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편지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디모데전서 4:6

Jesus Glory Jesus Glory

consider | considerate

consider | considerate

·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 5: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헤아려 달라’는 말을 ‘consider’로 번역했습니다.  영어 단어 consider의 어근인 sider는 사실 ‘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에스더라고 하는 이름도 같은 어원이라 별이란 뜻입니다. star, sider, Esther 등에 별이 보이신다면 당신은 꽤 좋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별’이라는 뜻에서 어떻게 ‘헤아린다’는 뜻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요?

원래 Sider는 별이라는 뜻에서 ‘별을 관찰한다’는 뜻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별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살펴 본다는 뜻이 고정되어 버린 것이지요.  접두어 ‘con’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consider는 함께 살펴 본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내 입장에서 함께 살펴 봐주는 것이 헤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형용사 considerate은 ‘배려심 많은, 사려깊은’ 의 뜻을 갖습니다. 함께 상대방의 처지를 살펴준다는 뜻이지요. 히브리서 10: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이 바로 배려입니다.

배려의 한자어 풀이도 재미있습니다. 배는 배포한다 할 때의 배 자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려는 고려한다 할 때의 려 자로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상대방의 생각하는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 배려라는 것이지요. 동서양의 생각이 오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리며 나눠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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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is vs Opportunity

사사기 11장에는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열다’는 뜻입니다. 그의 인생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꽉 막힌 똥수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여셨습니다. 그의 인생을 여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놀랍게도 민족의 위기였습니다.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위험이 곧 입다에게는 길이 열리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지요.

 

위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crisis는 어원적으로 ‘분리되는 지점’이라는 뜻입니다. 어근 cri가 ‘분리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변을 좀 유식한 말로 excrement라고 하는데, 어원적으로는 몸 밖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위험이 전적으로 한 방향성이 아니라 분기점으로서 양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단어는 peril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사실 모험입니다. 위험은 모험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고 하는 말의 조합이라고들 말합니다. 위험은 분명 가슴 쫄리는 일이지만, 그것이 또 다른 길이 되기도 합니다.

 

기회라는 뜻을 갖는 opportunity도 어원적으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근 port는 나른다는 뜻입니다. Port가 항구라는 뜻을 갖게 된 것도 항구가 나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Ford라고 하는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Henry Ford의 성 역시 port가 Ford로 변형된 것입니다. 나른다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르는 자동차를 개발한 것은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Opportunity가 기회라는 뜻을 갖지만, 원 뜻은 ‘항구를 향하여 간다’는 뜻입니다. 배를 타고 나가는 일은 막대한 돈을 벌어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실은 거센 풍랑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위험이 있기도 합니다.

 

위 단어들에서 볼 수 있듯 위험이 기회가 되기도 하고, 기회가 위험이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꽉 막혀 버리기도 하고 위기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면, 위기는 위험이 아닌 기회가 되어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기 앞에 있다면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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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ignment vs Significant

Assignment vs Significant

사사기 10장에는 두 명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돌라와 야일입니다. 각각 23년, 22년 씩 다스렸지만, 두 사람 모두 평화의 시대를 살았기에 그 족적이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록 중에도 두 사람의 기록에 특기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돌라의 경우 잇사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에서 일을 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왕이 되고자 형제 70명을 학살한 아비멜렉의 고향이며, 바알브릿이란 우상을 섬기면서 아비멜렉과 야합했던 세겜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돌라는 아비멜렉의 수치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민족을 구원하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반면, 야일에 대해서는 아들 30명을 가졌고, 어린 나귀 30을 탔으며, 30개의 성읍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다입니다. 잘했다는 것인지 못했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사사로 22년을 살았는데, 고작 기록된 것이 부자로 잘 살다가 가몬(높은 곳)에서 장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맡겨두신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영어로는 assignment이지요. 어근 ‘sign’은 쉽게 예측할 수 있겠지만 ‘표시, 기호, 신호, 싸인’ 등의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as) 싸인된 (sign) 것(ment)이 곧 숙제(assignment)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인생의 숙제를 잘 풀며 사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맡겨진 숙제들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에 표식이 될만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을 significant figure라고 부릅니다. 뭔가 표시가 될만한 것을 남기며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significant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다릅니다. 돌라라는 이름의 뜻은 ‘벌레’입니다. 자식도 없고, 성읍도 없고, 나귀도 없어, 세상에서는 벌레처럼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돌라는 민족을 구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일은 ‘빛을 비추는 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향해서만 조명이 비춰진 삶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야일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풍요만을 쫓는 삶을 살다가 블레셋과 암몬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빛나는 족적을 남기기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께는 전혀 기억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어떠한 발자취를 남기며 인생이란 숙제를 풀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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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식과 주인행세

어떤 공동체건 공동체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되, 주인행세를 버려야 합니다. 주인의식은 공동체를 행복하게 하지만, 주인행세는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운명을 파경으로 몰아넣곤 합니다. 사무엘하 6장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가슴뛰는 과정에서 웃사가 법궤를 잘못 만졌다가 죽임을 당하는 충격스러운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싶어 했을까요? 웃사는 왜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요? 다윗과 웃사의 태도와 행동을 주인의식과 주인행세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 보기 원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실로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호와 풍요와 번성과 승리를 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되자 법궤에 임했던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고, 법궤는 그저 나무 궤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들고 나갔지만 전쟁에서 패했을 뿐 아니라, 법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다곤신전에 전리품으로 갖다 놓았지만, 다곤신상의 머리와 손목이 잘려나가고, 사람들이 질병을 얻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게 되는데, 법궤를 함부로 만졌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법궤는 실로로 가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에 모셔지게 됩니다. 사울 통치기간 40년동안 법궤는 방치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임재에 관심이 없었고 자기 나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지 7년 반만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을 때에,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는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나라를 세우고 싶었고, 백성들을 법궤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결집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영광스러운 과정을 위해 무려 3만의 군대를 결집합니다. 법궤의 이동에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도하는 주체였습니다. 그야말로 주인의식으로 가득찬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의 한켠에는 주인행세가 섞여 있었습니다. 군대 3만을 데리고 자기 나라의 위용을 뽑내는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법궤를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웃사가 법궤를 만져 죽임을 당한 것은 3만 군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다윗이 주인행세를 버리고 100% 주인의식으로만 가득차 있었다면 방지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99%의 주인의식과 1%의 주인행세도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법궤는 약 70년 가량을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에게는 웃사와 아효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수레에 실어 끌고 나왔습니다. 법궤는 수레에 싣고 운반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날라야 했습니다.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것은 이방인들이 이방신들을 운반할 때에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소를 요동케 하셨습니다. 이때 웃사는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다가 즉사하고 맙니다.

