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신앙의 기초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교리가 아닌 삶의 집중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기독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좋은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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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와 성도 (요일 2:15-17)

  • 마귀와 성도

  • 요일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곳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 오늘날에도 마귀나 귀신이 존재하는가?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고, 자연주의 문화와 사상에 물든 현대인들은 마귀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귀신들림 현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사슬에 매여 고통을 받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르헨티나 선교를 갔을 때에 한 현지인에게서 드러난 귀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자 소리를 지르며 떠나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선교팀은 스페니쉬가 아닌 한국말로 귀신을 대적하였습니다. 이는 악한 영의 세력의 존재와 함께 예수님의 권능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무속인들의 존재는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의 좋은 예입니다. 그들 안에는 또 다른 인격이 있으며, 과거의 일들이나 현재의 상태들을 신통하게 맞추곤 합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방울은 일초에도 수십번씩 떨림음을 내며, 작두 위에서 90도로 뛰고 심지어는 가로로 미끄러 지는 데도 발이 베이지 않습니다. 물론 흉내를 내어 사기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실제로 귀신을 보며 귀신을 섬깁니다. 무속인들은 좋아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섬기지 않으면 사고가 나고 질병으로 끙끙 앓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현대 과학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내어 놓지 못합니다. 더욱 신기한 일은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한 사람이나 장소를 만나면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당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분들은 예수 믿고 신내림을 거부할 때에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간증하곤 합니다. 이처럼 마귀의 세력은 성경의 시대와 동일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인간의 전 영역을 통하여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2. 마귀의 공략 장소, 마음

마귀의 주요 타겟은 인간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타겟으로 정하는 이유는 하나님 대신 자신이 경배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격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격적 존재란 지성, 감정, 의지라고 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경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 대신 그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려 듭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언어와 행동을 통해 표현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마귀에게 붙들리면 악한 말과 행동을 남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지배는 개인적인 차원 뿐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벌어집니다. 지성이 집단화된 것이 사상과 이론과 철학입니다. 언행이 집단화된 것이 문화와 풍습입니다. 각 개인들의 의지가 모여 집단의 의지를 이루며 결국 하나님을 배척하는 정책과 사상과 문화들을 양산해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인간의 마음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말은 곧 마귀가 인간의 전 영역을 지배하려 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마귀는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는가?

마귀는 크게 시련과 유혹이라고 하는 두 가지 시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장악합니다. 시험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영어로는 test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중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에 다시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과 시련입니다. 유혹은 영어로 Temptation, 시련은 영어로 Trial 입니다. 시험에는 3T, 즉 test(시험), temptation(유혹), trial(시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중 test는 하나님께서 주시나, temptation과 trial은 마귀가 주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1) 마귀가 주는 시험 1 – 시련 (trial)

마귀가 인간에게 시련을 주는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타락 천사입니다.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면서 천사가 가지는 능력을 많은 부분 상실했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영원한 사슬에 매여 있는 존재들 (유1:6)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수 백년을 한 가계 안에서 보이지 않게 존재해왔고, 또한 사람들의 모든 역사를 지켜봐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과 집단의 과거를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인간의 심리 역시 통달하여 알고 있으며, 인간의 보편적인 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지요. 힘이 없는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공격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시련을 주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어 하나님 대신 자신이 경배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경배의 대상을 찾게 합니다. 어떤 때는 로마의 황제와 같은 위정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우상이 되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액운을 막아줄 수호신이나 조상신 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경배를 받는 것은 그 뒤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을 막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십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고, 시련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지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기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깨닫게 되며, 비로소 신적 존재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면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2) 마귀가 주는 시험 2 – 유혹 (temptation)

마귀가 주는 유혹은 시련보다 더욱 더 교묘하고 강력한 시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넘어지곤 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세 가지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1) 육신의 정욕; 2) 안목의 정욕; 3) 이생의 자랑 입니다.

창세기 3:5절은 마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이유를 피조물인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6절에서는 그 유혹의 본질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먹음직 한 것은 육체의 정욕을, 보암직 한 것은 안목의 정욕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은 이생의 자랑을 뜻합니다. 하와는 바로 그 세 가지 정욕에 넘어간 것이지요.

마귀는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세 가지 탐욕을 통해 시험합니다. 무려 40일을 금식하여 배가 고파있던 예수님께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공격한 것이었고, 세상을 보이며 마귀에게 경배하면 세상을 주겠다는 말은 안목의 정욕을 공격한 것이었으며, 천사가 받아줄 것이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말은 이생의 자랑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여전히 그 세 가지 영역을 통해 우리를 공략합니다. 마귀는 육체적 정욕을 따라 몸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하게 하고, 안목의 정욕을 따라 꼭 필요치 않음에도 눈에 보기 좋은 것을 탐하게 하며,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기 위한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살게 합니다.

4.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

오늘 본문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멀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특급 무기들을 활용하여 최대한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품었던 모든 정욕들 역시 다 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것들을 탐하는 정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을 좇은 사람들은 마귀가 주는 유혹을 따랐으므로 마귀와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좇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정욕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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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아비, 마귀 (요 8:44)

  • 거짓의 아비 마귀

  • 요한복음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1. 죄를 조장하는 원조 범죄자 마귀

오늘 본문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8절은 마귀를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소개합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마귀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말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 부분들에서부터 악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 같이’된다고 거짓말을 하여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범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거짓말을 했으니 거짓말쟁이요,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살인자이며, 죄를 낳았으니 거짓의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환상이나 소설이나 동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입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범죄의 원흉이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을 범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탄, 루시퍼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악한 자’ (요일 5:19) ‘불량한 자 (벨리알)’ (고후 6:15), 시험하는 자 (살전 3:5),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 (계 12: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이름들은 마귀가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짓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갖은 속임수로 성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교만에 빠지게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하락시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마귀는 또한 거짓 교리를 지어내어 믿는 자마저도 미혹하고자 하며, 하나님 대신 신으로 위장하여 대신 경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하여 진리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진리가 마귀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2. 마귀에게 속한 세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완고하게 대적하던 유대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요한일서에서 더욱 명확히 설명을 합니다.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8-10).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마귀의 자녀들의 특성을 마귀의 영향력과 탐욕에 종속된 자들로 규정을 합니다. 같은 의미로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요 12:31)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반역자 마귀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마귀가 불법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귀가 아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것을 왕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왕처럼 행세하는 일에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 이래로 쭈욱 그 일을 해왔으며 사람의 모든 패턴과 심리와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사람 등의 물질이나, 지성, 감정, 의지, 사상 등의 정신, 그리고 언행과 습관과 문화 등 행동까지 인간의 모든 영역을 통해 각 사람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그것을 활용합니다. 그것에 넘어가면 인간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왕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도록 디자인 되어 있고, 마귀는 그 왕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귀가 시전하는 궁극의 스킬이 바로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야”라는 거짓입니다. 그 속임에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왕이 되어 사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마귀를 왕으로 모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마귀의 덫에 넘어갔으니, 그 자체로 마귀에게 예속된 것일 뿐 아니라, 이후의 인생에서도 마귀가 그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게 됩니다.

3. 인간을 지배하려는 마귀

마귀의 세력은 오늘날도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완전히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1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믿기 전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의 풍조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즉 마귀가 사람들을 장악하는 수단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여기에서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불신자들을 장악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풍조를 좇아 살도록 유혹을 하여 그들의 삶이 마귀에게 예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좇아 사는 것은 곧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신자들을 향해서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며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벧전 5:8). 요한 역시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라고 성도를 대적하는 마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 12:17). 우리는 우리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마귀의 공격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괜찮다고 얘기한다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세상과 구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습은 마귀가 걸어 놓은 덫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 풍습이나 마귀가 주는 유혹에 따라 산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상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마귀를 이길 힘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4. 마귀가 원하는 것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사탄”

마귀의 첫 번째 의도는 사탄(대적자)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해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구원과 마귀의 멸망을 동시에 가져올 예수님의 탄생을 막기 위해 발악을 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탄생했을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으며, 아담을 유혹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예수님마저 유혹하여 구원자의 자격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또한 마귀의 일을 모두 멸하셨습니다.

2) 인간을 중상하는 자 “마귀”

마귀의 두 번째 의도는 마귀(중상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사람이 범죄하게 한 후, 그 죄를 빌미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죄를 범하게 한 다음 죄를 지었으니 죄값을 받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할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욥을 중상하여 욥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마귀의 꾀에 넘어가 욥에게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깨서는 마귀 따위에게 속임을 당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욥에게는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지경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고자 섭리하셨을 뿐입니다. 또한 욥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난제에 대한 빛을 주고,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 “루시퍼”

마귀의 세 번째 의도는 “루시퍼(빛을 가진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 받을 빛난 영광을 자신이 대신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숭배받고 영광받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고 속임수를 통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 대신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 숭배자에게만 숭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마귀를 숭배하는 행위이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의도입니다. 마귀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땅에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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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겔 28:12-17)

*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 에스겔 28:12-17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였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홍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게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사이 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 한낱 피조물인 마귀와 그 세력들

마귀와 악령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가로막는 대적입니다. 마귀는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로서 사탄의 다른 말입니다. 사탄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대적자”란 뜻이고 마귀란 단어는 사탄의 헬라어 번역인 "디아볼로스"에서 나온 말로 “참소자” 또는 “중상하는 자”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과 동시에 사람을 중상하는 자입니다.

본문 13절에 나오듯 사탄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골로새서 1:16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기록합니다. 즉 우주는 물론 모든 영적 존재들까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사탄을 하나님과 대등한 힘을 갖고 하나님과 왕좌를 놓고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이원론적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관점입니다. 피조물인 사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결코 대적할 수 없으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욥을 시험했던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재앙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사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지만 사탄은 피조물이므로 어느 한 곳에 국한되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그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하수인인 악령들 즉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2. 천사로 창조되었던 사탄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마귀와 악한 영들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악하게 창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창 1:31). 마귀는 원래 선하게 지어진 피조물인 천사들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16절의 기록처럼 사탄은 그룹 천사였습니다. 그룹 천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수호하기 위해 에덴 동산의 입구를 지키며 (창 3:24), 그 날개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위하는 (출 25:28), 하나님의 친위대 천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은’ 천사였습니다. 그는 피조물 중에서 가장 완전하게 지음을 받아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소고와 비파’ 를 관장하는 하나님의 찬양팀장으로서 많은 천사들의 칭찬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도 “빛을 간직한 자”라는 뜻을 지니는 “계명성 (루시퍼)”입니다 (사 14:12).

3.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인격을 가진 고등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는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습니다. 사탄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등한 인격을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토록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고 높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대신 찬양과 경배를 받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최초의 불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서 14장은 그 ‘불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16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7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4. 마귀의 사자들

요한계시록 12:3-9은 사탄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천사의 삼분의 일이 사탄의 반역에 가담하였다가 함께 쫓겨 났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란 당시 처소를 이탈한 천사들은 미가엘 천사장이 이끄는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7절). 그들은 결국 전투에 패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9절). 유다서 1:6은 그들에 대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쫓겨난 천사들을 우리는 ‘타락한 천사들,’ ‘악한 영들’ 또는 ‘귀신들’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도 사탄은 자신의 수하인 ‘그의 사자들’ 곧 귀신들을 지휘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성경은 그들을 ‘마귀와 그의 사자들 (마 25:41), ‘용과 그의 사자들’(계 12:7)이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사자들은 앙겔로스로 천사를 가르킵니다. 또한 마귀를 ‘귀신의 왕’ (마 12:24)이라 부르며, 마귀의 사자들을 ‘처소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유 6), ‘범죄한 천사들’(벧후 2:24) 등으로 표현합니다. 마귀의 세력이 원래는 천사였음을 알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5. 얻어야 할 교훈들

1) 나쁜 소식: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다

마귀는 오늘도 우는 사자처럼 그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마귀와 그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원래 천사였으므로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는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한 명의 천사가 앗수르 군대 135,000명을 멸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 보다 조금 낮게 지음을 받은 인간’(시 8:5)은 혼자서는 결코 마귀와 악령들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2) 좋은 소식: 하나님께서 마귀를 이길 힘을 주셨다.

마귀는 원래 천사로 분명 우리보다 강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마귀를 이길 권세와 권능이 허락됩니다. 고린도후서 10:4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무기인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할 때에 그들은 힘을 잃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마귀의 세력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존재입니다.

