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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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세상의 빛 (룻 4:13-22)

* 어두운 세상의 빛

* 룻 4:13-22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 본문해설

1. 어두운 세상에도 빛은 있다

드디어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기 민족과 그 신 그모스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신실한 그녀를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는 모압 여인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리 스도의 계보 속으로 밀어 넣어 구속사의 주요 인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결혼 과정을 다 생략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급하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결혼식의 개인적 즐거움보다는, 새 시대를 이끌 민족의 지도자, 다윗을 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룻에게 아이를 출산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암울한 시대에 세상이 모두 하나님을 떠났다고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둠 속의 빛이 될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사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왕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도 빛은 있는 법입니다. 그 빛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에서 찾아졌습니다. 그 빛은 아르논 강과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로 옮겨 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남겨진 또 하나의 빛, 보아스를 만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유익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값없이 베푸는 보아스는 그야말로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두 빛,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개인적인 로망스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요, 구속사의 단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거대한 역사 속에서 아름다운 한 페이지, 아니 한 줄이나마 장식할 수 있다면, 부초같은 인생에 그보다 큰 영광이 있을 수 있을까요?

2. 빛은 찬양과 감사를 낳는다

룻이 아들을 낳자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와서 축복의 말을 전합니다. 여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축복의 말을 시작합니다. 기업 무를 자가 없어서 대가 끊겨 버리고 노년의 소망도 없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에게 ‘기업 무를 자’를 주셨습니다. ‘기업 무를 자’란 물론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킵니다. 고엘 제도에 의해 그는 보아스의 가계가 아닌 엘리멜렉의 가계를 이어줄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서 기업 무를 자를 남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요, 저주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징계로 겸허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녀는 원망과 불평을 늘어 놓는 대신, 자신을 겸비할 줄 아는 신실한 여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힘이 없었습니다.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기업 무를 자’가 생긴 것이지요. 나오미는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단순히 ‘기업 무를 자’라고 하는 결과만을 보지만, 나오미는 스스로 모든 과정을 살아낸 사람이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한 “찬송할지어다”라는 말은 사실 나오미와 함께 기쁨의 찬양을 나누는 것일 뿐, 나오미에게는 무의미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감격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누구보다 크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빛은 감사와 찬양을 낳습니다.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빛을 만나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 나오미에게 찬양을 회복해 준 것처럼 우리의 만남은 누군가에게 찬양과 감격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빛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

3. 빛은 기쁨을 기쁨되게 한다.

여인들은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빌었습니다. 여인들은 또한 아이를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라 일컫습니다. ‘생명의 회복자’란 대를 이어갈 자가 없어서 더 이상 생명을 낳을 수 없게 된 나오미의 가정이 룻이 낳은 아이로 인해 생명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노년의 봉양자’라는 말은 나오미의 노년을 섬기고 돌봐 줄 손자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줍니다. 오벳이란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노인이 된 나오미를 ‘섬기는 자’가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여인들은 이 모든 축복이 룻을 통해 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룻을 일컬어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7’은 ‘완전’과 ‘충만’을 상징합니다. 완전수를 다 채운 아들들보다 룻 하나가 더 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양식을 다시 주셨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양식이 나오미에게 부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육신의 양식을 찾아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달았으며, 풍요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나오미의 초라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오미를 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가 아닌 ‘마라’로 불러 달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이고 나오미는 슬픔이란 뜻입니다. 이름은 기쁨인데, 슬픔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지요. 그러한 그녀에게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나오미 되고, 기쁨이가 기쁨이 되는 순간입니다. 나오미를 찾아와 축복의 말을 전하고 있는 여인들은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탄식과 동정의 말들을 뱉었던 바로 그 여인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탄식과 동정의 소리를 축복과 감격의 소리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룻이라는 빛은 바로 그것을 위해 쓰임받았습니다. 빛은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오늘도 아픕니다. 웃을 일이 없고, 감격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쁨이 회복되게 해야 합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생명의 회복자가 되어야 하며, 운신할 힘을 잃은 자들에게 봉양자가 되어줘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우리로 인해 기쁨을 회복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4. 개인이 아닌 민족과 열방을 밝히는 빛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나오미가 손자를 지극한 정성으로 양육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손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을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말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 아이를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룻기의 모든 이야기는 다음 시대를 이끌 다윗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였음을 밝히고 난 후, 다윗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성경에서는 한 시대가 끝나고 다음 시대로 이어질 때에, 그 이후 시대를 이끌 사람을 소개하면서 족보를 제시하곤 합니다. 다윗의 족보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유다의 자손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1,000년 전에 이미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예언은 베레스의 계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본문에 소개된 계보는 완전한 계보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기록된 계보입니다. 주요 인물들만 선택적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베레스로부터 나손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는 애굽의 노예 생활 동안에 살았던 인물들이고, 나머지 다섯 대는 출애굽 사건 이후에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룻기의 시대적 배경인 사사시대는 왕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왕이 없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 왕이 없다는 뜻과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모두 의미하지요. 사사기는 왕이 없는 백성들의 타락과 어둠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그야말로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소망은 있었습니다. 바로 보아스와 룻과 같은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룻기는 그 소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소망은 보아스와 룻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탄생하는 다윗왕입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어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빛 다윗을 소개하기 위한 책인 것이지요. 본문에서 나오미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오지만, 결국 보아스와 룻이라고 하는 빛에 의해서 회복이 되어집니다. 보아스와 룻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기쁨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을 통해서 말이지요.

우리는 시간이 흘러 이 계보를 타고 결국 예수님이 오심을 봅니다. 사사시대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룻기는 모든 인류의 진정한 빛 예수님을 소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 전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룻)하면서 하나님의 능력(보아스)으로 살아내는 자는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기쁨을 회복해주는 작은 소망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소망은 바로 진정한 빛 예수님을 통해 현실이 됩니다.

룻이라고 하는 작은 빛은 민족을 살리는 다윗이라는 빛이 되었고, 모든 열방을 살리는 예수라고 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들어오는 룻의 행색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이었고, 과부였으며, 남의 밭의 이삭을 주워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녀를 불러 민족의 빛인 다윗과 열방의 빛인 예수님의 계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빛 하나를 찾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일을 도무지 가늠하지 못합니다. 앞을 내다볼 수도 없고, 인생을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 빛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서있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민족과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가 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라한 우리 과거의 자아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다시 그리기를 원하십니다. 빛이 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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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자의 신부 (룻 4:9-12)

* 유력자의 신부

* 룻 4:9-12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 본문해설

1. 신랑 보아스, 신랑 예수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이 죽자 그 땅은 자연스럽게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에게 상속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도 죽었으므로 이제 땅은 남겨진 미망인들인 나오미와 룻에게 상속이 되어져야 했습니다. 오르바는 모압에 남았으므로, 상속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4:5절에서는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나오미에게 밭을 사는 날에 룻에게도 사서 룻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인데다가 이제 막 베들레헴에 들어왔기 때문에 실제로 땅은 나오미가 관리했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손에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에게 있던 모든 것들을 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아들이 아니라 친족이므로 땅을 상속받을 수 없었고, 다만 기업 무를 친족으로서 땅을 사야만 했습니다. 보아스가 땅을 살 때에는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을 사는 것이었고, 그 모든 것 안에는 룻도 포함되었습니다. 룻을 샀다는 말은 인신매매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기업 무를 자로서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의무까지 이행했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룻이 보아스의 법적인 아내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를 통해 룻의 정체성은 이방인 과부에서 유력자의 아내로 바뀌게 됩니다.

보아스가 룻을 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마귀에게 예속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지심으로 죄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이 되십니다. 이방여인이었던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기업을 이었던 것처럼, 이방인이었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방여인도 과부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신랑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그 힘으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품어 주시고, 우리에게 풍성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2. 유력자의 신부

보아스는 룻에 대하여 특별히 ‘모압 여인 룻’이라 표현합니다. 룻에게는 이방 여인, 특히 모압 여인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모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려는 이스라엘의 진로를 방해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음행의 죄를 범하게 했던 일로 인해 이스라엘의 총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된 민족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율법은 모압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모압사람을 총회에 들이지 말라는 말 속에 암묵적으로 그 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말론은 모압여인 룻과 결혼을 했고, 룻은 말론과 함께 상속을 누릴 자격을 가졌습니다. 더구나 룻은 개종하여 그 누구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룻이 모압 여인이라 하여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룻이 모압에서 살 동안에는 모압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할 때에는 모압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수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방여인이라는 지탄보다는 현숙한 여인이란 칭송을 받았습니다. 보아스는 그러한 룻의 현숙함에 매료가 된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압여인이라고 하는 룻의 과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오히려 모압 여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면서 그 과거가 문제될 것이 전혀 없음을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사람들은 룻을 ‘모압 여인 룻’이 아닌, ‘보아스의 아내 룻’으로 기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불순종의 자식들이었으며,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고, 온갖 죄악을 자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피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아내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과거의 죄인’이 아닌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로 그 정체성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신부’로 기억되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룻과 같은 현숙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부된 우리의 현숙함이 곧 신랑되신 예수님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신랑이 주는 유업

보아스는 죽은 자의 이름, 즉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이름으로 자신이 무른 땅을 상속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룻과 자신 사이에서 나는 아들을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기업을 잇게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을 위해 기업을 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족인 엘리멜렉 가문을 위해서 기업을 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하고 있으며, 신실하게 그 모든 정신을 이행하는 사람임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핏값으로 사시면서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그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수 없는 자에게 그 유업을 이을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해 수난과 죽음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풍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죽으면 천국 가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와 충만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찾으시며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4. 신부에게는 높여야 할 이름이 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산 의도는 엘리멜렉의 이름이 그 형제 가운데, 그리고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보아스가 그 모든 일을 성문에서 행한 이유도 많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이 일을 해주지 않았다면 엘리멜렉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날 아들이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그 땅을 상속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성문에서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은 끊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죽은 후에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큰 저주 중의 하나로 여길 정도로 이름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마치 이조 시대에 가문의 대를 잇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우리의 문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통해 사라질 이름을 다시 소생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룻이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어가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높여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교제 가운데에서 만들어지는 성령의 열매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하늘 높이 올려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한 방울이라도 더하거나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드러내는 존재가 될 수는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하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수님의 신부로 살고 있습니까?

