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편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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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어떻게 애를 낳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예수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즐겨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처녀가 어떻게 애를 낳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예수의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마리아가 판테라라는 로마 병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낳은 것이 예수’라는 헛소문까지도 만들어 낸 바 있습니다. ‘처녀 생식’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처녀 잉태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사실 처녀 잉태는 성경이 사람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썼다면 누가 봐도 믿을만한 이야기, 누가봐도 경건해 보이는 이야기를 실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종교를 만들면서 교주가 처녀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교주나 그런 교주를 가진 종교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비웃을만한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어느날 갑자기 처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는 그 순간에 처녀의 몸에서 난 자(여자의 후손)가 마귀(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700 년 전에 이사야라는 선지자에 다시 예언이 되어집니다. ‘메시야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가 사생아였기 때문에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미화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예언이 이루어진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애를 낳을 수 있냐고 물으시겠지만 이는 전능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망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흙으로 형상을 빚은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한 줌의 티끌로부터 사람을 만들어 내신 전능자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생물인 티끌에 생명을 부여하신 바 있는 전능자 하나님께 이미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 아이가 생기게 하는 것쯤은 전혀 힘든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처녀의 몸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인간이 믿을 만한 방식이 아닌 아무도 믿지 못할 방식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가 유전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첫사람 아담의 죄는 그 다음 대로 유전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유전은 오직 남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 결국 남자의 몸을 받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의 값인 죽음을 죄인들 대신 맞이해야 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죄가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남자를 통하여 탄생하면 죄가 유전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처녀의 몸에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죄인인 인류를 대표하여 죽어야 하므로 인간이어야 하고, 죄가 없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하므로 남자의 육체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여야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수 천녀, 수 백년 전에 미리 예언을 해주시고, 의심많은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근거까지 마련해 두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사생아가 아니라 사람임과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란 자리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그 흉내낼 수없는 사랑을 더이상 모독하지 마시고 이제 그 사랑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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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몰롱가의 기적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7:14)

과테말라의 작은 마을인 알몰롱가는 한때 과테말라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 중 하나였습니다. 비틀대는 알콜중독자들, 물처럼 흔한 마약, 매일 있는 사건 사고는 알몰롱가의 일상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있던 4개의 감옥에는 한 달에도 20명 내지 30명이 수용되곤 했습니다. 알몰롱가는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없는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던 알몰롱가가 마리아노 리스카으쩨라는 목사 한사람으로 인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노를 불렀고 알몰롱가를 회복시킬 것이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알콜중독으로 인해 간질환을 앓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교회로 모여들자 숱한 핍박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알몰롱가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 회복을 경험하기 위한 결정적인 두가지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괴한 6명이 마리아노의 입에 총을 넣고3번이나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발사되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84년에는 테레사라는 여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노 목사가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가 살도록 기도하라.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남편과 함께 그녀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약 10분정도 지난 후에 그녀는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이러한 소문들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이 마을은 더 이상 알콜 중독자가 존재하지 않으며,감옥은 교회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기적은 물이 귀하고 척박했던 이 땅이 기름진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1~2m만 땅을 파도 물이 솟아났는데, 북쪽에서는 찬물이, 남쪽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옵니다. 한 주에 트럭 1대분도 나오지 않던 수확물이 이제는 하루에도 40~50트럭 분량이 나옵니다. 작물을 심고 25일만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게 되어 1년에 8번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근 하나가 팔뚝보다 더 크게 자랐으며, 토마토는 마치 메론처럼 크게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으며, 그러므로 예수가 있는 곳에는 회복이 있습니다. 개인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고, 사회가 회복되며, 게다가 자연까지 회복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알몰롱가에 주셨던 그 기적을 당신에게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곧 그분을 찾으십시오. 그분의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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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밥먹여 주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예수가 밥먹여 주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예수가 밥먹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땅에 머무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벳새다 광야라는 곳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음식을 구할 수 없었던 탓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하루종일 굶어야 했습니다. 이때 한 아이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예수님께 내어 놓았습니다. 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기엔 터무니 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떼어 주었지만 줄어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음식을 얻을 수없는 광야에서 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이야기이며 실화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일을 안해도 무조건 먹고 살 수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땀흘려 일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은 죄로 인해 수고를 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실한 사람도 가난하게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법칙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외없이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안 믿어도 잘먹고 잘 살수 있고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까지 모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주시고 비를 주셔서 모두 먹고 살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을 ‘일반 은혜’라 부릅니다. 누구나 일을 하면 먹고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실 우리가 먹는 밥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 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 외에 특별히 주시는 은혜이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이 특별 은혜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절망 가운데에서 소망을 얻게 되고, 가난함 가운데 부요함을 얻게 되며, 연약함 가운데 강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부유한 사람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어떤 상황에서건 흔들림이 없고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시기적절하게 주시는 특별은혜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떡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떡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 영혼을 위한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라는 떡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그 생명의 떡을 먹은 자만이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 있을 현재의 밥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를 살게 할 영혼의 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밥먹여 줍니다. 그 밥은 현세와 내세의 배고픔을 모두 해결해 줍니다.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고 당신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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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좋은데 예수쟁이는 싫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17)