3)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범죄

사탄의 불의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바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피조물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창조주의 영역을 침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인류 최초의 범죄 역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인생을 망칩니다. 그래서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말로 교만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6은 교회의 지도자를 선임할 때에 새로 입교한 자를 제외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마귀처럼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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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성도 (계 19:9-10)

* 천사 2

* 요한계시록 19:9-10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1. 천사들과 우리의 지위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사도요한은 장차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린양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으며, 그 피값으로 성도들을 사셨습니다. 장차 하늘에서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혼인 잔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 멋진 환상을 바라보고 있는 요한에게 천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해 기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천사의 발 아래 엎드려 그를 경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것을 만류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증언을 맡은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일 뿐이니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천상의 존재이며, 두려운 능력을 가진 존재이고, 또한 거룩한 존재 (시편89:5)이므로 사람이 천사를 보면 자연스럽게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이 천사숭배로 이어지곤 하지요. 그러나 천사는 피조물의 하나로써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 그리고 천사와 성도 사이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1)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인간

우리는 분명 천사보다 조금 못한 자로 지어졌습니다 (히 2:7).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능력적인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반면 천사들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만드셨지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천사가 아닌 우리가 하나님을 더 닮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3은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날, 우리는 천사들을 판단하게 될 존재들입니다. 심지어 현세에 살고 있는 지금도 천사는 신분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높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반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4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우리를 위해 섬기라고 보내신 섬김는 영입니다.

천사들 중 하나님을 반역하여 떠난 자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길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까지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지요. 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고 위대한 사랑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유 1:6은 하나님께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전혀 구원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저 흑암에 갇힌 채 심판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각별히 대접하시는 것일까요?

2) 천사는 기도 응답의 메신저

다니엘서 10장은 힛데겔 강가에서 다니엘이 본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을 금식하며 기도해 왔는데 마침내 천사가 기도에 대한 응답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기로 결정을 내린 그 순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오는 길을 페르샤 제국을 지배하는 마귀의 세력이 가로 막았습니다. 이에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그들과 싸워 주었고 천사는 비로소 다니엘에게 응답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페르샤의 악령들과 싸우는 천사장 미가엘도 모두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천사들이 일합니다. 또한 계시록 8장에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향이 되어 천사들의 손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상달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사들이 기도의 향이 든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계 8:1-6). 성도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돕고 수행하는 것은 천사들입니다.

3) 천사는 재앙과 축복의 수행자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에게 재앙과 축복 등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천사들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때에 재앙을 가져 왔으며 (삼하 24:16-17), 히스기야와 아모스 선지자가 함께 기도할 때에 앗수르의 군대를 멸하였으며 (32:21),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 대왕을 죽였고 (행 12:23), 범죄한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부어 심판의 일부를 수행할 것입니다 (계 16:1).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큰 군대를 이루고 함께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살후 1:7).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지상을 순찰하며 (슥 1:10-11), 악한 영들과의 전쟁을 수행합니다 (단 10:13, 계 12:7-8). 계시록 20:1-3에는 천사가 마귀를 잡아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넣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열왕기상 19:4-7절에는 엘리야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천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극도의 우울감에 빠져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죽여 줄 것을 간구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먹고 힘을 내어 갈 길을 가라 격려합니다.

이처럼 천사들은 하나님의 계획들을 수행하는 일을 감당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주어진 강력한 능력으로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면 인간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동역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4) 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존재

천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사 6:2-3).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들은 또한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들입니다 (계 4:8).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에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눅 2:14). 그들은 또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존재들입니다 (눅 15:10).

천사들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의 샘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 일을 위해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기를 원하십니다.

2. 천사와 우리들의 관계

1) 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식하며 살라

사람들은 천사의 존재를 동화의 한 부분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이 부활도, 영도, 천사도 모두 부인했던 것처럼, 현대에도 자연주의적 사조에 물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마저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실재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의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의 종은 그 군대의 규모에 두려움과 절망감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그의 눈을 열어주기를 기도합니다. 종의 눈이 열리는 순간 그는 아람 군대 뒤로 빽빽히 포위하고 있는 천군 천사를 보았습니다. 오늘도 천사들은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보내심을 받고 우리 주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동참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웅장함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두세 사람이 모인 예배마저도 초라하거나 썰렁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행하는 죄와 불순종도 사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섬김과 헌신과 눈물 역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사실은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과 함께 보며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2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라고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지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연약한 자가 사실은 하나님의 천사일 수도 있음을 얘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천사를 활용하시는 것이지요. 즉 모든 사람을 천사 대하듯 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위험이나 환난에 처해 있을 때에도 천사는 여지없이 우리 주변에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어떤 천사는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보호했으며, 어떤 천사는 감옥으로부터 사도들을 구원했습니다. 어제 묵상했듯 시편 91편에서는 천사들을 명하사 우리의 모든 길에 우리를 지키게 하신다는 약속까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천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천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천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보내십을 받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해서도 안되고, 천사들을 찾아서도 안됩니다.

골로새 교회는 율법주의 이단과 함께 천사숭배자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골 2:18-19).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겸손한 척 하느라 천사를 높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몸된 성도가 성도들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두고 한낱 피조물이자 섬기는 영인 천사를 과장하여 숭배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도 오랫동안 천사를 숭배하는 악습에 젖어 있습니다. 천사들을 위한 기도문이 따로 있을 정도이지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전능하시므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도 오직 한분 예수님 뿐이십니다 (딤전 2:5). 천사는 우리의 중보자조차 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 천사를 찾아서도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의 출현을 구한 예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의 출현을 원하고 천사를 보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 불건전한 호기심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 천사를 구해서는 안됩니다. 단, 구원얻을 후사들인 우리를 위해 천사들을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을 이루시기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더욱 더 구체화시켜주고 생동감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3) 천사들로부터 교리를 받았다는 자들을 조심하라

사실 천사는 결코 사람에게 교리를 주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천사로부터 성경을 넘어서는 계시를 받았다면 그것은 타락한 천사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즉 마귀로부터 받은 거짓 교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교리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 1:8). 요셉 스미스는 모로니 천사가 전해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몰몬교를 만들었고, 마호메트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인간론 등 모든 영역에서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미혹에 넘어가 이단에 빠져드는 것은 이미 예언된 바 있습니다. 심지어 거짓의 영들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기적까지도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4).

우리는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없이 감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무모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이단에 빠지기 쉬울 뿐 아니라, 이단 집단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잘못된 신앙인의 모습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바로 아는 일에 결코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또한 누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해놓은 말씀들을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무분별하게 섭취해서도 안됩니다. 올바른 신학을 가지신 분들의 설교를 많이 접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전하는 거짓 가르침도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건강하면서도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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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어떤 존재인가 (시91:9-12)

· 천사들은 어떤 존재인가?

· 시편 91:9-12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여호와여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 천사들이 지키게 한다고?

시편 91편은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시라 부르며 그분을 거처로 삼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지키고 보호하셔서 그 어떤 화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호하시는 방식 중에 특별한 내용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령하셔서 모든 일에 우리를 지키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 시도한 바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받들어서 돌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자랑을 하도록 유혹한 것이지요 (마 4:6).

천사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말락 야훼’로, 야훼의 심부름꾼이란 뜻이며, 신약에서는 헬라어 ‘앙겔로스’로 ‘사신’ 또는 ‘사자’란 뜻입니다. 즉 천사란 하나님의 전령이란 뜻을 갖는 것이지요. 천사들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들도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 (욥 1:6; 2:1), “거룩한 자들” (시 89:5, 7), 영들 (히 1:14), “순찰자들” (단 4:13, 17, 23) 등으로 명명되어 졌습니다. 골로새서 1:16은 천사들을 “보좌들, 주관들, 권세들”로 구분하였으며, 에베소서 1:21은 여기에 “능력들”을 추가하였고, 유다서 9절에서는 미가엘을 ‘천사장’으로 소개함으로써 천사들에게 순위와 질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창조된 영적 존재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영적인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천사와 인간입니다. 그러나 천사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반면 천사는 영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란 “인격, 즉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육체는 없는 창조된 영적 존재들”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영구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골 1:16). 천사들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 것들에 속합니다. 천사들의 창조에 대해 성경에서는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148:5는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세계와 마찬가지로 천사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존재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절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모든 세계 안에는 당연히 천사도 포함이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세계는 천사까지도 말씀으로 창조되어졌습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므로 (히 1:14) 물질적인 몸이 없고 (눅 24:39), 결혼도 하지 않으며(마22:30), 죽지도 않습니다 (눅 20:3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볼 수있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천사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때때로 육신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3. 천사의 종류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룹천사, 스랍천사, 생물들 등입니다. 시편 18:10은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니신다고 했으며, 그룹 천사들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찬 에스겔서 10장은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고 계신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천사들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 휘장에는 그룹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으며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 역시 그룹천사 두 명이 양 날개를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그룹들은 에덴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창 3:24). 이 경우에도 그룹들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에덴에 임재하심을 말해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해주기로 하신 곳에는 늘 그룹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사람의 얼굴에 두 개의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가 됩니다.

스랍천사는 이사야서 6:1-7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총 6개의 날개를 가졌으며, 두 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개로는 발을 가리며, 나머지 두 개로는 날아 다닙니다.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그들이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렸던 이유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 앞에 서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사야가 부정한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할 때에 숯불을 입에 대어 그 부정함을 씻어 주었던 것도 바로 스랍천사였습니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는 보좌 주위에 존재하는 특별한 생명들을 소개를 합니다. 그들은 사자, 황소, 사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네 가지의 생물들은 예수님의 네 가지 얼굴들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므로 사자의 면모를 가지시며, 인간의 죄를 씻는 희생 제물이시므로 소의 속성을 가지시고, 인간을 대표하여 죽으셔야 하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늘의 왕인 독수리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4.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보호하는 천사들

천사들은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물론 피조물일 뿐이므로 무한한 능력을 갖지 못했지만 적어도 인간의 영역 밖의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천사들보다 못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히 2:7).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는 능력을 가졌으며 (시 103:20), 능력, 주관들, 정사들로 불려 졌습니다 (골 1:16).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했을 때에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목을 놓아 부르짖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보내심을 받은 천사는 혼자서 앗수르 군대 135,000명을 하룻밤 사이에 죽여버리고 맙니다.

천사들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수호천사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나왔지요. 오늘 본문인 시편 91:11-12 은 천사들이 인간을 보호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마저 무시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면서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마 18:10). 다니엘서 6장에서는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지키기 위해 천사들이 사자들의 입을 봉하였으며, 사도행전 12장에서는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묶고 있던 쇠사슬과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풀어 줍니다. 베드로가 돌아와 문을 두드렸을 때에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은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데가 미쳤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도 로데가 계속 진짜라고 하자 이번에는 베드로의 천사라고 얘기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해놓고 기도대로 되었는데, 믿지를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와 너무 닮았습니다. 위 구절들은 모두 천사들이 우리를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각 사람마다 늘 붙어 대인 방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방어를 하며 지키고 필요에 따라 개인을 지키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5. 오늘도 천사들을 보내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천사들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사랑의 대상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내일 더욱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지만 오늘의 내용 중에도 이미 소개되었습니다. 우선 천사가 아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천사들은 다른 피조물들처럼 말씀으로 지으심을 받았지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존재입니다 (창 1:26-27).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능력으로는 천사보다 못하되 신분으로는 천사보다 나은 존재가 됩니다. 히브리서 1:14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말하며, 명확히 천사가 우리를 위해 보내어진 존재들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마다 천사들은 우리 기도의 향을 금대접에 담아 하늘로 상달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 기도하십시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거나 험담하거나 힘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각 사람을 지키는 천사가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를 얼마나 인식하고 살고 있습니까? 천사가 우리 주변에서 함께 하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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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와 기도 (갈 6:7-10)

* 하나님의 섭리와 기도

* 갈라디아서 6:7-10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 심음과 거둠의 법칙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오해와 혼란을 불러 일으키곤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스는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오해는 결국 믿음의 행위나 전도나 기도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섭리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편으로 우리의 기도를 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물론 인생사가 꼭 심는대로 거둬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빈둥대도 편하게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심고 썩을 것을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심고 영원한 곳에서 누릴 영광을 얻게 된다는 데에도 변함이 없지요.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 열매를 따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죽음 이후에 열매를 따기도 할 뿐,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당장 열매가 안 보여도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날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2. 결과를 위해 필요한 것, 행동

요셉의 일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러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측면에 있어서도 그의 일생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그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배양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결정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유심히 보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면서도, 인간은 각자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을 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결국 장자권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먼저 멸망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하게 피의 복수를 함으로써 아버지를 곤궁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지파끼리 모여 살지 못하고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서 사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은 동생인 요셉을 시기하여 살해음모를 꾸몄습니다. 반면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형들 위에 우뚝 서며 11번째 아들임에도 장자권을 얻게 되지만, 형들은 동생 앞에 찾아와 절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자의 인간 행동에 대한 책임 역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9: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것은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야곱이 택정된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행위를 보면 여전히 각자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육체의 것만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 반면 야곱은 이기적이고 욕심많은 부정적인 성정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몹시 갈망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야곱의 영적 심음을 영적 거둠으로 갚으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전혀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라는 단어도 등장을 하지 않지요. 그래서 에스더서는 정경에서 빠질 위험에 처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도 개인과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너무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샤에서도 여전히 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을 멸족시키려 했던 하만은 자신이 만든 교수대 위에 매달리는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지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어 집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리고, 탄 음식을 습관처럼 먹으면 대장암에 걸리며,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아파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법칙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극명합니다. 말씀을 늘 접하는 사람은 말씀을 더 많이 알 수밖에 없고, 기도를 옳게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 안에서 각자가 걸어야 하는 행로는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달라집니다.