 

웃사는 법궤가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었던 70년 동안 자신이 법궤의 주인이 되어가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이동하는 순간에 운반을 주도하는 것은 웃사가 아효이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70년을 보관하였기에 그만 법궤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극은 주인행세가 부른 비극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합니다. 교회의 전통을 지켜온 사람은 연륜을 도구로,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로 교회의 주인행세를 합니다. 부교역자들이나 부서장들은 자기 부서를, 성가대장은 성가대, 쎌장은 쎌을, 찬양팀장은 찬양팀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려고 시도를 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사랑이 주인의식이 될 때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물론 자신에게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행세를 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화를 얻게 됩니다. 주인의식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행위이지만, 주인행세는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몰아내는 반역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인의식으로 일합니까, 주인행세로 일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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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하나님만이 유일한 방법일 수는 없는걸까?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5:1-2).

사무엘하 5장은 이스보셋의 죽음 이후에야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헤브론으로 찾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자신들이 다윗의 골육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에 철저히 다윗을 외면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대세가 다윗에게 기울게 되니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다윗과 골육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또한 사울이 왕일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것이 다윗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요 주권자로 삼으신 것이 다윗이었다 고백합니다. 그들이 진정 그렇게 믿었다면, 그들은 사울의 사망 직후 다윗을 왕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다가 그가 죽고 나니까 비로소 다윗을 찾은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고도 자신들의 수단을 다 도모한 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니 그때에야 하나님을 찾았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정확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기 보다는 항상 우리가 신뢰할만한 어떤 대체물을 찾습니다. 그 대체물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나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으로 모실 사람이 처음부터 다윗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왕으로 모셔야 할 분이 처음부터 하나님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늘 하나님을 대체할 다른 우상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야만 하는 것일까요?

 

헤브론에서 다윗이 왕이 된 때로부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까지 7년 반의 시간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답게 세워져 나가는 숙성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이스라엘이 이스보셋과 다윗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피를 흘려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지 못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는 안으로는 두려움이요 밖으로는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툼은 사실 대적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툼이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 간에 일어나고, 그 다툼이 우리의 삶 안에서의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직후 첫번 째 한 일은 예루살렘을 여부스족으로부터 쟁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난 직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차지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고 하는 뜻을 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의 성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작용을 합니다.

 

다른 대체물들을 찾지 마시고, 하나님을 처음부터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다른 대체물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대체물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그 시점에 우리는 비로소 평화의 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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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약 20년 전에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지은이는 물론 내용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새로운 창작을 해볼까 합니다. 제가 읽었던 동화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제 머릿 속에 남겨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0이라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0은 일생을 같이 할 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0은 일단 동네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친구를 찾아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0이 처음 만난 것은 8과 9였습니다. 그들은 권세와 부귀와 학식을 모두 갖춘 이들이었습니다. 몸에 치렁 치렁 걸친 것이 하도 많아 숫자라고 하는 것을 알아 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0은 8,9에게 친구가 되자고 제안했지만 8,9는 0을 투명숫자 취급했습니다.

 

이어서 0은 동네의 둔덕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5,6,7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8,9 정도는 아니었지만, 5,6,7 역시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5,6,7이 있는 둔덕은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웠기 때문에, 둔덕에 오르느라 갖게 된 영광의 상처들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5,6,7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0의 말에 한바탕 낄낄대며 웃더니,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0을 둔덕 아래로 밀어버렸습니다.

 

0은 미끄러져 내려온 둔덕 아래에서 2,3,4를 만났습니다. 2,3,4는 큰 숫자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흉내를 내느라 천떼기를 칭칭 감아 놓아 숫자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미끄러운 둔덕을 오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미끄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0은 2,3,4에게 친구가 되자고 소리를 질렀지만, 2,3,4는 둔덕을 오르는데에만 신경을 쓰느라  0의 목소리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이 슬퍼진 0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굴 속에는 누더기 옷을 겨우 걸친 채 울고 있는 1이 있었습니다. 1은 한 눈에 봐도 외롭고 처량하기 그지 없었지만, 숫자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숫자이기도 했습니다. 1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0의 말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껏 1을 친구 삼고 싶어하는 숫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과 0은 나란히 손을 잡고 동굴 밖을 나왔습니다.

 

동굴 밖을 나오자 그들은 하늘 위를 날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숫자  10이 되어야만 날아 오를 수  있는 하늘을 1이 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1은 0을 만나 1이 아닌 10이 되었던 것입니다. 0이 숫자들을 찾아 친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싶어서였던 것입니다.

 

새로 창작한 저의 동화 속에서 0은 우리 인생의 한 중심에 찾아온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보기에 볼품 없어 보이지만, 우리를 온전하게 하여 하늘에 오르게 해주실 유일한 존재입니다. 0은 친구인 1이 다른 숫자들을 더하기를 원합니다. 0이 원하는 것은 둔덕의 왕국이 아닌 하늘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날아 오르면 산도 둔덕도 발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하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쳐내며 살아가는 빼기 인생은 하늘 왕국에 합당한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땅을 살아가는 1들이 0을 만나 10을 이루게 해주어야 할 사명을 가졌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10이 된 자의 소명이요, 하늘 왕국을 살아가는 자들의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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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론, 작지만 강한 힘

거실 안으로 침투한 사진 속의 작은 씨는 민들레 홀씨가 아니라, 밀크위드 (milkweed)라는 식물의 씨앗입니다. 밀크위드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식물 안에 우유빛의 유즙이 담겨 있어 벌이나 나비에게 좋은 양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butterfly weed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습니다. 밀크위드의 씨는 또한 깃털보다 가벼워 아직도 미국에서는 베게 속을 채우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바람부는 날이면 모체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을 타고 이동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비가 와도 거센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실내에 들어온 후에는 빗자락질에도 견딜 정도로 강력한 접착력을 자랑합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이지만, 한번 어딘가에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지요. 작지만 강한 친화력 그것이 바로 밀크위드의 생명력이 됩니다. 친화력이 없다면 뿌리를 내리는 동안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겠지요.