5. 어둠의 시대에 빛나는 신앙을 가지라

장로들과 백성들은 선한 일을 한 보아스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우선 보아스와 결혼할 룻을 축복합니다.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달라는 축복이었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족장 야곱의 두 아내들로서, 12명의 아들들을 낳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한 사람들입니다. 장로들과 백성들은 룻 역시 하나님께 그러한 풍성한 복을 받아 큰 가문을 이루기를 기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보아스를 향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보아스가 힘이 있고 이름이 있는 사람으로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입니다. 극도로 타락하여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보아스의 행위는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룻이 보아스에게 많은 자손들을 낳아 준 것처럼,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께 영적인 자녀들을 낳아 드려야 합니다. 룻이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어 많은 자녀들을 낳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의 자녀들을 낳아 예수님의 품에 안겨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자녀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때에 비로소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아스와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홀로라도 빛을 발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모델은 우리의 보아스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미 보여지고 제시되었습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패역한 세대에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은 찬연하게 빛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사랑의 전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은 홀로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과 그 이름을 늘 찬양해야 하며, 그 찬양이 세상 가운데로 퍼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설 때에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유력한 자요, 유명한 보아스로 설 때에 예수님의 이름은 널리 퍼집니다. 보아스의 능력은 하나님의 거룩을 실현할 능력이었고, 보아스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높아졌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거룩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6. 죄악이 관영한 곳에 흐르는 은혜

장로들과 백성들은 룻과 보아스를 축복한 것에 이어서 보아스의 집안을 축복합니다. 젊은 여인 룻을 통해 보아스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보아스의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레스는 다말이 그의 시아버지 유다와 부정한 방법으로 동침하여 낳았던 쌍동이 아들, 곧 베레스와 세라 중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세라의 이름이 빠지고 베레스의 이름이 언급이 된 이유는 보아스가 베레스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말이 언급된 이유는 다말 역시 계대 결혼을 통해 후손을 낳은 케이스였기 때문입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였던 유다와 동침한 이유는 계대결혼을 통해 기업을 잇게 해주어야 할 유다가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다말은 계대결혼의 연장선상에서 유다와 동침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들과 백성들은 보아스의 직계 조상 베레스처럼 보아스도 룻과의 계대결혼을 통해 많은 후손들을 낳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해주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족보는 의도적으로 다섯 명의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았던 다말, 심판을 받아야 했던 가나안 여인 라합,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압여인 룻, 다윗과 간음했다가 그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았던 밧세바, 그리고 처녀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 등입니다. 이 중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조상들은 모두 예수님의 조상이 될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다윗의 혈통이 사실은 죄로 물든 혈통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혈통을 통해 예수님이 탄생을 한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은혜가 흐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와 처녀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속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 여인들 중, 다말과 룻, 두 여인이 오늘 본문에 등장을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자로 여겨졌지만, 다윗 왕조의 당당한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에서 죄가 관영한 곳에 은혜가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곳에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설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이 우리의 죄악 가운데에서도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고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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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을 뛰어넘는 신앙 (룻 4:1-8)

* 평범을 뛰어넘는 신앙

* 룻 4:1-8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 본문해설

1. 누군가를 도우려면 신속히 움직이라

룻기가 쓰여진 시대는 가부장적 씨족사회였습니다. 여자가 기업을 물려 받을 수가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곧 극도의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쌍으로 과부가 된 채, 한 집에서 살아가야 했던 나오미와 룻의 상황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과부들이 궁핍가운데 던져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법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기업 무를 자의 법’이었습니다. 과부의 죽은 남편과 가장 가까운 형제나 친족이 과부를 아내로 맞아 생계를 책임질 뿐 아니라, 기업을 물려 받을 아들을 낳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무를 자 중 하나였고, 따라서 룻은 보아스를 찾아가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지켜 자신을 아내로 맞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보아스에게는 그 의무를 지킬것인지 말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룻을 귀하게 본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을 위해 기꺼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감당해주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보아스가 가장 가까운 친족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족에게 권한을 넘기든지, 포기 각서를 받아내든지 둘 중 하나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절차를 밟는 보아스의 발걸음은 한가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기 원할 때에 신속히 일을 처리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목을 빼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비해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은 느긋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결코 지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신속히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상대의 절실함을 안타까움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2. 모든 일을 절차에 맞게 하라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앉아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습니다. 성읍들은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고, 사람들은 성문을 통해서만 성안으로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돌로 만든 성벽에 비해 성문은 성읍의 가장 취약점이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문을 될 수 있는 대로 좁게 만들었습니다. 적들이 밀려 들어오는 공간과 시간을 최소화시키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조가 전시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평화시에는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좁은 성문을 통과하고 나면 넓은 광장이 나오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문을 통과하여 일터로 나갔다 들어왔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문 앞 광장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성문 앞 광장은 사람의 통행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광장은 모든 소문의 근원지가 되었고, 정치활동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사법적인 판결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성문 앞 광장에는 장로들이 재판석에 앉아서 크고 작은 법적인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렸습니다. 보아스는 첫 번째 기업무를 자가 룻에 대한 권리를 이행할지 포기할지에 대한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 재판정으로 사용되었던 성문을 찾았던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절차를 무시한 채 원하는대로 밀고 나가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들을 절차와 원칙에 따라서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매듭짓기가 필요합니다. 법적인 일들과 원칙적인 일들을 무시한 채, 어물쩡 넘어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원칙보다 은혜가 강조되다 보니, 절차를 무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결국 교회 분란의 불씨가 되곤 합니다. 원칙과 은혜의 균형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3. 선한 일에는 늘 섭리가 작동한다

요즘처럼 쎌폰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므로, 보아스는 성문에 앉아 첫 번째 기업무를 자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성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진행하는 절차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한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절차와 원칙에 따라 우리의 할 바를 다해야 하겠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적함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자녀들을 위해 상황을 펼쳐 주시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늘 함께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용을 쓸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풍랑을 만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순적함과 형통함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이 때에 몰아치는 풍랑은 사실 풍랑을 위장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더욱 빨리 이끌기 위한 강한 바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를 점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4. 평범을 뛰어넘는 신앙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나오미로부터 사서 기업을 무를 것인지를 묻습니다. 기업무를 자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나오미에게 땅을 사는 날에 룻을 아내로 맞아 룻을 위해 기업을 이을 아들을 나아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악하거나 얍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그런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룻기에는 아예 악역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룻기 1장에 등장하는 오르바도 나오미를 등지고 떠났지만,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반면,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헤세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오르바의 행동과 대조되며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오르바는 룻을 두드러지게 하는 배경이 되고 있는 셈이지요. 마찬가지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푸는 헤세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친족의 행동과 대조되며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 친족이 보아스를 두드러지게 하는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가장 빛나는 순간 역시 평범을 뛰어넘는 믿음의 행위를 보일 때입니다. 다들 염려하는 상황에서 담대하고, 다들 화날 만한 상황에서 용서하며, 다들 회피할 만한 상황에서 다른 이를 돕는 순간,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빛이 납니다.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평범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있어서의 평범이란 여전히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골리앗과 싸우기를 싫어할 수 밖에 없는 평범을 뛰어넘었기에 다윗은 위대했습니다. 한 마리의 소로 제사를 드리는 평범을 뛰어 넘어 일천번제를 드렸기에 솔로몬은 위대했습니다. 예고된 생명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는 평범을 뛰어넘었기에 사도 바울은 위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평범을 뛰어넘는 빛나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까?

5. 능력이 안되거든 주도권을 넘기라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아마도 좋은 재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력으로는 룻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보아스에게 양도합니다. 그는 그 증거로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줍니다. 이스라엘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신발을 벗어서 양도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신발이 날인의 역할을 한 셈이지요. 신발을 그러한 용도로 사용했던 이유는 신발이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행위는 자아를 벗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물질에 대한 소유권에서 자신의 자아를 지워버리겠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이제 모든 권리는 그 기업 무를 자의 신발을 받아 든 보아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보아스가 대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상황이 어려울 때에 우리는 뛰기 위하여 신발끈을 동여 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우리의 해결 능력을 넘어설 때에는 우리는 신발을 벗어서 능력이 되는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를 벗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기면 예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우리 주님께서 대신해 주시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능력 밖의 일을 감당해야 하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지금 바로 신발을 벗어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이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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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 (룻 3:7-18)

  • 아름다운 만남

  • 룻 3:7-18

7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6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18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 본문해설

1. 당시의 문화적 배경

보리타작을 마친 보아스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며 즐겁게 먹고 마신 후, 마음이 한껏 즐거워진 채로 타작마당의 곡식 단들 끝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타작마당은 딱딱한 땅바닥에 돌담을 둘러 곡식단이 날아가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산 위의 석회암 반석 위에 만들기도 했고, 보리 추수 한두 달을 앞두고 늦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굴림돌로 다진 땅 위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추수를 한 곡식은 단으로 묶여 타작마당으로 옮겨졌으며, 타작마당에서는 햇빛에 말리기 위해 다시 풀어서 무릎 높이로 다시 펼쳐졌습니다.