3. 가장 확실한 신앙 행동, 기도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성도가 기도할 것을 명하며, 믿음의 기도가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며 또한 기도가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기도를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4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은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2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으며, 요한복음 16:2는 구하면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진공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고, 피조물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보존과 통치 뿐 아니라 협력이라는 주제를 아예 따로 넣는 학자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협력 수단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성도들과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이 이유들로 인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2) 기도를 통해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3)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4)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4. 믿음과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기도가 하나님의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언행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투성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들을 멸하겠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게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그 백성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출 32:14).

역대하 7:14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듣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의 약속을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 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용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찾아가 말씀도 전하시고 치유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소수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 외에는 하실 수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라고 하는 행동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행동이 행해지는 곳에서 일을 하시기 원하시는데, 그런 행동있는 신앙이 나사렛에서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amazed” 되셨습니다. 믿음이 너무 없어서 깜짝 놀라신 것이지요.

마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요청을 했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위를 걸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위에 있던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었지만, 베드로에게만 그 혜택을 주셨습니다. 오직 베드로만 주님께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으로 12년을 고통받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음을 얻었고,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도 자신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고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이란 도무지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함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과 고쳐주기를 간청하는 기도도 함께 원하십니다. 즉 목적을 원하시면서 수단도 함께 원하시는 것이지요.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로 하신 일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신 것 역시, 모세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었다기 보다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변경시킨 것으로 보이므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된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을 하신 것이지요.

5. 기도보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당황스럽고 낙심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은 우리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궁극적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러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질병을 고쳐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바울의 질병을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 질병으로 인해 사도바울은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면서도 자고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않게 하는 역할을 그 질병이 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도를 통해 스스로의 질환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뜻대로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응답에는 Yes, No, Wait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Yes를 원합니다. 그러나 No나 Wait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 응답이 No일 경우가 더 멋진 응답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지성을 뛰어 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도 말고, 쉬지도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 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응답이 No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응답이 되지 않는 기나긴 Wait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하는 기도 본연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를 파트너로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중요한 일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입니다. 그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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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와 죄악 (출 14:3-7)

* 하나님의 섭리와 죄악

* 출애굽기 14:3-7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1. 악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악은 하나님의 책임 아닌가?

애굽의 화려한 문명은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거느리고 있었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내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떠나는 순간 수많은 노역을 감당해왔던 일꾼들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끔찍한 재앙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 보내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바로는 끔찍한 열재앙을 맛본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막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게 되자 바로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금 그들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4절의 말씀입니다. 물론 5절에서는 바로와 신하들이 스스로 마음이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쫓았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과 바로 스스로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이 둘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표현은 열재앙이 임하는 동안 이미 수차례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라면 바로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 아닐까요? 이왕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실 거면 좀 순탄하게 재앙없이 나가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요? 왜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게 해서 굳이 홍해로 가게 하셨을까요? 아예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게 하신 것일까요?

이런 수많은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질문들을 하나로 압축한 질문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악과 고통을 허락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가 악한 날과 악한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의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죄와 악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그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3-14). 한편 요한은 우리가 악을 행하는 이유를 탐욕이라고 규정을 하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6).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한 죄와 악이 하나님의 통치 활동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의 섭리와 죄악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죄와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지속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아예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로 설명하면서 ‘협력’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존’과 ‘협력’과 ‘통치’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1) 죄를 막으시기도 하시고, 2) 죄를 묵인하기도 하시며, 3) 죄를 지도하기도 하시고, 4) 죄를 제한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지요.

1) 죄를 막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된 행동을 그만두게 하시거나 가로 막으실 때가 있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그랄 지방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그녀를 데려 갔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 동생인 줄로 알았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취하는 일이 고대 근동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아브라함이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는 남의 아내를 취하려는 악의가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사라를 범하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다윗은 이처럼 죄를 막으시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자기를 죄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간구한 바 있습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 19:13).

2) 죄를 허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막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이 자범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던 것도 사실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죄를 막지 않고 자율에 맡겨 두신다는 사실때문이었습니다. 늘 범죄를 막으신다면 그런 기도를 드릴 이유도 없었겠지요. 창세기 20장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죄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불신앙의 행위였으며, 초범이 아닌 재범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막지 않으셨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의 생사 여부가 결정되게 하셨으며, 아비멜렉으로부터 소와 양과 종과 땅까지 받게 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행 14:16). 그는 또한 로마서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셔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23-24),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셔서 동성애를 행하는 범죄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26-27) 말합니다.

3) 죄를 지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가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면서 그로부터 선이 나오는 방식으로 죄들을 지도하기도 하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시기심으로 인해 요셉을 죽이려는 악한 의도를 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죄의 동기를 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시점에 미디안의 상인들이 지나가게 하심으로 인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하십니다.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이 됩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해 요셉은 보디발 집안의 총무가 됩니다. 그 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정욕을 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품은 정욕은 범죄행위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그로 인해 요셉은 감옥에 가야 하는 억울하고도 악한 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중에 애굽 전체의 총무가 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사람들의 악한 의도와 행위들이 결국은 선한 곳을 향해 다리를 놓고 있지요. 그래서 요셉은 창세기의 말미에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는 멋진 고백을 합니다 (창 50:20).

하나님은 마치 기술이 탁월한 씨름선수나 유도선수와도 같습니다. 기술이 월등히 탁월한 씨름 선수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쓰는 힘을 이용하여 힘의 방향만 틀어 놓으면 상대방은 자기 힘으로 인해 자멸해 버리고 맙니다. 에델버트 슈타우퍼라는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역전의 법칙’이란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악한 상황, 악한 날을 뒤집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선으로 바꿔버리십니다.

사탄은 예수님만 죽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격동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자극한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인들도 모두 죄악을 범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행한 악은 결국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사건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이지요.

4) 죄를 제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악한 행위를 막지 않으시지만, 악한 사람들과 악령들이 하는 일의 정도나 결과를 제한하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사실을 잘 압축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3. 악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과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선을 위해 악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 애굽의 노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과정을 죄와 사망의 노예에서 인류가 해방되는 과정으로 예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는 애굽사람들의 행위는 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인류 전체 구원에 대한 청사진으로 활용하십니다. 또한 당시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심판을 받을 정도로 극에 달하는 시점을 기다리는 과정이었으며, 이스라엘을 나라의 규모로 키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노예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한 채, 풍요에 젖어 애굽에 머물기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왜 완악하게 하신 것일까요? 그래야 열재앙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열재앙은 사람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애굽의 우상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았던 400년 동안 애굽의 우상숭배 문화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우상들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 개구리, 이, 파리, 가축, 질병, 하늘, 곡식, 태양, 바로왕 등이 모두 숭배의 대상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것들을 타겟으로 재앙을 내리셔서 우상이 가짜 신임을 알게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왜 마음이 돌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게 하신 것일까요?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천하지에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알고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애굽의 고센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고작 삼일 길밖에 안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쫓아오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짧은 길을 두고 홍해 바다 앞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는 물론 애굽 사람들의 마음까지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베푸셨고, 절대로 무너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애굽의 군대는 순식간에 바다 속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이자, 이정표요, 표식과도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회개와 회복과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홍해 바다를 추억했습니다. 그것이 바로와 애굽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이유였습니다.

4. 악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다.

마음이 완악해진 바로와 애굽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을 허용하셨고, 또한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악행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들의 몫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편하게 놀고 먹으며 향락을 누리려는 것이 그들의 악행의 근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악한 마음을 하나님의 계획에 이용하셨을 뿐입니다. 마음이 악한데 사정이 안되서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살해의지나, 살해계획이나, 살인미수나, 살인이나 모두 동일하게 살인으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바로 스스로 그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이 혼용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악했습니다. 동일한 인간을 노예로 부려 문명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활용하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묵인하시거나 이용하시거나 지도하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악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피조물을 사람이건 천사건 심판하십니다.

5. 역전의 명수께서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와 악한 날까지 그분의 목적과 영광과 우리의 선을 위해 이용하시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친구시며 우리의 남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코너에 몰려 있다면, 곧 있을 하나님의 카운터 펀치를 기대하십시오. 지금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악한 자와 악한 날이 있다면, 곧 있을 하나님의 되치기 한판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악한 날의 힘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전세를 뒤집어 가장 선하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선물하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기도하며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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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2 – 통치 (단 4:33-35)

* 하나님의 섭리2 – 통치

* 다니엘 4:33-35

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1. 하나님의 통치

다니엘 4:35절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는 멋진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고백을 한 사람이 다니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라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니엘 외에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신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하셨고,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여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교만하여서 여전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꿈을 주셨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그를 특정기간 벌하시겠다는 꿈이었고, 다니엘의 꿈 해석은 그 일에 대한 예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받은 벌은 자신이 소인 줄로 착각하고 들판에 나가 풀을 뜯어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7년을 소처럼 풀을 뜯으며 살다가 기한이 차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다시 왕좌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경험한 후에야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나라와 천사와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2.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다스리십니다.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물, 개구리, 이, 파리, 병원체, 우박, 메뚜기, 흑암 등은 모두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징계의 대상은 애굽사람들은 물론 그들이 믿는 신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사람들은 각각의 자연물들을 관장하는 신들을 만들어 놓고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자연물을 마음대로 다스려 애굽을 징벌하는 동안 그들의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신이시며, 그 분은 창조주이시므로 자연을 마음대로 통치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도 엘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신으로 모셨습니다. 바알은 비를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비가 없으면 농사도 목축도 불가능 했던 이스라엘의 지형적 특성상 비의 신이라 여겨진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과 바알숭배자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하늘의 문을 닫고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를 잠궈 버리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 1:850의 대결을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해서 먼저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결이었지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춤을 추고 자신들의 몸을 칼로 자해하며 피투성이가 된 채 라이브쑈를 했지만 그들의 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3년 반이나 닫혔던 하늘을 여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하늘도 비도 불도 모두 하나님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입니다.

애굽의 10재앙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무생물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동물들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1:850의 싸움 직후 극도의 외로움과 우울감 속에 지쳐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 떼를 보내셔서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신성은 바로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통해 드러나곤 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시기도 하시고,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던 물고기를 두 척의 배에 가득 채울만큼 잡히게 해주시기도 하십니다.

3.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국가들의 운명까지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십니다 (단 2:21).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 이방 왕 느부갓네살을 맘대로 세웠다 던졌다 다시 세우기를 식은 죽 먹듯 하십니다. 다니엘을 통해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제국들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해주셨고 수백년을 흐르며 그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강설합니다 (행 17:26). 각 족속과 나라가 어떤 경계 안에서 살게 될지, 각 나라가 얼마나 지속될지 등의 모든 흥망성쇠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4. 개인의 삶의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연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각 개인의 삶을 다스리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한나의 찬양처럼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삼상 2:6-7).

