 때에 바나바의 추천으로 사도들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추천할 만한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추천서를 쓴 인간도 추천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기록한 편지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은 인간이 기록한 추천서를 가진 반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기록한 편지인 성도들을 추천서로 가지고 있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적자들의 추천서는 먹으로 기록한 추천서인 반면 바울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한 추천서입니다. 대적자들의 추천서는 돌판을 의지하는 자들이 기록한 것인 반면, 바울의 추천서는 육의 마음판에 기록한 추천서입니다. 돌판과 마음판이라고 하는 용어를 도입시킴으로써 바울은 추천서 논쟁을 율법과 복음의 논리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추천서 논쟁을 벌이는 자들이 추천서를 통해 자꾸 율법주의를 복음 안에 집어 넣으려 시도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종이 위에 잉크로 쓰여진 추천서를 들고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영혼도 살리지 못하고, 교회에 분열만 가져왔습니다. 반면 바울은 마음판 위에 성령으로 새겨진 추천서를 들고 와서 복음을 강조했으며,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는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추천서를 받은 자입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3. 하나님을 향한 확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만족

바울은 목숨을 건 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했으나 결코 자기 영광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사도권을 옹호한 이유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정성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사람들은 치유를 받고 귀신들이 쫓겨나갈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누구라도 자기 만족에 빠질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만족에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과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만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만족이었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만족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족할 만한 그 어떠한 지혜나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유한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사는지 모릅니다. 이 정도면 됐어, 나 정도면 훌륭해, 나만큼 능력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만큼 멋지게 말씀 전하는 사람은 없을거야 등의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고하고, 무시하고, 무례해집니다. 우리는 결코 자기 영광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있어 보이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파하십시오. 있어 보이고자 할수록 더욱 역겨운 사람이 될 뿐입니다.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4. 새 언약의 일꾼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음으로 인해 만족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복음을 말하고, 옛 언약은 율법을 말합니다. 추천서 논쟁은 이제 명확하게 율법과 복음 논쟁으로 셋업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에는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일단 율법과 복음은 그 적용대상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율법은 육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반면, 복음은 영적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됩니다. 영적 이스라엘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만 편애하느냐는 질문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한 모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이스라엘이 모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율법은 짐승의 제사를 통해 죄를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효력만을 발휘합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표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 죄를 속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옛 언약은 새 언약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피의 제사가 죄를 속한다는 틀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짐승의 제사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반면, 그리스도의 제사는 영구적이고 무한합니다. 단 한번의 제사로 모든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고 구원을 얻을 길을 제시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시므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죽으실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질만한 거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율법은 행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를 하게 하지만, 복음은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여기에서도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복음으로 이끌어줍니다. 율법은 애초에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율법의 선포는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자를 기다리게 됩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자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율법은 필요합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직접적인 길로서가 아니라,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복음의 길을 제시하는 간접적인 길로서 율법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율법은 인간의 공력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헛된 시도를 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의지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므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결과입니다.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사람들이 지은 죄는 율법을 기준으로 죄로 정죄되어집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되는 것이지요.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복음은 성령의 생명의 법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는다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에 법 조항 하나를 추가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그 조항은 바로 생명의 법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면 죄를 용서받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은 성령님을 받게 됩니다. 우리 영은 죄로 인해 죽고 말았는데, 살아계신 영이신 성령님께서 들어가심으로 인해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성령의 법이요, 생명의 법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새 언약의 일꾼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해 쓰시기 원하시는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있는 삶과 성결한 삶을 볼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옛 언약이 아닌 새 언약의 일꾼들입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자유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어 그들도 우리가 누리는 자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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