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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9장, 나만의 챕터 (행 28:17-31)

  • 사도행전 29장, 나만의 챕터

  • 사도행전 28:17-31

1. 가둘 수 없는 복음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도달하였습니다.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병사 한 사람만 붙여둔 채로 구금된 상태에서 사람들의 방문이 자유롭게 허락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막가비 시대에 처음 로마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폼페이 장군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에 포로로 잡아왔으므로, 로마에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므로 단일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개별 공동체들이 존재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구금된 집으로 초대를 한 사람들은 개별 공동체의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을 초대했을 것입니다.

첫째 황제 앞에 서기 전에 유대인들이 혹시라도 재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사전 점검을 하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돈으로 황실을 매수하여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대대로 지켜온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누명을 씌어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것이라고 자기 변호를 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죄목을 찾을 수 없었으나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바울을 석방하지 못하였으므로,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었을 뿐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그들의 경계를 허물 뿐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둘째, 보다 본질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건 1차 전도 대상을 동족인 유대인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악감정도 해칠 의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노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잡힌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 천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해 왔습니다. 지속적으로 이방인들의 식민통치 하에서 고통을 받아 왔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이스라엘의 왕과 그가 다스릴 이스라엘 왕국을 대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인 메시야가 이미 왔음을 선포하다가 사슬에 묶인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도 바울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기다렸는데 왜 유대인들은 바울을 미워했을까요? 바로 소망에 대한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정치적 메시야를 소망했고, 바울은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이미 왔으며,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해주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묶인 몸으로 자신을 묶게 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복음이 갇혀 있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초청하여 자신에게 허락된 상황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도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해지는 하나님의 나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다행히도 로마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에서 어떠한 편지도 보고도 받은 적이 없다 말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바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바울에 대한 고소장이나 사절단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로마로 이송된 시기는 겨울이 임박한 시점이었으므로 바울이 탔던 배가 로마로 가는 마지막 배였을 것입니다. 유대의 유대인들이 바울보다 앞서 사람들을 보낼 시간적인 여유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로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소문이었지요. 당시 기독교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관과 예수님이 맞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야를 기다려 왔으므로, 자신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혹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들은 메시야를 죽인 자들이 되고 맙니다. 로마인들 역시 기독교인들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를 신이라 떠받들어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으므로 황제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황제라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라 불리웠습니다. 또한 모두 형제자매라 불렀으므로 근친상간자들이란 오해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성찬식을 했으므로 식인종이라는 오해까지 샀습니다. 무신론자요, 근친상간자요, 식인종이라 믿었으니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멸시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은 정식으로 기독교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고 다만 다른 종파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호적 태도와 호기심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날짜를 정하고 자신이 유숙하는 집에 사람들을 번갈아 가며 불렀습니다. 바울의 집을 찾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교재는 구약성경이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에는 장차 왕이자 메시야가 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구약은 장차 올 예수님과 예수님이 왕되신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일 수 밖에 없는지를 강론하였습니다.

3. 복음에 대해 반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사도바울의 구약을 관통하는 강론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을 이사야가 예언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우둔하고 눈이 감겼으며, 귀가 닫혀 있었으므로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에도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 갑니다. 우상을 사랑했으므로 그들은 우상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우상은 한낱 돌이나 나무에 불과하므로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바울의 시대에도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돈과 권력과 탐욕에 찌든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눈이 멀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들이 마음도 눈도 귀도 없는 것이므로 그것들을 닮아 깨닫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사하고 회복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으면 돌이킬만한 사람들에게로 발길을 옮기십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잠시 뒤로 하고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향하게 한 이유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응입니다. 말씀은 이미 우리엑 주어졌고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하는가의 문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남겨두면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사도행전 29장, 나만의 챕터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무려 2년 동안이나 로마에서 구금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황제가 백성들을 다스리는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탐욕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사안들만 가끔 판결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년 후 결국 황제 앞에 서게 되고 무죄를 선고받아 풀려납니다. 그렇게 간단히 풀려날 일을 2년이나 질질 끌며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 2년을 바울은 결코 허송세월로 보내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집을 복음이 전해지는 복음의 발산지로 활용을 합니다. 사람들을 초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도 거침없이 가르쳤던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황제 앞에 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도 서야 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져 있는데도 누가는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빼놓았으며, 그 이후의 바울의 이야기도 생략합니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바울의 생애를 간략하게 연대순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정확한 년도는 아니고 추정일 뿐인 연대가 있으므로 대충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 출생: AD 5년

* 예루살렘 유학 : 15-20년 (11세-16세, 6년)

*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 : 32년

* 예수님 만나 회심 : 34년

* 아라비아 : 34-37년

* 예루살렘 15일동안 방문 : 37년

* 다소체류와 사역 : 37-46년

*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사역 : 47년

* 1차 전도여행 : 47-48년

* 예루살렘공의회 : 49년

* 2차 전도여행 : 49-52년

* 3차 전도여행 : 53-56년

*가이사랴 구금 : 57-59년

* 로마도착 : 60년

* 로마구금 : 60-62년

* 서바나,동방, 마게도냐에서의 사역 : 63-66년

* 로마감옥 및 사망 66년 (62세) - 네로박해 때에 오스티안 길에서 참수형을 당함

바울은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 핍박 때에 결국 순교를 하게 됩니다. 네로가 황제로 있을 때에 로마시에는 대규모 화제가 발생을 하고 네로는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몰아갑니다. 기독교인들은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쓰게 하여 개나 맹수의 공격을 받아 찢겨 죽게 하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을 거리를 밝히는 횃불로 태워 버리는 잔학한 탄압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베드로 역시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마게도냐에 있었는데 마게도냐의 총독이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잡아다가 바칩니다. 결국 바울도 AD 66년 그 고단한 전도자의 여정을 마치고 형장의 이슬로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 본 사람은 오직 누가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의 이후 모든 사역을 지켜 보았지만 의도적으로 기록을 뺀 채 열린 결말로 사도행전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행전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9장이라고 하는 독자들만의 챕터를 써내려가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챕터를 사도행전 29장으로 써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자들의 피를 통해 씨앗이 뿌려지고, 성도들의 눈물과 땀을 먹고 자라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를 흘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눈물과 땀을 흘려 복음의 씨앗을 싹틔우고 성장시키는 일을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써내려가야 하는 사도행전 29장은 자신만의 챕터입니다. 그 챕터를 쓰기 위해서는 기꺼이 피, 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자신을 그 자리에 내어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실 것이며, 그만의 성령행전을 써내려 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은 어디까지 쓰여져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 오실 날에 어디까지 완성이 되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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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에게 힘을 주는 성도 (행 28:11-16)

• 전도자에게 힘을 주는 성도

• 사도행전 28:11-16

1. 세상 가운데 서 있어야 하는 성도

11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해 항해하던 중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멜리데 섬에 안착하여 살아남게 됩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도 멜리데 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는 사역을 해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머문지 3개월이 흐른 뒤 바울은 다시 로마를 향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3개월을 머문 이유는 겨울을 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겨울에 항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모든 배가 항구에 정박한 채 겨울을 지내고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때마침 멜리데 섬에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가 있었습니다. 난파된 배도 알렉산드리아 배였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면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배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배의 이름은 디오스구로였습니다. 배 머리에 디오스구로의 상이나 혹은 이름이 붙어 있는 그런 배였겠지요.

디오스구로란 제우스(dios)의 아이들 (kouros)란 말에서 왔습니다. 별이 되어 쌍둥이 별자리 (Gemini)를 이루어 선원들을 지켜주는 신들로 추앙되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상입니다. 바울 시대에 세상은 온통 우상 천지였습니다. 우상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진 배를 타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운행하는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세상은 온통 우상 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추앙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우상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시스템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는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이 디오스구로 배 위에서 서서 꿈의 목적지인 로마를 향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 한 복판에서 우리의 목적지와 비전을 향해 항해를 해야 합니다.

2. 질주를 위한 숨고르기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바울을 태운 배는 수라구사에서 사흘을 정박합니다. 사흘을정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짐을 푸느라 머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레기온에서도 하루를 지냅니다. 문맥 상 남풍이 불지 않아서 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남풍이 불자 다시 항해를 시작해 보디올에 이릅니다. 보디올에서는 예수를 믿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또 다시 7일을 머뭅니다. 보디올을 마지막으로 항해가 끝이 나고 보디올에서 로마까지는 육로를 통해 갑니다. 로마까지 가는 길이 직행이 아닙니다. 여기 저기 머물며 갑니다. 짐을 푸느라, 바람이 맞지 않아서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꿈에 그리는 곳을 코앞에 두고 쉬어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은 숨을 고르는 시간입니다. 빨리 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역풍이 불면 잠시 쉬면 됩니다. 조건이 안 맞으면 잠시 숨을 고르고 도약을 준비하면 됩니다. 그 길에서 뜻을 같이 나눌 수 있는 형제들을 만나면 더 좋겠지요. 바울은 보디올에서 7일을 더 쉽니다. 아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보디올에서 믿는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며 일주일 동안 숨고르기를 합니다. 가슴벅찬 로마의 입성을 코 앞에 두고 잠시 쉬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에도 쉼표가 필요합니다. 잠시 쉬며 충전하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시간은 더 힘찬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3. 성도의 당당한 발걸음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당도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바울을 위한 깜짝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나와 바울을 환영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바울을 환영하기 위해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압비우스 광장을 말합니다. 압비우스 글라우디오 황제가 건설을 시작한 광장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길 이름을 붙였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벽한 길이라 정평이 나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로마의 장수들이 개선할 때 사용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들어오고 있지만, 개선 장군과도 같은 환호를 받으며 압비우스 광장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장차 로마 제국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착한 일을 해서 향기로운 향을 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 후서 2:15-16의 말씀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고 말합니다. 로마군대는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개선할 때에 향을 피웠습니다. 향내는 온 시내를 가득히 채우고 사람들은 향내음을 맡고 달려 나와 승전을 하고 돌아오는 장수를 맞이하며 칭송하였습니다. 승리를 한 로마인들에게 그 향내는 승리의 향이요, 동시에 생명의 향입니다. 그러나 개선하고 돌아오는 무리에 섞여서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은 포로가 된 채 끌려오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향내는 사망의 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받아 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향기이며, 동시에 원수 마귀에게는 심판과 사망의 향기입니다. 예수를 거부하고 마귀의 편에 속했던 자들에게도 역시 심판과 사망의 향이 되겠지요. 바울은 지금 그 향이 퍼지던 압비우스 광장을 성도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을 내며 당당히 개선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비록 죄수의 모습처럼 초라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개선하는 그리스도의 장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국 승리를 주실 것이고, 우리는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는 도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4. 전도자에게 힘을 주는 성도들

바울을 맞이했던 성도들은 대부분 바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얘기로만 들었고 편지로만 만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찾아와 길을 빽빽히 채운 채 바울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담대함을 얻고 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로마를 밟는 바울의 심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설레고 벅차기도 하지만, 두렵고 떨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에게 성도들의 뜻밖의 환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리마인드 시키는 감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에는 담대함이 생기게 되어 추후의 사역을 힘있게 전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제대로 하기를 원한다면, 서로에게 힘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전도자에게 힘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의 힘을 빼놓는 성도가 있고, 전도자에게 힘을 주는 성도가 있습니다. 같은 성도들끼리도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의 힘을 쪽 빼놓는 사람이 있고, 보기만 해도 힘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끼리도 서로 힘을 주고 위로를 주지 못하면 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그런 교회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교회는 형제들이 서로 한 마음을 품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용납하며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몰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이 넘치고, 걸핏하면 섬기는 사람에게 딴지를 걸며 불만을 드러내고,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고 짜증을 내어 성도들을 치받기나 하고, 모든 일을 제 멋대로 하여 질서를 무너뜨리고, 열심히 하는 성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일할 힘을 빼놓고, 열심히 하는 것을 드러내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느라 다른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군이 아닌 마귀의 일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는 자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는 자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고 부셔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 후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남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러나는 순간에 교회는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이름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교회의 모토는 “나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나와 예배드리는 것에 만족하고, 사소한 일로 지지고 볶는 교회를 할 것이라면 교회 문을 닫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기도합니다.