다윗의 일생은 한 개인의 삶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됩니다. 그는 작은 촌동네 베들레헴에서 8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사무엘이 새로운 왕을 찾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형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지만 다윗은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집안에서마저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목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는 불과 십대 소년의 몸으로 민족의 대적 골리앗을 죽이는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정치 무대에 당당히 입문합니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던 그의 인생은 그를 시기한 사울왕에게 쫓겨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면서 꼬이고 맙니다. 이후 30세에 왕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그저 도망자의 삶이었습니다. 곳곳에 원수들과 죽음의 그림자들이 그를 옥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모든 비방과 두려움 속에서 드리는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시 31:14-15).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던 그의 믿음과 승리는 다윗의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그보다 더욱 위대한 모습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다윗의 낮아지고 높아지는 모든 족적들에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어두움의 터널 속에서 바로 그것을 발견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교만하거나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고 털어버릴 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목숨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갈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으로 하여금 적어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생사를 넘나드는 위협과 비방과 치욕 속에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승리만 있으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골리앗과 싸울 때도, 사울에게 쫓길 때도, 아미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때도 아닌, 왕이 되어 한가로이 궁전의 옥상에서 거닐던 때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올라 평온할 때에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고, 결국 그의 일생 전체를 뒤흔드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가졌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가르쳤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교만해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경고합니다 (고전 4:7). 물질을 가졌건 재능을 가졌건 믿음을 가졌건 지식을 가졌건 영적은사들을 가졌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십시오. 우리 스스로 갖게 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가질 수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5.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결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유로와 보이고 철저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활동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굴로 도망갔습니다. 사울은 그 굴 속에 다윗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굴로 들어갑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벱니다. 다윗이 굴로 피한 것도 사울이 굴로 들어간 것도 모두 자유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었을까요? 사무엘상 24:10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의 목숨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정권을 사울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울은 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활에 맞아 중상을 입고, 이방인의 손에 죽기 싫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건 하나님의 심판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대상을 향하여 찾아갑니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시대로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였으며, 애굽사람들은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대로 물질을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유를 출12:36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신 것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다스리시는 장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샤왕 고레스 칙령에 의해 돌아오는 장면에서 명백해집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샤 제국의 왕이었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로 돌아가게 하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을 중건하기 위해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건에 필요한 물질까지 주어서 돌려 보냅니다. 사람의 마음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장면이지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서는 것입니다 (잠19:2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뜻과 계획을 아예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뜻도 세우고 계획도 세우고 마음의 소원도 두되, 주님 안에서 그것들을 세우고, 주님 안에서 경로를 바꾸기도 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6. 우연으로 위장된 하나님의 통치

어제도 짧게 다루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연으로 보이는 사건들마저 다스리십니다. 잠언 16:33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를 일으키셔서 그가 타고 있던 배를 매우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선원들은 누군가가 악을 행해서 재앙이 임한 것으로 판단하고 제비를 뽑아 그 사람을 가리고자 합니다. 제비뽑기에 당첨된 것은 요나였습니다. 제비뽑기는 철저히 운처럼 보이나,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이지요.

7. 사람들과 마귀의 악한 행위들조차도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윗의 몇 안되는 실수 중 하나는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힘이심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만하여져서 자신의 군사적 힘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동안 창궐한 전염병으로 인해 7만명이 죽는 참극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동기가 사무엘하 24:1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킨 것으로 나오고, 역대상 21:1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킨 것으로 나옵니다. 도대체 다윗이 범죄하게 한 것은 하나님일까요, 사탄일까요? 만약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범죄하게 하고 벌을 내리신 것일까요? 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목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자행했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매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다윗이 왕으로 버티고 있으니 국가적인 징계를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 한켠에 존재하고 있는 교만의 씨앗을 격동하여 다윗이 범죄케 했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을 격동하게 사용된 자는 사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뜻을 위해 다윗의 범죄도, 사탄도 모두 주장하시고 활용을 하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다윗의 심령에 존재하는 교만의 씨앗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이스라엘의 범죄도 다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더욱 명확히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인해 인류를 구원하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수많은 악역들이 등장을 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거짓말로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웠으며,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물론 이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지요. 사탄과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없었다면 십자가 대속이라는 하나님의 계획과 성경의 예언들은 성취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인들과 사탄까지도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지요.

글을 묵상하시는 동안 아마도 수많은 질문들이 생기셨을 것입니다. 악인과 사탄까지 주장하신다면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등의 의문이 일어났을 줄로 압니다. 내일부터는 그러한 내용들을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도, 코로나도, 우리 주변의 환경도, 우리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심지어는 악한 영들과 천사들마저도 모두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은 좋은 교제권과 좋은 환경을 누리고 있겠지만, 또 어떤 분은 악한 사람과 악한 환경 가운데 고통받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건 오늘 소개된 다윗을 묵상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며, 결국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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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1 - 보존 (빌 4:10-13)

* 하나님의 섭리1 – 보존

* 빌립보서 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 하나님의 섭리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의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이는 사도바울의 모습은 옥에 갇힌 자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밝아 보입니다. 그는 옥에 갇혀 있지만, 심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옥중에서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가 아예 기쁨입니다. 누가 봐도 암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바울에게 능력 주시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빌4:19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천에 처하기도 하고, 풍부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는데, 그 비결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잘 조화되어 돌아가도록 장치를 해두신 후 세상을 떠나버리셨으며, 피조세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신 분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이 세상을 보존하고, 통치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만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섭리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피조물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계심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보존과 통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섭리란 1) 모든 피조물들을 존재하도록 보존하고 유지하시고 지도하시며 (보존), 2) 하나님의 목적대로 피조물들을 통치하시는 (통치)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에 대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2. 보존의 섭리

1) 피조세계를 지으신 특징대로 보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세계가 원래의 특성대로 존재하고 유지되도록 보존하십니다. 히브리서 1:13은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느 9:6).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고 붙드시지 않으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에 만물에 주셨던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하여 반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이유 역시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 때문입니다. 아메바는 아메바 대로 사람은 사람 대로 각자 보존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 섭리에 의해 실험실에서 반복적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공룡이 새로 진화했다는 말도 안되는 기적을 믿으며, 4쌍의 염색체를 갖는 파리와 23쌍의 염색체를 갖는 인간이 같은 조상에서 출발했다는 미신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꿀을 발라 세상에 내어 놓기도 합니다. 진화설은 과학이 아니라, 사실 과학에 대한 모독이요 미신적이고 맹신적인 종교의 하나일입니다. 일상에서 발견되어지는 보존의 법칙들을 무시한 채, 진화되었다는 전제에 억지로 모든 현상을 짜맞추기 때문입니다.

2) 무생물, 식물, 동물들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의 행위에 협력하셔서 그 특징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욥기 37:6-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하나님께서 눈과 비를 내리도록 하시면 사람들은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들어가야 하고, 짐승들 역시 그것을 피해 각자 처소에 머물러야 합니다. 눈과 비는 인간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일들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피조물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땅에서 풀이 자라는 이유는 가축들과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시104:14), 별들이 운행하는 것 (욥 38:32), 아침이 오는 것 (욥 38:12) 등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어주시는 분이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마5:45). 햇빛과 비를 먹고 자라는 식물들과 생태계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각종 동물들을 먹이시고 살리십니다.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 10:29).

3) 보존의 정점, 인간

땅에 자라는 들풀을 입히시고, 날아가는 참새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들풀이나 짐승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보존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이유도 (마 6: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신 이유도 (마 10:31) 모두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에 근거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가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을 들라 하면 역시 사자굴 속의 다니엘과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친구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를 사자굴에 던지도록 음모를 꾸몄던 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용광로의 불에 던져졌지만 아무 일없이 불 속을 거닐다가 불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을 불 속에 던진 사람들은 그 열로 말미암아 타죽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보존하신다는 사실이 이보다 극명할 수는 없습니다.

3. 보존의 이유,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만물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10:29).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롬 8:35),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롬 8:38-39).

4. 풍랑 속에서의 보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신다는 말은 신자에게 위험과 결핍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위험이나 시련이나 박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존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큰 시련이 올 것을 미리 예고해 주셨고, 베드로 역시 성도들이 겪어야 할 고난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제시되었듯이 바울은 풍부에 처하기도 했지만, 빈곤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따스한 햇살만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모는 것일까요?

첫째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손길을 극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기 때문에 사자의 입마저 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 수 있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풀부불에 던져졌기에 불속에서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진위가 시험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 인생은 망한 인생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끝자락에 벌거 벗은 채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남겨진 옷이란 결국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맺었던 사랑의 관계로 지어진 옷 밖에 없습니다. 그 예복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수치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헐벗은 상태를 알게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일을 위해 위험과 풍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시련과 궁핍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비결을 알아가며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4절은 모든 것들 심지어는 악한 사람과 악한 날들마저도 하나님께서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도에게 악한 사람을 붙여 놓으시고, 악한 날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금이 되듯, 우리의 믿음 역시 불의 연단을 통해 순수해지며, 우리의 변화받지 못할 심령과 태도와 행위들이 정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성도를 보존하시고 지키시고 성장시키신다는 것이지요.

5. 하나님의 크고도 섬세한 손길

하나님의 보존의 손길은 결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하나 하나 섬세한 터치를 잊지 않으시는 미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민족과 열방을 아우르는 장엄한 것이기도 하며, 수천년을 아우르는 거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멀리 보실 뿐아니라 자세히 보시며, 크게 보실 뿐아니라 작게 보시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요셉이 형들의 손에 팔려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하는 모든 행보에 형통함을 주셨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섬세한 터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개인적 삶은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으로 이주를 하는 민족적 운명과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어지는 출애굽 사건은 요셉 개인의 삶이 어떻게 민족적인 운명으로 판이 커졌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청사진으로 이어집니다. 요셉 개인의 삶에 섬세하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사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6. 우연 속 필연

모세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이 지나치게 강성해진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번성을 제한하기 위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달을 숨겨서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모세가 담긴 상자는 강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던 이집트의 공주에게 발견이 됩니다. 모세는 결국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애굽의 왕자로 살아가게 되고 모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게 젖을 먹이면서 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모세는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담은 상자가 바로의 딸에게 발견된 사건은 우연이었을까요 필연이었을까요? 룻기 2:3에 보면 모압 여자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는데, 후에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열왕기상 22:34에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이 소개되는데, 그는 전쟁 중에 한 사람이 우연히 쏜 화살에 갑옷의 솔기를 맞아 죽습니다. 겨냥도 하지 않은 화살이 갑옷에 있는 손가락만한 빈틈을 정확히 맞춘 것이지요. 이로 인해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아합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성취됩니다. 우연히 쏜 화살은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글로리 교회 성도로 함께 모이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여러분이 저를 만나고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지금 이 시간에 제가 공들여 쓴 글을 읽으며 위로를 얻고 있는 이 순간이 우연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못하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하고 자상한 손길, 하나님의 시공을 뛰어넘는 크고도 장엄한 손길, 그 손길이 짜아내는 기가막힌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손길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고, 염려도 말고, 힘을 내십시오. 두려움과 염려를 일으키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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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 (계 4:10-11)

• 하나님의 창조

• 요한계시록 4:10-11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1. 무로부터의 창조

사도요한은 성령으로 감동된 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영광을 봅니다. 그 보좌 앞에서 24장로들이 엎드려 자신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세토록 계신 분이시지만, 만물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모든 만물은 창조의 시점이 있으므로 어떠한 피조물도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천상의 보좌 앞에서 24장로들이 찬양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 세상에는 그 어떠한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일말의 재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적인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선포합니다 (요 1:3).

2. 아담과 하와만 직접 창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방법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각종 피조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만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손수 빚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직접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첫 여인인 하와 역시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하신 후 갈비뼈를 취하시고 그것으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신 진화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되 진화를 통해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명확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손수 빚어서 만드셨음을 말합니다. 바울 역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라고 기록하면서 (고전 11:8),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지어졌다는 창세기의 설명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유신 진화론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진화설이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게 느껴지거든, 더 공부를 해서 성경을 믿던지, 아예 포기하고 진화설을 믿던지 할 일이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허탄한 설화와 짬뽕을 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특별한 존재로 대하십니다. 인간은 다른 짐승보다 조금 나은 존재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존재를 자꾸 무기물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짐승에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니,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 때에라야 비로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논할 근거가 생깁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들에 있어서 인간이 짐승보다 존엄한 이유란 인간이 짐승보다 탁월하다는 것 뿐입니다. 탁월함이 존엄성의 근거가 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 족속입니다. 흑인도 황인도 홍인도 백인도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하담과 하와의 근원은 물론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므로 피부색이나 출생지나 지위나 학식이나 재력 등으로 사람이 차별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대상자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차별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C.S. 루이스는 교만한 신자에 대하여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자기 머리속의 하나님을 스스로 창조하여 믿고 있는 우상 숭배자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사람에게 등급을 매겨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행위입니다. 영적인 교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지식이 많다는 것,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 하나님과 더 친밀하다는 것,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한다는 것 등의 사실이 다른 사람을 낮게 보는 근거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귀합니다.

3.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초월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게서는 그 초월적인 능력으로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고 지탱하시기 위해 피조물들 안에 머무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내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의 사상들이 생겨납니다. 어떤 자들은 초월을 믿지 못하고, 어떤 자들은 내재를 믿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을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과 초월과 내재를 모두 인정하는 복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지식을 소유하고도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온전히 체화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1) 유물론적 그리스도인

유물론자들은 하나님의 초월도 내재도 부정합니다. 이들은 모든 물질세계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말도 그러한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에 그러할 ‘연’을 사용하지요. 자연이 원래부터 스스로 그렇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물론자들에게는 물질세계가 전부입니다. 인간의 의식도 뇌라는 물질의 산물일 뿐입니다. 이들이 아무런 고상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이들의 관심은 결국 물질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유물론자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일보다, 물질을 쫓는 일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영원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 채, 돈을 쫓아, 물질을 쫓아, 외양을 쫓아, 사람을 쫓아, 힘을 쫓아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들을 유물론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리스도인을 위장한 유물론자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울 지경입니다.