간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마음껏 화내고 성질부리는 교인들, 자기 잇속만 챙기기에 바쁜 교인들, 죽어도 손해볼 줄 모르는 교인들, 울고 불고 기도하고 성경을 달달달 외우고 다니는데 삶은 개차반인 교인들,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는 무례한 교인들, 심심찮게 신문지상을 오염시키는 교인들, 이런 예수쟁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한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는 예수를 사랑하였음을 볼 수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인간은 그 안에 죄성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 가르침대로 살 수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에게 예수는 필요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악한 것은 도덕이나 가르침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죄성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면 당연히 그 믿음에 걸맞는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에는 성숙의 단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시점을 갓난아이로 본다면 장성한 성인으로 자라는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요. 신앙이 미성숙할수록 믿기 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성숙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다닌 년수로는 노인이지만 실제적인 성숙도는 갓난 아이인 경우도 허다합니다. 성숙은 자기 내면에 있는 옛자아를 깨어 부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에 실패할 경우 오래된 교인이라 할지라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의인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의 삶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속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의 삶은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온전히 닮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들마저도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그보다 더 형편없는 삶을 살았을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으며, 그들로 인해 소망을 찾고 살맛을 회복한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진다면, 억압받고 가난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손길을 경험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가는 일들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성숙에 이른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을 행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익히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러한 사람들마저도 완성되지 못한 약한 모습을 갖출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가 완벽한 것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완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변할 수 없는 사람이 조금씩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변해간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죄인의 습성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싫다는 이유로 구원의 길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완벽하지 못한 예수쟁이는 싫더라도, 완벽하신 예수를 믿으셔야 완벽하지 못한 당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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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진리는 오직 하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행전 4:12)

모든 종교에는 각자 구원의 교리와 체계가 있으며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종교마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운행되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그 모든 관점이 다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진리는 한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 곳에 가고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습니다. 반면 불교에서는 죽고 나면 다른 생명체로 환생하여 또 다른 삶을 산다는 윤회를 믿습니다. 윤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의 교리는 틀린 것이 되며, 반면 영혼이 천국과 지옥 중 한 곳에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불교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만물이 스스로 생겨났다고 믿는 종교는 틀린 것이 됩니다. 예수가 그저 4대 성인중 한명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터무니 없는 사기가 되지만, 예수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낸 유일한 통로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종교는 틀린 것이 됩니다.

믿음의 대상은 다양할 수 있고 무엇을 붙드는가는 자유이지만 결국 진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결코 혼자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창조주에 의해 정확한 목적 가운데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주가 목적 가운데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목적은 반드시 피조물들에게 계시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운행되다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창조주의 관점에서 피조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기록한 책은 유일하게 성경밖에 없습니다.

어떤 기록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기록이 실제적으로 검증이 되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 한사람에 대한 예언만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으며 그 기록은 모두 사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다. 가장 천한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어떤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이다. 제자에게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 채찍에 맞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조롱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도 다리뼈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겉옷과 속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뽑을 것이다.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릴 것이다. 죽은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을 짧은 지면에 기록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300번이 넘는 예언이 모두 사실이 되었다면, 그가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마지막 예언이 빗나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무엇을 믿건 간에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선택이고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땅위에 있을 때에는 종교와 사상에 구별없이 모든 인간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숙명인 죽음 이후에 펼쳐진 세상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걸고 하는 선택앞에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선택을 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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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는 선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인도의 한 선교사가 힌두교도인 할아버지에게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단지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구원이란 그렇게 쉽게 얻어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행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할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고행으로

힌두교의 메카인 캘커다까지 무릎으로 기어가는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행을 떠나기 앞서 선교사에게 마지막 선물을 건네며 그동안 잘 대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 그 선물은 세상에서 본적이 없는 주먹만한 진주였습니다.