“이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실거면 이 교회가 망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성도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복을 빌기 위해 절간에 모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날 때에 비로소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글로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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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같은 존재 (행 28:1-8)

• 모닥불 같은 존재

• 사도행전 28:1-8

1. 모닥불을 피우는 사람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하던 바울을 태운 배는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결국 난파하게 됩니다. 그러나 배 안에 타고 있던 276명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알려 주신대로 모두 살아남게 됩니다. 풍랑을 만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멜리데라고 하는 섬이었습니다. 멜리데는 현재의 몰타 섬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변국들 사이에서는 은퇴 후 살고 싶은 곳 1위에 해당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퇴역 군인들을 보내어 정착시킨 곳이기도 해서 상당한 부를 누리던 곳이기도 합니다.

멜리데 원주민들은 난파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풉니다. 초겨울 날씨에 헤엄쳐 오느라 바닷물에 젖어있고 비까지 맞았으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모두들 오들 오들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원주민이란 표현은 팬티만 입고 다니는 토인들을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누가는 헬라어 바바로이(barbaroi)라는 단어로 이들을 표현했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이 온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어가 아닌 페니키아어로 말을 했을 것이고, 헬라인들은 헬라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바바로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말에서 유래한 barbarian이란 영단어는 야만인이란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멜리데 사람들은 전혀 야만인이나 미개인이 아니었으며, 발달된 문명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난파된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기에 비록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선한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도덕관념은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한 환경과 학습에 의해 결정되므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점이 오래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세상 사람보다 무례하거나 비도덕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겨울비를 맞아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닥불을 제공해줄 수 있는 따뜻함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출발점이야 어찌 되었건 예수를 믿는 시간이 길어지고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따뜻함을 갖는 사람들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겨울비 맞은 세상에 모닥불을 피워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모닥불을 지탱하는 사람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바울은 사람들이 앉아 몸을 녹이는 자리에서도 그냥 앉아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닥불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무를 모아다가 모닥불 위에 던져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막 난파된 배에서 찬바람을 맞고 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닥불을 지필 나무를 모아 온다는 것은 여간 귀찮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고 기꺼이 일어나 나무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세상에 모닥불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모닥불을 피울 재료를 모아야 하고, 피우는 수고를 해야 하며, 또 모닥불을 지속시키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헌신과 수고없이 모닥불은 결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 만 것이지요. 모닥불의 땔감 사이에 독사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이라 뱀도 막 겨울잠에 들어선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모닥불 앞에 있으니 뱀이 깨어났다가 땔감을 집으려는 바울의 손을 깨물었던 것이지요. 멜리데 사람들은 뱀에 물린 바울을 보면서 바울이 살인자라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울이 바다에서는 구조되었지만 결국 공의의 심판을 받았다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모닥불을 지탱한다는 것은 뱀에 물릴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할 때도 있고, 불필요할 오해와 정죄로 인해 고통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상하고 다칠 위험은 줄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위험과 모욕을 감수하고라도 세상을 위해 모닥불을 유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3. 모닥불로 세운 사람을 지키시는 하나님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바울은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독사에 물린 사람들을 경험해왔습니다. 독사에 물리면 극도의 알러지 반응으로 인해 온몸이 부어 오르고 심한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기에 그 일이 바울에게도 일어날 것을 예상하며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천벌을 받은 살인자라고 오해했던 사람들은 이제 태도를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에게 경배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막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신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순화시킨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칭한대로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멜리데 섬에 모닥불을 피우고 싶으셨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을 위해 물리적인 모닥불을 제공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영적인 모닥불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모닥불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모닥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그라지면 세상을 따뜻하게 할 모닥불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께서 지피신 불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독사에 물렸지만 살아남은 바울의 이야기는 온 섬의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바울을 초대하여 삼일 동안이나 머물게 하며 환대를 했습니다. 그는 근처에 토지를 가지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섬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많은 땅과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병과 이질이란 아마도 그 일대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감염이었을 것입니다. 섬에 의사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 자리에 있는 누가 역시 의사였지만, 당시의 의학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질병이었겠지요.

바울은 보블리오의 아버지에게 들어가 기도하고 안수합니다. 질병은 순식간에 나아버렸습니다. 의사들이 어찌할 수 없는 질병을 고쳤다는 소문은 곧 온 섬에 퍼지게 되고 다른 병든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바울을 통해 지유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불이 지펴진 것이지요. 멜리데 사람들은 이전에는 경험치 못한 성령의 모닥불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고 멜리데 섬의 사람들은 유라굴라 폭풍이 아니었다면 결코 듣지 못했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로마로 돌아가는 배에 필요한 물질들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전의 배는 난파되고 없어졌지만, 새로운 배가 생겨나고 그 배를 채울 물질들도 채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지피신 불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회복을 가져 옵니다.

5. 숨겨진 이야기

누가는 본문을 통해 단순히 멜리데에서 생긴 일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누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모닥불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겪게 될 일들과 그 결과입니다. 세상에 모닥불을 제공하고자 하는 자는 뱀에 물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뱀을 짐승이라 부릅니다. 마귀를 뱀이요 짐승으로 불렀던 요한계시록의 개념과 유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에 모닥불을 제공하는 성도를 물어 뜯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뱀을 털어 버리는 순간 뱀은 불에 타 죽고 맙니다. 마귀의 운명은 지옥불에 들어가 타는 것입니다. 마귀에 붙어 있던 모든 자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제공하신 모닥불을 통해 사람들은 치유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해하고 욕하고 조롱했던 사람들도 돌아와 그 따스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길을 친히 지피시고 유지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전체에 그려진 이미지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 기록된 본문의 이야기는 단순히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를 그려내는 이미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이루고자 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는 이미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 역시 마가복음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러한 이미지를 간단하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7-18).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세상의 모닥불이 되고자 결단하고 달려 나아갈 때, 멜리데 섬의 이미지와 마가복음의 성경구절은 우리의 이미지요, 우리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울비에 맞아 떨고 있는 것과 같은 세상 가운데 모닥불을 제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모닥불이 되어 원수 마귀는 불에 던져 쫓아내고, 마귀에 붙들려 고통받는 영혼들에게는 따스함과 치유와 회복을 주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의 몸과 영혼을 녹이는 하나님의 모닥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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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 (행 27:27-44)

*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

* 사도행전 27:27-44

1. 아직 어두운 밤일지라도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하고 있습니다. 무려 14일이나 되는 긴 시간을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떠돌았습니다. 아드리아 바다란 현재의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집트와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중간의 바다를 말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노련한 사공들이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때가 자정이었으므로 앞이 보였을 리는 없고 아마도 사공들의 귓전에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바다 한복판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해안선이 가까워질수록 파도 소리가 들리므로 그 소리를 듣고 육지가 가까운 줄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어두운 밤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물을 재어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 됩니다. 한 길은 1.8m이므로, 물은 36m가 되었다가 잠시후 27m가 된 것입니다. 이제 상황은 암초에 부딪힐 것을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물로 닻 넷을 내립니다. 고물이란 배 뒷쪽을 말합니다. 배 앞쪽은 이물이라고 하지요. 보통 닻은 이물에 내립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닻을 고물에 내렸습니다. 만약 이물에 닻을 내리면 뒤에서 파도가 강력하게 치고 있는데 이물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배가 180도 전복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닻을 내린 채 날이 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날만 새면 살 소망이 생깁니다.

아직도 어두운 밤이지만 바울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첫 스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 인생이라는 배의 닻입니다. 소망의 닻을 내리면 파도가 일렁여도 배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칠흙같은 밤이지만, 불과 5시간만 지나면 여명이 밝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모락 모락 피어 오릅니다. 인생이 어두움 속에서 파도를 맞는 상황 가운데에 있으십니까? 소망의 닻을 내리십시오. 이제 곧 날이 샙니다. 날이 새면 앞이 보이고 앞이 보이면 소망이 현실이 되어, 소망의 닻은 더이상 불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2.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그러나 말씀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뜻대로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공들은 자신들만 살고자 하여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습니다. 그들은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 사람들을 속이며 자기만 살자고 거룻배를 내려 놓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건 말건 상관이 없고 자기들만 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말씀은 모두가 살 것이라고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지를 못합니다. 말씀이 떨어지나 그것을 붙들지 못하는 인생은 추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 함께 살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못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군인들입니다. 바울은 풍랑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파선의 위험을 세 번씩이나 당하고도 살아 남았으니 알만큼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러한 그의 눈에 사공들의 불필요하고 수상한 행동이 빗겨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사공들이 떠나지 못하게 해야 모두 살 수 있다고 말을 해줍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달려 들어 거룻배를 묶고 있는 거룻줄을 끊어 버립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배가 난파하게 되거나 해안에 접근을 못하게 되면 거룻배는 생명의 보트가 됩니다. 거룻배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을 바람막이 삼아 간신히 지켜낸 바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서 지켰던 거룻배를 단 1초만에 베어서 바다에 떨구어 버립니다. 거룻배를 들어 올리고 사공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 될 일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만 살겠다고 남들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나 앞뒤 안 재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섞여 있으면, 공동체는 너무나도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피해를 입게 되며 공동체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공동체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주 심령이 상하게 만들고, 혼란을 야기하며, 소망을 꺾어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두고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추악한 모습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공존하며 상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질서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실현이 됩니다.

3. 모두가 불안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모두가 살기를 원하고 불안해 하는 상황 가운데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먹기를 권합니다. 사람들은 벌써 2주째 풍랑에 시달리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확실히 말씀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 것이지만, 배는 난파될 것을 이미 믿고 있습니다. 난파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고 힘을 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프니 잘 먹자는 수준의 행동이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된 대로 믿고 말씀에 맞게 대응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모두가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모두가 산다는 말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주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대부분이 산다는 메시지였으면 사람들은 대부분에 속하지 못할까봐 불안에 떨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사람들 앞에서 축사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평온한 모습에 사람들 역시 배부르게 먹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들이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힘을 얻고 구원의 소망 가운데 곧 있게 될 삶의 길을 준비하게 됩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남겨 두었던 밀도 이제는 바다에 버립니다. 최대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모든 목표는 살아남는 것에 맞춰집니다.

사람들에게 평안과 용기를 주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례하게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질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며 위로와 평안과 격려를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살아내며 말씀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4. 낡은 배는 난파된다 할지라도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드디어 날이 새고 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뭍이 보인다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지에 제대로 정박을 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배가 들어갈 수 있겠는지를 논의한 후 배를 최대한 육지에 가깝게 접근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닻은 끊어 바다에 버렸습니다. 생명이 달린 상황에서 배와 기구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단 사는 게 목적이지요. 키도 풀어서 늦추고 돛을 달아 바람에 배를 맡깁니다. 큰 돛은 무게가 나가므로 풍랑 중에 이미 버렸을 것이고 남겨둔 작은 돛을 달았을 것입니다. 배는 해안을 향해 잘 들어갔지만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양쪽의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는 항상 퇴적층이 있습니다. 둔덕이 생겨서 배가 들어갈 수가 없지요. 배의 이물이 둔덕에 쳐박힌 상태에서 고물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칩니다. 배가 둔덕에 부딪힌 충격과 파도가 때리는 충격이 합해져 배는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배는 난파된다 할지라도 새로운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인생의 배가 좌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배 한 척이 망가졌을 따름입니다. 새로운 땅을 만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배 한 척 망가지는 것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실 뿐 아니라, 새로운 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새로운 배가 생기고 새로운 항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5.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결국 바울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배 안에 있던 276명 전원이 살아 남았습니다. 군사들은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할까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 우깁니다. 모두가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깨려 듭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보고 홀딱 반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모든 순간 슬기롭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사람이 갖는 위용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죄수들을 죽이는 것을 금합니다.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군사들이 거룻배를 끊어 버린 탓에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하여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모두가 살아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말씀으로 각주가 되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선포된 말씀을 우리가 신뢰해야 하며, 선포된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내야 합니다. 또한 선포된 말씀은 결코 안될 법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기적처럼 우리 앞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바로 위엄과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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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네게 주셨노라 (행 27:1-26)

• 다 네게 주셨노라

• 사도행전 27:1-26

1. 초라해도 이루어지는 꿈

1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던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제 그는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꿈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는 죄수의 신분입니다. 그가 타고 가는 배도 큰 선박이 아니라 아드라뭇데노라고 하는 작은 배였습니다. 배에 함께 가는 사람들은 로마로 호송되는 죄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사형수로 원형 경기장의 검투경기에 나서 사람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하며 죽을 날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꿈을 향해 가는 바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자그마한 배를 타고 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바울 속에 품고 있는 꿈의 싸이즈가 크기 때문이며, 그 꿈을 이루실 하나님의 싸이즈가 언리미티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가는 여정에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함께 동행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의사로, 아리스다고는 수종드는 사람으로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성경에서는 고작 5구절 정도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준 바울의 제자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사람으로 아마도 바울의 2차 여행 시에 바울의 전도에 의해 제자가 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3차 전도 여행에 바울에게 합류했다가 에베소에 있었던 은장색들의 소동으로 말미암아 죽을 뻔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대표로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헌금을 들고 바울과 함께 동행했다가,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극진히 바울을 돌봤을 것이며, 이제는 로마로까지 동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다고는 이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될 때,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해가는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선대합니다. 바울에 호의적이었으며 바울의 무죄함을 익히 아는 베스도가 바울을 선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또한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극진한 섬김을 받는 바울을 보면서 백부장 스스로도 바울을 다르게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백부장의 배려로 시돈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귀한 교제의 시간을 갖습니다. 여기에서 친구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형제 자매된 사람들을 일컫는 당시의 애정어린 호칭이었습니다.