 

친화력은 밀크위드 뿐 아니라 모든 약한 자의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센 척, 있는 척 해도 결국 늙고 병들고 사라질 에노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또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헤브론으로 이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았지만, 사울이 죽었다고 하여 바로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부었다는 사실은 다윗은 가족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 다음의 왕으로 기름부으심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글락에 있던 다윗은 사울의 사망 직후 어디로 갈 지를 하나님께 여쭸고, 하나님께서는 헤브론으로 가라 지시하셨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로부터 다시 한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신 것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성경이 침묵하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정황을 통해 그 이유를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600명의 용사와 그 가족들이 있었고, 사울 직후 다윗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헤브론은 산지로서 다윗이 왕국을 세워 나갈 요새로 적절하였습니다. 헤브론은 또한 유다의 수도같은 곳이었기에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정치 행정의 중심지로 삼기에도 적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브론은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한 후 둥지를 튼 곳이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의 뜻은 친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친구’라는 별호를 얻습니다. 모세의 가나안 정탐꾼 중 한 명이었던 청년 갈렙은 40년 후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치며 헤브론을 갈망한 이유도 그러한 역사적 의의 때문이었습니다.

 

헤브론은 친교의 땅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의의를 가지는 곳이 바로 헤브론이지요. 헤브론에 정착한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긴 채, 무려 7년 반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헤브론에서 지내는 7년 반은 하나님과 친교를 다지는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야 믿던 그 시기에 다윗은 하나님과 친교하며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으며, 백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자기편으로 되돌리며 언약이 이루어지는 날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밀크위드의 씨앗이 그러하듯, 모든 약한 자에게 있어 친화력은 곧 생명력입니다. 스스로 강하다 믿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강하다 생각하는 그것으로 인해 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품기 때문에 약함이 곧 강함이 되어 버립니다. 가벼우나 강한 자로 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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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2021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2020년 5월 3일 온라인으로 열 수 밖에 없었던 교회를 2021년 5월 2일 전면 대면으로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글로리교회는 ‘신앙 야성의 회복하라’라는 기치를 내걸고, 마가복음 9:23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붙들고 한 해를 지나 왔습니다. 때로는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파를 헤쳐 왔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졌던 연약한 모습들은 신앙의 야성이 상실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야성이 없었던 우리의 본전을 드러내는 과정이었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신앙의 야성을 되찾아 왔습니다. 2021년 한 해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새가족들을 교회에 보내주셨고 기존 가족과 새 가족이 어우러져 뼈대를 이룰 만한 힘을 주셨습니다. 지난 성탄절 예배는 그러한 가능성을 엿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남아도는 음식과 얼굴에 넘쳐나는 웃음이 우리에게는 소망을 엿보게 하는 시각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2022년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올 한 해 우리가 붙들고 갈 표어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입니다. 이사야서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에라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올 한 해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풍성해지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품은 성전으로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개인의 영광이 모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영광은 온 성도가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룰 때에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보고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연약함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도들끼리 하나가 되기는 커녕 서로를 할퀴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사람 말고 하나님을 보며 버티자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면 영광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아닌 예배 공동체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교회를 다녀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니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신나고 함께 있으면 위로가 되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2021년 한 해를 보내고 2022년 새해를 맞이하는 소중한 시점을 우리는 송구영신 수련회로 시작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치있다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시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참석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모가 되면, 만사도 제치고, 감정도 제치고, 게으름을 넘어, 은혜의 자리로 달려 나아오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젖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자아와 연약함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작은 불들이 모여 마침내 글로리교회라고 하는 큰 불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2022년 한 해 영광스러운 성도,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져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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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리기 위해 성탄 츄리를 만들고 집안을 장식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길과 온 집을 휘황찬란한 전구들로 휘감습니다. 시에서는 아예 성탄 디자인 컨테스트를 해서 가장 아름답게 집을 꾸민 가정에게 포상을 하는 곳도 있고, 산타 랜드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아름다운 빛의 잔치를 벌이곤 합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예비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좋은 형식입니다. 그러나 좋은 내용이 빠지면 좋은 형식은 오히려 그 의미를 퇴색시켜버리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진정으로 예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수반할 때에 진정한 것이 됩니다. 열매는 마음과 삶의 열매로 맺혀집니다.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거짓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빠진 채 장식에만 치중하고 있다면 성탄절을 오해해도 한참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교회에서는 대림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대강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매주 초 하나씩을 밝혀가서 대림절 네 째 주일에는 네 개의 초가 밝혀지게 합니다. 촛불은 우리 삶의 빛이 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빛을 상징합니다. 각 주일마다 주제가 있습니다. 그 주제들은 주별로 각각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입니다.

 

회개가 왜 중요한 것일까요? 우리의 죄가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심입니다. 죄를 씻어 주셔야 소망도 평화도 기쁨도 사랑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안을 장식하는 것도, 촛불을 밝히는 것도, 전구를 다는 것도 아닌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좌정하실 수 있는 좌소를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장식은 집 안이나 집 밖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안팎을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식하는 과정에, 그리고 장식된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도 밝히고 전구도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통해 마음을 점검할 뿐 아니라, 마음을 정결케 하기 원한다는 우리의 소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에 초를 밝혀야 하는데 제 때 촛불을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죄를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강단에 성탄 츄리를 장식하는데 장식의 방식에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를 험담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도무지 성탄의 의미도, 성탄 장식의 의미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밝히는 초와 장식이 분쟁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나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본질을 기억하지 못하면 형식을 좇다가 항상 본질을 훼손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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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에게서 얻는 지혜

1. 홀로 안될 때, 연장을 쓰라

해달은 도구를 사용하는 몇 안되는 동물들 중 하나입니다. 겨드랑이 바로 옆에 살이 접히는 부분이 있어서 그곳에 돌멩이를 품고 다닙니다. 물고기야 그냥 뜯으면 되지만, 조개 같은 것을 먹을 때에는 손으로는 열기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 위에서 뒤로 누운 채, 납작한 돌 하나를 배위에 깔고 뾰족한 돌로 조개를 쪼아 속을 거내 먹습니다. 조개를 잡고 나서 그 때서야 돌을 챙기러 가는 법이 없지요. 항상 연장을 준비해서 다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개를 깔 힘이 없으면, 조개보다 강한 것을 준비하면 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인생의 조개를 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산 돌이 되시는 예수님께 의존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딱딱한 조개를 깔 수가 있습니다.