2) 범신론적 그리스도인

범신론자들은 내재는 인정하지만, 초월을 무시하므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 대해 무지합니다. 이들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전체 혹은 하나님의 일부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명상, 요가, 참선 등이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정점에는 자기 스스로 신이 된다는 해탈과 성불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려는 시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 마음에 평안이나 주는 존재 쯤으로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선하심도 초월하심도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들은 범신론적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리스도인을 위장한 범신론자일까요?

3) 이신론적 그리스도인

이신론자들은 초월은 인정하지만 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존재이시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세상이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지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일부 이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심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심판의 날에 한정된 것일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신론자와 같은 신앙을 갖고 살아갑니다. 주일에 한번 예배나오는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심판을 면하기 위해 착하게 살려 애를 쓰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역사하시며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그저 종교활동이나 종교놀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삶에 관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열심으로 찾거나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4) 이원론적 그리스도인들

한편 하나님과 우주가 영원토록 나란히 존재한다고 믿는 이원론 사상도 있습니다. 이원론자들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과 하나님이 서로 대적하며 투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목적 가운데 창조하셨다는 것도, 세상을 목적에 맞게 통치하신다는 것도,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도 모두 부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영적인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악한 영을 보거나 느끼거나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우주 안에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존재하여 대립하며 누가 이길지 최종 결과를 알 수 없다라고 믿는 것이지요. 악한 영이 더 강하다고 느껴질 때에 그들은 악한 영의 힘에 의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뉴에이지 운동이나, 사탄 숭배 사상 등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악한 영의 존재를 체험한 후 이원론적 세계관에 빠져버리곤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귀신에 들린 사람을 목격하거나, 예수를 믿는데 여전히 악령이 공격하는 것등을 경험하면서 마치 악한 영이 하나님과 대립하는 한 축인 것처럼 오해를 하고 마는 것이지요. 이 경우 인간은 하나님과 마귀의 전쟁 사이에서 등이 터지고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하나님과 비견될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심지어 예수 이름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인간에게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마귀의 세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세력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우리가 대적하면 우리를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한번도 악령을 두려운 존재로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악령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이 더러운 악의 세력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쫓겨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세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전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시 19:1). 피조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절정은 물론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고전 10:31). 모든 피조물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무엇인가를 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행위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5. 매우 선하게 창조된 세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셨으므로 세상은 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드시고 기뻐하셨던 물질세계를 우리의 악한 의도와 탐심으로 오용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지속적으로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합니다. 돈은 물론 모든 좋아보이는 상품들과 아름답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까지도 유혹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이 피조세상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심히 기뻐하셨던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행이나 금욕생활은 거룩해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5).

이 피조세계는 가장 귀한 피조물인 인간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누리느라 하나님을 망각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에 선하게 창조했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초월과 내재를 모두 체화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선하게 창조한 세상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에 모든 초점을 두고 살아 가십니까? 오늘 하루 우리가 묵상할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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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적 속성 4.2 - 능력 (렘 32:17-19)

• 공유적 속성 4.2 – 능력

• 예레미야 32:17-19

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1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19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1. 전능하신 하나님

어제는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선한 의지와 멋진 계획이 있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면 그 의지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해 행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으므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전적인 능력으로 천만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시고,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셔서 결국 사람들의 행한 열매대로 보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성이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의 선언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당연히 세상의 주인이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세상을 버려두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며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역사주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세상을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에 이를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장사한 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구원주가 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1) 하나님의 창조, 2)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3) 심판, 4)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 등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진 주님이시다라는 표현 안에는 1) 창조주, 2) 역사주, 3) 심판주, 4) 구원주, 부활의 주 등이 포함된 것입니다.


2. 우리을 위해 전능하심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절대주권, 창조, 역사, 심판, 부활, 구원 등이 서로 한 덩어리로 묶여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우리와 무관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이며, 현재의 삶과 장차올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는 늘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공급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엡 3:20)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 17:1). 전능자 하나님은 100살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의 계보를 시작하십니다. 그로부터 약 2,000년 후 마리아에게 찾아왔던 가브리엘 천사는 처녀인 마리아가 아이를 낳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눅 1:37). 전능하신 하나님은 처녀의 몸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시면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9:26). 죄악으로 인해 멸망이 결정되어버린 민족의 운명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갈 것을 명확히 하시지만 동시에 바벨론으로부터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때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패역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일과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일을 모두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려집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바벨론 제국마저도 강대하게도 하시고 쇠퇴하게도 하십니다. 또한 심판자가 되기도 하시고, 구원자가 되기도 하시지요.


세상의 재판관들은 무능함으로 인해, 또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판단을 굽게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잘못된 판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는 모든 것을 아는 능력과 모든 현명한 지혜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계시록 16:7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시니 심판 역시 참되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질서있게 운영하시며, 역사를 쥐락 펴락하시고, 현 세상과 장차올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자들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기를 즐거워 하시고, 그 무한하신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3. 전능하지 않으신(?) 하나님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전능하지 않으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실 수없는 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이나 속성을 벗어나는 일을 하실 수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거룩한 뜻을 행하실 수 있음”으로 정의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만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못 받으시며 (약 1:13), 자신을 부인하실 수도 없습니다 (딤후 2:13).


“전지전능의 역설”이라고는 것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좋아하는 논리인데,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전능자는 자신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창조할 수 있는가?” 만약 창조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 돌을 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자가 아니게 됩니다. 만약 창조할 수 없다고 말하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자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막힌 논리이지요? 그들은 이렇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진정한 바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능가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전능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창조하실 수 없습니다. 전능이라고 하는 속성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전능합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지 않다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렇게 주장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심판할 능력이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신 지혜의 단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깐족거리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습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자가 복된 것입니다. 전능자 앞에서 지혜자는 우둔한 자가 되고, 절대자 앞에서 능력자는 먼지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 11:7-9).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측량할 능력도 전능자를 알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자는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어 망할 것이고, 능력을 자랑하는 자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어 망할 것입니다.


4. 전능자의 그늘, 전능자의 팔

하나님께서는 전능자를 의지하는 자에게 그늘이 되어 주시며, 그 전능하신 팔로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전능자의 사랑을 받는 복된 자들입니다. 너무나도 따가운 햇살아래 있다면, 너무나도 악한 밤의 기운 아래 있다면, 전능자의 그늘로 피하십시오. 아무리 악한 자들이 삼키려 달려 들어도, 아무리 악한 날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전능자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악한 길에 의미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늘 선하시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선한 의지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악한 것을 주실 능력이 없으십니다.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 힘있게 살아가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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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적 속성 4.1 - 의지 (행 4:25-31)

* 공유적 속성4.1 – 의지

* 사도행전 4:25-31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1. 알쏭달쏭한 하나님의 뜻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공회에 끌려 갔다가 풀려난 후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너무도 여러가지 의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미 예언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미 예언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 모든 예고된 뜻을 이루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다는 것 역시 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점들도 생겨나게 합니다.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능력의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께서 학대받는 것을 내버려 두셨으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위협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가? 악한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복음의 일꾼들을 학대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베푸시는 분이 왜 인간을 고통가운데 내버려 두시는가? 인간이 고통받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러한 의문들은 불신자들은 물론 성도들에게 까지도 몹시 혼란스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인격적이란 말은 마음, 즉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완전한 지식, 지혜를 가지셨다는 것과 사랑, 긍휼, 질투, 인내, 진노 등의 감정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과 감성과 더불어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란 하나님 자신과 온 피조물의 존재와 행위에 필요한 모든 행동을 승인하고 결정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의지는 선택을 낳고 선택은 결정을 낳으며 결정은 행동을 낳습니다. 선택과 결정과 그에 따른 모든 행동들이 다 의지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또한 의지를 행하기 위해서는 그 의지를 실현케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 할지라도 능력이 없으면 의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 (엡 1:11)라 규정합니다. 우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계 4:11). 구약과 신약 성경이 모두 세상의 정부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진 것이라 말합니다 (단 4:32; 롬 13:1). 오늘 본문도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뿐 아니라, 헤롯과 빌라도와 로마제국과 십자가의 형벌 등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모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해 발생 되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환난과 고통을 받는 것까지도 때로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라며 고난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음을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온갖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게도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핍박과 곤고와 환난과 굶주림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위협하는 자들을 심판해달라는 기도 대신, 위협 속에서도 보호해주실 것과 복음을 전할 담대함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의지들에 대한 구분

모든 사건들, 심지어 악한 사건들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아프거나 혼란스럽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곤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구분을 하는 법을 안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비밀스런 의지와 계시된 의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

모세는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전능자이시고,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대부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비밀스런 의지라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을 계시된 의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과 성경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피조물들이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100% 하나님의 뜻이지만, 하나님의 뜻의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에 계시된 의지 외에도 비밀스럽게 감춰진 의지들이 무한히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66권은 사람이 알아야 할 계시의 모든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아는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기도는 분명 하나님의 비밀스런 의지가 이루어지기를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이 땅에서 인간에 의해 실현될 것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는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인격을 주셨습니다. 인간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의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마음대로 뛰어 넘으실 수 있으십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원하였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입에서 저주의 말 대신 축복의 말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뛰어 넘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요. 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달라는 요구를 거역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또한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작정적 의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살도록 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성경을 통해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교훈적 의지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셔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도록 삶의 규범을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는 언제나 성취되지만, 교훈적 의지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거역하여 악을 자행하는 자들의 책임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이루실 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은 작정적 의지였습니다.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범죄함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진 것 역시 작정적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거역한 그들 스스로의 죄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범죄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3) 숨겨진 의지와 나타난 의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통가운데 내버려 두신다는 사실은 성도들을 혼란스럽고 속상하게 만들곤 합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하나님의 의지를 숨기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라고 부릅니다. 반면 일의 과정 가운데, 혹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일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곤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나타난 의지라고 부릅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의해 팔려 애굽 사람 보디발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주인인 보디발에게 충성을 다해 인정 받았지만 그의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바로왕의 술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그로 인해 누명을 벗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술관원장은 요셉의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결국 피를 나눈 형제에게 버림 받고, 충성한 주인에게 버려졌으며,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마저 배신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고구마 100개를 물 한 모 금없이 씹어 먹는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고자 하시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 400년 동안 머무르게 하시려는 장대한 하나님의 의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의 이면에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야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가 드디어 요셉에게 나타난 의지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일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모형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요셉은 아직 알지 못했고, 그 후손들 역시 무려 2,000년 가량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이 십자가 사건을 위한 예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숨겨졌던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에게는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가 된 것이지요.

인생이 참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투성이지요?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나타나기도 하고, 또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셉보다 형편이 훨씬 좋습니다. 많은 숨겨진 하나님의 의지들을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로 성경을 통해 이해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철저히 숨겨진 상황 가운데에서도 흔들림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숨겨진 비밀이 온전히 계시된 상황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는 이론적으로 요셉의 신앙을 능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4) 하시려는 의지와 하게 하시려는 의지

하나님께는 하시려는 의지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작정된 의지를 반드시 이루시고자 하시지요. 그런데 그 의지의 중심에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려는 의지를 사람을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고, 사람과 함께 동역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짐이 아닌 영광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 그리고 심지어 인간과 함께 일을 하시려 한다는 것은 대통령이 우리와 함께 국사를 논하는 것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과분한 일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십니다. 그러한 의지를 ‘하게 하시려는 의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붙여 주시기도 하고,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시지만, 반대로 악한 날에 처하게도 하시고, 악한 사람을 만나게도 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환난을 받았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으며,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의지는 물론, 계시된 의지와도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할 것을 명령하셨고,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이 성취되게 ‘하시려는 의지’가 명확하셨고, 결국 그 일은 환난과 핍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환난과 박해를 피해 도망갔던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으며, 결국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하게 하시려는 의지’ 속에 핍박이라는 악한 날과 핍박자라는 악한 사람들이 허락된 것이지요. 제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느라 능욕을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시려는 의지’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게 하시려는 의지’이지요. 우리는 하게 하시려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또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분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의지는 결국 성도에게 유익한 것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4. 결론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더 많이 겪으며, 평안한 때보다 풍랑의 때를 더 자주 만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 이면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의지, 숨겨진 의지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악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까지 조합하여 결국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악한 날에도 하나님만 붙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지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악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있도록 교훈적 의지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지요. 장차 하나님의 모든 의지가 명확히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흐릿하게 알았던 것을 명확히 대면하여 보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왔을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있을까요? 요셉처럼 신실하게 주님을 신뢰하며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흔들림없이 하나님만을 사랑했던 자로 서있을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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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적 속성 3.3 - 의와 공의 (롬 2:5-8)

* 공유적 속성3.3 – 의와 공의

* 로마서 2:5-8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1.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이라 규정합니다. 스 9:15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의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의로운’(차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표준에 따름’을 의미합니다. 의롭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의는 율법과 엄격히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위에는 법이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를 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본성 속에 명확한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며,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막무가내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모든 법들을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므로 본질상 의로우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의’라고 부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모든 행위를 하시므로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로우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상대적 의’ 또는 ‘하나님의 공의’라고 부릅니다.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공의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통치적 공의’와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분배하시는 ‘분배적 공의’입니다.