2. 바람부는 인생의 항로

4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로마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맞바람이 있어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배의 속도가 늦춰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들은 무라 시에 이르러 큰 선박인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탑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곡물을 실어 나르는 곡물선이었을 것입니다. 큰 배로 옮겨 타도 풍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살모네와 그레데 해안 중간을 지나며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겨우 겨우 항해를 하여 미항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품고 가는 로마행인데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바람이 멈추질 않고 바람막이를 찾아 겨우 겨우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람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만의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3. 인생의 배가 좌초하는 이유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맞바람때문에 배의 속도가 나지 않고 해안은 바람막이 삼아 가느라 더욱 천천히 가야 했기 때문에 항해는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지연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잠시후면 겨울이 시작됩니다. 겨울이 오면 지중해를 통과해 순항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금식하는 절기란 속죄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치면 7월 10일에 있는 절기인데, 로마식 달력으로 하면 9-10월에 해당합니다. 역산하면 AD59년의 속죄절은 10월 5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겨울의 초입인 것이지요. 바울은 이 시기에 항해를 하는 것이 지극히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후 11:25의 고백처럼 바울은 이전에도 3번이나 난파된 적이 있으며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적으로도 결코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가 순적하게 가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상황과 아마도 기도하는 중에 바울에게 앞으로 있을 일을 예감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 대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 지식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미항에서 겨울을 나고 항해를 다시 시작하자는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편한 곳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뵈닉스를 향해 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생이 좌초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지혜를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 앞에 있는 유익과 편의 때문에 위험이 축소되어서 보입니다. 편의에 눈이 가려지면 위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쫓거나, 반복되는 하나님의 경고와 조짐을 무시하고 유익과 편의에 눈이 가려지면 인생의 배가 좌초되고 맙니다.

4. 순풍이 속임수인 순간들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선원들이 대부분 미항이 아닌 뵈닉스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순하게 부는 남풍에 속은 탓이기도 했습니다. 뵈닉스를 향해 북서쪽 방향으로 항해하는 배에 남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뵈닉스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유라굴로는 동풍을 뜻하는 유로스와 북풍을 뜻하는 아퀼로의 합성어입니다. 남풍을 이용해 북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북동풍의 광풍이 불어 닥친 것이지요. 이 바람을 만나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남쪽의 이집트 방향을 향해 밀려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은 가루다라고 하는 섬을 만나 겨우 거루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스루디아를 만납니다. 스루디아란 모래톱 또는 모래수렁을 말합니다. 그곳에 부딪히면 모두가 죽게 됩니다. 배가 난파되도 육지 근처에서 난파가 되어야지 모래수렁에 걸리면 끝장인 것이지요. 모래수렁을 겨우 면했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바람이 잦아 들지를 않았으므로 짐을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사흘 째에도 바람이 멎지 않자 이번에는 기구들을 모두 버려야 했지요. 짐도 배의 기구들도 모두 소중한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광풍을 맞아 살기 위해 그동안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이제는 목숨만이라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항해에서 순적한 남풍에 속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스탑 싸인이 들어 왔는데도 무시하고 속도를 내어 직진을 해버립니다. 모든 상황이 괜찮아 보이고 오히려 좋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순풍에 속아 잠시 후에 닥칠 유라굴로를 예측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상황이 이르면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인생의 배까지도 망가지게 되고 목숨만 부지해도 좋겠다 고백하는 상황에 몰리기도 합니다.

5. 절망이 속임수인 순간들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유라굴로 광풍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안되는 두려움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파도는 쳐서 갑판 위로 올라옵니다. 이제는 모두가 구원의 여망마저 상실한 채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바울이 갑판 위에 서서 말합니다. 바울이 입을 열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소망의 메시지가 임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그들을 원망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신뢰하게 하여 결국 영혼들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두가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그 순간에 안심하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주니다. 배는 잃겠지만 단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여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광풍 가운데 들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배 안에 바울만 있었다면 광풍을 만날 이유도 없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은 영혼들을 얻기 위해 펼쳐지는 속임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광풍으로 배 안의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 배에는 바울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국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사람입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바울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풍에 의해 로마로 순항을 하면 바울이 타고 있는 배의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탄 배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 만났건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배를 탔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가운데 한 배에 탄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 광풍이 불 때에 우리는 눈을 들어 어떤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망이라고 하는 속임수 속에 담아 두신 희망의 빛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한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 말씀입니까? 바울은 배 위에 서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배 위에 탄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믿는 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신을 섬겼으니까요.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들의 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은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절망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두가 살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풍랑이 일었던 이유도, 풍랑 속에서 살려 주시는 이유도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갈망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당신들 다 내꺼야!”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겠다는 메시지를 주셨으므로 만약 살게 된다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영혼들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광풍을 만나셨습니까? 오랫동안 별빛같은 희미한 빛마저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험난한 문제와 고통들이 파도처럼 갑판 위로 올라와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여망마저 무너져 남은 것은 절망 뿐이고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통해서 우리가 결코 얻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주십니다. 낡은 인생의 배가 난파되면 새로운 인생의 배를 주십니다. 낡은 배 안에는 세상 양식과 세상 사람들이 들끓겠지만, 새 배에는 썩지 않을 하늘 양식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들끓게 될 것입니다. 광풍을 만났다면 이제 기대치 않았던 새 일과, 영광스럽게 옮겨 탈 새 배를 꿈꾸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우리에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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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狂)신도, 광(光)신도 (행 26:24-32)

• 광(狂)신도, 광(光)신도

• 사도행전 26:24-32

1. 미친 신앙 (狂信), 빛나는 신앙 (光信)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은 사슬에 묶인 채 고관들 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섞어 복음을 전합니다. 고관들은 바울을 심문한다고 앉아 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전하자 총독 베스도가 바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베스도는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야기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3대 교육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도 학식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어, 아람어, 로마어, 헬라어 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헬라 철학에도 조회가 깊었고, 율법과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지식을 갖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게다가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흔들림도 거침도 없이 복음을 쏟아 놓는 모습은 베스도가 학문이 많은 것을 인정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 많이 공부를 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말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미친 믿음이 아니라 빛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슬에 묶인 채 자신을 둘러싼 고관들 앞에서 담대하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결코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학문이 초등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이성으로만 받아 들이고자 하면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이 열려야 복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또는 지위가 높다고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브로 섬을 주관하던 총독 서기오는 바울을 일부러 불러 마법사의 방해를 뚫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복음은 영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받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미친 믿음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광신도라는 오명을 입혀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미친 신앙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신앙은 불타는 논리 가운데 세워진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도 기독신앙은 조롱을 당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신앙은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라고 하는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넘치게 사랑하면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에게 미칠 수밖에 없는 이유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의 말이 참되고 온전한 말이라고 변호했지만 베스도에게 집중하지 않고 아그립바에게 집중을 합니다. 베스도에게 복음을 들을 귀가 없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바울은 상대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아그립바를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아그립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통치하는 분봉왕으로서 그리스도의 도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적어도 이스라엘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터무니 없는 낭설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의 한쪽 귀퉁이에서 생겨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생겨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순례객들이 200만 이상 찾아오는 유월절에 공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삼일만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기이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로마군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이 털릴 리는 만무했기에 빈무덤의 소문은 모두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 5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0일 후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했던 놀라운 이적들이 재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표적들에 의해 증명되는 말씀 앞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작 120명으로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는 수만명의 규모로 커져 있었으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의 땅까지 그리스도의 도가 만연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도보다는 훨씬 바울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아그립바는 분봉왕으로서 대제사장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성전관리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벨릭스 통치 시에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지만, 베스도를 찾아온 대제사장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장본인이 바로 아그립바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아그립바는 당연히 유대인의 전통과 구약성경에 대해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선지자들을 아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당연히 선지자들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영이 열려 있지 않았기에 선지자들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그립바에게 바울은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즉 선지자들을 안다면 당연히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도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바로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이미 성경에 기록해두신 바로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영원한 벌로부터 영원한 복으로 우리를 옮겨 버리셨으니, 이런 분에게 미치지 않으면 누구에게 미쳐야 할까요?

어차피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베스도 역시 공명하고 현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 입장에 미친 사람입니다. 남매가 살을 섞고 사는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정욕에 미친 사람이고, 함께 동석한 모든 고관들도 돈이나 권력이나 혹은 무엇엔가는 미쳐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미쳐 있습니다. 스포츠에, 취미에, 돈에, 힘에, 감정에, 드라마에, 샤핑에, 자식에, 이성에, 그렇게 각자가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미쳐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진정으로 미칠만한 가치를 가진 존재는 누구일까요?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 미쳐야 신앙이 빛난다

28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아그립바가 흔들림을 보입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적은 말로 자신을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적은 말이란 짧은 시간에 하는 짧은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길게 복음을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간증을 녹여 최대한 압축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그립바가 가장 흔들릴만한 내용으로 맞춤 설교를 했던 것이지요. 그 말에 아그립바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길게 전하나 짧게 전하나 모두가 자신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다만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 미친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다른 곳에서 모여 바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정치적으로는 그 어떠한 죄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그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부분에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아그립바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와 고관들은 바울이 종교적으로도 전혀 문제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베스도에게 말해줍니다. 이후 황제에게 가는 조서를 꾸밀 때에도 아그립바는 베스도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만약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뻔 했다.” 그들은 풀려날 수도 있는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는 바람에 풀려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풀려나는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꿈은 로마도 보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믿음을 세상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바울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세상 사람들이 흉내나 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바울이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몸은 사슬에 묶여 있지만, 총독과 왕과 고관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고 있는 모습은 빛이 나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미치는 것입니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하는 흐릿한 사랑 앞에서 사랑 받는다 느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활화산 같은 사랑을 부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미치신 것이지요.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역시 하나님께 미친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미친 사랑은 빛이 납니다.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사랑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철저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기에 더욱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미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고결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친 사랑을 해야 신앙은 빛이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쳐도 괜찮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순금처럼 빛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불순물이 섞여서 빛이 없고 희미티티한 그런 신앙이 아니라 모든 불순물들이 태워지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미쳐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빛나는 신앙인들이 될 수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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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일 (행 26:1-23)