 

2. 홀로서는 막을 수 없다

해달은 이중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거친 외층과 부드럽고 촘촘한 내층으로 나뉩니다. 두 층 사이에는 공기층이 형성됩니다. 대부분의 삶을 물 속에서 사는 해달이지만, 두 층 사이의 공기로 인해 내부의 촘촘한 털은 방수처리가 됩니다. 털이 물에 젖으면 몸이 무거워져 떠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추위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물샐 틈없는 방비를 해야 합니다. 모든 조직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불량배는 벨리알로서 행실이 악한 사람에게도 적용되나 마귀에게도 적용된 단어입니다. 한 뿌리라는 것이지요. 적은 수의 악한 자와 불량배가 있어도 금새 공동체는 오염되고 맙니다. 악한 자들의 영향력이 물샐 틈 없이 막아져야 공동체는 물 위에 떠 자유롭게 유영하며, 영적 혹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개의 털층이 공기를 품어 물 속에 있지만 물의 유입을 막듯 리더십과 모든 성도가 하나된 유기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3. 홀로 떨어지면 안된다

해달은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잠을 잘 때도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미역 줄기 같은 것으로 몸을 감고 잡니다. 미역 줄기를 찾을 수 없을 때에는 서로 손을 꼬옥 잡고 잡니다. 해달의 주요 서식지인 알래스카 해안에서는 무려 1,000마리 가량의 해달들이 떼를 지어 손을 잡고 자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공동체란 그런 것입니다. 홀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미역 줄기에 몸을 감듯 우리는 성령으로 서로를 동여야 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는 서로의 손이라도 잡는 것입니다. 그래야 강력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4. 홀로 서야 한다

막 태어난 새끼 해달은 수영을 하지 못합니다. 어미 해달은 아기 해달이 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배 위에다 올려 놓고 다닙니다. 열심히 혀로 핥아 털을 부풀려 물에 빠지지 않게 하고 추위로부터 보해해줍니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자라나면 스스로 수영을 해서 독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어미는 새끼 해달을 끌고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새끼는 위기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수영하는 법, 사냥하는 법, 조개 까는 법 등의 생존 전략을 배워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역시 당당한 어미 해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끔은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하시고 허우적 거려야 하는 상황 가운데 두기도 하십니다. 스스로 어미 해달이 되어 누군가를 품고 보호할 존재로 성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갓난 아이의 영성이 아닌 어미의 영성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일 어미가 되기 위한 과정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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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통해 승리한 세균과의 전쟁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근사할 것이라 추측하지만, 사실 과학자들은 매일 실패를 거듭하며 삽니다. 제가 보는 한, 훌륭한 과학자는 실패가 없는 과학자가 아니라, 실패 역시 성공으로 대하는 과학자입니다. 실패를 했다는 말은 사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작은 성공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실패를 뜻하는 FAIL이라고 하는 단어를 “First Attempt In Learning”로 읽습니다. 또한 연구를 뜻하는 ‘research’를 ‘또 다시 (re) 찾는 것 (searc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실수들을 통해 우리는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워 갑니다.

 

한편, 실패는 때로 엄청난 성공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노벨의학상의 2/3 이상은 실수를 성공으로 전환시킨 사례들입니다. 항생제의 발견, 인슐린의 발견, X-Ray의 발견 등이 모두 실수를 통해 발견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내뱉어지는 소리는 “Eureka(찾았다)”가 아니라, “그거 참 흥미롭네”입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실패가 선물한 가장 위대한 성공 중의 하나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니실린은 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세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항생제 개발에 기여하기 전 사람들은 작은 상처에도 감염되어 죽음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일례로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826)는 장미 가시에 찔렸다가 감염성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플레밍 시대의 병사들은 총칼에 의해 즉사하는 경우보다는 부상 이후에 오는 2차 감염을 막을 방법이 없어 죽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플레밍은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그러한 사실을 익히 보아왔습니다.

 

플레밍은 도대체 어떻게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일까요? 세균을 배양할 때에는 세균 이외의 다른 것들이 자라지 못하게 멸균처리를 잘해야 합니다. 공기 중에는 늘 곰팡이들이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해도 세균과 함께 곰팡이가 자라 버립니다. 세균을 배양해놓고 휴가에서 돌아온 플래밍은 세균을 접종해놓은 플레이트가 푸른 곰팡이에 의해 오염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실패였지요. 그런데 그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푸른 곰팡이 주변에는 세균이 자라지 못하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푸른 곰팡이에 항균 작용을 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연구의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그 작은 발견 하나가 항생제 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쓴 큰 걸음이 되었던 것이지요.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실수가 항상 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실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위대한 인물인 다윗도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러한 실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칭호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플래밍이 푸른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뜻밖의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세균을 배양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푸른 곰팡이에 오염된 플레이트를 짜증스러워 하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플레밍 자신도 이전에 그러한 경험을 하였겠지요. 그러나 누구나 놓치고 사는 것들 속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순간, 쓰레기통에 들어갈 물건이 갑자기 보석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실수와 실패와 좌절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해가고 그 안에서 배우며 변화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보석이 되어서 ‘써프라이즈’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리고 목회자로 섬기면서 제가 발견해가는 실패에 대한 진실입니다. 실수했을 때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다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뜻하지 않은 보석을 찾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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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접한 여인은 정말 사무엘을 불러낸 것일까?

사무엘상 28장에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요청에 따라 사무엘의 영을 불러 올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난해구절 중 하나로 그 해석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 사무엘을 직접 보내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강신술사는 결코 죽은 자의 영을 불러 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보았던 영은 사무엘의 영이 아닌 악령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의 영혼은 죽는 순간 이 세상을 떠나 낙원이나 음부에 가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기 직전 회개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16장은 부자는 음부의 불길 가운데 있고, 나사로는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음을 명확히 묘사합니다. 음부와 낙원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있어 서로 왕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낱 영매의 부름에 사무엘이 등장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당은 죽은 자의 영을 직접 부를 수 없습니다. 무당들이 죽은 조상의 목소리나 몸짓을 그대로 표현하며, 가정사의 내막을 일러 주는 것은 다만 가정사에 익숙한 귀신이 죽은 조상을 흉내내는 것일 뿐입니다. 귀신은 변장의 명수입니다.