당시에는 타작마당의 곡식단 위에서 누워 자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도적들이 곡식을 약탈하는 시기가 주로 이 시기였으므로 주인들은 타작마당에 누워 자며 곡식을 지키곤 했습니다. 타작하는 때는 건기이므로, 비가 올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더운 지방이지만 일교차가 심해 밤공기가 찼으므로 잠을 잘 때에는 몸을 덮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겉옷을 이불처럼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들의 겉옷은 소매가 아예 없거나 매우 짧아서, 입는 것이 아니라 걸친다고 봐야 하는 네모난 천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옷처럼 걸치고 다니다가 잠을 잘 때에는 그것으로 발을 가려 이불처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경우라도 밤이 되면 옷을 돌려 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겉옷이 곧 이불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타작마당의 곡식단 위에서 자신의 겉옷으로 몸을 덮고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보아스를 향한 룻의 돌진?

보아스가 지붕도 없고 문도 없는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에 룻은 보아스의 침소에 아무도 모르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살포시 들고 보아스 발아래에서 그와 직각 방향으로 누웠습니다. 이 행위는 현대 사람들에게는 저돌적인 대쉬나 유혹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엘의 직무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던 방법이었습니다. 야외에서 텐트를 세우고 잠을 잘 때에 종들도 텐트에서 함께 자곤 했는데, 이때 종들은 주인의 발 아래에서 직각으로 누워 잠을 자곤 했습니다. 여종들도 이런 풍습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발치 아래 직각으로 누워 자는 여인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경악할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룻을 심하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3. 당신의 옷자락을 펴 저를 덮으소서

한밤중에 이불 안을 파고 드는 기척에 놀라 잠을 깬 보아스는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룻은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옷자락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날개입니다. 룻은 지금 “당신의 날개를 펴 저를 덮으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날개 아래에 덮는 행위는 완벽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옷자락으로 덮으라는 이야기는 “오늘 같이 자자”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아내로 맞아 보호해달라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룻의 요구는 말씀에 근거를 둔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룻은 “우주 메리 미? 유 슈드!” 하고 있는 셈이지요.

4. 좋은 여자, 룻

보아스는 룻이 젊은 남자를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엘을 찾고 있는 것을 극찬합니다. 그는 룻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룻의 처음 인애는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신 것을 말합니다. 그녀는 그를 통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했고, 정욕과 행복이 아닌 신의와 자비를 선택했습니다. 룻의 나중 인애는 새로운 출발을 자기 욕정이 아닌 하나님의 법 안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택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선택했던 룻의 처음 인애보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는 룻의 나중 인애가 더욱 귀한 것이었습니다.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알고 있는 성읍 사람들의 모든 인식을 넘어서는 현숙함이 룻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5. 좋은 여자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남자, 보아스

1) 사람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눈

고엘의 의무를 지켜 결혼해 달라는 룻의 요청에 반응하는 보아스의 태도는 흠잡을 곳 없이 멋있습니다. 보아스는 한밤중에 자신의 이불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더러운 탐욕으로 더럽히지 않습니다. 또한 이방여인이라 모욕하지도, 음란한 여인이라 지탄하지도 않습니다. 보아스는 오히려 룻에게 복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사람의 겉모양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성읍의 백성들이 모두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알고 있었고, 보아스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보아스의 입장에서는 룻을 얼마든지 가볍게 여길 수 있었지만, 룻의 처지와 상관없이 룻 안에 있는 보석같은 품성을 보아주는 멋진 남성이었습니다.

2) 냉철한 이성과 믿음을 주는 언행

보아스는 또한 충동이나 감정에 의해 섣불리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업무를 자가 맞으나, 그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고엘의 의무를 포기하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보아스는 모든 것을 절차대로 행한 후에 반드시 기업무를 책임을 감당해주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젊고 어린데, 행동 하나 하나에 흠이 잡을 것이 없습니다. 청년부 얼굴에 권사님 마인드를 가졌으니,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처럼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여인이 자신의 발치 밑에 들어와 있지만 보아스는 철저히 원칙을 지키며 함부로 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목석처럼 사람을 답답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룻의 청혼에 정확한 자신의 태도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를 함으로써 완전한 신뢰와 안도감을 주고 있습니다.

3)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발치 밑에서 그와 직각으로 누워 잠을 자게 합니다. 밤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이 새벽 일찍 일어나게 했습니다. 아무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남자와 함께 밤을 지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경우,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룻을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이란 명예로운 이름은 몇 시간 안에 음란한 여인이란 오명으로 바뀌게 되겠지요. 사람의 평가란 바람 같은 것입니다. 오늘의 칭찬이 내일은 모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보아스는 그런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룻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4) 넉넉한 인심

룻을 향한 보아스의 사랑과 배려는 보아스가 룻에게 준 보리의 양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룻과 아무일 없는 하룻밤을 보낸 보아스는 룻에게 겉옷을 펴라고 말합니다. 펼쳐진 룻의 겉옷 위에 보아스는 여섯 됫박의 보리를 퍼서 담아줍니다. 정확히는 6세아를 준 것인데, 이는 2장에서 룻이 하루종일 수확한 보리의 양보다 2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여인 혼자서 나르기 힘든 무거운 양이었으므로, 룻은 그것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넘치게 주는 넉넉함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5) 사람을 꼼꼼히 챙기는 섬세함

여섯 세아의 보리에 담긴 마음은 룻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늙은 나오미를 향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보리를 주면서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17절)라고 말을 해줍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룻이 거저 받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까봐 해주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고, 진심으로 나오미를 챙기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늘 넉넉하게 베풀줄 알면서도 사람의 감정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6) 일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는 성실함

나오미는 보아스에게서 돌아온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보아스에 대한 나오미의 신뢰는 대단합니다. 그저 앉아서 잠잠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보아스가 다 해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일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는 사람입니다. 룻은 자신의 할 일을 다했고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보아스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오빠만 믿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신뢰할 만한 남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

오늘 말씀을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1. 나는 룻과 같은 여인인가? 나는 보아스와 같은 남자인가? 룻과 보아스가 이루는 가정은 어떠한 모습일까? 우리 가정은 그러한 모습을 가졌는가?

2. 다시 위로 올라가셔서 보아스를 예수님으로, 룻을 성도로 바꾸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룻인 성도가 어떠한 품성을 가져야 할지를 묵상해 보시고, 또한 보아스로 그려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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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아 나서라 (룻 3:1-6)

* 희망을 찾아 나서라

* 룻 3:1-6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룻은 보리추수와 밀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곧바로 이삭을 줍기 시작했으므로 적어도 3개월 이상의 시간을 쉼없이 이삭을 주우러 들에 나갔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을 아침 일찍 나가서 해질 무렵에 들어오는 며느리의 모습을 나오미는 안타깝게 지켜 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고생을 하며 지내는 룻의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기도 했을 것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음에도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감사와 미안함의 감정이 겹쳐 눈물을 훔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룻이 이삭을 주워 생계를 책임지는 3개월의 시간동안, 나오미의 머릿 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룻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본문 1절에는 룻을 향한 나오미의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 사랑때문에 나오미의 눈에는 길이 보였습니다. 사랑하면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길은 바로 보아스였습니다. 나오미는 줄곧 자신과 룻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아스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모습과 행동으로 보았을 때, 보아스야말로 룻에게 위로와 안식과 풍요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 것이지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고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품으면 모든 관심사가 온통 그의 길을 열어주는 일에 집중되게 됩니다. 누군가를 부모의 마음으로 아끼고 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를 위해 찾고 또 찾아 길을 제시해줘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수도 없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홀로 서는 단계인 청년의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부모의 단계로 성숙을 해야 합니다.

2. 말씀과 섭리 안에서 길을 찾으라

룻의 길을 찾기 위해 나오미가 붙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였습니다. 나오미는 10년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무시하고 모압으로 갔다가 모든 것을 잃은 채 돌아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는 과정에서 룻을 얻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룻기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룻기의 배경인 사사시대는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려다 폭망한 시대였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러한 암울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이어지는 룻기에서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는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바로 보아스를 만나 다윗의 조상이 되는 룻의 이야기에서 찾아집니다. 다윗은 암울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 사람이었기 때문에 룻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오미 자체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에게 룻은 소망이 되어 주었던 것이지요. 실패와 고통 속에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과 섭리 안에서 길을 찾으려는 나오미는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나오미가 붙든 말씀은 바로 ‘기업 무를 자’, 고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 고엘제도야말로 구원과 안식을 줄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또한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보아스는 사실 고엘제도에서 말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 아니었습니다. 고엘제도를 붙들려면 가장 가까운 친족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 열린 길은 그 다음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였습니다. 고엘의 자격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에게 있어 보아스는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왜 하필 보리추수 때에 맞추어서 베들레헴에 도착했을까요? 왜 하필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을까요? 왜 하필 그 시점에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밭으로 찾아왔을까요? 왜 하필 보아스는 룻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일까요? 왜 보아스는 그렇게 룻에게 자상하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멋진 보아스가 고엘의 의무를 가진 친족이었던 것일까요?