선교사는 귀한 것을 거저 받을 수는 없으니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주고 그것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습니다. “이 진주를 어떻게 돈으로 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주는 잠수를 좋아했던 할아버지의 아들이 물속에서 진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캐어 나오다가 그만 잠수병으로 목숨을 잃게된 사연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을 어떻게 값으로 살수 있겠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그 가치가 귀한 것은 그 가치를 매길 수가 없기 때문에 값을 지불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 선에는 이를 수없고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죄의 값을 지불할 수는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완벽한 지혜를 가질수 없고, 인간이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망권세를 이길 힘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날마나 죄책감으로 자신의 몸을 해친다 할지라도 그 죄가 사해지지 않는 것처럼 고행과 구원은 애초에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결국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값을 매길 수없는 위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베풀 수있는 자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 선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 사실을 설명해주었고 결국 할아버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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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 계시록 3: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 계시록 3: 20)

윌리엄 홀먼 헌트 (William Holman Hunt)라는 화가는 "세상의 빛"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의 한 사람이 문 앞에 서있습니다. 문은 담쟁이 덩굴이 덮혀져 있어서 오랫동안 닫혀져 있었음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그는 한 손에는진리의 등불을 든 채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사랑을 말하고 그의 얼굴은 문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그 문의 바깥쪽에는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림 속의 문은 사람의 마음의 문이고 문밖에 선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마음의 문에는 밖으로 난 고리가 없고 오직 안쪽에만 고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꽁꽁 닫힌 채 열리지 않는 우리 마음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따사로운 햇빛이 비출 때는 물론이고 깜깜한 밤에도 비가 올 때도 눈이 올 때도 예수님은 그렇게 외롭게 서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마음문 밖은 참으로 쌀쌀하고 외롭습니다. 열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애를 태워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을 위해 죽어주신 그 분을 차갑고 외로운 당신의 마음 문밖에 세워 두시는 일을 이제 그만 멈추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사느라 분주하여 그 분의 노크에 귀를 귀울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주한 삶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과 더불어 먹고 마실 때 행복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꽁꽁 닫아 두었던 당신의 마음문을 여시고 그 분을 맞이해 보십시오.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참 평안과 행복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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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노르웨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조그마한 공간에서 비좁게 예배를 드리던 마을 사람들이 교회를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시골 교회이다 보니 건축비용이 모자랐고 온 교인들은 스스로 일을 하여 교회를 지어야 했습니다. 교회 건물이 점점 완성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교인들은 모두 기뻐하며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종탑 꼭대기에서 일하던 한 교인이 그만 실족하여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죽었을 줄만 알았던 그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히 살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교회 밑을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중 한 마리의 양위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사하였지만 양은 즉사하였습니다. 양의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한 셈이 된 거지요. 아직도 그 교회의 종탑에는 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살 수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준다면 그 사람은 살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게 하셨습니다. 양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어린양에게로 전가시킨 다음 대신 죽게 하는 것이었지요. 이때의 어린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을 사용하게 하신 것 역시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요. 그것은 마치 사형수가 다른 사형수의 죄를 대신하여 죽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가 되겠지요.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면 양이 그 죄를 대신하여 죽고 사람은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우리의 죄를 전가시키기만 하면 우리는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지금 곧 당신의 죄를 그 분에게로 옮기실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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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세계적인 부흥사 찰스 피니(Charles Finney)는 원래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 중이던 그는 뉴욕의 한 치안판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었습니다.