 

2.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생각하면, 사무엘도 올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시면,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고작 영매를 통해 사무엘을 보내어 말씀해 주실 리 없습니다.

 

3. 사무엘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야지, 땅으로부터 올라오면 안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은 그저 음부에서 자고 있다가 부활 때에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옆의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의 영은 낙원에 있어야 하고, 당연히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와야 맞습니다.

 

4. 땅으로부터 온 영이 직접 자신을 사무엘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그저 사무엘 흉내를 내는 귀신이었을 뿐일 것입니다. 귀신 역시 거짓말쟁이요, 속임수의 명수입니다.

 

5.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그저 한 노인이 겉옷을 입었다는 정보 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울이 사무엘인 줄로 알고 절을 한 것입니다. 겉옷 입은 노인이 사무엘 한 사람이었을까요? 더구나 영혼이 여전히 노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도, 영혼이 세상의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6. 사무엘로 보이는 영이 말한 것이 정확히 이루어졌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입술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을 축복케 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인 가야바를 통해서도 진리를 말씀하게 하셨지요. 악한 영들 역시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얼마든지 악령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7. 하나님은 회개케 하여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시지, 절망하며 죽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울은 자기의 죽음을 확인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접한 여인의 말을 진짜 사무엘의 말로 들은 사울은 좌절하여 이미 죽은 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영이 진정 사무엘이었다면, 마지막 회개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회개하고 울부짖었다면, 적어도 삼손과 같이 슬프지만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말씀하실 리는 만무하지요.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것이 진짜 사무엘이었는지, 아니면 미혹하는 영이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울이 하나님이 아닌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죄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보응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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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말고 지구에서 숨쉬자

달에도 지구처럼 대기층이 있지만, 그 층이 매우 얇고 대부분이 수소와 네온과 아르곤 가스로 되어 있습니다. 산소를 마시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나 지구 생명체들에게 적합한 공기를 갖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달에는 엄청난 양의 산소가 존재합니다. 그저 숨쉴 수 있는 가스의 형태가 아닐 뿐입니다. 달에서의 산소는 달 표면의 바위층이나 흙층 안에 갇혀 있습니다. 달표면의 토질에 갇힌 산소의 양은 무려 토질 전체의 45%나 됩니다. 만약 달 표토에 있는 산소를 가스화 시킬 수만 있다면 수조의 사람들이 10만년 동안 살 수 있는 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학자들은 추측을 합니다.

 

달 표면에 갇힌 산소를 가스화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기술력으로 가장 실현 가능한 방법은 알루미늄 생산 공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알루미늄을 생산할 때에 부산물로서 산소가 발생합니다. 물론 달에서의 공정은 산소를 얻기 위한 공정이 주가 되고, 알루미늄을 부산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장비들을 요구합니다. 우선 태양열 패널을 만들어서 에너지원으로 삼아야 겠지요. 그 후 표토에 엄청난 열을 가해서 고체를 액체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마쳐진다면 액체를 다시 기체화하는 공정이 들어가야겠지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과 기술력과 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산소를 가스화 시킨다 하더라도 달은 여전히 살 수가 없는 땅입니다. 사람이 산소만 마시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산과 들과 강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 자라는 식물과 동물들이 있어야 하며, 그 모든 것들이 적절히 생태계라고 하는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지구 밖에서 살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꿈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그 어떠한 가능성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작 어느 별에 유기물이 발견되었네, 물이 발견되었네, 산소가 발견되었네 정도를 가지고 흥분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특별한 곳입니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은 초미세 조정이 되어 있습니다. 지구는 우연히 생겨난 장소가 아닙니다. 우연은 결코 생명도 생명 안에 있는 질서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숨쉴 만한 공기 하나를 제 손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는 공기를 추출하려고 해도 막대한 자원이 들어갑니다. 그 자원은 어디에서 온 곳일까요? 애초에 인간에게 산소를 추출할 수 있는 능력과 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소중함과 감사를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나, 우리는 그것들이 원래부터 우리에게 있어야 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음식 하나를 해줘도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애인을 위해 이벤트 하나를 해줘도 감동하여 눈물 짓기를 원합니다. 부모가 아닌 사람이 보면 도무지 영혼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자녀의 감사의 표현 한 문장에 감동하여 눈물을 찔끔대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제공한 것에 대해 감사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에 대하여는 도무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애쓰고 수고하며 베풀어준 사랑에도 감사를 표현하는데 지나치게 인색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반면 마귀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혹스러워 합니다. 평소에 잘 보지 못한 캐릭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흉내낼 수 없는 성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안되는 것이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첨언해 주셨습니다.

 

지난 한 해도 아리고 쓰린 일들을 무수히 통과해 오셨겠지만, 그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과 상황들과 조건들과 물질 등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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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오징어 게임