나오미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비춰졌을 것이고, 따라서 보아스는 룻의 “아모르파티”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기업무를 자’에 대한 말씀과 함께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3. 희망을 찾아 나서라

추수는 끝이 나고 이제는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타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타작이 끝나면 룻이 보아스를 만날 일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다음 추수 때까지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지요. 또한 보리를 타작하는 날은 잔치로 마쳐졌기 때문에 룻이 보아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 접근할 초특급 첩보작전을 일러 줍니다. 그것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보아스 몰래 접근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보아스의 숙소로 잠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미리 알아채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없습니다. 타작마당은 보아스의 집에서는 먼 곳에 있었을 것이므로 보아스가 어디에서 잠을 자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요즘처럼 호텔방을 미리 예약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지켜보고 있다가 보아스가 들어가는 숙소로 몰래 따라 들어가는 방법을 써야 했던 것이지요. 보아스가 들어가 누우면 보아스가 덮은 이불의 발치부분을 들고 살포시 거기에 눕는다는 것이 나오미가 룻에게 일러준 작전의 결말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보아스가 결정하고 진행할 일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비로운 사람이라 고엘의 의무를 수행해달라는 룻의 청을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을 것입니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망측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당시의 문화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커리어 우먼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과부가 된 한 여인의 안식은 새로운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있어 결혼은 곧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자주 무덤이요, 멍에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결혼은 안식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첫번째 인간 조직입니다. 그 안에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 받으며,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안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로 인해 일그러져 버렸기에 결혼이 더이상 안식이 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당시를 살던 여인에게 있어서 결혼은 곧 경제요, 안전이며, 미래요, 유업에 대한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업무를 자’에 대한 규례와 ‘계대결혼’이라는 현대로서는 이상해 보이는 법들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인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그 안식을 얻을 기회가 눈 앞에 펼쳐졌고, 나오미는 그 기회를 취했던 것입니다.

소망은 적극적으로 찾는 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바로 지금 찾는 것입니다. 은혜를 미루는 자는 은혜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찾는 자의 것이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구해야 하고, 두드려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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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반응하기 (룻 2:17-23)

* 은혜에 반응하기

* 룻 2:17-23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오직 은혜로

룻이 밭에 나가 모은 이삭은 한 에바나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0리터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 먹는 양이 3리터 정도 된다고 가정했을 때, 나오미와 룻 두 사람이 5일 동안 먹을 양을 단 하루에 모은 것입니다. 이는 보아스가 베풀어준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열심히 주우려 해도 줍기를 허락하지 않으면 주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체력이 남아 돌아도 주울 이삭이 많지 않으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것과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룻은 성도를 예표합니다. 보아스가 동행해야 룻에게 보리 한 에바가 생겼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셔야 성도에게 열매가 넘치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뜻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룻의 뜻은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행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10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10배의 수확이 있어야 두 사람이 나누어도 5배가 되는 것입니다. 풍족한 은혜가 있어야 풍족히 나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부지런히 일하고 싶어도 일감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팔고 싶어도 고객이 없고, 일자리를 찾고 싶어도 불러 주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이 결코 인간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체감하는 시기를 우리는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존재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해와 비와 공기와 발딛고 살아가는 땅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마치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건방들을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한 자가 걷는 길은 결국 파멸일 뿐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2. 은혜를 받으라

룻은 밭에 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보아스가 베푼 은혜로 인해 이삭을 마음껏 주울 수 있게 된데에다가 일부러 이삭을 뽑아서 버려두는 배려까지 있었기에 룻은 신나게 이삭을 모았습니다. 모아 놓고 나니 양이 많아 집에까지 가져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그 자리에서 타작까지 마무리를 짓습니다. 타작을 하고 나니, 보리가 한 에바나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부어준 은혜가 아니었다면 룻은 결코 한 에바나 되는 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아스가 은혜를 베풀었다 할지라도 룻의 성실함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결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에 성실함으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은혜는 베풀어질 때 취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보리가 굴러 들어오는 것 아닙니다. 보아스의 은혜는 밭에 흐트러져 있었고 룻은 그 은혜를 성실함으로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모든 곳에 흐르고 있지만, 은혜를 취하지 않으면 그 은혜는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은혜는 적극적으로 열망하고 추구하며 찾고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은혜를 나누라

보아스는 이삭을 줍는 룻을 불러서 먹을 것을 제공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나오미를 위해 싸갔습니다. 그런데 과연 룻은 자신이 먹고 남은 것을 가져간 것일까요, 애초에 나오미를 염두에 두고 음식을 많이 받았을까요?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어차피 풍성했습니다. 일정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먹을 만큼 받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음식을 받을 때에 자신이 먹을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받았던 것입니다. 나오미를 염두에 두고 나오미 몫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속성입니다. 은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이웃에게 나누어줄 몫까지 챙겨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어줄 사람을 염두에 두고 더욱 풍족히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결코 인색하지도 쪼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그릇이 작을 뿐이고, 우리 그릇에 뚜껑을 닫아 버릴 뿐입니다. 우리는 그릇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많이 받아야 많이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릇에 뚜껑을 닫아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나누지 않고 뚜껑을 닫아버리면 은혜는 멈추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나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흘려 보내지 않습니다. 뚜껑이 닫힌 그릇에는 은혜를 부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담을 그릇에는 뚜껑이 있으면 안됩니다. 붓고 또 받고, 붓고 또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무제한이기 때문입니다.

4. 은혜임을 깨달으라

나오미는 룻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남겨갈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나오미는 그것이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메, 이것이 웬 떡이여?”하고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보여 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줍기를 통해 그렇게 많은 양을 모을 수 없음을 나오미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보리가 룻의 성실함 뿐만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누구 밭에서 일을 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녀는 아예 룻을 ‘돌본 자가 누구인지’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은혜가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는 눈을 가졌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두신 이 세상이 일반은혜로 주어졌음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 성경과 인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이 특별은혜로 주어졌음을 알지 못합니다. 깨닫지를 못하니 은혜가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더 큰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은혜로 주어진 이 세상 하나 하나에서 은혜의 흔적들을 깨달을 수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다음 수준의 은혜도 더 풍성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법을 습득해야 합니다.

5. 은혜에 감사하라

룻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보아스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보아스를 위해 복을 빌어줍니다. 나오미는 은혜를 그냥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형편이 안되니 은혜에 대한 보답의 몫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우리는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은혜를 받고 신세를 져야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은혜를 갚을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그 때에 쓰라고 주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 찬스’입니다. 은혜 갚는 역할을 하나님께 넘겨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을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보다 더 크게 갚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늘 보상이 따릅니다. 누군지를 반드시 알아서 감사를 빌고자 했던 나오미에게도 보상이 따랐습니다. 그 보상은 바로 보아스의 발견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룻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룻이 자신의 집안 사람인 나오미에게 잘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나오미를 각별히 생각했던 것은 나오미가 혈족인 엘리멜렉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은 죽은 사람이지만 보아스의 혈족이었기에,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관련된 룻과 나오미를 챙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오미는 보아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한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동안 나오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고엘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룻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게 해주고, 그에 합당한 유산을 물려줄 권리와 의무를 갖춘 사람이 있었음을 나오미는 감사의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지요. 물론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나오미의 감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은혜 안에 머물라

룻은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만 머물며 이삭을 주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나오미에게 해줍니다. 홀로 된 여인이 이삭을 주으러 다니는 일이 모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은혜에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룻을 사랑했던 나오미는 룻의 안전을 위해 다른 밭에 나가지 않고 보아스의 여종들과 함께 나가는 것이 좋다고 동의를 합니다. 이에 룻은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붙어 다니며,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과 함께 붙어 다녔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성도들과 함께 붙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공동체를 떠나면 은혜 밖으로 나가게 될 확률도,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그만큼 커집니다. 세상과 은혜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룻이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영혼들의 추수가 마쳐지는 그날까지 영혼들을 추수하며 하나님의 밭에 머물러야 합니다.

결국 룻이 보아스의 신부가 되었던 것처럼, 교회도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가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룻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걸었지만, 우리는 모든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룻보다 더욱 신실하게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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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의 헤세드 (룻 2:8-16)

* 룻을 향한 보아스의 헤세드

* 룻 2:8-16

8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오늘 본문에는 룻에게 쏟아 부어지는 보아스의 헤세드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내며 여러가지 은혜를 베풉니다. 보아스가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보아스는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으로 보입니다 . 나중에 보아스는 스스로 자신이 나이가 많은 사람임을 밝힙니다. 보아스는 나이를 매우 잘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풍부한 인생의 경험으로 룻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룻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헤세드는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헤세드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고 있는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이웃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내 울타리 안에 머물라

보아스가 룻을 위해 배푼 첫 번째 헤세드는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일은 여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밭 저 밭을 돌아다니며 이삭을 주어야 했기에 어느 밭에서 어느 악한 사람을 만나 어떤 천대나 상처를 입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안전을 보장하는 울타리를 제공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우라고 한 것입니다.

밭에서 추수를 하는 사람들은 젊고 혈기왕성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밭의 주인은 그들의 인성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그래야 할 의무도 없었지요. 이삭을 줍는 것은 주로 남편을 잃어 가난해진 여인들이 하는 일이었으므로 우선 남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을 멋진 노인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밭을 떠나지 말고 자신의 여종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을 해줍니다. 룻이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틈 속에 머물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지요.

혹시라도 룻이 다른 밭으로 갈 일을 방지하기 위해 추수를 하는 청년들을 따라 다니라고 말을 해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밭은 경계가 뚜렷하게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쟁기질 한 땅끝에 쟁기질 하지 않은 부분이 곧 밭의 경계선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지 중에 다른 사람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될 확률이 높았지요. 그렇게 되면 보아스는 룻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리는 청년들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부리는 청년들도 짐승이긴 마찬가지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합니다.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모든 청년들에게 미리 말을 해 둔 것이지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역시 우리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한 자들의 손에서 놀아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밭과 세상 밭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명백히 분리된 환경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잘 쫓아가야 하며, 또한 말씀의 일꾼들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룻이 보아스의 추수꾼들을 따라가야 보아스의 경계 밖에 있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듯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필수 덕목입니다.