“피니야, 너 변호사가 되면 무엇 할래?” “부자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겠지요”

이 대답을 마친 후 피니는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반 마일쯤 떨어진 숲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라고 결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이기적인 생활, 세상 쾌락을 즐기는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는 부흥사가 되어 50년 동안 복음을 전했으며 수천, 수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 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그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자는 흠과 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점의 흠도 허물도 없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서서 하나님의 잣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곳은 극한의 고통이 있는 곳이며 영원히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곳입니다. 절망적인 사실은 단 0.0001%의 죄만 인정되어도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컷트라인이 50점이나 60점이 아니라 100점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인생은 어제까지 있다가도 오늘은 없어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을 살지만 사실 우리의 끝은 당장 오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만약 준비가 되지 않으셨다면 지금 곧 준비하십시오. 방법은 너무도 쉽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살포시 당신의 죄악을 옮겨놓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순간 죄는 자동으로 그에게 전가됩니다. 더 늦기 전에 바로 지금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에 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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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사랑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옛날 그리스 영토 로그리양 (Locrians) 나라에 BC480년경 처음으로 그리스의 법률을 만든 자로크스 (Zaleucus)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간음죄인은 두 눈을 뽑는다는 법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을 공포한 지 하루 만에 바로 자기 아들이 간음죄로 기소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로그리양 왕은 자기 아들의 두 눈을 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법을 시행하여 공의를 지키면 아들이 평생 장님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아들이라는 이유로 법을 무시하면 나라 전체의 공의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사건은 모든 백성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재판일이 되자 그는 형리로 하여금 자기 아들의 눈을 빼게 하였습니다. 형리가 왕자의 한쪽 눈을 빼고 나머지 한쪽마저 빼려고 할 때, 그는 나머지 한쪽은 자신의 것으로 대신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로써 왕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공의와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사랑 모두를 다 이루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사람들의 죄를 그냥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점의 죄와 허물이 없는 절대선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실 수도, 죄와 공존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다른 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신 것이지요.

아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한쪽 눈을 뽑게 했던 로그리야 왕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기꺼이 그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공의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값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앞에 길이 열려졌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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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랜드 캐년의 골짜기에는 2,330km나 되는 콜로라도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강은 그 물살이 매우 빨라 카약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고 물살이 매우 느린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캐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콜로라도 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가는 띠처럼 보입니다. 그랜드 캐년의 꼭대기가 너무 높아서 위에서 보면 콜로라도 강의 움직임이 안 보이는 것이지요. 2m의 최홍만과 1m 60도 안되는 김병만을 63빌딩에서 내려다 보면 모두 점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에 발끈하는 것을 봅니다.

“누구를 죽인 적도 없고, 누구를 등쳐먹은 적도 없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

많은 사람들은 죄인에 대하여 얘기할 때에 살인자나 강간범 등의 극단적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만의 잣대와 기준으로 판단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잣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내어주며 잠자리를 같이 하게 한다면 그것은 죄일까요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명확히 죄가 되지만 에스키모인들에게는 실제로 그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죄인인 우리의 잣대로 똑같은 죄인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한점의 죄도 없이 100% 절대선인 하나님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서 나오는 죄란 단어는 ‘하말티아’로 ‘과녘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이지요.

100%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며, 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하든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죄의 짐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지금 바로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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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잣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선한 사람이 천국에 가야지 예수 믿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들 합니다. 선한 사람이 천국에 가야한다는 말은 100% 맞는 말이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는 선하다는 것을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인도 토다족, 시베리아 척치족, 에스키모인 등은 나그네에게 아내를 빌려주어 동침하게 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문화에서는 큰 죄악입니다. 과연 어떤 잣대가 옳은 잣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문제는 커트라인의 문제입니다. 과연 몇점에서 잘라야 할까요? 50점? 70점? 평균이상과 이하로 판단할까요? 컷트라인보다 1점 부족하면 아쉬워서 어떻게 하나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당연히 선한 사람만 천국에 들여 보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판단 기준이 사람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의 잣대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잣대로 선악을 판단하시며 커트 라인은 100점 만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0.000000001%의 죄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죄와는 공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천국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잣대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으십니까?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마음만 품어도 살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죄인인 우리의 잣대로 볼때에 분명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100% 선하신 절대선의 하나님의 잣대로 보면 악한 사람과 조금 덜 악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악하므로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예외 규정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가의 규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악한 사람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는 사람에게서 예수님께로 전가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해 주십니다. 죄와 의의 물물교환이 이루어 지는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죄를 전가받았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그에게 전가된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의 논리를 충족시키고 계신 것이지요.