· 회개에 합당한 일

· 사도행전 26:1-23

1. 존중하며 복음 전하기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를 비롯한 고관대작들 앞에 바울을 세웁니다. 바울의 재판은 이미 종료되었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한 후이므로 굳이 바울이 자신을 항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그립바와 고관대작들 앞에 서는 것을 전도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아그립바는 있는 폼을 다 잡으며 바울에게 말합니다.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사실 아그립바는 바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뭐라도 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말하기를 허락한다고 무게를 잡고 있는 것이지요.친동생 버니게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는 주제에 근엄하게 무게를 잡고 있는 모습은 사실 우습고 가증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을 들어 자신을 변호합니다. 손을 든다는 말은 존경심을 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타락하여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영혼이 어떠한 모습을 갖추고 있건 우리는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복음의 핵심, 부활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느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이 바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임을 증거하다가 죄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바울을 기소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부활은 당연히 믿어지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믿는 바였고, 조상들을 통해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시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믿으라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부활하여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현재가 있기에 부끄럽지 않은 과거의 간증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간증만큼 큰 힘을 갖는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는 삶의 간증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선포되어야 그 복음은 복음으로서의 힘을 갖게 됩니다. 수천년 전에 종이에 기록된 글이 아닌 삶 속에서 실현된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간증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와 희망찬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찬성했던 사람이고, 누구보다 앞장 서 그 일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모든 회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채찍질하며 예수를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가혹한 형벌은 예수를 부인하도록 위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일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심히 격분하여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두고 두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간증을 할 때마다 이 부끄러운 과거를 언급합니다. 그러한 자신을 빛으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 죄악 가운데에서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는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4. 죄인을 부르신 목적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바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정오의 강렬한 햇살를 능가하는 빛이 임하여 바울을 압도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가시채를 발길질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멈출 것을 바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가시채란 주인이 짐승을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짐승이 주인에게 반항하여 발길질을 하면 할수록 자유로워 지는 대신 고통이 가중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바울에게 소명까지 주십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일과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일에 대해 바울을 종과 증인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바울은 죽음의 위기들을 수도 없이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바울을 구원하시며 그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할 것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목적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아그립바와 버니게 같은 부정한 자들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이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두움에 거하고 사탄의 권세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두움은 끝나고 빛이 임할 것이며, 사탄의 권세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죄사함을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나누게 하실 것입니다. 그를 위해 바울을 부르셨고, 또한 바울을 통해 아그립바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5. 회개에 합당한 일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인간들의 빛과 소망이 되어 주실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하여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바울을 지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겼으나 죽지 않고 서서 아그립바와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의 합당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말합니다. 자신이 전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형식이지만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통하여 약속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며, 마지막으로 회개의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온전한 회개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는 죄사함도 없고, 죄사함없이는 유업도 없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이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회개의 합당한 일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의 합당한 일로 증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히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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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들어야 할 복음 (행 25:13-27)

• 그럼에도 들어야 할 복음

• 사도행전 25:13-27

1. 정욕에 매인 자들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신임 총독인 베스도가 바울의 재판을 진행한 후 수일이 흘렀습니다. 로마에서 파송된 새로운 총독을 만나기 위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방문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 당시는 헤롯 가문이 대를 이어 이스라엘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여러 명의 헤롯 왕들 중 하나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로디아의 오빠로서 야고보를 목베어 죽인 자이며, 후에 교만을 떨다가 벌레에 먹혀 죽은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1세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그립바 1세와 버니게와 드루실라입니다. 그 중 드루실라는 권력을 탐해 남편을 버리고 로마총독 벨릭스와 결혼하여 살던 사람임을 앞 장에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버니게는 드루실라와는 비교도 안되게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버니게는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와 결혼했다가 그와 사별한 후 삼촌인 칼키스와 결혼했지만 그 역시 사별하였습니다. 그 후 버니게는 한 살 많은 친오빠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의 눈에 이것이 용납될 리가 없었고 버니게는 사람들의 입방아와 비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녀는 나쁜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 길리기와 왕 폴레몬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혼하여 다시 오빠 아그립바와 동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놓고 동행하고 다녔으며 베스도를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까지 등장을 한 것입니다. 버니게는 나중에 디도의 첩이 되어 로마의 황후가 될 것을 꿈꿨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친동생이자 정부인 버니게를 데리고 신임 총독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 역시정욕과 탐욕에 묶여 사는 추악한 자였습니다.

2. 탐욕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를 방문하기 전, 베스도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0일 정도를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7절에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죄하기를 청했다는 것입니다. 재판도 하기 전에 아예 죄인으로 판명해줄 것을 로비했다는 것이지요.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행위를 하면서도 의를 행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탐욕으로 자기 배를 채우고 무고한 자를 해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이었습니다.

3. 깨끗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벨릭스와는 달리 탐욕이 없고 공명정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스도가 흠이 없는 사람이란 말은 아닙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선하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의 잣대 자체가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적 입장을 위해 거짓과 위선을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으므로 스스로도 남보기에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 평을 받는 것이지요.바울을 정죄해달라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고소 사건에 대하여 피고가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속으로 그렇게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으므로 도망갈 염려가 없다는 것과, 자신이 곧 가이사랴로 돌아가므로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하자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 대면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만큼은 같은 통치자로서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로마법을 따라 공명하게 판결하는 사람이고, 백성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칼같은 성정의 정치인임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마자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바로 재판을 열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자신이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 역시 자신을 내세우는 행동입니다. 자신은 성실한데다가 통찰력까지 있는 사람임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고소하는 자들이 여러가지로 고소를 했지만 증거는 하나도 없고 오직 종교적인 이슈만 있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쟁점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과연 분별력이 있고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 그는 어떻게 심리할 지를 모르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판단되었다면 풀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어떻게 심리할 지를 모르겠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겸손함까지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스도가 어떻게 심리할 지를 몰라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다시 받겠느냐고 물은 것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심리할 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울이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기에 베스도는 바울에게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적어도 자신이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부임 초기에 유대인들의 마음도 얻어야겠고, 로마시민이 연루된 재판도 로마법에 의해 제대로 해야 한다는 딜레마 앞에서 베스도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발동해서 완충지역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바울을 놓아주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냐는 질문을 한 불공정을 자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없는 자가 갖는 도덕의 한계입니다. 베스도는 상대적으로 공명정대하고 현명한 사람이긴 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는 공명함도 타협꺼리가 되었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거짓말과 과대포장을 서슴치 않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지요. 자기를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마귀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로 이생의 자랑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죄로 여기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추악한 죄로 여기십니다. 사람의 잣대와 하나님의 잣대 사이의 괴리로 인해,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4. 아무리 치장해도 감출 수 없는 추악함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그립바는 베스도에게 자신도 바울을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에 대하여 이미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친동생인 드루실라가 전 총독인 벨릭스의 아내였으니 못 들었을리가 만무하지요. 그러나 바울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습니다. 아그립바에게 호기심이 발동된 것입니다. 다음날 아그립바와 베니게는 크게 위엄을 갖추고 바울을 만나러 접견장에 들어옵니다. 그 자리에는 천부장은 물론 성의 고관대작들이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구류된 바울에 비해 이들의 겉모습은 웅장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크게 위엄을 갖추고 온다 할지라도 친오빠와 친동생이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뻔뻔하게 공식적인 석상에 동석하고 있다는 추악함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베스도도 자신을 치장합니다. 바울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은 반드시 죽여야 할 자로 규정하지만 자신이 재판을 해보니 무죄하다고 이야기 함으로써 자신의 현명함과 공명함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찾지 못했다면 놓아 주었어야 했습니다. 애초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냐는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또한 로마 황제에게 상세하게 보고할 정보가 없다고 말을 하며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는 것처럼 겸손으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보고할 정보가 있었습니다. 반역을 도모하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고소였습니다. 바울은 그 죄목으로 고소를 당했고, 무죄함을 밝혔으나 정치적 역학 관계 때문에 방면이 이루어지지 않는 불의로 인해 황제에게까지 상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죄목대로 황제에게 보고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첫 부임지의 유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져야 할 복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베스도의 위선과 바울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아그립바의 호기심이 버무려 져서 바울에게는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할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울의 재판이 펼쳐지는 곳은 항상 복음이 전파되는 장이 되었습니다. 기소된 내용에 대한 반박을 하려다 보면 자신의 간증과 자신의 사역, 자신의 신앙까지 전부 말을 해야 했기에 재판이 아닌 전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류해 두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과 위선과 탐욕과 정욕과 패역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역시 사랑하십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아그립바와 버니게, 그리고 총독 베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사람들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패역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도를 듣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구류된 채 갇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전도의 판을 키워 주십니다. 그를 통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고관대작들까지도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비천한 자나 높은 자나, 연약한 자나 권세를 가진 자나 모두가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의 죄가 만연하기에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들이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바울은 구류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세상을 향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지금 패역한 세상에 유일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자로 세상 가운데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정욕들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그립바와 베니게, 우리 안에 있는 베스도,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가증스러운 모습까지 모두 지워내야 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미끼를 들고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자로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서서, 혼탁함에도 불구하고 전해져야 하는 복음의 전파자로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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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향하여 (행 25:1-12)

• 비전을 향하여

• 사도행전 25:1-12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구류한 채 로마로 송환되고 신임 총독인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었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부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총독 본부는 가이사랴에 있지만 예루살렘이 자신이 다스릴 이스라엘 땅의 중심지였으므로 대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행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점을 잘 활용하여 다시 한번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소하면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베스도가 신임 총독이므로 자신들의 요청을 잘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도가 청을 들어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면 그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일 음모를 이미 꾸며 놓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같은 사건으로 두 번씩이나 재판을 해서 패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통해서는 바울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매복하였다가 살해하려는 악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아무리 은혜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이런 악한 꾀를 내고 있으니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썩고 타락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처럼 악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로마시민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을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 상황고 공정성 가운데 밸런스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도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할 것이라 밝힙니다. 첫째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그가 도망갈 염려가 없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어디 가는 것 아니니 번거롭게 호송할 필요 없이 가이사랴에 가서 재판을 하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자신이 가이사랴로 곧 돌아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일정이 있으므로 총독의 일정에 맞춰서 재판을 잡는 것이지, 유대인들의 편의에 따라 총독의 일정을 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아무튼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청을 거절함으로써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있는 셈입니다.

2. 바울을 놓아줄 수 없는 베스도의 정치적 입장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10일을 머문 후에 가이사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바울을 불러 오게 하여 재판을 진행합니다. 이번 재판이라고 하여 새로울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이자 전문 변호사인 더둘로를 고용해서 말을 했어도 승소를 하지 못한 것을 2년이나 지나 다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말로 마구 고소를 해댔지만, 그 어떠한 증거도 제시를 하지 못한 채 빡빡 우기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번 재판에서 활용하고 있는 방법은 ‘쪽수로 밀어붙이기’ 였습니다. 바울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대인 유력자들이 와서 삥 둘러 싸고 위협을 가하는 것이지요. 바울에게 뿐 아니라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력자들이 와서 바울을 죽이기 원하는데 무죄 선고를 하면 정치적 입장이 땅에 떨어질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들 앞에서 자신은 율법과 성전과 가이사에 대해 전혀 죄가 없음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거스려 우선 유대교에 위해를 가했다는 것으로 기소를 했습니다. 이는 로마 당국이 각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한다는 사실에 위배가 되는 것임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실 무근이었고 증거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바울이 가이사를 반역하는 역모죄를 범했다고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이사에 반하는 그 어떠한 정치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근거도 증거도 없는 사실로 기소를 하고 있으니 바울은 무죄였고 베스도는 당연히 바울을 놓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임한 지 2주 밖에 안된 시점에 벌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어 버리면 앞으로의 정치가 어려워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 앞에서 재판을 다시 받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합니다. 베스도는 공정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의 편에 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3. 로마황제에게 상소한 바울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 거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불리한 판단을 받고 죽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빨리 죽어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지 않은 음모로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죽을 만한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죽을 것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을 한 것이지요. 당시 로마시민권자들에게는 지방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지,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요청에 따라 배석자들과 상의를 한 후 그 요청을 받아 들입니다. 총독은 정치인이지 법률 전문가는 아니므로 재판을 할 때에는 법률 전문가인 배석자들을 함께 대동하고 재판을 하였습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논의를 한 이유는 바울의 사안이 황제에게 올릴 만큼 중대한 사안인가 하는 것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종교적인 사안이었지만, 기소는 정치적인 사안으로 기소가 되었고, 더구나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사안이므로 당연히 황제에게 갈만 한 중대 사안이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해 가도록 결정이 된 것입니다.