2. 내 물을 마시라

이삭을 줍는 일이 힘들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갈증이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을 맞으며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목이 마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청년들은 자신들이 추수를 하면서 목이 마를 때에 마시기 위한 물을 길어다 놓습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허락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배려로 인해 주어지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유롭게 목을 축이며 이삭을 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일꾼들에게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게 해달라고 조치를 취해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을 성령의 생명수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생수를 마실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갈망을 해갈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목마름 가운데 주님께로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내 샘에서 목을 축이라” 말씀해주시며 물을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물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목말라 있습니다. 사랑에, 위로에, 평화에 목말라 있으며, 또한 많은 인생의 뙤약볕들로 인해 목마름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영적, 육적 생수를 제공해야 합니다.

3. 나는 너의 가치를 안다.

이삭을 줍고 있던 룻은 밭의 주인이 찾아와 말도 걸어주고 또 자비를 베풀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극단적으로 낮추고 상대를 하늘처럼 높이는 행위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고 돌보는지를 묻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는 것을 그녀는 알았던 것이지요. 사실 룻은 이방여인이었기에 더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룻의 가치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의 눈에 비춰진 룻은 반드시 보호를 받아야 할 보석같은 존재였습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그것도 자신을 개처럼 여기는 사람들 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희생이었고, 보아스는 그 가치를 알아주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위를 너무 귀하게 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갚아 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기도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룻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자기가 먼저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 보아스의 기도는 이미 보아스 자신을 통해 응답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룻처럼 하나님 밖에 있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며, 입만 열면 악을 말하고, 발을 떼면 악을 행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존귀한 자로 여겨 주셨습니다. 먼지 같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버릴 정도로 우리를 소중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가치를 알아줄 때에 그 누구도 룻을 범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 안에서 가치가 인정된 자들이기에 그 누구도 우리를 가치없다 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가치없다 여기는 것은 마귀가 주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보배처럼 존귀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이웃들이 그러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존귀합니다. 함부로 막 대해도 괜찮은 존재란 없습니다. 아끼고 위하고 보듬고 쓰다듬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역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존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면, 스스로 그 기도의 응답이 되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를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원하는 것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손을 통해 세상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 사람의 기도 응답이 되어줘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기도의 응답이 된다라고 하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겠지만, 보아스를 통해서 충분히 나타내진 것이기도 합니다.

4. 내 안에서 기뻐하라

보아스의 배려에 룻은 보아스에게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더 많은 은혜를 달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준 그 은혜를 감사하며 받겠다는 것입니다. 룻은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 중 한명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자신을 낮춥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와 인정하는 말은 룻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육체적인 보호를 제공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위로와 기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우리를 쳐다봐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존귀히 여기시고 우리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모두가 우리를 멸시하고 천대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롭게 여기시고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았기에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에게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내 상에서 배를 불리라

식사할 시간이 되자 보아스는 룻을 식사하는 곳으로 불렀습니다. 룻은 추수꾼들 옆에서 보아스가 제공하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며, 심지어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한 음식까지 남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으며,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7광주리를 남기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단지 먹을 것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식사와 교제에는 늘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세상을 향하여 발산되어져야 합니다.

6. 내 안에서 풍요를 누리라

식사를 마친 룻은 다시 이삭을 줍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일꾼들에게 명하여 룻이 곡식 단들 사이에 떨어진 이삭을 마음껏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 합니다. 또한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서 버리라고 까지 명령을 합니다. 룻이 땀흘리지 않은 게으른 빵을 먹지 않게 하고, 풍족한 빵을 먹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하려는 특급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예수님은 넉넉한 분이십니다. 필요를 채우실 뿐 아니라,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안에는 풍요와 충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특별한 기적으로 먹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수고하고 땀흘려 성실히 일한 손으로 먹기를 원하십니다. 요행을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보고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난데 없는 돈벼락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근거없이 돈벼락을 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마에 흘린 땀으로 얻는 빵이 값진 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풍요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주면서도, 그들이 얻어 먹는다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들 스스로 땀흘려 취할 수 있도록 또한 배려해야 합니다. 값없이 얻은 빵은 한 끼 배를 채우고 끝나지만, 땀흘려 얻은 빵은 자존감의 허기를 채웁니다. 한끼를 제공하는 것은 끊임없는 공급을 요구하지만, 스스로 빵을 얻을 힘을 주는 것은 그들 스스로 공급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자에게 주는 자일 뿐 아니라, 그들 역시 주는 자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아스의 헤세드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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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먹구름에 생긴 틈 (룻 2:1-7) 

* 절망의 먹구름에 생긴 틈

* 룻 2:1-7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 본문해설 및 적용

1. 친족이라는 단어의 중요성

오늘 본문은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친족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고엘이라는 당시의 제도 때문입니다. 룻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엘제도’라는 당시의 문화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고엘’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무르다’, ‘되찾다’, ‘구속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가알'에서 유래했으며, ‘보상할 자’, ‘회복할 자’, ‘구속할 자’, ‘보복할 자’ 등의 뜻을 갖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근족, 기업 무를 자, 보수자 등으로 번역이 되었지요. 즉 '고엘'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해주거나 억울함을 갚아줄 의무와 권리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고엘의 개념이 나중에는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지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고엘은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갖으며, 그것은 정확히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고엘 제도의 세부적인 법과 원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기업 무르는 법

친족이 가난하여 땅을 팔았을 경우, 고엘은 땅값을 물어주고 그 땅을 다시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또 친족이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 갔을 경우에도 고엘은 그 몸값을 물어주고 그 사람을 자유케 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2) 계대혼인법

친족이 아들이 없이 죽어 대를 잇지 못하게 될 경우 고엘은 미망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합니다. 맏아들이 죽으면 차남이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동생이 없을 경우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의무를 이행하는 법입니다.

3) 동해보복법

동해보복법이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법입니다. 친족이 피살되었을 때 고엘은 동해보복법에 의해 살인자를 죽여 원한을 갚아 주는 의무를 갖습니다. 물론 이 권리는 합법적인 재판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허락되었습니다.

고엘의 역할을 감당하는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혈연적으로 연결이 된 친족이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 고엘의 의무와 권리를 갖지만, 만약 이행할 수 없게 되면 그 다음 가까운 친족이 우선권을 갖습니다. 둘째, 본인이 스스로 고엘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을 경우 다음 친족에게 그 의무와 권리를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고엘로서의 역할을 할 능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기업을 무르고 싶어도 경제적인 상황이 허락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2. 희망의 빛, 보아스

나오미는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하는 소망없는 상황에서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려고 시도를 합니다. 이유는 자신을 따라올 경우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에게는 아들들이 없었으므로 룻과 오르바를 위한 고엘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 현실적인 설명에 오르바는 눈물을 머금고 나오미에게서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사랑했기에 나오미가 가진 절망을 함께 짊어지기로 결정을 하고 베들레헴까지 동행을 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삶은 소망이라는 빛을 절망이라는 먹구름이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2장에 오면서 절망의 먹구름에 틈이 갈라지는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아스의 등장입니다. 고엘이 나타난 것이지요. 이는 절망을 통해 일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이제는 소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전환되는 시발점으로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란 이름의 뜻은 ‘능력, 유력자’ 입니다. 본문 1절은 보아스를 소개하면서 이름 뜻 그대로 ‘유력한 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보아스는 유다지파의 족장인 나손의 손자였고, 살몬과 라합의 아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금수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이었던 엘리멜렉 역시 부유한 사람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풍족했을 나오미가 현재의 궁핍함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의 크기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할 것입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나오미는 기쁨, 마라는 슬픔, 룻은 동행, 보아스는 하나님의 능력을 각각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룻 앞에 나타난 보아스의 이미지는 기쁨을 잃고 슬픔이 되어버린 자(마라가 된 나오미)와 동행하는 은혜를 베푼 자(룻) 앞에 하나님의 능력(보아스)이 나타난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은 훗날 솔로몬 성전을 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에 부여된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받치는 두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와 야긴이었습니다. 야긴의 뜻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둘을 합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을 갖는 것이지요.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세우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훗날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훼파했을 때, 그는 성전의 두 기둥을 뽑아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립니다.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 살려고 했던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세우심’이란 두 기둥이 뽑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절망의 먹구름이 소망의 빛을 전적으로 가렸을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 즉 보아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하는 모든 영적인 룻에게 하나님의 능력인 보아스를 허락하십니다. 짧은 한절로 표현된 보아스의 등장은 바로 그러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룻

룻의 이름은 동행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룻은 절망을 맞은 나오미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속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의 눈길을 사로잡은 룻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1) 겸손함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추수를 할 때에 땅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밭에 떨어진 이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고 밭에 떨어진 것을 주워 가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난하여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먹는 사람임을 공식화하는 수치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가난할 때에 굽히는 것보다 굶는 길을 택합니다. 더구나 나오미는 룻에게 들판에 나가서 이삭을 주워오라고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 룻은 자기 스스로 들판에 나가 이삭을 주워 올 것을 자청합니다.