사람의 피가 빨간 이유는 피 속에 적혈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혈구는 왜 빨간색일까요? 적혈구 속에는 헤모글로빈이라고 하는 색소가 들어 있는데, 헤모글로빈 안에 있는 철 성분이 빨간 색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적혈구 안에 있는 철 성분은 우리 몸 속에 산소를 공급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몸의 심장에서 뿜어진 피의 일부는 온몸으로 보내지지만, 다른 일부는 폐로 갑니다. 폐로 간 혈액은 숨을 쉴 때 폐가 받아들인 산소를 안고 심장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헤모글로빈 속의 철 성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심장으로 산소를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심장이 뛸 때마다 산소가 온몸으로 공급되는 것을 쉴 새없이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징어나 문어 같은 연체동물은 피가 녹색입니다. 헤모글로빈 대신 헤모시아닌이라는 색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헤모시아닌 속에는 철분 대신 구리 성분이 들어있는데, 구리 성분으로 인해 피가 녹색을 띄게 되는 것이지요. 헤모글로빈에 비해서 헤모시아닌은 산소와 결합하는 성능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헤모시아닌을 가졌다면 산소가 많은 상황에서도 산소 부족 현상을 보여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연체동물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색소를 가졌을까요? 그것은 헤모시아닌이 산소가 부족한 환경이나 몹시 추운 환경에서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헤모글로빈이 산소가 부족하거나 날씨가 추우면 산소 결합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산소가 부족하고 기온이 차가운 심해에서 살아야 하는 오징어 입장에서는 헤모글로빈보다 헤모시아닌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오징어나 문어는 또한 심장이 세 개나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큰 심장 하나는 온몸에 피를 보내고, 그 옆의 작은 심장 두 개는 아가미로만 피를 보냅니다. 아가미로 보내진 피는 외부의 산소를 안고 큰 심장으로 들어오고, 큰 심장은 산소를 온몸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 몸에서는 심장 하나에 분획이 있어 두 가지 일을 모두 감당하지만, 산소가 부족하고 추운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오징어 입장에서는 심장이 따로 있어서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자연 속에서 각자 처한 환경에 맞추어 살도록 신체의 모든 조성들을 각기 다르게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와 배려를 볼 때마다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극한의 환경인 심해가 오징어에게는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도록 모든 생물들 속에 세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산소가 많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산소가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환경이 적합한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순환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헤모글로빈이 좋아 보이지만, 때로는 성능이 떨어지는 헤모시아닌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악한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누군가에게 산소를 공급해주는 헤모시아닌 같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장 하나로 감당이 안되는 환경을 만날 때는 심장을 셋을 가지면 됩니다. 크고 튼실할 필요 없습니다. 작고 미약하다 할지라도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다면 악한 환경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오징어 게임입니다. 오징어 한 마리에게도 살아갈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가 우리의 신앙의 결을 결정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극한의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징어 한 마리를 위해서도 지혜와 능력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힘을 주실 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반드시 허락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과 상황을 허락하시지요. 우리를 돕는 사람과 우리를 해치는 사람, 우리를 떠나는 사람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등 모든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성장시켜 가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악한 상황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인생을 맡겨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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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값진 보배가 된 분변

철기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한 소금 광산은 유네스코 세계 유적지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광산에는 광부들이 배설해 놓은 분변 더미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땅 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분변을 해결하고자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은 인력 낭비이기에 아예 땅 밑에서 해결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약 2,700년이 지난 후 분변들은 탁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보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약 2,700년 전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분변 샘플을 이용해 미생물과 DNA와 단백질 등을 면밀히 검사한 결과 철기시대 광부들이 곡류와 고기와 블루치즈와 맥주를 먹고 살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분변에서 발효에 관여하는 효모들이 발견된 것이지요. 고고학자들은 2,700년 전부터 이미 효모를 이용한 발효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도 2,700년 된 개인 화장실이 발견되어서 화제입니다. 개인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매우 부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화장실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밑으로는 하수처리 탱크가 있습니다. 근대의 화장실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지요. 학자들은 화장실 밑의 하수 탱크를 열고 들어가 분변을 검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2,700년 전에는 그저 분변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과거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등을 연구하는 좋은 재료가 된 셈이지요.

 

사실 이러한 정보는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야말로 ‘2,700년 전의 X 같은 얘기’이지요. 그러나 고고학자들에게는 분변도, 분변에서 얻은 정보도 값진 보배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더럽게 여기는 분변이, 그것도 2,700살이나 먹은 늙은 분변이 누군가의 손에서는 보석이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도 거들떠 보고 싶지도 않은 분변같은 일들이 꽉차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과 아픔을 ‘X’으로 비유한다면, 다윗은 그야말로 X 더미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고하게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은혜를 베풀었던 자들로부터의 배신,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들에 의한  밀고,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받는 무례한 모욕과 수치, 셀 수 없이 넘나들어야 했던 죽음의 문턱 등이 그 삶 속에 끊이지 않고 범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분변처럼 여겨지는 그 일들이 다윗에게는 값지고 빛나는 보석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아는 왕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만 시선을 둔 왕이 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강대하게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함께 분변 더미를 헤집고 다녔던 아둘람의 용사들 역시 빚지고 원통하고 환난당한 자들에서 나라를 세우는 개국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분변 더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었던 그의 시들은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되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선율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분변 더미를 걷다 보면 그 분변은 사람들의 심령에도 쌓이기 마련입니다. 마음 속 분변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어느덧 분변처럼 되고 맙니다. 사람은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쏟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마음 속 분변을 너무나도 잘 해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생겨나는 모든 쓰레기들을 하나님께로 가져 가서 쏟아 냈습니다. 그의 심령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의 강 줄기에 의해 온갖 쓰레기들이 씻겨 나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분변을 우리의 보석으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의 분변들을 옳바르게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자들에게는 분변 뿐일 모든 상황과 조건과 사건들이 우리들의 심령 속에서는 값지고 영롱한 보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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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에 밟힌 종교개혁일

매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종교개혁의 날인 것을 기억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반면 이 날이 할로윈이라고 하는 사실은 모든 성도들이 다 알며 심지어 할로윈 행사에 거리낌 없이 동참을 합니다. 종교개혁일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날이 할로윈이라는 사탄의 축제일에 밟혀 버린 것이지요.

 

할로윈(Halloween)이란 단어는 성인을 뜻하는 hallow와 전야제를 뜻하는 even이 결합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10월 31일을 모든 성인들을 축하하는 ‘성인 대축일’의 전야제로 지켰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날로 여기며 만성절이라는 미신 행사를 펼쳤던 것이지요. 이날이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과 혼합되어 오늘날의 할로윈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귀신을 두려워 했던 켈트족은 죽은 영혼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귀신 복장을 하고 집안을 차갑게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만성일을 5월 13일에서 11월 1일로 정식 변경하면서 할로윈이 만성일의 축제로 굳혀졌습니다. 이것이 미국으로 퍼지게 된 것은 1840년대의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이주민에 의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이주민들이 벌이는 작은 행사에 불과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의 급증으로 인해 할로윈도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이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흥미를 자극한데다가 사탕까지 얻으니 아이들은 누구나 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할로윈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안전한 것일까요? 사탄교의 창시자인 안톤 라비(Anton LaVey)는 “나는 크리스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어도 1년에 한번 사탄을 숭배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기뻐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 때 사탄교의 고위 성직자였다가 지옥체험을 한 후 기독교 사역자가 된 존 라미레즈라고 분은 할로윈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탄을 숭배하는데 발 빠르게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로윈 복장을 하며 얼굴에 색칠하고, 심지어 교회까지도 할로윈을 축하하기 위해 호박으로 교회 정문을 장식한다. 이런 행동은 마치 ‘내 교회가 여기 있다. 네가 가져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도들은 할로윈에 생각없이 참가하지만, 사탄숭배자들이나 마녀들은 이 날을 두고 특별한 준비를 합니다. 사탕에 제사를 드린 후 자기 집을 방문한 아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악령들이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도록 공들인 제사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해 사탄의 행사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영향력으로부터의 보호막 역시 거둬지고 맙니다.