4. 비전을 향하여

바울은 2년 구금을 당하고, 같은 사건으로 3번이나 재판을 했으나 무죄임을 밝히고도 방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바울에게는 모두 유익이었습니다. 구금당한 동안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무죄방면되었다면 악한 유대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울을 살해했을 것입니다. 구금이 바울에게는 오히려 안전장치가 되었던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3차 재판을 위해 기소하지 않았다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계획은 훨씬 늦춰졌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그저 무죄방면을 하였어도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악한 음모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바울을 풀어주지 못하는 베스도의 이기심이 있었기에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자신의 사건을 상소하게 되었고, 바로 그것을 통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던 바울의 비전은 성취가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지만, 그는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서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꿈과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인생은 동력을 잃은 배와도 같습니다. 배에 동력이 없으면 배는 표류하기 마련입니다. 파도가 치는 대로 요동치다가 때가 이르면 침몰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꿈과 비전이라는 동력이 있으면 생동감있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은 사람을 살아있게 하고 역동성이 넘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소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소망들은 대부분의 경우 탐심이거나 망상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대통령, 재벌, 총장, 월드 클래스 등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을 주시고 그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품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소망과 꿈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악한 상황들마저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에게는 그저 꿈을 향하여, 비전을 향하여 행진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현재의 모든 악한 일들과 상황들은 그저 우리의 꿈을 향해 가는 여정에 불태워질 연료일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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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 전에 (행 24:22-27)

* 너무 늦기 전에

* 사도행전 24:22-27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의와 절제를 상실한 탐심 부부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바울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전문 변호사까지 고용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장로들과 함께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기소합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현란한 말솜씨로 바울을 로마의 정치범으로 몰아가려던 변호사 더둘로의 기소는 바울의 자기변론 앞에서 철저히 부셔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바울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는 대신 재판을 연기합니다. 천부장 루시아의 말을 들어보아야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이 이미 무죄임을 인정하는 편지를 써보낸 바 있습니다. 벨릭스가 재판을 연기한 이유는 사실 천부장 루시아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있어서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벨릭스는 유대인들이 바울 때문에 몹시 화가 나있는 모습을 보고 바울을 그냥 무죄 방면하기를 꺼렸습니다. 유대인들의 반감을 굳이 조장할 필요가 없었고 바울을 감금해 둠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것이지요. 또한 벨릭스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이 돈이 많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가두어 두면 풀려 나기 위해 돈을 줄 것으로 기대를 했던 것이지요. 결국 재판을 연기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유지와 돈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은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드루실라는 헤롯아그립바 1세의 딸이고 아그립바 2세의 여동생입니다. 드루실라는 코마겐의 왕자 에피파네스와 약혼을 하였지만 그가 할례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파혼을 했습니다. 대신 할례를 수락한 시리아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와 불과 15세의 나이로 결혼을 합니다. 드루실라에게 할례 문제가 그토록 중요했을까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남편 아지주스를 버리고 벨릭스와 결혼을 하는데, 총독 벨릭스가 할례를 받았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할례를 고집한 이유는 유대인들에 마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통치하고 있는 아그립바 1세가 절반 유대인인 딸을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시키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드루실라가 총독 벨릭스와 결혼을 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배국인 로마의 총독, 그것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총신 팔라스의 동생과 결혼을 하는데 유대인들의 지탄따위 안중에 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드루실라가 남편을 버리고 총독 벨릭스에게로 간 이유는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벨릭스가 드루실라를 다른 남자에게서 빼앗아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드루실라가 절세의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쁘면 다른 남자의 여자라도 빼앗아 오는 추한 정욕의 주인공이 바로 벨릭스였던 것이지요. 벨릭스에게 드루실라는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여자를 밥먹듯 갈아치우고 말지요.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돈, 권력, 정욕에 찌든 세상 사람들에 대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세상은 돈과 권력과 정욕을 지향합니다. 이 세상이 다라 생각하면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이 마음에 만족을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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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탐심을 채워도 여전히 갈급한 영혼

본문에는 아주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총독 벨릭스가 그리스도의 도를 더 자세히 알았다는 대목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보다 더 자세히 알았다는 것인지, 바울이 설명하는 것보다 더 자세히 알았다는 것이지 모호하지만, 벨릭스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듣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미루어 드루실라 역시 예수님께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방 사본에 의하면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가 벨릭스를 졸라 바울을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드루실라는 돈과 권력과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그것을 나름 충족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만 채우실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빚어놓은 진공”이라 부른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감을 느낍니다. 진공이기 때문입니다. 진공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 보니 다른 대체물로 그것들을 채우려고 시도합니다. 돈, 권력, 정욕 등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잡동사니들로는 결코 진공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갖고 또 가져도 마음의 허무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 많이 갈구하게 되지요. 평생 먹고 남을 것을 가지고도 여전히 목말라 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그것은 곧 인생의 가장 비참한 고통이 되어 사람을 괴롭히고 맙니다.


3. 바울의 해방책, 의와 절제와 심판의 메시지

바울은 이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아는 것이었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돈과 권력을 위해 의를 저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정욕을 위해 절제를 저버린 사람들이었지요. 이 땅예서는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의와 절제를 저버리고 산 것에 대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질 공간을 잡동사니 쓰레기들로 채운 것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정확히 그들의 상태를 알았고,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을 전했습니다.


4. 인간에게 정해진 시간

바울의 말을 듣던 벨릭스는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말씀이 제대로 작동을 한 것이지요. 물론 효력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돈과 권력과 정욕의 맛을 본 벨릭스는 그것들을 놓치기 싫었습니다. 마음 속에 온통 잡동사니가 채워져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들어설 마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급히 바울을 돌려 보냅니다. 두려움으로 사로잡혔던 마음은 잠시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바울을 만나 여러차례 이야기를 나눕니다. 재판을 무려 2년이나 연기한 채 바울을 구금하여 둡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돈과 권력을 그렇게 많이 누리고 있으면서도 더욱 많이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2년씩이나 구금해 두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결국 총독 자리를 내려놓고 로마로 송화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가이사랴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벨릭스는 많은 유대인들을 감금하고 때론 죽이기도 했습니다. 학정에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강력히 탄원했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2년이나 감금했던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고 로마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형 팔라스가 로마 황제의 총신이었기에 그는 엄벌을 받는 위기는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와 권력을 보장했던 총독 자리에서는 물러나야 했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 사이에는 아그립바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AD 70년에 있었던 화산 폭발로 인해 아들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돈도 권력도 아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경영할 능력이 없습니다. 추구하는 것을 언젠가는 다 잃어야 하는 시점이 옵니다. 모든 인간에게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정해진 시간 동안에 예수님을 믿어야 심판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정해진 시간 동안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5. 바울에게 있어서의 2년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왜 가만히 계셨을까요?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 2년은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배려하신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구금이 되어 있었지만, 돌보는 사람들이 마음껏 면회를 할 수 있었고, 일정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동역자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빌립 집사나 바울과 함께 했던 동역자들이 찾아와 바울을 돌봤습니다.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의 삶은 쉴 틈없이 돌아가는 숨가쁜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유가 오히려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목숨을 드리기로 결정한 탓에 모든 고난과 환난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휴식의 시간을 주신 것이지요. 가이사랴에 구금된 시간 동안 바울은 과거의 사역을 돌아보고 미래의 사역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휴식의 시간이 끝났을 때에 바울을 구금해두었던 벨릭스는 로마로 송환이 되어집니다. 벨릭스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바울을 구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휴식을 위해 벨릭스를 거기 두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바울을 떠나게 해줄 또 한 사람의 인물로 벨릭스를 대체합니다. 그가 바로 베스도입니다. 베스도는 벨릭스와는 달리 공정과 덕으로 통치를 하려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베스도를 통해 바울은 로마로 전도여행을 떠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달려야 할 때가 있고,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적절히 통제해 주시곤 합니다. 너무 달리려 할 때에, 잠깐 쉼표를 찍어 주시기도 하고, 쉼이 충분하다 싶을 때엔 급격하게 상황을 반전시켜 다시 달릴 조건을 마련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건 그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삶의 발걸음을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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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인의 부활 (행 24:10-21)

• 의인과 악인의 부활

• 사도행전 24:10-21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 공손하나 담대하게

변호사 더둘로의 고발에 이어 바울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총독은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합니다. 총독의 권위적인 태도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식민지 백성을 통치하는 지배국의 총독이니 백성들을 아래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의 눈에 그는 ‘이 민족의 재판장’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사건에 대하여 변호하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인사를 하여 공손히 예의를 표하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서있습니다. 총독 벨릭스를 백성에게 태평과 개선을 가져온 통치자로 묘사했던 더둘로와는 너무나도 상반된 태도입니다. 더둘로는 재판의 승리를 위해 총독의 마음을 사려고 갖은 미사여구로 아첨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총독을 민족의 재판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총독이 유대인과는 다른 민족임을 강조하여 유대인에 대한 이해 가운데 판결할 것과, 지배자가 아닌 재판장으로서 정확한 판단을 해줄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공손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는 그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오직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공손히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에게 공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해할 뿐 영혼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 뿐 아니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어떠한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24: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2. 바울의 변론 1. 정치적 목적 아닌 종교적 이유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기 변호에 들어갑니다. 바울의 첫 번째 변론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간 목적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종교적 목적 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 갔습니다. 예루살렘이 더 아래에 위치에 있는데도 올라갔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1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가이사랴가 예루살렘보다 위에 있음에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표현합니다. 종교적 목적으로 왔음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이지요.

3. 바울의 변론 2. 알리바이 - 12일 안에 뭘 할 수 있었겠나?

바울의 두 번째 변론은 그가 예루살렘에 머문 것이 고작 12일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2일의 짧은 기간 동안 정치적 선동질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바울은 첫 날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2일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으며, 3-9일 동안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습니다. 이 기간의 끝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10일 째에는 공회에서 변론을 했고, 11일째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12일 째에는 가이사랴로 호송이 되었지요. 그러니 그 틈에 정치운동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알리바이가 너무 명확합니다.

24: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24: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4. 바울의 변론 3. 증거는 있고?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소에는 화려한 미사여구만 있을 뿐 증거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발하는 송사에 증거가 하나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바울은 성전에서 예배만 드렸을 뿐 누구와 변론한 적도 없고, 회당이나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한 것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들은 그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말만 듣고 바울을 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이 아무리 뻔지르해도 증거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재판은 말재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와 논리로 해야 하지요. 바울은 더둘로가 기소한 모든 내용이 증거가 없으므로 무의미한 것임을 선언합니다. 만약 증거가 있었다면 굳이 총독에게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대제사장 아나니이아가 변호사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기에 그들은 거짓과 말솜씨와 아부로 고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5. 바울의 변론4. 나는 이단 도당의 우두머리가 아니야.

더둘로는 바울을 이단의 우두머리로 거짓 고소를 한 바 있습니다. 그 앞에 굳이 나사렛이라는 칭호를 붙여 종교적 이단임과 동시에 정치도당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꼼수를 부렸지요. 그에 대해 바울은 기독교가 이단이 아니라 도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정치적 도당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조상이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인임을 밝힌 것이지요. 로마의 정책은 로마의 평화만 깨지 않는다면 종교나 문화와 전통 등을 식민지 민족의 재량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 도당이 아니라면 로마 당국은 종교활동을 보장해줘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총독이 자신에게 무죄선고를 내릴 뿐 아니라, 종교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구약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임도 명확히 밝힙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시가서로 나누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선지자들의 글들은 여호수아부터 시가서를 제외한 모든 글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을 믿는다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단도 아니고 정치도당도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24:15 그들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6. 바울의 막간 복음- 의인과 악인의 부활

자신이 무죄함을 입증한 바울은 막간에 짧은 복음의 메시지를 삽입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기 보다는 여전히 자신을 변호하고 있지만 변호라고 하는 모양새를 갖춘 복음제시였던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백년 동안 이방인들의 속국이 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의 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그들은 하나님께서 결국 온 세상을 통치하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소망을 의인과 악인의 부활로 연결을 시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정치적인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기소된 이유이기도 하므로 여전히 자기 변론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을 기소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판결을 하고 있는 총독에게도 경고의 메시지, 즉 복음의 메시지가 됩니다.