또한 이삭을 줍는 룻의 태도 역시 매우 낮은 자세입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것을 은혜를 입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허락된 이삭을 그저 권리로만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룻은 이삭을 줍기 전 이삭을 주워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얻습니다. 추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삭을 줍느라 걸리적거리는 무례함을 범하는 대신 추수하는 사람들의 뒤를 쫓아가며 떨어진 이삭을 줍겠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며,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람입니다. 이삭은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는 자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를 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 낮은 태도가 아닌 당연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도움은 필요한데,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낮은 자세로 도움을 요청하기 보다는 맡겨 놓은 것처럼 요청을 하곤 합니다. 이런 자세는 사실 높아진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마음이 낮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 성실함

룻이 지닌 또 하나의 치명적인 매력은 그녀의 성실함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침부터 와서 잠시 쉰 후에는 이삭 줍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몫까지 모아야 하기 때문이고, 할 수만 있다면 하루 먹을 것 이상을 모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룻은 게으른 자의 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자기 손으로 자기가 준비한 빵을 먹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매사에 성실합니다. 종교적인 활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게으름은 크리스쳔의 직업윤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전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해야 하는 자입니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자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람, 보아스

보아스는 유력한 자로 소개되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보아스의 속성을 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그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일꾼들 역시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복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납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등장하게 될 보아스의 모습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는 그의 일꾼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처음보는 얼굴임을 금방 알아채고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한 가난한 여인에게 한 지파의 족장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흔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가득찬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만남이었습니다. 성도의 만남은 바로 이런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있으면 그 만남은 아름다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

룻은 이삭을 줍기 위해 추수꾼들을 따라 다니다가 우연히 엘리멜랙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그곳에 보아스가 자기 밭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히’와 ‘마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그 정확한 시간에 보아스가 등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룻과 보아스의 관점에서는 우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보아스와 룻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나오고, 인류의 왕이 될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비된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 섭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범죄를 하여 그 땅에 흉년이 오는 과정에도, 엘리멜렉이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을 떠나는 범죄를 하는 과정에도, 말론이 율법을 어기고 모압여인을 가정으로 들이는 과정에도,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과정에도, 룻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사랑과 도리를 지키는 과정에도, 보아스와 룻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지속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섭리를 결코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시며, 세밀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 속의 가장 아름다운 주인공은 오르바가 아닌 룻의 몫이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태도와 결단과 결정과 행동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톱니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깊고도 높은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담대함을 가지면서도, 겸손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연처럼 살되, 필연을 고대하는 삶,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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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쓰다고 느껴질 때 (룻 1:18-22)

* 인생이 쓰다고 느껴질 때

* 룻 1:18-22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사랑은 결단을 요구한다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얻은 모압 며느리들을 자기 어머니 집으로 돌려 보내기 원했습니다. 젊은 며느리들이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가기 위해 포기해야 할 달콤함과 견뎌야 할 씁쓸함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돌려 보내기로 결단했습니다. 사랑은 늘 결단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쓴 맛을 덜어줄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게 단 맛을 줄 것들에 대해 포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와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현실적인 설명에 설득이 되었고 목을 놓아 운 다음 나오미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였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사랑했고 그녀를 안타까워 했습니다.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늙은 시모가 안타까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를 향한 오르바의 사랑은 인생의 달콤함을 버리고 씁쓸함을 감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반면 룻은 나오미와 헤어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룻을 설득해서 친정으로 돌려 보내려던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결단하는 것이고 결단은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 좋은 것들을 포기하고 나쁜 것들을 감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좋은 어떤 것보다 나오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쁜 것이라도 감수할 만큼 나오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 단 것을 버리고 쓴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달콤한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고 쓰디 쓴 십자가를 취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치를 두고 애정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정도까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단없이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은 사실 공허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단하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주님 사랑해요”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쳐서 주님을 위해 단 것을 포기하고 쓴 것을 취하는 결단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결단은 닫음과 마침입니다. 룻의 결단은 나오미의 입을 닫았고, 둘 사이의 논쟁을 끝냈습니다. 룻의 결단은 나오미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유혹의 문을 닫았고, 자기 내면의 욕심을 끝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단이 없는 신앙은 문을 절반 쯤 열어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활짝 열어둔 것 보다 나아보이지만, 도둑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문을 닫을 뿐 아니라 아예 잠궈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결단이 있는 신앙은 마귀가 들어올 문을 닫고 잠궈 버리는 힘을 갖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함께 걷기로 결정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그 어떠한 반대와 우려의 소리도 모두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결단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기꺼이 단 맛을 포기하고 쓴 맛을 감당하겠다는 결단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 어떤 십자가를 감수하고 있습니까?

2. 돌이킴은 굴욕을 감수한다

모압을 떠난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을 맞아주는 것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였습니다. 19절은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마자 온 성읍이 그들로 인해 떠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여자들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 성경에 의하면 20절의 ‘그들’은 여성 인칭 대명사입니다. 여인들이 떠드는 말은 “이이가 나오미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떠들어 댔던 것일까요?

본문은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갔다고 한 문장으로 적고 있지만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50마일 이상을 걸어야 했고, 아르논강과 요단강이란 두 개의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산을 넘어야 했고 골짜기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의 행색은 남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고작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남편 엘리멜렉도 없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도 없으며 종도 없습니다. 10년의 세월동안 겪어야 했던 고초로 인해 얼굴은 삭아 버렸고, 기나긴 여행으로 인해 행색도 말이 아닙니다. 숨길 수 없는 가난의 흔적이 그들의 차림새에 묻어 있었겠지요. 거기다가 옆에는 처음 본 젊은 여자 하나가 서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우리가 아는 그 나오미냐?라고 떠들어 댔던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나오미 꼴이 왜 저렇게 됐대?” 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심으로, 어떤 사람은 흥미거리로, 또 어떤 사람은 가십거리로 떠들어 댔겠지요.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어떤 아줌마들은 나오미에게 직접 다가와 이 꼴이 뭐냐는 둥, 남편과 애들은 어찌 됐냐는 둥, 저 가련해 보이는 젊은 처자는 누구냐는 둥, 나오미의 감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떠들어 댔을 것이고, 또 어떤 아줌마들은 자기들끼리 그러나 사실은 다 들리게 나오미와 룻에 대해 쑥덕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선명하게 보일 때에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 미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아줌마들은 그것을 알리가 없지요. 현대에도 사람들은 사람이 느낄 감정을 잘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이킨다는 것은 늘 따가운 시선과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회복하려 하면 가장 도전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신경을 쓰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슬픔도 감당해야 했던 고초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눈물과 한숨이 그저 식탁 위의 밥 반찬거리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이고 그것이 사람의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 알고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겠노라 결단하는 순간, 나오미가 감내해야 할 처음 목록은 아마도 동네 아낙네들의 시선과 입놀림의 필살기를 감수해내는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입놀림 따위는 우리 인생에 그 어떠한 영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에 너무 무게를 두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의 시선에 더 많은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시선이 고정되어 버리면 사람들이 입을 터는 것 따위는 콧방귀를 낄 수 있게 됩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서면 되는 것입니다.

3. 회복의 출발점은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떠들어 대는 아낙네들에게 나오미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모두 오픈합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오미”가 아닌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 단맛’의 뜻이고, ‘마라’는 ‘슬픔, 쓴맛’의 뜻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에는 기쁨과 단맛을 품고 나갔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많은 재산을 가지고 떠났지요. 그러나 10년 후, 그녀가 돌아올 때에는 슬픔과 쓴맛을 달고 들어왔습니다. 남편도 아들도 재산도 모두 잃고, 빈털털이가 되어 늙은 육신을 끌고 돌아왔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슬픔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리우길 바랍니다. 이것은 사실 조롱 당하기를 스스로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나오미는 전능자가 자신을 심히 괴롭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징벌이었음을 쿨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오미의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이 털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징계를 받고도 그것이 징계인 줄을 모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연단을 주셔서 그 자녀가 하나님의 온전한 품성을 가진 자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전능자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다이’입니다. 이 말은 모든 만물과 모든 능력을 가졌다는 말을 함께 내포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시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나오미는 바로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스스로 나오미가 아닌 마라라고 불리우기를 자처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실패하여 마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쓴 맛을 내는 그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지요. 예전에 우리를 알던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쑥덕댈 수 있습니다. “어쩌다 저리 되었대?”, “잘난 척 설치더니 꼴 좋네”, “불쌍해 죽겠네”, “쫄딱 망했네 망했어” 등 온갖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평가들이 귓전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아닌 마라가 된 그 지점에서 쓴 맛을 입에 품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돌멩이라도 움켜 쥐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통과했음을 자랑스럽게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4. 마라를 통과하면 불현듯 나오미가 돌아온다.

본문 22절은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시점을 보리 추수 시작할 때로 기록을 합니다. 이 불필요해보이는 기록을 왜 하고 있을까요? 회복의 전조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2장에서 이어질 보아스와 룻의 운명적인 만남을 전조하기 위해 시기를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보리 추수할 시기’라는 말은 나오미와 룻에게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섭리를 숨겨두고 계시는 의미심장한 시기입니다.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쓴맛이 끝나면 단맛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쓴맛이 끝난다고 반드시 단맛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쓴맛으로 살다가 쓴맛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말은 진리입니다. 믿음으로 마라의 시기를 지나 보낸 사람에게는 반드시 나오미가 회복됩니다. 땅의 쓴맛은 하늘의 단맛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땅의 쓴맛이 올 때에, 단맛을 찾아 땅에서 헤맵니다. 그것이 단맛을 결코 찾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반면 쓴맛을 보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기에 단맛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맛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도, 쓴맛을 감수한 채 살아가기로 결단했어도, 하늘로부터 오는 단맛의 회복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단맛이 하늘로부터 그냥 땅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쓴맛이 임했을 때에 하늘을 보십시오.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단맛을 넘치게 얻게 될 것입니다. 할레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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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의 순환 (룻 1:6-18)

* 헤세드의 순환

* 룻기 1:6-18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 본문 해설

1. 돌보심 – 하나님의 헤세드

흉년을 피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찾은 10년의 세월동안,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녀에게 모압은 슬픔과 상실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고향이 몹시도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녀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라는 명칭으로 불리웠습니다. 스불론 지파에도 베들레헴이란 장소가 있었기 때문에 장소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습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이 속한 작은 행정구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란 뜻이고, 에브라다는 “번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번성과 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번성과 빵이 일상인 지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으면 흉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흉년 중에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으면 이내 양식이 생기는 것이지요.