2. 통치적 공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법을 세우시고 그 법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따라야 할 표준을 제시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표준을 주셨으며,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법을 세우신 입법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약속하셨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따라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에는 차별도 불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7:11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딤후 4:8). 오늘 본문으로 제시된 로마서 2: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로운 심판’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이 세상을 완전히 의롭게 통치하시며, 또한 공의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고작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세상은 온통 악과 불의로 가득찬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공의를 정확히 행하실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모든 선과 악을 아시는 전지의 하나님이시며, 선과 악에 대하여 정확한 상급을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공의로운 손에 우리의 모든 원한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물론 마지막 심판 때에 완성이 되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며 (시5:8),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시65:5). 하나님의 법도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로 소성케 하시며 (시119:40), 주님께로 피하는 자를 곤궁에서 건져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시31:1). 하나님께서는 또한 공의를 베푸셔서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45:21).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과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는 개념입니다.

3. 분배적 공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이것을 ‘분배적 공의’라고 부릅니다. 상과 벌을 분배하는 공의라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인 로마서 2:5-8절은 분배적 공의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으며, 세상 끝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자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분배적 공의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25:31-46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산 사람들은 의인으로 분류되어 영생에 들어갈 것이며, 하나님을 멸시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악인으로 분류되어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분배적 공의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보상을 주는 보상적 공의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을 주는 보응적 공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보상적 공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을 것을 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상적 공의’라고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은 사람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악에 대한 보응만 피해도 감지덕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내려야 할 의무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상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하심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의에 의해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으로 인해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약속을 의지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2) 보응적 공의

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으며 불의를 따라 산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롬2:6).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며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응적 공의라 부릅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보응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에 의해 멸망했으며, 악하고 음란하고 동성애에 빠졌던 소돔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9:43죄인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모형들을 통해 심판이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고, 세상 끝날에 그러한 일이 모든 인류에게 임할 것임을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행위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면 왜 심판을 해야 하나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속성상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면 두 가지의 문제가 생깁니다.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더이상 의로운 분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던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그 상처로 인해 사람들에 대한 무분별한 적의를 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만약 어린 시절의 그를 불쌍히 여겨 죄를 용서해주는 판결을 내린 판사가 있다면, 그 판사는 공정하고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배경은 안타깝지만 죄에 대해서는 벌이 가해야 판사는 스스로의 공의와 재판장으로서의 자격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달리 ‘절대공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대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민감하고 격하게 죄에 대해 반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두 번째 문제는 이 우주가 끔찍한 공포의 장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불법이 판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는 행위를 밥먹듯 자행하는 장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힘이 없고 나약한 자들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신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부를 쌓아놓고 자자손손 그것을 물려주는 반면, 정결한 신자들은 악랄한 세력에게 가난과 위험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일이 현대에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사람들은 “죄에는 대가가 없다”고 인식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읊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73편의 기록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사악한 자의 종말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현세에 공의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래참으심으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공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5. 사랑과 공의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엄격하여서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하는 것이지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극단적으로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기고 맙니다. 죄와 죄인을 분리하여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시므로, 그 공의적 속성상 반드시 죄인을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과 공의 사이의 모순이라는 덫이 하나님 앞에 놓여진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지혜와 능력을 통해 가볍게, 그러나 너무나도 무겁게 그 딜레마의 덫을 넘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전가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는 죄는 예수님께로 옮겨 졌습니다. 반면 죄를 전가시킨 사람에게는 죄가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대신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절대적인 의”는 사람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사람은 죄가 없어진 공백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뒤집어 쓴 의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께 부어졌고, 의를 향한 하나님의 상급은 죄인에게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내어 주심으로 인간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동시에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께 쏟으심으로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허락된 하나님의 사랑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4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 모두에게 공의를 행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경탄과 감격을 이끌어 내고도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을 함께 담은 공을 죄인에게 넘기셨고, 이제 공은 죄인의 코트에 넘어와 있습니다. 이 공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죄인은 의인이 되어 보상을 받거나,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보응을 받는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6. 보상이 약속되었음에도 보응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사람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보상이 아닌 보응을 선택합니다. 죄인을 위해 죄를 대신 전가받으시고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넘겨주신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보상을 받는데, 그것을 거부하여 죄인으로 남은 채 보응을 받는 길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왜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느냐”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까 예수님의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지옥에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딸리는 머리와 되지도 않는 논리로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 듭니다.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당대에 의인이었던 욥이 자신에게 내려진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변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 친절하게 답을 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신의 행동의 의로움을 변호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욥은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에 대한 변론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선언으로 답변하셨습니다. 그 설명에 똑똑한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감히 자신이 입을 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욥도 그러할 진대, 하물며 죄 투성이인 인간이 감히 알량한 자신의 의와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깐족거리는 것은 교만의 극치일 뿐입니다. 사람은 한 치앞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목숨을 빼앗겨야 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기만 하고 공의를 행할 지혜와 능력이 없으시다면, 이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만 하고, 의롭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폭력과 변덕으로 인해 고통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움과 사랑과 전능하심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십니다. 오직 스스로 나약한 자임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능력 안에서 풍요로움과 평안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반면 스스로 강하고 잘났다 생각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능력을 덧입기를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정면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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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적 속성 3.2 - 거룩 (레 19:2)

* 공유적 속성3.2 – 거룩

* 레위기 19:2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백성

성경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시편 99편에서는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를 합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3).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이름을 찬송하고, 높이며, 경배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예배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인 레위기 19장 2절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백성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룩의 속성이 사람에게도 부여된 공유적 속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거룩의 의미 1 – 구별

그런데 시편 93편의 말씀과 레위기 19:2의 말씀 사이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거룩함이 경배의 이유로 제시되었다면, 인간도 거룩한 삶을 통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거룩이 있고,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룩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의 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카도쉬”입니다. 카도쉬는 “구별”이라는 뜻입니다.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거룩의 일차적인 의미는 도덕적, 윤리적 의미가 아닌 물리적 의미입니다. 다른 것들과는 딱 잘라 선을 긋는 것, 즉 구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된 존재이십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그것을 “장엄-거룩 (majesty-holi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갖는 속성이며, 바로 이 속성 때문에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따름이므로 장엄-거룩이라는 구별된 속성을 갖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 15:11).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은 실존하지 않는 가짜 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찬송받을 만한 위엄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높이 들리신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을 때, 스랍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노래했습니다.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은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 거룩의 의미 2 – 성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거룩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시면 거룩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구별이란 의미는 그대로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호렙산의 타지 않는 떨기나무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선 땅이 거룩한 곳이므로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렙산은 그냥 산이고, 떨기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고 구별하셨기에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서 지성소와 성소는 휘장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지성소나 성소나 동일한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휘장 역시 일반 커튼을 만드는 재료로 만든 천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룩이 갈립니다. 적절한 절차없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죽어야 했습니다. 지성소가 거룩한 이유 역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로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여 임재하시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물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지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 때에 구별을 성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거룩의 두 번째 개념입니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선민이요 성민으로 불렸습니다. 선민은 선택된 백성이란 뜻이고, 성민은 거룩한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들입니다. 불신자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죄인들일 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을 하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을 했으니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쎄인트 (saint)’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쎄인트라는 칭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칭호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물리적인 개념에서 거룩한 자란 뜻이지요.

4. 거룩의 의미 3 – 성결

하나님의 거룩성의 다른 측면은 도덕적인 의미의 절대 순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으로만 구별될 뿐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으로도 완벽하게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절대 순결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습니다. 악에 접촉되지도 오염되지도 않습니다. 하박국 1:13은 하나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과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13은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욥기 34:12은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않으시며, 공의를 굽히지 않으신다 말합니다.

바알 신화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 신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다 찢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헤라 몰래 바람을 피워서 생긴 자식들만 수두룩합니다. 이처럼 이방의 우상들은 죄인에 의해 창조된 신이라 죄인의 더러움이나 연약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선”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우리의 도덕적 표준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사람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결’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깨끗함’이란 뜻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도덕적인 순결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예물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흠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드리는 예물도 흠이 없어야 했던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시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거룩하게 산다는 것

요약하자면 거룩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구별과 성별과 성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도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1)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피조물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되고, 홀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그분만을 예배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의미의 구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할 자들을 찾아 나서도록 보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으며, 보내심을 받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다른 예배자들을 찾고 세우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성별된 것들을 지키는 삶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들을 특별히 성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별된 것들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안식일을 특별히 구별하셔서 지키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여러 날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념하시고 구별하시는 순간, 특별하고 거룩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거룩하게 구분하여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시고, 율법의 정죄를 사랑의 법으로 풀어버린 그날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구별된 날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지켜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는 성막이나 성전이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성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특정한 제사는 반드시 성전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여 임재하실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공간의 개념은 무너지고 맙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인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신 이후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도 죽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이나 이후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곧 거룩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시대에도 동일하게 견지된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 있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셨기에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가 바로 거룩한 장소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당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드리는 그 장소는 곧장 거룩한 곳이 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컴퓨터 앞의 바로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 성별된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리를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3) 성별된 자답게 성결한 삶을 살라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성도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의 핵심은 앞의 두 가지의 말을 모두 포함하지만 결국 도덕적 성결로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예배자의 삶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몹시 싫어하시며, 죄에 대해서 알러지 반응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자 마자 입술이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뵈었으므로 화를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물고기를 한마리도 못잡았던 자신에게 만선의 수확을 주신 예수님 앞에서 만선의 기쁨을 표현하는 대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이 하는 첫 번째 자각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떠나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으니, 성별된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칭호의 뜻처럼 거룩한 무리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삶이 거룩하지를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거룩하게 구별이 되었는데, 도덕적으로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은 자들이지만, 그 거룩은 거룩한 삶, 즉 성결을 통해 완성이 되어집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3).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살전 4:7-8).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라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백성에 걸맞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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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적 속성3.1 - 선하심(시 34:8)

• 공유적 속성 3.1 하나님의 선하심

• 시편 34:8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 하나님의 선, 2) 하나님의 거룩함, 3) 하나님의 의 등의 도덕적 속성을 갖습니다. 오늘은 그 중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기 원합니다. 시편 34:8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선하심은 머리로 인식하는 정보가 아니라, 음식을 맛보아서 아는 것과 같은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고작 10대 소년의 몸으로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인 민족적 영웅이었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그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던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역설적이게도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적국의 땅으로 망명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정체가 발각된 다윗은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고,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을 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영웅 다윗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다윗은 고개를 들 수 없는 그 치욕적인 사건 후에 시편 34편을 썼습니다. 다윗이 위기 상황 가운데 수치를 당하며 체험한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한 하나님이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은 맛보아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절망과 위기와 수치 속에서도 다윗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고,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처럼 안전하고도 따뜻한 품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2.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상황을 보았을 때, 우리는 선하다는 것이 인간인 우리들의 입장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선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그 날의 수치는 하나님과 밀착된 왕으로 빚어지는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다윗이 당시에 그것을 깨닫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확실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 곧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인간에게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을까요? 인간이 선한 것을 알 지식과 선한 것을 베풀 능력을 온전히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떤 것이 선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의지도 능력도 갖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을 공유한 자로서 그저 선한 행위를 가끔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므로, 무엇이건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곧 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체험한 자,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1).

3. 선하심을 나타내신 하나님

1)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선하심

창 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며 돌보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선대 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고 (시145:9),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십니다 (시 145:16).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시며 (마 6:26-28),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10:29). 그런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선하심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마 5:45). 바울은 루스드라라 하는 지방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그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각각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오해를 해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것을 만류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음과 증거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행 14:17).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특별히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인간을 부르셔서 관계를 맺어주시는 것이요, 둘째는 그 관계를 유지해주시기 위해 끝까지 신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 친구의 관계 등 너무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주셨으며, 또한 사람이 그 관계를 파기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모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인간을 향해서 베풀어 질 때 성경은 자주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사실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돈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찬양도 필요치 않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을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라고 창조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고, 사랑하기 위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즉 이해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그 사랑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요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확증된 사랑입니다 (롬5:8). 또한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베풀어 주신 사랑입니다 (요일 4:10).