사람들은 의인이건 악인이건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의인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도 부활합니다. 의인들은 부활하여 천국으로 가고 악인들의 영은 죽으면 사라지는 그런 것 아닙니다. 의인들은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하고, 악인들은 벌레와 같이 보잘 것없는 모습으로 부활합니다. 의인들과 악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정죄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악인들은 정죄를 받아 그 행위대로 영원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달아 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항상 거리낌이 없도록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한답시고 사람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사람도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유익과 탐욕이 삶의 목적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변호사 더둘로도, 총독 벨릭스도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항상 애쓰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은연 중에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돈과 권력만을 위해 그렇게 양심을 저버리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텐데, 너희는 의인의 부활일까, 악인의 부활일까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지요.

24: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24: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24: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4: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4: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7. 유대인을 사랑한 것과 부활을 말한 것이 죄인가?

바울은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유대 땅 밖을 돌아다니다가 유대인들을 도울 구제헌금과 제물을 가지고 유대로 왔다고 밝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사랑했고 또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결례를 모두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서 그저 결례를 행하고 있는 바울을 보았을 뿐입니다.아시아에서 와서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 역시 바울이 범법자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랬다면 총독에게 와서 고소를 하는 일에 앞장을 섰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소동만 일으켜 놓고 지금은 뒤로 싹 빠진 채 흔적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공회 앞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도 로마법에 위배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습니다. 현재 총독 벨릭스 앞에서 하고 있는 말 그대로 공회에서도 했을 뿐입니다. 만약 현재 총독 앞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증언에서 총독이 문제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바울에게 문제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8. 기억해야 할 포인트

바울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에게 고용된 더둘로는 자기 탐심에 이끌려 무고한 사람을 고발하고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판결하는 사람은 벨릭스입니다. 그 역시 탐욕에 쩔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은 쉽게 무죄선고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때에 모든 그들은 모두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했던 죄목들을 스스로 읊조리며 지옥불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날에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행한 죄를 스스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고백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흘러 우리가 지었던 죄들을 씻겨 주는 모습들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그러나 감격스럽게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따라 항상 살지 못했다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모습으로 심판대 앞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값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의인의 부활로 서게 되겠지만, 용서받은 죄인답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로 살기 위해 항상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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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호하심 (행 23:24-35)

* 하나님의 보호하심

* 사도행전 23:24-35

1. 하나님의 자녀에게 위기는 그저 징검다리일 뿐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죽일 음모를 계획했다는 소식을 들은 천부장은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로 이양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천부장은 무려 47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바울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천부장은 썩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로 절반은 로마식, 절반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본명인 루시아는 헬라식인데, 성인 글라우디오는 로마식입니다. 그는 원래 헬라인이었지만 거액의 돈을 들여 로마시민권을 샀습니다. 그의 성이 글라우디오인 것으로 보아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로마시민권을 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군의 천부장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후 천부장까지 올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천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는지는 총독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아래 사람이 상관에게 보고를 할 때에는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은 서한 전체를 공개한 것이 아니라 누가가 서한을 짧게 요약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총독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보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 천부장은 바울이 시민권자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바울을 결박했었습니다. 그러나 서한에서는 바울을 결박했다는 내용을 쏙 빼고, 대신 로마시민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출동한 것처럼 조작했습니다. 자신의 실수는 숨기고, 자신의 공을 부각시키면서 총독의 마음을 사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시는 데에 있어서 이런 자를 사용하시기를 꺼려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의 본성과 탐심을 이용하시기까지 하면서 그 자녀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위기 가운데에서도 바울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사실 바울의 위기는 바울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비전은 위기를 통해 이루어져 갑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벌인 탓에 바울은 로마의 천부장에게 연결이 됩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던 40여명의 유대인들의 음모로 인해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양도되고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에서 한발 한발 로마를 향한 비전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지요. 로마의 비전을 위해 가는 길목에서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하는 고난이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철저히 보호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아무리 풍랑이 거세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보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향한 인도하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안연히 거할 뿐 아니라, 풍랑 후에 있을 도착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억울함도 목적지를 향한 과정일 뿐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만한 그 어떠한 범죄도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모두 근거없는 모함이었고, 근거가 있다 할지라도 형사적인 책임을 질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천부장은 심문을 통해 이 문제가 형사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이슈일 뿐임을 명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총독에게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사실 상 바울에게 무죄 선고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아직 재판의 판결이 나지 않은 채 바울의 신변이 위험에 처해 있으므로 바울의 재판을 총독에게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한 일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흘려야 할 눈물도 많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발산할 곳이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있으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무고함을 밝혀 주실 것이며, 그 억울한 일마저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성숙시키고 인도해가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3. 이방인의 군대도 그저 도구일 뿐

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천부장의 군사 470명은 안디바드리까지 바울을 이송합니다. 안디바드리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이 성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 세워진 곳이지만 그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입에는 확실합니다. 천부장의 군사들은 중무장을 한 채 바울을 보호합니다. 바울은 말을 타고 가고 있지만 중무장한 보병과 창병들이 있기에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강행군하여 위험 지역을 벗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바드리는 예루살렘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므로 이곳에서 다른 군대는 돌아가고 기병들만 바울을 호송합니다. 기병들만 가므로 이때부터는 신속하게 가이사랴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바울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바울 한 사람을 위해서 로마군 400명이 도보로 걸어 밤이 맞도록 강행군을 해야 하고, 기병들은 한 사람을 위해 가이사랴 먼 길을 말을 달려야 하는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시는 데에 사용하지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4. 썩은 막대기라도 그저 도구일 뿐

33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총독 벨릭스는 그렇게 근사한 이력과 고매한 품성을 가진 자는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타키우스는 그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왕의 권력을 휘둘렀던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황제의 모친 안토니아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형 팔라스 역시 노예였지만, 황제 글라우디오의 황제에 의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형의 도움으로 AD 52-58년 사이에 유대의 총독으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그는 세 명의 아내와 결혼했으며, 그 중 한 명이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었던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유부녀였지만 벨릭스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했습니다. 한 때 노예였던 벨릭스는 그 노예의 정신을 버리지 못한 채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며, 자신의 탐욕대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썩은 막대기와도 같은 인물인 셈인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물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바울은 헤롯궁에서 로마로 이송되기 전까지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5.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기면 될 뿐

삶이 쉽지 않고 한숨의 연속일 줄 압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세상이 겪는 고통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항상 인도를 수반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 목적이시라면 아예 보호할 만한 일을 안 만드시면 됩니다. 그러나 풍랑이 허락되는 이유는 인도하심을 위한 것입니다. 보호와 인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도달하기 원하는 목적지로 동행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도 풍랑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을 통해 옛자아의 옷을 벗고 새로운 피조물의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품은 우리의 비전이 이루어지게 인도해 주십니다. 거센 파도를 쳐서 우리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던져 놓으시기도 하시고, 한 곳에 안주하고자 하는 우리를 결국 가야할 곳으로 옮겨 놓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올 때에 우리는 그저 주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힘을 내고 견디십시오. 우리에게 암울한 미래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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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거세질 때 (행 23:12-24)

* 풍랑이 거세질 때

* 사도행전 23:12-24

1. 갈수록 거세지는 풍랑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이 거센 풍랑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폭도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으며, 천부장의 손에 붙들려 채찍에 맞을 뻔했고, 대제사장의 명령으로 입을 맞을 뻔했고, 공회원들에게 붙들려 몸이 찢길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풍랑들은 뻔했던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바울을 지키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잡는데 거듭 실패하자 열심이 유난했던 사십여명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결단을 합니다. 대단한 살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고한 자를 잡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매복하는 것을 율법으로 엄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 앞에 맹세까지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일에는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까지 연루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이처럼 썩어 있으니 당시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그 종교는 사람들에게 아픔과 멍에만 줄 뿐입니다. 은혜가 없는 종교의 특징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품는다고 하면서 40여명의 유대인과 같은 태도를 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악한 음모에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는 악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마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또 하나의 할 뻔했던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했으므로 그 맹세를 지켜 죽어 나자빠지던지, 맹세를 어기고 스스로 맹세를 지킬 힘도 없는 존재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의는 자기의였고, 그들의 열심은 자기열심이었습니다. 습관처럼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와 자기열심을 버려야 합니다. 설령 뜻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복수를 꿈꾸며 음모를 세우는 대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길 기도하며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로 인해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 앞에 밀려오는 폭풍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걱정일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꿈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 꿈은 바울 자신의 꿈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운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강한 오른 손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2.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에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바울의 생질이 유대인들의 음모를 듣고 바울에게 일러 줍니다. 바울의 생질은 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까요? 이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시간 그 자리에 두셔서 음모와 매복에 대해 듣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생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생질이 아닌 하나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없는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지키십니다.

바울은 백부장 중 한 사람에게 자기 조카를 데리고 천부장에게 가서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죄수였던 바울의 말을 듣고 백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이끌고 천부장에게 갑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로부터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해 듣게 됩니다. 백부장이나 천부장은 이방인들로서 바울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울과 관련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개입을 하십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라는 것을 모르고 바울을 결박했기에 바울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천부장이 악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의 음모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관리마저도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위해 사람을 적당한 시간, 적당한 장소에 배치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풍랑이 거세질 때라도 안연히 거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환난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큰 도움이시요, 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해 못 이용하실 사람도, 못 다루실 물건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보호자이씨면서, 동시에 공급자이십니다.

3. 하나님을 믿는데 풍랑이 계속 거세지는 이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바울의 살해음모에 대해 전해 들은 천부장은 백부장 둘을 불러 군대를 동원하게 합니다. 보병 이백, 기병 칠십, 창병 이백 해서 도합 470명을 동원한 채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합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이스라엘 본영이 있는 곳입니다.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천부장은 예루살렘 내에서 바울을 지키는 것이 힘든 것임을 알고 바울을 총독에게로 보냅니다. 바울은 사실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기에 총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또한 바울이 로마까지 가게 되고, 로마 황제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교두보가 됩니다. 더구나 바울은 가이사랴까지 가는 길을 말을 타고 갑니다. 그동안 바울은 늘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을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그 목적지는 바울이 꿈꾸던 것이지만 현실화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세지는 폭풍 속에서 바울을 오히려 더 높이, 더 멀리 날려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꿈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 그 꿈을 돕고 계십니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극적으로 그 꿈에 도달하게 하시기 위해 폭풍같은 상황을 이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계속적으로 풍랑이 거세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정화입니다. 폭풍이 일지 않으면 아무리 바다라도 썪기 마련입니다. 폭풍이 일때 마다 바다는 정화되어 생명이 살만 한 곳이 됩니다. 또한 폭풍이 일고 나면 바다 위의 잡동사니들은 모두 해변으로 밀려납니다. 폭풍은 바다를 깨끗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폭풍같은 상황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가로막거나 시선을 강탈하는 쓰레기들을 치워내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밝게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폭풍이 일기 전에는 성도들은 자주 쓰레기들을 쳐다보며 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풍이 이는 순간 비로소 쓰레기들이 쓰레기들이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폭풍을 통해서 성도가 바라봐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임을 알게 되며, 폭풍을 통해서 온전히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폭풍이 거세지는 두 번째 이유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 꿈은 곧 하나님의 꿈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폭풍이 이는 자리에 천부장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인도하십니다. 벨릭스는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이방관리였을 뿐입니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유부녀였는데 벨릭스와 결혼하기 위해 전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남의 여자를 빼앗은 부정한 사람이었고, 돈을 탐하고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상관치 않으십니다. 그를 통해 바울을 로마로 보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폭풍을 거세게 하시는 이유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 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폭풍의 거센 파도에 휩쓸릴 때에는 죽을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어야 할 보다 나은 자리로 더 빨리 보내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이 폭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 가운데 허락하신 폭풍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빠져 죽은다는 것만큼 웃기는 코미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스운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는 실수도 실패도 없으십니다.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붙드실 것이며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폭풍이 거세질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하실 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다가, 멋진 일을 이루시는 그 순간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뻐하고, 기념하는 오기가 넘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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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하라 (행 23:1-11)