인생의 쓴 맛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사모하기 위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이 쓴 이유는 단맛이 주어지는 하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쓰디 쓴 고통은 우리의 고집스러운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 깨어진 자아의 틈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실 수 있는 공간이 되지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흉년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국 돌보심을 예비한 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나오미에게도 드디어 연단의 시기가 끝나고 하나님이 돌보심의 헤세드가 주어집니다.

2. 돌봄 – 며느리들의 헤세드

나오미에게 있어 모압의 쓴맛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번성과 떡을 더욱 더 목마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에 흉년이 멎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길을 나섭니다. 돌아가는 길을 두 며느리가 함께 합니다. 이미 늙어 버린 나오미에게 있어 두 며느리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의 죽음 이후에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같이 함께 했던 그 자체가 이미 큰 힘이었겠지요. 젊은 두 며느리는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시어머니를 모셨을 뿐 아니라, 생면부지 타국 땅까지 동행하는 인애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늙은 시모를 모시고자 하는 며느리들의 돌봄의 헤세드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3. 돌아봄 – 나오미의 헤세드

룻기는 모든 기독 시어머니들의 로망이 되곤 합니다. 본문 8절에 의하면 며느리들은 이미 죽은 가족들에게도 매우 잘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도 잘하고 시부모에게도 잘하는 며느리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사실 며느리들의 인애는 나오미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따뜻한 어머니요, 경건하고 신실한 신앙인의 모델이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귀향길에 오른 나오미에게 있어 젊고 착한 며느리들의 존재는 큰 도움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 보면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녀들을 축복하여 새로운 남편들을 만나 위로를 받게 해주실 것을 기도해줍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어 그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나오미에게는 며느리들을 데려갈 좋은 구실도 있습니다. 며느리들을 데려가 그녀들로 하여금 이방신의 품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며 참신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룩한 구실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거룩한 구실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11절과 12절에서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며느리들은 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고 딸들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봄의 헤세드가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나오미 앞에서 며느리들은 소리 높여 울며 어머니와 함께 하겠노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 장면 역시 며느리들의 돌봄 이면에 있는 시어머니의 돌아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였기에 남남이나 다름없는 시어머니를 소리높여 울면서까지 돌보고자 할까요? 오르바와 룻은 나오미를 만나기 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오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진 성도는 헤세드의 전파력을 갖습니다. 사랑은 전염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은 옮겨지고 증폭됩니다.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통과하는 과정에 있다 할지라도, 나오미란 이름의 뜻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는 나오미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힘들고 쓰다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쓴 맛을 분출하거나 전가하면 안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4. 동행 – 룻의 헤세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며느리들에게는 아들들이 없었고, 태중에 아이를 임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남자는 곧 유업이었습니다. 아들들이 있으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으며, 그 아들들은 홀어머니에게 남편 역할을 해줄 수가 있습니다. 여인이 홀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현대처럼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남편은 그야말로 밥줄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형사취수’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생계를 책임질 뿐 아니라, 아들을 낳게 해서 유업을 이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유다의 아들 오난은 형이 죽은 후 형수를 아내로 취했지만, 아들을 낳아 유업을 나눠주는 것이 싫어서 몸밖에다 사정을 했다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한 바 있습니다. 본문 12절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늙었으니 남편을 둘 수도 없고, 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다 자라 남편이 될 나이가 되면 며느리들은 호호 할머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남편을 만나 아들을 생산하는 것을 여인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고대 사회에서 룻과 오르바가 남편없이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잃는 것과 같은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현대의 눈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며느리들은 나오미를 떠나는 것이 현명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하면 그 어떠한 소망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이러한 현실 앞에 순응을 했습니다. 나오미를 존경하고 사랑하나 자신의 앞길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오르바의 뜻은 ‘뒷목’입니다. 나오미에게 뒷목을 보이고 돌아선 것이지요. 나오미는 오르바가 돌아간 것을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 (15절)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르바를 ‘목이 곧은 자’로 해석을 했습니다. 현실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는 것이지요. 다소 과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사실 영적으로는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도움과 신의가 필요한 자들에게 뒷목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동행이라는 헤세드가 등장합니다. 바로 룻의 헤세드입니다. 룻은 ‘동행’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오르바가 돌아갔으니 룻도 돌아가라고 설득을 합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끝까지 동행할 것을 고집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를 향한 룻의 결단은 그 어떠한 해설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룻의 말 그 자체로 감동이고 은혜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룻에게 있어서 나오미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집에 시집오면서 남편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얻었고, 좋은 신앙의 롤모델인 나오미를 얻었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신실한 성도가 되어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나오미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결국 룻으로 흘러가 동행의 헤세드를 낳았습니다.

* 적용

1. 하나님의 돌보심을 갈망하라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엄청 노력하여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지만, 노력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노력한 대로 얻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갈망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2. 이웃을 돌보고 돌아보라.

서로를 돌보고 돌아보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의 모습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오르바마저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사람은 돌보고 돌아봐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들 그것을 갈망하되 베푸는 사람들이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목이 마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돌봄과 돌아봄의 헤세드가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른 이들의 돌봄을 기대하지요. 그러니 기대와 목마름은 갈수록 커지기만 하고, 그 목마름은 쉽게 해갈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목마름을 해갈시키는 물줄기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촉발점이 되어 이 세상이 그래도 넉넉하고 살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되라.

누군가는 걷기가 힘겨운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 일어설 힘조차 잃어버린 슬픔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함께 걸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뭔가 큰 것을 줄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큰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태생이 이방 여인이었고,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오는 것마저 금지된 보잘 것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동행은 나오미에게 그 어떠한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옆에 있어 준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동행의 헤세드를 우리에게 베풀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해주는 것을 닮게 됩니다. 누군가의 옆을 지켜준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십자가를 나눠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인 것입니다. 결말을 미리 스포하자면, 룻은 그 동행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금지율을 깨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인 다윗의 조상,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힘겨운 자와 기꺼이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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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찾아올 때 (룻1:1-5)

* 결핍이 찾아올 때

* 룻기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본문 해설 및 적용

1. 결핍이 오는 이유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으로 젖과 꿀이 흘러야만 하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실제로 젖과 꿀이 강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풍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내리기만 하면 그 어느곳보다 초목이 무성해지는 그런 땅입니다. 초목이 풍성해지면 풀을 마음껏 뜯어 먹은 양과 염소들은 많은 젖을 생산하게 될 것이고, 들판에 핀 꽃들로부터 벌들이 대량의 꿀을 생산해낼 것입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된 이미지였습니다. 반면 그 땅은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이 닫히면 대책이 없는 땅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을 바라볼 때에만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땅이었던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떠나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보고 사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왕이 되어, 하나님의 힘이 아닌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멈추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요를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풍요를 생각할 때에 자꾸 땅의 풍요만을 생각합니다. 땅의 기름진 것들이 물론 소중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신령한 것들은 그것들과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풍요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결핍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들에게 결핍이 찾아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성도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결핍이 찾아 옵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결핍을 통해 그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아합 왕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3년 반이나 하늘을 닫으신 바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사울이 기브온 족속을 학살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3년 동안 기근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에 성도는 하나님께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언제라도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범죄한 성도 뿐 아니라, 신실한 성도에게도 얼마든지 결핍이 올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신실하여 하나님과 붙어 있다 할지라도 결핍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신앙의 지경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결핍을 주기도 하십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권선징악, 인과응보 등의 사상 너머에 있는 진리들을 깨닫게 해주시고, 자기 의에 빠지지 않게 하며, 구속자가 땅 위에 선 것을 보게 해주시려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결핍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풍부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결핍 가운데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결핍 가운데에서 성도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여 온 결핍이라면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면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 온 결핍이라면 그것을 통해 땅의 기름진 것 대신, 더욱 귀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얻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2. 결핍이 심화되는 이유

엘리멜렉은 결핍에 대해 잘못 반응하여 더 깊은 결핍으로 빠져든 성도를 그려낸 선명한 이미지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사시대 전체를 그려내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도 가장 신실하고 용맹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결핍이 오자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결핍이 왔을 때에 하나님 안에서 해결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떠난 자식이 신용카드가 끊기자 사채를 빌려 쓴 꼴이라 할까요?

모압은 엘리멜렉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땅이었습니다. 신명기 23:3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그들을 미혹하여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압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이지 말라고 엄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압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모스라는 신을 섬겼는데, 그모스에게 풍요를 위한 제사를 드릴 때에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잔인한 풍습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엘리멜렉에게는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말론의 아내는 룻이었고, 기룐의 아내는 오르바였습니다. 그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한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잘 살아보자고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던 엘리멜랙은 자신 뿐 아니라, 두 아들까지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모압이 풍요를 위해 아들을 태워 죽이는 땅이라는 사실과 풍요를 찾아 모압으로 갔다가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오묘하게 겹쳐지고 있습니다.