3)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 선하심

은혜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드러내는 용어도 없을 것입니다. 은혜란 “요구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의 수준을 넘어, “죄로 인해 사형이 선고된 자들에게 공로도, 값도 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흉악한 죄로 물든 죄인들로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을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롬 3:24). 또한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엡 2:8). 이 은혜 앞에 우리가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엡 2:9). 선한 것이 하난 없고 행한 것은 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구원을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선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자비로 나타난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요소는 자비입니다. 자비는 긍휼로 번역되어지기도 합니다. 은혜가 죄인을 ‘용서를 필요로 하는 불의한 자’로 규정을 한다면, 자비는 죄인을 ‘죄의 결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가련하고 불쌍한 자’로 규정을 합니다.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인간을 마음 아프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는 용어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자주 자비와 은혜라는 용어를 같이 붙여서 사용합니다. 자비란 ‘공로와 상관없이, 곤궁과 비탄에 빠진 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과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더럽고 흉악한 죄인을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주셔서 죄로부터 건져 주시고자 하신 것이지요.

5) 하나님의 오래참음으로 나타난 선하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오래참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 시오니” (시86:15).

죄인의 특징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니 당연히 회개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오래 참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선하심을 공유한 자의 삶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만물을 베풀어 주셨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오래참음 등으로 그 선하심을 풍성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유해주신 이유는 우리 역시 선함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채,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공유해주신 선하심을 이웃들에게 베풀 의지를 상실한 채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자녀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선하심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돌려 드려야 하며, 이웃들에게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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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1. 정신적 속성 –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진실함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적인 속성 뿐 아니라, 정신적 속성 또한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며, 입력된 지식을 근거로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합니다. 또한 옳고 그른 일을 판단할 능력을 가지며 해가 될지라도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진실함과 신실함을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을 보다 잘 알고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으며, 또한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신적 속성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정신적인 속성을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진실함은 공유적 속성으로 분류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비공유적 속성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전지의 속성은 인간이 도무지 흉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류에서 헷갈릴 필요 없습니다. ‘지식’이란 용어를 쓰면 공유적 속성으로, ‘전지하심’이란 용어를 쓰면 비공유적 속성으로 이해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2.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고 계시며, 그분의 지식은 무한하십니다. 요한일서 3:20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전지하심

하나님께서는 우선 하나님 자신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에도 제한이 없는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그런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지식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외에는 하나님의 일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2:10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 기록합니다.

2) 모든 사물에 대한 전지하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실제적인 그리고 가능한 지식들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아시는데 피조물들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생겨나고 있는 모든 것, 앞으로 생겨날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리워진 것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까발려져 있습니다 (히 4:13). 하나님께서는 현재 일어나는 일이나 장래 일어날 일 뿐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지식까지도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요시야 왕이 화살로 땅을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을 것임을 엘리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에서 이적들을 베푸셨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3)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처지와 필요를 아신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7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실 정도로 세밀하게 우리를 알고 계신다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털이 많고 어떤 이는 머리털이 아예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이 풍성한 사람의 머리털을 세는데 버퍼링이 생기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단순한 행동이며, 부분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세지도, 측량하지도 않고 그냥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하늘의 별의 숫자도 모두 아십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세느라 진땀 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냥 숫자가 “딱”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 추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새로 생겨나는 지식도, 망각하는 지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결코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은 이전에는 전지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치앞도 몰라 불안해하고 염려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콘트롤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때로 악한 자도 악한 날도 허락하시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아빠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과 처지를 아시며, 우리의 앞길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광야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길을 내실 것이고, 우리가 사막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강을 내실 것입니다.

3. 최상의 것을 주시는 지혜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지혜를 공유한 존재입니다.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아는 것에 의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시편 19:7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1:5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면 주실 것이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혜를 허락하셨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과 공유하는 속성이지요.

그러나, 불완전한 사람의 지혜와는 달리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최상의 목표를 위해, 최상의 수단을 취하시며, 최상의 결정으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하나님은 그저 모든 것을 아시는 수준에서 멈추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지혜를 갖추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와 온 땅에 창조하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지혜는 충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도 악한 일이 생기고 답답한 상황이 찾아 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지혜를 공유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사 55:9).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우리는 선을 행하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벧전 4:19).

우리의 믿음은 고난의 순간에 빛을 발하며,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과정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더욱 깊은 친밀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 모든 것들을 통제하여 결국 선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28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까지도 모두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는 경이로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고통없이 지나갈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고, 누구에게나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모두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합력을 합니다. 모든 일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악한 일을 만나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롬 8:29).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분투를 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으며,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심지어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롬 8:30).

4. 결코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모든 지식들은 참되며, 진리의 최종적 표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그 지식이 완전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그 지혜로 통제하시는 분께서 실수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알면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결코 변질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무망하시며,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시며,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진실함이 있고, 신뢰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함은 공유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진실함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한치앞을 모를 뿐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고 경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실수하거나 믿음을 배신할 때에, 그를 용납하고 이해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무망하듯이, 우리 역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진실되게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에 내재된 죄성이 날마다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실패하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려는 지속적인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함과 신실함을 공유한 존재이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그러진 진실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얼마나 신뢰합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이웃들에게 얼마나 신실하고 진실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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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적 속성 1 - 영성 (요4:24)

* 공유적 속성1 – 영성

* 요한복음 4:24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 공유적 속성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도무지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비공유적 속성이라 부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도 일정정도 나누어 주셔서 인간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속성을 공유적 속성이라 부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공유적 속성 역시 완벽하게 공유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지식과 능력을 가졌지만, 전지전능하지 못합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사랑과 의로움을 가졌으나 완전한 사랑, 완전한 공의를 갖지 못합니다. 공유적 속성도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비공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영이시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24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도 사람도 영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라고 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짐승에게는 영이 없고 혼만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animal 이지요. ‘anim’은 혼이란 뜻을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영적인 존재는 셋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천사와 인간입니다. 물론 마귀와 악령들도 하나님께 반역하여 쫓겨나기 전에는 천사였으므로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영적인 속성을 하나님과 공유하므로 누리는 특권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인간이 영이기 때문에 누리는 첫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영으로 드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오직 영적인 존재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배는 인간의 의무이지만, 인간만이 갖는 특권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특권을 그만 짐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예배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즐거움도 없이 그저 드려야 하니 드리는 예배는 영의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할 때 뿐 아니라, 기도를 할 때에도 우리는 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방언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음의 기도와 영의 기도를 구분한 바 있습니다.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고전 14:14-15).

이 말씀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면 마음은 열매를 맺지만 영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도 기도하고 자기 언어로도 기도하여 마음과 영이 같이 열매를 맺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므로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방언까지 선물로 주십니다.

2)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7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주와 영으로 연합하여 주님과 한 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과 육체로 연합하면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버리므로, 음행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하나님과 영으로 연합된 사람은 그 몸마저 자신의 정욕이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에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님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이이므로 성령이 들어오시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5-16).

4)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간다

사람은 몸이 흙으로 지어졌지만, 그 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7).

반면, 영이 없는 짐승들은 흙에서만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 3:21).

물론 그것이 천국에 동물이 없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므로 천국에는 동물들이 없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땅에서 보았던 짐승들은 하늘에서는 다시 보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때문에 죽음을 고대하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3-24).

빨리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지만, 그가 돌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만의 비공유적 영성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점에서 우리와 속성을 공유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영도 창조된 영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육체가 없이 영으로만 존재하시며, 그 영은 창조주의 영이십니다.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우리는 영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앞에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공간적, 육신적 예배가 아닌 영적 예배를 드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일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어디에서 드리는 것이 옳은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배자가 예루살렘에 있느냐, 사마리아에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에 살펴 보았듯, 하나님께서는 장소에 제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닌 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교회 건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드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면 예배가 언제 시작하는지에 많은 관심들을 갖습니다. 그런데 대면 예배라는 단어 자체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대면한다는 것입니까? 사람끼리의 대면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의 예배가 사람을 대면하는 예배가 되면 안됩니다. 어차피 교회 건물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가 아닌 사람을 대면하는 예배라고 한다면 그 예배는 대면 집회이지 대면 예배가 아닙니다. 온라인 예배를 예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모여서 드렸던 예배는 사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우리는 바로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건, 우리의 예배의 형태가 무엇이건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입술과 형식이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가 아니고 육적인 예배, 혹은 혼적인 예배가 되면 그것은 예배다운 예배가 아닙니다.

2) 하나님에 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꾸 눈에 보이는 형상 안에 담으려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 (출 20:4)은 우리가 이 땅이나 하늘에 있는 어떤 조각된 형상이나 어떤 모양에 대해서도 경배하거나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로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순간 그 행위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강력하게 형상을 섬기는 행위를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숭배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는 황금 송아지나 부처상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도 포함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숭배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담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라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치명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1) 영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말은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무지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며, 영광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한 태양을 쳐다볼 능력도 안됩니다. 피조물의 한 조각도 보지 못하는 존재가 감히 하나님을 보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그이지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로 연결이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불가견성’이라고 말합니다. 불가견성이란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속성’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볼수 없는 존재로 묘사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딤전 6:16).

2)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빛이 밝혀지는 순간 어두움이 사라지듯, 절대 선이신 하나님 앞에 악인이 서면 멸망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 조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하지만, 이 대면이란 실제적인 대면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친밀하게 대화를 했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친밀함이 깊어질 수록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실제로 보고 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지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여기며 친밀하게 대화를 나눠 주셨던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악 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니요. 그 말은 곧 ‘날 그냥 죽여 주세요’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현하기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는 영적 존재이시고, 거룩하신 존재이시지만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운데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나타나 예언을 하게 하셨으며,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셨고, 이사야에게도 나타나 소명을 주셨으며, 그 밖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죽지 않을 방식으로 현현을 하셨지요. 하나님의 현현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던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졌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도 역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오셨기에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존재이시지만 가시적인 피조물들과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제한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전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보면 사람이 죽게 되므로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이지요.

4)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천국에 가셔요.

우리는 절대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 3:2).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4).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예수님을 믿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 거울은 유리 거울이 아니라 청동 거울이었습니다. 청동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명확하지 않고 흐릿했습니다. 마치 청동 거울로 보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은 흐릿하지만, 천국에 이르는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분명하고 진실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의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어떠한 가치들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며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앞에서 쓰레기처럼 여겨질 뿐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떠한 영적 예배를 영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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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유적 속성 5 - 단일성 (고전 8:4-9)

* 비공유적 속성 5 - 단일성

* 고린도전서 8:4-7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1. 신념과 진리의 괴리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이 존재하지만, 무신론 역시 믿음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을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표현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주장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진리가 여러 개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업보에 따라 다른 생물로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설이 맞다면, 죽음 이후에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둘 다 맞을 수는 없지요. 또한 힌두교의 주장대로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 신은 하나 뿐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허구가 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무신론이 맞다면,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헛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건 진리는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믿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많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선포합니다. 모든 만물은 유일한 참신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이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분을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복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상을 섬김으로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무엇을 믿건 그것은 자유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중 하나는 하나님의 단일성입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나뉠 수 없고, 본질과 속성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용어가 어려워 보이지만 어려운 내용이 아니니 포기하지 마시고 읽으시면 개념을 잡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넘기시고, 용어보다는 내용에 집중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조로 설명을 진행할 것입니다.

* 단일성

1. 단수성

1) 유일성

2) 독특성

2. 단순성

2. 단일성 1: 단수성

하나님의 단일성의 첫번째 의미는 단수성입니다. 단수성이란 말이 좀 어렵게 보이지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된 시점으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들 중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단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신 자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단수성은 하나님의 자존성과 연결이 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는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유일성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다는 말에는 또한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단일성은 유일성과 독특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1) 단수성 1: 유일성

이미 사도바울의 선포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이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도바울이 있기 오래 전에 솔로몬 역시 동일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왕상 8:60).

세상 사람들은 각자의 신을 만들어 놓고 살지만, 만민에게 있어 여호와만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그저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범신론자들은 정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령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창조주가 아니며, 그들의 존재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영들의 근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신성과 능력을 피조 세계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투성입니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신비와 경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담겨 있다 보니 인간들은 그만 피조물들을 신격화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피조물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들을 신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해, 달, 별을 섬기고, 짐승들을 섬기며, 곤충들을 섬기고, 수목들을 섬기며, 심지어 물과 불과 바람 등의 무생물까지 섬깁니다. 물론 그것들을 다루는 신이 있다 가정하고 섬기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피조물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뭘 믿건 간에 그 모든 것들은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가짜 신들이 진짜 신인 듯 보이는 일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가끔 기적도 일어나고,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들도 일어나곤 합니다.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 이외에도 신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에 대해서도 명확히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한 때는 천사였지만, 하나님을 반역하여 쫓겨난 악령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 하늘로부터 쫓겨난 마귀의 세력은 그 숭배의 대상을 틈타고 인간을 장악해 버립니다. 그것이 신비로운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원래 천사들이었던 악령들은 막강한 힘을 갖습니다. 그러나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무소부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기에 인간의 편에서는 신적 존재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과 경배를 빼앗아 가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며, 결국 경배의 대상도 경배자도 모두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2) 단수성 2: 독특성

하나님께서 유일한 참신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숫적인 의미 뿐 아니라 여호와라는 이름을 갖기에 합당한 독특한 하님이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6:4).