 

많은 교회들은 할로윈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홀리윈 데이나 할렐루야 나잇을 만들어 발길을 교회로 유도합니다. 그러나 라미레즈는 이것 역시 할로윈의 변형으로 할로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들의 교육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를 포기하거나 상실해버린 이 시대의 특성 상, 재미와 사탕이라고 하는 유혹을 뛰어넘게 할 힘이 없는 실정에서 홀리윈이나 할렐루야 나잇까지를 폐쇄한다는 것은 지나친 도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할로윈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나이에 어떤 영의 영향력 안에 들어갈 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악한 영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면 아이에게 악한 변화가 생겨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의학적으로 발견이 되는 것도 아니기에, 원인도 알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체험을 한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의지로 환영하며 참석하여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것이 죄인지를 모르므로 회개할 수도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므로 축사를 할 생각도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위험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방치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영적인 위험 가운데로 아이들을 몰아 넣고 있는 것일까요? 부모들이 바른 관점을 가지고 원칙을 설명한다 해도 과연 아이들이 설득되지 않는 것일까요? 제가 처음 예수를 믿었던 텍사스 교회에서는 불과 중학생 밖에 안되는 당시 목사님의 아들이 할로윈에 자녀를 참석시키는 부모들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교육만 되면 어른들보다 잘합니다. 즉, 교육의 실종이 아이들을 위험 속에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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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먹는 기생충

지난 수요일 USA Today에는 흥미로운 기사와 함께 다소 끔찍한 사진 하나가 소개되었습니다. 물고기의 입 속에 커다란 기생충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기생충은 ‘혀를 먹는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금 유식한 말로는 ‘시모토아 엑시구아(Cymothoa exigua)’라고 불리웁니다.

 

시모토아는 아가미를 통해 물고기의 입안으로 침투한 후 혀에 달라 붙어 피를 빨아먹고 삽니다. 무려 14개나 되는 다리로 혀를 꽉 틀어쥐고 피를 빨아 댑니다. 피가 도중에 응고되지 않도록 항응고물질을 분비하여 피를 빨기때문에 이내 혀가 죽어버립니다. 죽은 혀가 물고기로부터 떨어져 나가도 물고기는 죽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죽으면 기생충 자신도 죽기에 죽지 않는 수준에서 위해를 가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물고기가 기생충보다 더 오래 살지요. 더욱 끔찍한 것은 물고기의 혀가 떨어지고 난 후에 시모토아가 물고기의 혀뿌리와 입사이에 붙어 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짜 혀로 위장을 하고 물고기에 붙어 지속적으로 피를 빠는 것이지요. 시모토아는 심지어 물고기의 입안에서 암수가 교배를 하여 번식을 하기도 합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Battle of Pastors라는 책에 언급된 ‘종교적 기생충’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영적 기생충이란 교회에 성도인 척하고 들어와 교회 안을 돌아다니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더럽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집단이 성도인 척 들어와 교인들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인도하고 마는 것은 영적 기생충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얘기하는 영적 기생충이란 신천지와 같은 이단 집단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성경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개인적인 사상을 퍼트리며,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염증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라는 것이지요. ‘영적 기생충’이란 표현이 다소 과격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성경은 그러한 존재들로부터 성도와 교회를 보호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에 해를 끼치고 파괴적인 역할을 하며 모든 영혼들의 피를 빨아 영혼들이 자라지 못하거나 죽게 하면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시모토아들이 뿌려놓은 혈액응고물질에 의해 지속적으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영적 기생충들이 뿌려 놓은 잘못된 사상들이나 태도들 몇 가지를 살펴 보며 자신이 감염되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1. “교회가 나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어”라고 늘 말하고 다닌다.

2.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 원한다.

3. 찬양하는 때보다 불평하는 때가 더 많다

4.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헌신이 부족하다 말하고 다닌다.

5. 개인적인 문제를 교회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6.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를 갈라놓는 언행을 하고 다닌다.

7. 물고기의 혀와 같이 교회의 중요한 일부인 척 가장하지만 실상은 영혼을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는 개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땀흘리고 헌신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를 위해 눈물도 땀도 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면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육적인 부분이 아니고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요구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함께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함께 아름답게 빚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 써비스를 제공하는 봉사 쎈터가 아닙니다. 함께 손잡고 눈물흘려 기도하고, 땀흘려 헌신하며, 피흘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흘리는 눈물, 땀, 피가 없이 교회로부터 뭔가를 요구하고만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한 성도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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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좇는 사람, 도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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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1, 22장에 도엑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도엑은 에돔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으로 전향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엑이라는 이름의 뜻은 ‘염려함’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과 성경에 잠깐 소개된 그의 행적들을 보며 도엑이라고 하는 인물을 캐릭터화해보기 원합니다. 일부의 내용은 제 개인적인 각색일 뿐임을 고려하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되는 그의 삶과 태도를 통하여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을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 뜻처럼 그는 세상에 대한 염려가 그의 마음과 일생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왜 에돔을 버리고 이스라엘로 전향을 했을까요? 사무엘상 14:47은 그에 대한 희미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사울은 비록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다윗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 악령에 완벽히 장악된 사람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건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쟁하는 동안에는 사방에 있는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이긴 대적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엑은 에돔 사람으로서 승승장구하는 이스라엘의 손을 잡아야 산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배경이야 어찌되었건 그는 에돔인이었지만 사울의 목자장이 되었습니다. 목축업이 주산업이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사울의 목자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 도엑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을 피해 놉 땅으로 피신해온 다윗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놉 땅으로 피신한 이유는 당시 놉 땅에 하나님의 성막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갈 길을 묻고, 먹을 것과 무기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성막을 찾았던 것이지요.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윗에게 먹을 것과 골리앗을 칼을 제공했고, 도엑은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사울은 신하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사울의 편이 아닌 다윗의 편에 섰다고 화를 내며 징징거립니다. 도엑은 이 때다 싶어 자신이 본 사실을 사울에게 고하고 맙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은 물론 놉땅에 거하던 제사장 85명을 잡아다 놓고 신하들에게 그들을 죽이라 명합니다. 사울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사울의 신하들은 감히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제사장들을 죽일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에 사울은 도엑에게 명령하여 제사장들을 죽이게 하였고, 도엑은 또 다시 이 때다 싶어 85명의 제사장들을 모두 살해하고 맙니다. 도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학살하였으며, 소와 양까지 몰살기켜 버립니다.