결핍 가운데에서 엘리멜렉이 바라봐야 했던 것은 모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결핍을 맞이할 때에 바라봐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성도들이 풍요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치닫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결과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현대판 모압입니다. 세상은 가치가 흐려져 있어서 죄가 죄로 인식되지 않는 곳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가치를 떠나 자꾸 세상과 섞이다 보니 세상에 물들게 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화려해보이고 풍요로워 보이나 그곳은 결코 성도에게 풍요를 줄 수 없는 곳입니다. 결핍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치닫기 때문에,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떠난 10년

이스라엘에 흉년이 온 기간은 10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품을 떠난 10년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집안에는 여자 셋만 남게 되었습니다. 룻기는 엘리멜렉으로 시작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초점은 급격히 나오미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자기 스스로 인생의 왕이 되려는 교만

엘리멜렉은 “하나님이 (엘리) 왕(멜렉)”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핍이라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아닌 모압을 찾았습니다. 모압이라면 흉년이라는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자만했던 것이지요. 흉년이 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풍요만큼은 자기 손으로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인생을 경영하려는 순간이 곧 불행의 시작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멍에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므로 징계가 임하지만, 징계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아시기에 그 평안과 행복 안에 거하게 하시려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자꾸 하나님을 피해 멀리 멀리 달아나려다가 늪에 빠지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2) 영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

엘리멜렉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는 영적인 안목이 가려진 영적 무지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왜 왔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피할 곳이란 그 어느 곳도 없습니다. 결핍이 오면 풍요를 위해 다른 것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더믹의 시대에 많은 성도들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는데에 집중을 합니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운신할 수 없는 상황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의 눈이 가려지면, 어떻게 먹고 살까, 어떻게 건강할까, 어떻게 우울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들만 생각을 합니다. 영적인 장님인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시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우리는 영의 눈을 열어 이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행동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3)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는 혼합주의

엘리멜렉의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께서 섞이지 말라는 모압과 섞이는 것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하나님이 아닌 그모스를 섬기는 땅입니다. 사람은 환경과 문화에 지배를 받습니다. 모압에 살면 모압의 풍습에 물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이나 모압 등의 이방인들과 철저히 구분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혼합주의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데 교회 가는 것 빼고는 세상과 전혀 구별이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돈의 신, 맘몬을 섬기는 곳입니다. 맘몬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치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가치는 결코 섞일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세상과 구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만 성도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구별이 안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가치 절반, 세상의 가치 절반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가치로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돈신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 하고, 하나님께서 물질을 허락하셔도 오직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오직 성공만을 향해 치달으면서,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을 비방하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며, 심지어 짓밟기도 합니다. 세상과 혼합된 성도는 어떤 측면에서 세상보다 추합니다. 자신의 추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덮으려 들기 때문입니다.

4. 지금 결핍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결핍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라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만약 결핍이 우리의 범죄로 인한 징계라는 인식이 든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풍요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를 바라는 회개는 그 자체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틀어진 관계로 인해 애통해 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풍요보다 더 소중한 가치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결핍이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핍가운데에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지는 오직 한 곳, 하나님입니다. 지금 결핍 가운데 있다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영적 교만이며, 영적 무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핍할 때나 풍요로울 때나 돈과 힘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핍할 때나 풍요로울 때나 하나님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핍할 때에 하나님을 구하며 찾아야 합니다. 풍요로울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풍요를 세상으로 흘려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결핍과 풍요에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이 있음과 일시적인 측면과 영원한 측면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풍요를 위해 물질적 결핍을 기쁘게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하며, 영원한 풍요를 위해 일시적인 풍요를 잠시 접어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핍할 때에라도 산처럼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풍요로울 때에라도 결핍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나누는 넉넉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결핍과 풍요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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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를 시작하며 (룻1:1-2)

* 룻기를 시작하며

* 룻기 1:1-2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 본문 해설

1. 룻기의 배경, 사사시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인간의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의 창조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요 왕이시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고자 하는 뜻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인생을 경영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하도록 디자인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려다 망해가는 사람들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사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시고 그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기 위해 제시된 표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자꾸만 하나님을 떠나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델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타락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그들을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끝없이 반복되는 노력이 가장 잘 부각되고 있는 것도 사사기입니다. 사사는 판관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는 대신 판관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두지 않으려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그것에 실패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크게 1) 사사들, 2) 종교적 타락, 3) 도덕적 타락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사사들의 이야기에서는 “망각-범죄-징계-회개-구원”의 악순환의 고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을 범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의 고통 속에서 회개하고 절규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들을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또 다시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범죄에 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사사기 후반으로 가면서는 그나마 악순환의 고리마저도 무너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가 와도 더이상 회개할 줄을 모르게 된 것이지요.

사사들의 이야기에 이어 기록되는 내용은 ‘미가의 신상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종교적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가장 먼저 생겨나는 것이 종교적인 타락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은 반드시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을 떠나버렸으니 삶의 기준과 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사기 마지막은 ‘레위인의 첩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도덕적 타락으로 장식된 것입니다.

2. 효부가 아닌 왕의 조상으로서의 룻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는 이스라엘에 왕정정치가 필요하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이제는 왕이 통치해야 한다는 왕정정치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구절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다윗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룻기는 바로 왕정정치가 요구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룻기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한 훌륭한 며느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의 격동 속에서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잇는 교량으로서 기능하는 시대적 스케일을 가진 책입니다. 룻은 모압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되며, 결국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결국 룻기는 사사시대 이후 왕이 되어 왕정시대를 시작하게 될 다윗을 소개하기 위해 기록이 된 것이지요.

3. 사사시대의 자화상, 엘리멜렉

룻기는 흉년을 피해 다른 민족의 땅으로 이주를 하는 사사시대의 한 인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지형적 특성상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를 잇는 요단강이 해수면 보다 200-400미터 낮았기 때문에 물을 끌어올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신 이유는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임한 것은 백성들이 하늘을 보고 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지표였습니다. 그러므로 흉년이 임할 때에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범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절에는 흉년에 매우 인간적인 반응을 한 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자신이 살던 이스라엘 땅에서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해 흉년을 면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나오미의 뜻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면 기쁨이 온다는 것을 두 부부의 이름을 통해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오자 하나님이 주신 유업을 떠나 모압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땅의 개념은 현대인들의 땅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들에게 있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으로서, 흉년이 왔다고 해서 떠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흉년이 온 시대적 배경 가운데에 살고 있는 한 개인은 시대적 아픔을 부여잡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리고 다른 땅을 찾아가는 인간적인 반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왕’이란 뜻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스스로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엘리멜렉은 바로 사사시대를 그려내는 자화상인 것입니다. 다음 묵상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엘리멜렉이 고향을 떠나 찾아간 모압 땅은 결코 들어가서는 안되는 죄악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듯 엘리멜렉도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열매, 말론과 기룐

엘리멜렉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자”라는 뜻이고, 기룐의 뜻은 “병으로 쇠잔해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맺게 되는 열매는 병약함과 쇠잔함 뿐이라는 영적인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엘리멜렉 일가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복선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결과가 병약함과 쇠잔함이기에 ‘나오미(기쁨)’도 결국 이름의 뜻만 기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의 기쁨이 무너져 버립니다. 동시에 백성의 기쁨 역시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기쁨이 떠난 자리는 순식간에 아픔과 슬픔이 찾아 들게 됩니다.

5. 룻기의 주제, 헤세드

룻기는 매우 칙칙하게 시작하지만 사실 룻기가 주는 메시지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기쁨을 상실해버린 나오미는 결국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기쁨을 회복하게 된 원인은 바로 ‘헤세드’입니다. 우리는 룻기를 알기 위해 반드시 ‘헤세드’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헤세드는 히브리어로서 우리말로는 ‘자비, 사랑, 인자, 인애’ 등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헤세드란 원래 ‘지속적이고, 끝까지 신실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항구적으로 추구하며, 아낌없이 주고, 펑펑 쓰며, 전혀 제한이 없으며, 격렬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긴 뜻을 갖습니다. 헤세드는 단순히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헤세드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부어주는 행동을 수반하는 사랑입니다.

룻기에는 바로 그 헤세드가 주제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인해 그 땅에 흉년이 임하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로 말미암아 결국 다시 풍요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축소판 이미지인 나오미 역시 가지 말아야 할 땅 모압까지 찾아가 쫄딱 망하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기쁨을 회복하게 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에게 헤세드를 베풀며,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풉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결국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였습니다. 그들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정정치를 시작할 다윗이 탄생하며, 그로부터 약 1,000년의 세월이 흘러 그 족보를 타고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롯은 모압여인이었습니다. 추후에 설명되겠지만, 모압은 가증스러운 출생배경과 악한 풍습을 가진 족속이었습니다.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헤세드는 법까지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는 죄인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율법의 정죄를 무너뜨리고, 인류에게 헤세드를 베풀겠다는 하나님의 복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살던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그를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심으로 인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헤세드를 베푸셨습니다. 그 헤세드가 바로 룻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 적용

1. 엘리멜렉답게 살라

우리의 정체성은 엘리멜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엘리멜렉’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자꾸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엘리멜렉’이 아닌 ‘내가멜렉’이 되어 사는 것이지요. 그 열매는 말론과 기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병약하고 쇠잔하여 비실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실 때에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나오미답게 살라

우리의 정체성은 나오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으심과 택하심과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려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순간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기쁨을 얻지 못하며,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벗어 던지고 기쁨을 회복하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키십시오. 그래야 나오미가 나오미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헤세드를 누리라.

우리의 죄악 속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면면히 흐릅니다. 오히려 죄악이 관영한 곳에 하나님의 헤세드는 찬연히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가 흘러 넘쳐도 헤세드는 오직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자들의 것입니다. 헤세드를 거부하는 자는 그것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4. 헤세드를 베풀라.

헤세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헤세드를 받은 백성들에게 헤세드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헤세드와 이웃을 향한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헤세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헤세드이고, 세 번째 헤세드는 우리가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헤세드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끝까지 신실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항구적으로 추구하며, 아낌없이 주고, 펑펑 쓰며, 전혀 제한이 없고 격렬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가 이웃으로 흘러 넘치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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