당신은 완벽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예수가 필요없습니다. 쭈욱 그렇게 착하게 살다가 죽으신 다음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주저없이 예수님께 죄를 전가하고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으십시오. 그 방법만이 선에 대한 천국의 잣대를 충족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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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먹을 믿어라 (?)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체스터 버텔이라는 사람은 생전에 동상을 만들어 성경을 조롱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동상의 오른손에는 ‘인류의 정신해방’이라는 이름의 두루마리가 들려 있고, 왼발에는 ‘미신’이라는 이름의 두루마리가 밟혀져 있습니다. 물론 왼발에 밟힌 두루마리는 성경을 상징하지요. 그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 몸을 뱀으로 들끓게 해 보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은 뱀굴이 되어버렸고, 하루에 20마리가 잡힌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모독을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라’는 독설을 날립니다. 전능자를 한낮 피조물의 주먹과 비교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우리의 주먹은 믿을만한 것일까요? 알렉산더 대왕은 관에 구멍을 내고 자기의 빈손들을 관밖으로 나오게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손은 3개의 대륙을 차지한 손이었지만 33세에 요절해야 하는 운명을 바꿀수 없었습니다. 지혜와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갖췄던 솔로몬 왕의 손은 나라가 갈리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손은 절대권력을 갖춘 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신의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손은 그들의 손보다 큽니까? 당신의 손으로 질병의 문제를, 고통의 문제를, 슬픔의 문제를, 재정의 문제를, 자녀의 문제를, 부부관계의 문제를, 신분의 문제를, 진로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죄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물론’ 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는 전능자의 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주먹을 믿고 의지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위의 문제 중 하나라도 당신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이제 유한한 피조물의 손이 아닌 무한한 전능자의 손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손은 전능자의 손이기에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은 조용하고 잔잔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강력하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어떤 절망이라도 희망으로 바꾸고, 그 어떤 비참한 인생이라도 형통하고 번성케 하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천하만국을 치유하는 은혜의 손길이 됩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명조차 어찌할 수 없는 유한자의 손에 맡기시겠습니까? 전능자의 손은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펼쳐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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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여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순간 그것은 믿음이 아닌 사실이 됩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전기를 볼 수 있습니까? 공기를 볼 수 있습니까?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파장을 볼 수 있습니까? 주파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출 때 라디오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공기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숨을 마시고 내쉴때 공기를 호흡하며 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없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체가 아닌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이 아닌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은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눈, 영적인 안테나가 망가져 더이상 영적 존재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것이지요.


하나님은 한점의 흠도 죄도 없는 절대선이요 완전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죄인이 되어 버린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순간 우리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감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망가져 버린 우리의 영적 안테나를 고치는 것입니다. 고장난 안테나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주파수를 맞추어도 라디오를 수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망가진 영적 안테나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도무지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망가진 영적 안테나를 다시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안테나가 망가진 이유는 죄때문인데 예수님께서 그 죄를 씻으셨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을 믿어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는 말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공기가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존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마음을 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시고 겸손히 그 분께 요청해보십시오.

“만의 하나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면 나를 찾아와 주세요. 나는 당신을 보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찾으신다면 머지 않아 하나님께서 영적 안테나를 살리시고 자신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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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연인 사이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첫번째 바램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성립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과 사랑을 나눌 사랑의 대상을 찾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아름다운 로봇 하나를 만들고, 그 안에 ‘PureLove’라는 프로그램을 입력합니다. 로봇은 프로그램에 따라 시시 때때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주인님, 사랑해요. 삐리 삐리 삐리 ~~”

과연 이 로봇의 사랑은 진짜일까요? 이 로봇의 고백이 주인의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미워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비로소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의지를 발동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도 주셨습니다.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라는 나무였습니다. 다른 모든 과일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행위를 통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사람은 그 선악과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속임수에 속아 버린 것이지요. 그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사람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어져 버린 연인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새로운 통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통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마음에 받아 들이시는 순간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는 즉각 살아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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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한 사람이 로봇 하나를 발명했습니다.

하룻동안 이런 저런 일로 지친 피로를 풀어줄 수 있도록 만든 맛사지 로봇이었습니다. 과학자는 맛사지 로봇에게 고성능의 인공지능을 부여했는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로봇의 지능이 너무 높다 보니 자신만의 꿈이 생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맛사지 로봇은 권투 로봇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맛사지는 않고 권투 연습만 했으며 심지어는 가족들을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약 로봇을 만든 과학자라면 로봇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데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읽고 계시는 편지에도, 편지가 쓰여진 종이에도, 그리고 편지를 입력한 컴퓨터와 그것을 출력한 프린터에도 각각의 만들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제작 원리가 복잡한 것일수록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메뉴얼이 주어집니다.