 

다윗이 놉땅으로 피신했을 당시 도엑이 왜 그곳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므로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1) 성막에 머물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교제권 안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개종자로서 머물고 있었다; 2) 문둥병이 있었거나 하나님께 서원을 지키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3) 범죄를 하여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정해진 희생을 드리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그의 행실로 드러내고 맙니다. 다윗은 도엑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반드시 그가 사울에게 말할 것을 알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의 참극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기에 세상을 좇는 사람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좇았던 사울과 도엑의 잔인함의 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성막에 머물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 사람의 신앙의 순수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은 예배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좇을 때에 신앙의 태도와 행동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으로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주차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당에 앉아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좇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좇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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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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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울의 살해 위협으로 인해 놉 땅으로 도망을 갑니다. 당시에는 성막이 있었던 실로를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었고 성막은 놉땅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갈 바를 묻기 위해 놉땅을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제사장으로 있던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는 신세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자신이 왕의 특명을 받아 중대 임무를 수행 중이라 거짓말을 한 후, 먹을 것과 무기를 요청합니다. 이에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진설병과 골리앗을 칼을 내어 줍니다.

 

훗날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아히멜렉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대목에 이를 때에 독자들은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로 아히멜렉을 속인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은 죽임을 당하니 다윗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저 소모품인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무고한 아히멜렉의 죽음을 통해 여러가지 묵상들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 측면을 본다면 이 문제를 묵상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사무엘상 초반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자이자, 비느하스의 손자입니다. 제사장 엘리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성결해야 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도적질 하는 불량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성막을 섬기는 여인들과 동침을 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맙니다. 그 저주의 핵심은 가문에 늙어서 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쟁 시 법궤를 들고 나갔다가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비보를 전해 들은 엘리 역시 의자에 앉은 채로 넘어져 목이 부러진 채 죽게 됩니다. 큰 아들 홉니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작은 아들 비느하스만 아히둡과 이가봇이라는 두 아들을 남겼습니다. 아히멜렉은 아히둡의 아들이자, 비느하스의 손자이자, 엘리의 증손자입니다. 그러므로 아히멜렉의 죽음은 사실 엘리 가문에 임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무고한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가슴아파하던 다윗은 훗날 왕위에 오른 뒤, 아히멜렉의 아비아달에게 제사장직을 맡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비아달 역시 솔로몬과 아도니야가 왕권 다툼을 벌일 때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솔로몬이 왕권을 잡자 파면당하고 맙니다.

 

성도들이 사랑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엘리 가문의 후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로서 성실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감당했지만,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죽음은 홉니나 비느하스의 죽음과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이 심판이라면, 예레미야의 죽음은 순교이지요. 엘리 가문에 내린 저주 아래서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엘리 가문에 내린 저주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그 이름을 가볍게 여긴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사에 얽혀진 일들은 복잡하고 무의미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는대로 거둔다’는 원리에 대해 일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심은 것은 반드시 열매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현세에서 따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따는 것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며 살아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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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지 않은 비가 준 유익

비가 오자 등을 문질러 각질을 벗겨내고 있는 코뿔소

비가 오자 등을 문질러 각질을 벗겨내고 있는 코뿔소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온 김에 평소에 가보지 못했던 곳을 몇 군데 둘러 보며 그동안 갖지 못했던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쌘디에고의 사파리공원을 방문했습니다. 일인당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효도도 할겸 큰맘 먹고 트럭 사파리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데, 예정된 시간 약 10분 전부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와서 동물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시간을 내어서 왔는데 아예 사파리가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나 별의 별 걱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파리 안내원이 생글거리며 의외의 소식을 전합니다. 동물들이 비오는 날을 좋아하여 비가 오면 오히려 활동이 많아지고 재미있는 광경들을 연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쌘디에고에는 비가 잘 오지 않기때문에 비가 오는 날은 평소에 못볼 멋진 광경들을 볼 수 있는 행운의 날이라는 것이지요. 트럭을 타고 젖은 씨트에 앉아 사파리를 시작하는데, 안내원의 말처럼 코끼리 4마리가 쏟아지는 비에 기분이 좋아 진흙탕을 구르는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평소에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코뿔소들 역시 커다란 궁둥이를 흔들며 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코뿔소는 피부에 붙은 각질을 벗겨 내느라 등짝을 나무에 부비적거리기도 했습니다.

 

한참 탄성을 자아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중간에 사파리 투어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비만 오면 괜찮은데 낙뢰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트럭이 철수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아쉬워하며 오후 시간으로 다시 일정을 잡으려고 갔더니 오후에도 비소식이 있어서 아예 티켓값을 전액 환불해주었습니다. 코끼리, 코뿔소, 기린, 임팔라 등 이미 볼만한 것들은 다 보았고, 비로 인해 평소에 볼 수 없는 진풍경까지 보았는데 돈을 전액 환불해준다니 이 무슨 은혜인가 싶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값진 교훈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비바람이 칠 때가 있습니다. 비바람 앞에서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지요. 그러나 그 비바람으로 인해 우리는 비바람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 비바람을 통해서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배달되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늘상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도, 비바람만 치면 까맣게 잊어 버린 채,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원망과 불평으로 값진 시간들을 소모하고 맙니다.

 

오늘 비바람이 치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비바람을 멎게 할 수도 없고, 비바람을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비바람이 없는 삶을 꿈꾸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비바람 속에서 예기치 않은 보화를 찾아내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파워이지요. 오늘 부는 비바람 속에서 우리는 비바람마저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비바람 속에 내일의 예기치 않은 보석을 심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인내하며 그것을 찾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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