* 담대하라

* 사도행전 23:1-11

1. 순결과 정체성을 가져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본문은 아주 짧게 한 문장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바울은 자신의 행동에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을 만한 그 어떠한 잘못도 없음을 변증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선한 양심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에 거스르는 말을 했다라고 기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선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고, 적어도 기소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죄가 없으며, 또한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을 죽이느라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를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율법의 기준에는 거칠 것이 없이 순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정죄하려 드는 공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공회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들이란 호칭은 공회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재판을 하고 죄와 벌을 결정할 수 있는 판결권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식으로 하면 ‘존경하는 재판장님’ 정도는 해줘야 하는 그런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는 그들은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들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현재는 바울이 재판을 받고 있지만 장차 심판대 위에 서있게 될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공회원들입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아는 바울은 그저 그들을 구원해야 할 동족 형제들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살았고, 공회원들이 자신을 어찌할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인식한 바울이었기에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며 이야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했다는 말은 노려봤다는 뜻입니다. 담대하게 공회원들을 응시하며 주눅들지 않고 자신을 변호하고 또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힘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았던 순결함과 자신을 어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인식하는 자기 정체성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2. 우리 앞의 장벽은 회칠한 담이다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의 자기 변호와 복음 증거에 참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바울의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나니아의 모습은 바울이 보기에 가증스럽고 우습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형벌을 가할 수 없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입을 치라는 것은 형벌에 해당합니다. 그것도 아주 모욕적인 형벌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입을 치라는 것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 규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바울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그처럼 모욕적인 형벌을 가하라 말하고 있으니 율법의 대가였던 바울의 눈에는 가증스럽고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불렀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말은 석회를 칠한 무덤처럼 겉모양은 하얗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 속은 시체처럼 부정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회칠한 담이라고 하는 표현은 겉보기에는 말짱하지만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기반이 약하고 이미 균열이 가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데 겉에다만 석회를 발라놓은 담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겉보기에는 튼튼한 담처럼 보이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그 담은 조그마한 힘만 가해져도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이 이기심을 챙기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차 있는 자를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경건한 척 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위선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하는 대제사장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리라는 라임을 먹이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잔인하고 탐욕많은 자였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수탈하여 부를 축적했고, 로마에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치며 자신의 뒷배를 만들었습니다. 친로마 정책을 펴 국수주의 성향의 유대인들에게는 미움을 샀지만 권모술수로 부와 권력을 유지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고처럼 그는 로마와의 전쟁이 발발한 AD 66년, 살기 위해 헤롯궁의 도수관에 숨어 벌벌 떨고 있다가 결국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의 손에 붙들려 비참한 최후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모든 인간의 행동을 측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죄악대로 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은 사실은 회칠한 담들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이고 담으로 둘러 쌓여 도무지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은 균열이 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담들입니다. 그것들이 감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로막고 있는 담이기 때문입니다. 그 담들은 하나님의 콧김 하나에 가루처럼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길이 없어 답답해하던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그 무너진 담장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해도 괜찮은 이유입니다.

3. 무례함이 담대함은 아니다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한다고 바울을 책망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즉시 사과를 합니다.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고 실수를 한 것이라 해명을 합니다. 바울은 출22:28의 말씀을 인용하여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했는데 자신이 대제사장에게 심하게 말한 것은 실수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며 해명을 한 것이지요. 바울은 담대했지만, 대제사장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킵니다.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율법이 그리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스스로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됩니다. 아나니아 곁에 있던 사람들은 아나니아를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아나니아는 율법대로 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부를 착취하는 하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재판을 당하고 있는 바울은 율법대로 부정한 관리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례함과 담대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하지만 그것이 무례함으로 넘어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례히 행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담대하되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며 실수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인정하고 사과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통하여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자녀임이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바울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공회에 섞여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머리에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공회원들 사이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지요.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자신의 아버지도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심문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부활을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부활과 영혼이라고 하는 부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척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영과 천사를 모두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바울은 부활에 대한 논쟁거리를 화두로 던진 것이지요.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적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논쟁과 영의 유무 논쟁이 공회를 덮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중 성경에 박식한 서기관들이 일어나 바울을 옹호하고 들었습니다. 바울에게 특별한 죄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바리새인으로서 부활을 전하다가 기소가 되었다고 하니 같은 바리새인으로서 편을 들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혹시라도 바울이 한 말이 바울의 주장처럼 영이나 천사에 의해 전해진 말이면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을 하면서 바울을 변호하고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란 말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기를 원한다 하여 지혜로와질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공회에 끌려 갈 때에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 말씀하신 바 있으십니다. 성령님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자가 주님께 구하면 주님께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주시는 주님 안에서 담대해도 좋습니다.

5. 담대하라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공회는 그야말로 분쟁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회원들 중에는 격떨어지게 바울에게 달라들어 바울을 붙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공회원들에게 찢겨질까 천부장이 두려워 했다는 표현이나 무리 가운데에서 군사들이 바울을 빼앗아야 했다는 표현 등은 이미 그들이 바울을 덮친 급박한 상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바울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무리에게서 격리시켜 영내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겪은 바울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바울이지만, 실제로 죽이려 달려 들어 붙드는 폭도들 앞에 서면 아무리 강철 심장이라도 쫄깃해질 수 박에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날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이 환상을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소개되지만 이 장면처럼 다정한 장면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직접 말씀해주신 것이지요. 바울은 숨쉴 틈 없이 주님을 향해 달려 왔습니다. 그가 감당해야 했던 고난의 무게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뛰다가 지칠대로 지친 바울의 어깨에 힘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바울에게는 남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다정하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받아야 하니까요.

바로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주저할 틈이 없고, 방해하고 가로막는 세력에 눌려 감정적인 소모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마음이 쪼그라들 때도 있으며, 다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찾아 옵니다. 그럴 때에 우리 주님께서 곁에 서서 말씀해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담대하라.” 우리 곁에 서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하십시오. 마음을 강철처럼 강하게 하십시오. 우리에 달려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담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들은 문제 내의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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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시민권을 누리라 (행 21:22-40)

* 천국의 시민권을 누리라

* 사도행전 22:21-40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1.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이 되지 말라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있는 자들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노라 작정하셨습니다. 값없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에 쩔어 있었습니다. 바울의 간증을 잘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시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바울의 말을 듣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격분하여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다” 외쳐 댔습니다. 떠들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비통하거나 격분하였을 때 감정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가짜 백성이었습니다. 온 인류가 은혜를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대적하고 죽이기를 서슴치 않는 불량자들이었고, 마귀의 일군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혹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리에 서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 천국 시민권자임을 자각하고 선포하라

바울의 말에 유대인들이 발광하는 모습을 본 천부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할 기회를 달라 해서 말을 줬는데 예기치 않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했으므로 천부장은 바울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만을 목격하였습니다. 천부장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명령합니다. 군사들은 바울을 가죽줄로 매었습니다. 가죽줄로 맨 이유는 채찍질하기 좋은 자세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채찍은 동물의 뼈조각이나 쇠조각 같은 것을 가죽끈들 끝에 매달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채찍질을 할 때에는 가죽줄로 손을 묶어두고 주로 등짝에 채찍을 가했습니다. 채찍이 가해지기 직전 바울은 옆에 서있는 백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렸습니다. 죄를 정하기 전에는 결박할 수도 형벌을 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형벌을 집행한 사람이 오히려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로마시민권자는 또한 지방법과 로마법 중 자신이 유리한 법을 취사 선택하여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고, 자신의 죄를 황제에게 항소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시민권자임을 알게 되자 즉시 형집행을 중지하고 천부장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합니다.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 하나로 상황이 급격히 바뀝니다. 그것이 시민권자가 누리는 권한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토가라고 하는 옷을 입어 로마시민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토가는 옷이 불편하여 입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예루살렘에 있었으므로 토가를 입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바울이 시민권자임을 로마의 군인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하다 하여 로마시민권자가 시민권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여 스스로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여길지라도 한번 부여된 천국 시민권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은 행위의 옷이 초라하고 남루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신분은 여전히 천국 시민입니다. 천국 시민이 천국백성으로서의 권한을 누리기 위해서는 천국 백성임을 자각해야 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는 결박당한 채 채찍에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당당히 천국 시민권자임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시민권자에게 부여된 권한을 클레임해야 하며, 천국 시민권자로서의 자격과 권한으로 악한 영들의 결박을 풀어내야 합니다.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3. 천국 시민권자로서의 권한을 누리라

바울이 시민권자라고 하는 사실을 접한 천부장은 바울에게 헐레벌떡 찾아와야 했습니다. 시민권자를 죄도 정하지 않은 채 결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은 바울의 코트로 넘어왔고, 칼자루는 바울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라고 하는 사실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의 유대인이 로마시민권자이리라는 사실은 짐작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부장 자신도 로마시민권자가 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겉보기에 로마시민권을 살만큼 부유해보이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은 거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바울은 어떻게 로마시민권자가 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자신은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였다고 답을 했습니다. 모태시민권자이니 돈을 주고 시민권을 산 천부장보다 한 수준 높았던 것이지요.

로마 제국에서는 식민지 민족들 중에서도 로마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로마시민권을 부여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원래의 취지는 퇴색하고 나중에는 로마의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돈을 받고 시민권을 팔았습니다. 특별히 글라우디오 황제의 아내는 아예 시민권 장사를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다음 장인 23장에서는 천부장이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이양하면서 쓴 편지가 소개됩니다. 그 편지에서 발신자인 천부장의 이름이 밝혀지는데 그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로마 사람이 아닌데 로마시민권을 받기 위해 작명한 이름에 글라우디오라고 하는 성이 들어간 것이지요. 이는 그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돈을 주고 시민권을 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어찌 되었건 상황은 급전환을 이루어 이제는 천부장이 아닌 바울이 칼자루를 쥔 형국으로 바뀌게 됩니다. 천부장은 고소인이 없는 상태에서 로마 시민권자를 심문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결박도 풀리고 심문도 중지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누리는 권한은 로마시민권자 따위가 누리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는 불과 몇 백년을 향유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로마제국도 없습니다. 그러한 로마제국의 시민권자만 되어도 큰 권한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려 하나님 나라의 선민입니다. 무려 하늘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를 그 누구도 심문할 수 없고, 우리를 그 누구도 감히 결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박된 채 살아갑니다. 천국 시민권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 어떠한 권한과 권능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천국백성임을 인지하고 클레임하며 선포하는 순간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결박은 풀리고, 우리를 옥죄어 오던 모든 정죄와 심문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누구인지를 인식하십시오. 천국 신민으로서의 권한을 누리십시오.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4. 지경을 넓히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의탁하라

천부장은 이 사건을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고소인이 없는 사건을 심문없이 해결해야 하는데다가 로마시민권자를 결박하는 실수까지 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대제사장과 공회를 불러 바울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부장은 이 사건이 종교적 문제임을 알았기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코자 한 것이지요. 바울은 덕분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결국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결국 벨릭스 총독 앞에 바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울은 결국 자신의 재판을 황제에게 항소합니다. 결국 죄수의 몸으로 자신의 숙원이었던 로마를 밟게 되었던 것이지요.

점점 바울의 지경이 넓혀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바울의 꿈과 비전은 풀려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선 자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였고, 또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고 있었습니다. 땅끝으로 여겨졌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땅끝은 스페인이었고, 바울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룬 후 주님 품에 안기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울의 꿈을 바울이 기대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결박당하고 심문당하는 듯한 상황에 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난과 아픔이 찾아오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지경을 넓히시기 위하심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지경을 넓히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비전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십시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고, 현재의 고통은 그저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루기 위한 징검다리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삶을 의탁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목적지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늘 백성을 결국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견인의 손 안에 우리는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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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간증, 나의 간증 (행 22:1-21)

* 바울의 간증, 나의 간증

* 사도행전 22:1-21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1. 공감을 살 수 있는 언어로 간증하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예언을 들었지만, 한사코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자기의, 자기열심, 율법주의를 벗고 복음을 알게 되기를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바울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울을 잡아 죽이려 시도합니다.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출동한 천부장과 로마 군대에 의해 죽을 위기를 넘긴 바울은 천부장에게 청하여 군중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도는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전도는 힘도 효능도 없습니다.