우리 역시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명확한 목적가운데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 목적을 따라 살게 하려면 창조주는 어떠한 형태로든 그 만드신 이유를 설명해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사용 설명서를 주셨습니다. 그 사용 설명서 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사용 설명서는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곧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만 행복하도록 디자인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치 권투 선수를 희망했던 맛사지 로봇처럼 우리 역시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버리고 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진 원래의 목적이며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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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에서 구원으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4)

혈루병이란 병에 걸려 12년동안이나 절망 속에서 살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자궁 내에서 피가 지속적으로 흘러 나와서 냄새가 진동하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 곁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용하다는 의원들을 다 찾아 다녔지만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졌던 재산만 다 날려 버렸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은 것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한가닥 실날같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마을을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곁에 가면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길을 나섰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본 여인은 빽빽히 모인 군중의 숲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에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온갖 기적과 신비한 일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옷깃만 만져도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잠시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혈루병의 뿌리가 뽑힌 것이지요.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현대에도 예수님을 통해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말기암에서 치유 받아 살아 난 사람, 중풍에 걸렸다가 일어난 사람, 폐병으로 인해 죽음 직전에 살아난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 회복되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것과 같은 절망 속에 계시다면 지금 용기를 내어 예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예수 안에는 질병을 이기는 능력 뿐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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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이어령 교수는 한국 최고의 지성들 중 한 분으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자신이 왜 무신론자일 수 밖에 없는 지를 많은 글을 통해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92년, 이 교수의 딸 민아 씨는 갑상선암을 앓았으며, 망막이 손상되어 실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딸의 질병이라는 불가항력 앞에서 무너진 그는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민아 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앞을 보게 된 것이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딸이 병에서 회복된 기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돈과 지식과 명예가 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낙망할 때에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에도 빛을 잃지 않는 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그 의연함이 그녀의 등 뒤에 서계신 빛되신 예수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최고의 지성 이어령 교수가 발견하였던 예수라는 빛은 결국 그를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제 그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에서 하나님을 만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돈도 명예도 지식도 권력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어두움의 터널 속에서 헤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를 만나면 인생의 어두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 빛가운데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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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대상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안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신비로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아예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 정도로 특별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물질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영혼과 인격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티끌을 취해서 만드셨기에 우리 역시 먼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셔서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처럼 특별히 만드신 이유는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로 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 수 있도록 해와 비와 물과 불과 공기와 먹거리 등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활용할 지혜와 재능도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베풀어졌음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하기까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것들을 거두지 않으실 뿐 아니라,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사건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사랑의 대상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지금도 그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면, 우리는 그저 먼지같은 존재로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먼지와 하나님의 자녀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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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청사진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사도행전 17:26)

우리는 모든 정보가 의식활동의 결과임을 압니다. 잉크병을 종이에 백만번 흩뿌린다 해도 의미있는 한 문장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파도가 백만 번 해변에 몰아쳐도 모래 위에 의미있는 글귀는 새겨지지 않습니다. 백만마리의 쥐들이 백만년동안 컴퓨터 자판에서 뛰어 놀아도 한 편의 편지는 작성되지 않습니다. 의미있는 정보는 모두 우연이 아닌 의식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는 DNA라 불리우는 유전정보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유지되며 증식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결코 우연히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DNA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삼단 논법이 성립됩니다. 1) 모든 정보는 의식활동의 결과이다, 2) DNA는 정보이다, 3) 그러므로 DNA는 의식활동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DNA를 만들어낸 의식은 누구의 의식일까요?

현대는 돌쪼가리를 놓고 유추를 하는 촌스러운 과학의 단계를 넘어, 기전을 설명하지 못하면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유독 진화론에 대해서만 기전에 대한 설명 없이 형태만 보고 믿는 관대함을 베풉니다. 과학세계가 진화라는 종교적 도그마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요. 현재 인간은 유전정보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축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그 어떠한 합리적인 기전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체의 세포는 모든 내부 조성물이 한꺼번에 갖춰져 있지 않다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생명체가 오랜 시간을 두고 우연히 생겨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백만마리 쥐들이 우연히 컴퓨터 자판 위에서 뛰놀다 보니 오딧세이가 나왔다는 주장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억지입니다.

생명체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으셨음을 드러내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당신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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