여기에서 ‘유일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하드”는 수적인 유일성보다는 그 속성 상 다른 존재와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스가랴 역시 비슷한 표현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슥 14:9).

이 말씀에서도 홀로 한 분이라는 표현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여호와와 같은 존재가 없고 독보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모세는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하나님의 독특성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15:11).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 독특하게 하나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습니다.

3. 단일성 2: 단순성

하나님의 단수성은 유일한 참신인 하나님으로부터 거짓 신들을 도려내는 외적 측면에서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 스스로의 내적, 질적인 단일성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양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한 속성만을 다른 속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시다는 불변성의 선포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단수성이 하나님의 자존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는 분이시므로, 한 시점에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셨다가, 다른 시점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변하실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의로우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존재해 오셨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특정한 속성들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행동들을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피조물들을 통해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는 그분의 거룩과 공의와 진노를 나타내셨으며, 속죄사역을 통해서는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각각의 행위들 속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다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 인격이 행하시는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움이며, 진리이며, 지혜며, 빛이며,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 중 다른 속성보다 더 중요한 속성이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잠시 다른 속성을 제쳐두지도 않으십니다.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의 전 품성의 다양한 측면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이시며, 사랑을 행하시면서도 동시에 빛이십니다.

4. 우리에게 주는 의미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자존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앞에 두는 반역행위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신이라는 선포 앞에 무신론도, 다신론도, 범신론도 무너져 내립니다. 하나님만이 독특한 참신이라는 선포 앞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이신론도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 역시 단 한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곳은 도달하는 길이 여러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곳은 도달하는 길이 하나 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수천 가지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하나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단일성 앞에 종교다원주의도 무너져 내립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여러 모양으로 제시되지만 하나님은 하나의 통일된 본질과 속성을 가지십니다. 공의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이 온전히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공의를 위해 사랑을, 사랑을 위해 공의를 포기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모든 인간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하심으로써 공의를 행하셨으며, 그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 인해 사랑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드러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길을 잃은 사람들의 길이요, 빛을 잃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세상에서 신이라 주장되는 그 어떤 존재라도 우리 하나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완벽한 지혜와 능력으로 그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공의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완벽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죄와 죽음을 감당하는 존재도 도무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독특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속성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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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유적 속성 4 - 무소부재 (시 139:7-10)

* 비공유적 속성4 - 무소부재

*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모든 공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간의 주인이시며, 어떤 공간 안에도 제한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의 전 공간에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이 존재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편재성, 또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이라고 부릅니다. 편재성은 ‘편만하게 존재하신다’는 뜻이고, 무소부재성이란 ‘계시지 않은 (부재) 장소가 없다 (무소)’라는 뜻입니다.

2.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오늘 본문인 시편 139편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묘사를 했습니다. 어디로 가든 하나님의 영을 떠날 수 없고, 주의 앞에서 피할 곳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음부)에 내려가도, 바다 끝으로 가도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도, 가장 낮은 곳에도, 가장 먼 곳에도 주님은 항상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어디를 가든지 상관없이 그 전능하신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모든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에 대해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3-24).

하나님께서는 먼 데고 가까운 데고 어디에나 계시므로 사람은 결코 은밀한 곳에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를 쳤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적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것처럼 거짓을 행했습니다. 천지에 충만하여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그들의 은밀한 죄를 모두 지켜 보고 계심을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한 지점에 하나님의 일부분만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서쪽에는 하나님의 왼손이 있고, 동쪽에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미국에는 하나님의 다리만 있고, 한국에는 하나님의 등만 있는, 그런 방식의 무소부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에서 일부가 아닌 전적으로 존재하십니다.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3. 공간적 차원이 없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에 전 존재로 임재하시지만, 그 어떠한 공간에도 담겨 계실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완공시킨 직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감히 하나님을 담아 둘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을 감히 성전 안에 가둬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을 교회 건물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계시는데, 교회 밖에는 계시지 않는 그런 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 공간에 담기실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이 우주공간에도 담기지 않으시며 우주 밖의 더 큰 공간에서 우주를 품고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적인 차원과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공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피조물들의 일부 또는 피조물들의 전부와 동등한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도 안됩니다. 범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있는 모든 곳에 빠짐없이 임재하시지만, 그 피조물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을 흠뻑 빨아 들인 스폰지 안에는 물이 꽉 차 있지만, 스폰지가 곧 물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완벽한 비유는 아닙니다. 물을 빨아들인 스폰지의 경우 물이 있는 공간이 따로 있고, 스폰지가 있는 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물질이므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요. 그러나 물질세계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존재 형식

1)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형식

하나님의 편재성 앞에서 사람들은 몇 가지 혼란을 경험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데 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이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서야 오신 것으로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는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필요에 따라 땅으로 내려 오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형식이 다를 수 있음을 간과한 데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다른 형태로 존재하십니다. 편재, 임재, 내주 입니다. 편재는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심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곳에 특별한 목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임재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아예 자리를 잡고 거주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내주라고 부르지요.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말은 편재하는 성령님이 성도들 위에 강력히 임재하고, 성도 안에 내주하게 해주시겠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는 표현 역시 편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집중적으로 드러내시는 임재를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또 한 가지 혼란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내주하시는데,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을 갖는 분들은 성령님께서 이미 내주하시므로 성령님이 임하신다는 표현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주장입니다. 성령님의 존재 형식이 다름을 알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우리를 장악하고 계시지는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때와 장소가 있지요. 그것을 임재라고 부릅니다. 임재라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내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한다는 것은 그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어디에나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강력히 지배해주시도록 환영하는 행위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이미 내주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적극적으로 성령님을 초청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함으로써 성령님의 지배 하에 우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더 자주 더 오랫동안 그처럼 할 때에,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벌을 내리기 위해 임재하시는 하나님

또 한 가지 혼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에도 존재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사실 상 지옥이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지옥에는 하나님께서 안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은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논리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지옥에도 계십니다. 다만 존재의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벌을 주시기 위하여 임재하십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과 완벽히 단절됩니다. 벌을 주려고 임재하신 하나님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부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인지하지 못할 뿐, 사실 벌을 주시기 위해 그곳에 임재해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특정 장소에 벌을 내리기 위해 임재하십니다.

아모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려운 메시지를 전한 바 있습니다.

“1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2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모스 9:1-4).

3) 보존하기 위해 임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단지 보존하기 위해 어떤 장소에 임재하기도 하십니다. 모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 질서대로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3).

예수님께서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이 세상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4)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임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복을 주시기 위해 어떤 장소에 임재하십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편재하시지만, 그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해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이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멀게 했다고 말합니다 (사 59:3). 또한 잠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잠 15:29).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시는데 어떻게 백성과 멀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안 계신 어떤 공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어디에선가 나타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주십니다.

4. 임마누엘과 코람데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존재 형식과 존재 목적이 다릅니다. 모든 곳에 편재하시지만 벌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와 때가 있고, 축복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강력하게 드러내시어 임재하시는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력하게 더 오래 경험할 수록 내주하는 하나님의 더욱 확실한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임마누엘과 코람데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일에도 두려움이나 염려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가건,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 전능의 팔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 축약된 용어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코람데오입니다. 하나님 (데오) 앞에(코람) 우리가 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 가건,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사실이 어떠한 의미로 다가 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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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유적 속성3 영원성 (사40:28-31)

* 비공유적 속성- 영원성

* 이사야 40:28-31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1. 무한하신 하나님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변국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던 이사야는 이사야 40장에 들어가면서 심판의 메시지를 소망의 메시지로 전환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하나님만 앙망하면 새 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님의 무한성으로 연결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고, 땅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땅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속성을 영원성이라 부릅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는 뜻이지요. 공간을 초월하신 속성을 무소부재성, 또는 편재성이라고 부릅니다. 안 계신 (부재) 장소가 없이 (무소), 어디에나 편만하게 존재하신다 (편재)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존속해 오셨지만 무한하신 분이시기에 노쇠하지 않으시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광활한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지만 무한하신 분이시기에 창조하신 후 탈진하지 않으셨고,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분이시기에 그 분을 앙망하기만 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시간을 초월하시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의 무한성 중에서도 특별히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하나께서 영원하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창조자이시므로 아무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를 불안해 하며 현재를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들과 미래의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모세는 그의 시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2).

유다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 1:25).

‘영원 전’은 무한한 과거의 시간을 말하고, ‘이제’는 현재를 말하며, ‘영원토록’은 무한한 미래의 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있다는 말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3. 모든 시간을 생생하게 보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해 계시기에 하나님 앞에 모든 시간은 항상 현재적입니다. 하나님께는 기억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과거를 현재처럼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지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미래를 현재처럼 보시기 때문입니다. 택정과 자유의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도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만은 아니게 됩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므로 모든 것이 불투명하지만,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구원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갈라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이 예정된 자들이지만,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성도는 열정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불신자는 부르심에 의지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4). 베드로 역시 동일한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하나님께는 천년의 세월이 그저 하루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서 천년이란 문자적 천년이 아니라 셀 수 없는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는 현재의 일처럼 생생이 보여집니다. 하나님께는 또한 하루가 천년같이 여겨집니다. 시간의 제약이 없으시기에 영원이 곧 하루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언제 구원해 주시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늦게 일하시나 불만을 품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하나님께는 한 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어떠한 실수나 오차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편 90편과 베드로후서 3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모세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을 심판으로 연결을 시켰다는 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시적인 세상을 곧 끝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영원한 세상을 꿈꾸며 하나님을 앙망한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일시적인 세상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심판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모든 사람들이 심판이 아닌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있을 일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10). 그날이 오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과거를 현재처럼 보시는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자신의 민낯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4. 시간 안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지만, 시간 안에서 사건들을 바라보시며, 시간 안에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지만 과거를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실수투성이인 인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라도 과거를 조작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임머신을 쓰실 필요도 없이 과거에 무한 접속이 가능하실 뿐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과거를 마음껏 조작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으로 돌아가 뱀에게 유혹당하기 직전에 뱀을 잡아 뱀술을 만들어 주실 수도 있으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현장, 노아가 술에 취해 올누드로 화보를 찍었던 현장, 모세가 혈기를 부리다가 폭망한 현장, 다윗이 밧새바와 간음했던 수치스러운 현장,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해야만 했던 안타가운 현장 등을 모두 선택한 후 삭제 버튼을 누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모든 안타까운 일들을 남겨 두신 채,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일을 정하신 때와 시간에 맞춰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신 이유는 때와 시간에 따라 사람과 동행하면서 일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제약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동행하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걸음마를 갓 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산책을 하는 엄마는 아이보다 훨씬 빨리 걸을 수 있지만, 아이의 걸음을 따라서 천천히 걷습니다. 빨리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이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주님께 서두를 이유란 없습니다. 그저 인간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을 즐거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렇게나 무분별하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와 기한을 정하셔서 미리 알려 주시고, 알려 주신 순서와 절차에 따라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찼을 때에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율법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갈 4:4).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롬 5:6).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일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때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6절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손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 시간은 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현실로 받는 데에 25년이 걸렸지만, 결국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어가는 오빠 나사로를 위해 예수님께서 속히 와 고쳐주시기를 요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가 되서야 도착하신 예수님을 보고 심하게 삐쳐서 예수님이 부르실 때까지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로 인해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놀라운 현장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마지막 날 있을 부활의 모습을 더욱더 생생하게 그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이 바로 하나님의 때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고, 정확히 예언된 시점에 오셨으며, 정확히 예표된 절기에 따라 유월절에 잡혀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5.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아가는 우리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통해 정확히 때와 방법과 절차에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는 아프고, 현재는 힘들며, 미래는 불안하심을 잘 압니다. 그러나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하루를 우리와 동행하며 천천히 걸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아팠던 과거의 눈물들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 우리의 지친 어깨에 힘을 주시고, 독수리 날개치듯 새 힘을 얻고 날아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오늘 불투명해 보이는 미래는 기쁨과 평강과 행복으로 우리에게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을 여는 키는 바로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모두 주님 손에 넘겨 버리고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속한 시간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내일을 장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속적으로 현재를 살 뿐입니다. 내일이 오면 그 내일은 또 다시 오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제도 내일도 과장하면 안됩니다. 오늘을 천대하면 더더욱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오늘이 은혜의 때이고,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신실하십시오. 우리가 오늘을 신실하게 산다면 미래는 하나님께서 여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오늘을 심고, 보장된 내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 쓰고 확정된 내일이라 읽는 자들이며, 내일이라 쓰고 신실한 오늘이라 읽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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