바울은 손짓을 하여 군중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자신을 죽이려 소동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을 향한 변함없는 자신의 애정을 표현합니다. 그들을 “부형들아”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그들의 형제요, 동족임을 상기시킵니다. 군중들은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져 놓고도 몸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층대에 서서 말을 하는 것에 적잖이 당황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손짓을 하자 잠잠해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하자 군중들은 더욱 더 조용해졌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주로 헬라어를 구사했으므로 히브리어에 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능란한 히브리어로 말하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간증을 하여 하나님을 전하고 싶을 때에는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이 관심있어 하는 주제로,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로 출발을 해야 합니다. 듣는 청중은 배려하지 않고 자기의 말만 늘어 놓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만 하는 사람,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간증을 할 때에는 최대한 동질감과 친근감과 배려감과 호감이 느껴지게 접근하고 말해야 합니다.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2.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삶을 나누라.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유대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었습니다. 다소는 아테네,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 내 교육의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다소 출신이라는 말은 자신이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가 11세 부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기록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받은 율법 지식은 현재 율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 중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았으며, 율법의 의로도 결코 밀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도 바울은 결코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었고,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증인입니다. 그들로부터 직접 공문을 받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까지 올라갔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열심으로 가득찬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스스로 유대인일 뿐 아니라 그 어느 유대인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율법의 지식과 행위와 의와 열심을 가졌던 자임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간증들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간증을 할 때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이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 만나기 이전의 삶이 나눠져야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더욱 또렷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만나기 이전의 삶이 나눠져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3.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을 설명하라

그 누구보다도 율법에 철저했던 율법주의자요, 예수의 핍박자였던 바울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문을 받아들고 다메섹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치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소리는 들었으나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빛이 사울에게 쪼이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는 그런 상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났던 시점은 정오입니다. 정오는 정신이 가장 말짱한 시간이며 빛이 가장 강렬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태양 빛보다도 더 강한 빛이 바울의 눈에 비춰졌고 바울은 강렬한 빛이 시력을 잃은 채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요.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빛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의 손에 의해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혼자서는 앞을 볼 수도 없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영적 소경된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런 바울을 예수님께서는 만나 주시고, 구원하시고, 주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창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강력해야 부활의 신앙이 생기고, 천국의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이 명확해 집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예수님의 계신 천국에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소망이 명확해집니다. 우리도 부활하고 우리도 천국에 이를 것이기에 이땅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과 확신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부러워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4.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삶을 나누라

바울의 삶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에 완벽한 반전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는 예수를 핍박하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증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체험도 있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명은 우선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찾아와 눈 먼 바울의 눈을 열어 줍니다. 영적 소경이었던 바울이 드디어 영적인 눈을 뜨고 진리를 보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아나니아는 또한 바울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셨다는 주님의 부르심을 전달해줍니다.

훗날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이 아닌 예루살렘에 머물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심지어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스데반을 살해한 자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 말을 혹자들은 스데반이 자신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에 부족한 자임을 고백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에 맞지 않고 바울의 행적에도 위배됩니다. 바울은 눈을 뜨자 마자 이미 예수님의 증인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콜링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맥 상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사랑하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을 사랑했고 일단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아셨기에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 명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예전에 예수를 핍박하고 심지어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임을 밝히며 자신의 간증을 하면 유대인들이 믿게 될 것이라고 주님을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을 극구 이방인들에게로 보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은 바울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임을 천명한 것이지요.

예수를 믿은 이후의 바울의 삶은 완벽히 주님께 드려진 삶이었습니다. 이전에 누렸던 그 모든 것이 바울에게는 더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의도, 자기 열심도, 목숨처럼 여기던 율법주의적 삶도, 교만도 모두 버렸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았고 그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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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늘 그 자리에 (행 21:27-40)

* 사랑은 늘 그 자리에

* 사도행전 21:27-40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1. 거짓 모함과 음모를 일삼는 사람들

바울은 세 번의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도 성전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만의 하나님이어야 했고, 만약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유대교에 입교하여 유대인들의 모든 전통을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이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향한 미움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 역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4명의 서원한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결례를 행할 때에 그들의 결례비용을 감당하며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라 제안합니다. 그 제안에 따라 바울은 결례를 행합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근거없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뜻밖의 상황에서 발생을 합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알아보고 소동을 야기시킨 것이지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에베소에서 왔을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아보았다는 것이 29절에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이나 사역을 했기 때문에 바울의 얼굴은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름만 소문으로 들었을 뿐 바울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요. 유대인들은 바울의 얼굴만 알면 언제라도 그를 해칠 분노의 분량이 채워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등장을 하여 폭로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바울에게 근거없는 죄목을 뒤집어 씌웁니다. 유대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백성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그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만 있다면 그 생명마저도 바치겠노라 공언했고, 지금도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적도 없습니다. 그 스스로 율법을 지켰고, 절기가 되면 성전을 찾아 유대인의 규례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자기의와 자기열심을 반대했으며,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지 율법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은 모두 허위 사실이었습니다.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2. 성전 밖과 성전 안의 삶이 다른 사람들

에베소 유대인들의 선동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 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항변을 들으려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에베소 유대인들의 선동질 하나로 판단을 끝내 버립니다. 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혹시라도 성난 군중이 바울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성전이 시체로 더렵혀질 것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거룩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더러웠습니다. 성전 안의 삶과 성전 밖의 삶이 구별된 것이지요. 성전 안에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거짓 송사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행하면서 성전 건물만 깨끗하면 된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바울이 혹시라도 제단의 뿔을 붙잡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단 네 귀퉁이에는 뿔이 달려 있었고, 죽어야 할 죄인이라도 성전 제단의 뿔을 잡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뿔들 중 하나를 잡는 순간 그들은 바울에게 손을 댈 수 없고 바울은 그 틈에 자기가 하고 싶은 변론을 다 할 수 있고 소동은 잠잠해질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와 성전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제단의 뿔을 잡으면 살 수 있다는 형식적인 규례는 지키지만, 거짓송사하지 말고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은 어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교회 안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교회에서의 모든 종교 형식은 다 따르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거룩 거룩인데, 교회 밖에 나가면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예배 형식은 경건한데, 미움을 품거나 거짓 송사를 하고 모함을 하며, 다른 사람을 매장하려 드는 것은 밥먹듯이 자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안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동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좋은 형식에 형식보다 더 좋은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 뜻밖의 도움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 군대가 출병을 합니다.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온 것이지요. 성난 폭도들이 바울을 막 죽이려는 찰나에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 셈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오순절 절기였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에서 몰려드는 시기였고 따라서 로마 군대는 바짝 긴장을 하고 치안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달려온 로마 군인들은 이내 소동을 잠재웠으며, 바울은 죽을 위기에서 살아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죽음의 결박이 아닌 생명의 결박으로 이루어집니다. 결박될 것이라는 예언은 맞았지만, 결박이 되었기에 바울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울은 죽음을 이미 각오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꿈으로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결박된 채 자신의 비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죽었다 생각될 때, 이제 끝이라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수 있게 하시며 원래 떨어졌던 그 지점보다 훨씬 높이 날아올라 창공을 누비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에게는 절망의 끝이 사실은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하고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4. 천지 분간을 못하는 죄인들

천부장은 바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물었지만 군중들이 하도 시끄럽게 자기 얘기를 하는 통에 소동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영내로 데려가게 합니다. 로마군들이 바울을 잡아 영내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백성들은 바울을 죽이라고 소리를 치며 따라 갑니다. 로마군들은 바울을 폭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울을 아예 들고 갑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진땀을 빼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떼를 쓰던 유대인들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지만 실상의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것이 그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쉴 새 없이 드려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추악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5. 그래도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바울은 군사들에게 들려서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겁니다.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을 보며 의아해 하는 천부장의 머리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갑니다. 몇 해 전 3만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광야와 감람산에 숨어 살며 반로마 운동을 했던 한 거짓 선지자가 바울이 아닐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은 물론 로마도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며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추종자들을 모았고, 4천명의 자객들을 만들어 항전을 합니다. 그들은 결국 로마군에 의해 섬멸되었지만, 거짓 선지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 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혹시 그 애굽인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애굽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소읍 사람이 아니라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다소는 알렉산드리아, 아덴과 더불어 교육의 삼대 도시였습니다. 다소 시민이라고 하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학식과 교양이 인정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강점을 드러냅니다. 늘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바울이지만, 이 순간만은 자신의 출신 성분을 밝힙니다. 바로 복음에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왜 천부장에게 말을 걸어 말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영내로 들어가면 살 수 있었고, 그대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생명연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관심사였다면 아예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요. 그의 관심사는 바로 동족이며 형제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자기의와 율법주의를 벗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불과 몇 분 전까지도 거짓 모함을 하고, 폭행을 가하며,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기에 변함없이 그들에게 목숨을 내어 주고라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향해 찾아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랑이란 고정된 것이며, 동시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향해서는 고정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실수를 해도, 철딱서니 없는 죄를 지어도, 천지분간 못하고 자신을 공격해도 여전히 고정된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소유일 뿐입니다. 또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와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십자가에 오르셨던 것처럼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고, 죽기까지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목숨을 빼앗은 자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에게 고정된 사랑을 하기 원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이는 사랑을 하기 원합니다. 세상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욕심에 충족되지 않으면 사랑의 대상을 마구 바꾸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말하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랑은 고정된 것입니다. 세상은 또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움직이기를 원하지요. 수고도 없고, 헌신도 없고, 다가감도 없고, 용서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얘기합니다. “꼭 말을 해야 알아? 난 사랑한다고.” 그러나 사랑의 대상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고정된 채,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서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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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행 21:17-26)

*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사도행전 21:17-26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 바울을 환대하는 사람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합류한 성도들과 함께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형제들이 그들을 기꺼이 영접했습니다. 본문의 ‘형제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환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22절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아직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환대한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환대가 아니라 바울을 좋아하는 일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환대였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예루살렘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에 대해 난무하는 온갖 소문들 틈에서도 바울을 기꺼이 영접하고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3차 여행의 긴 여정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바울 일행에게 이들의 환대는 적지 않는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믿어주고 환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헛소문이 돌거나,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손을 잡아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제 괜찮다가 내일 등을 지는 것이 아니라, 소문과 오해를 뚫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고 환대해주는 그런 관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소문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환대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 가장 먼저 얻어야 할 것, 하나님의 마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이 장로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다 모인 것인지, 일부만 모인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교회의 리더십들이 바울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사역에 하나님께서 이방에 역사하셨음을 상세히 보고합니다. 그 증거로 각 이방교회에서 온 7명의 대표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금한 헌금을 들고 눈 앞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선교 사역을 ‘(바울) 자기의 사역’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역’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곤 합니다. 누가 역시 선교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바울의 사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몰라서 하는 반응입니다. 그러한 표현은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역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사역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켜’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그 시각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크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아무리 커도 그냥 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사역,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기쁘시게 하지 못하면서 그저 교회니까, 성도니까 잘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3. 길을 잃기 쉬운 사람의 마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직후 야고보는 화제를 급속히 전환합니다. 야고보의 마음에 근심이 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 성도들이 수만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유대인의 율법을 여전히 열정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율법의 매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누렸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바울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거나 바울의 행동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판단 근거는 오직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의 근원지는 당연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겠지요.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바울은 유월절에 맞추어 순례선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바울을 죽이고자 공모한 유대인들로 인해 원래의 계획을 접고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바울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으니 얼마나 악하게 말을 했을까요?

그들이 전한 말은 대부분 근거없는 헛소문에 불과했습니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를 배신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한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배반한 적도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았으며,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바울이 금했던 것은 율법에 얽매여 자력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기의였습니다. 율법이 아닌 율법주의를 배격한 것이었지요.

바울이 아들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 명했다는 것도 근거없는 헛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그렇게 중요한 구원의 요소로 보지 않았으므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반쪽짜리 유대인이었던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까지 하였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이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 역시 헛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을 금지한 바가 없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관습을 행했습니다. 제 2차 전도여행 때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 머리를 태운 예식을 드린 것은 나실인의 서약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등의 절기를 맞춰서 들어오려고 서두르고 애를 썼던 이유도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관습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소문에 매우 약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부정적인 얘기를 들어도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습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러한 안타까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은 악의에 차서 바울을 죽이려는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지도 않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형제를 판단하고 이를 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직접 보고 들은 것도 아닌데 소문이 돌면 그대로 믿어 버립니다. 때론 소문이랄 것도 없이 그저 한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인데도 그대로 믿고 한 사람을 판단해 버립니다. 거기에 덧붙여 그 사람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을 몇 편이고 써내려 갑니다. 소설을 쓰고 나서 사람을 보면 모든 상황들이 절묘하게 소설의 플랏 안에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소설의 특성이기도 하지요. 고작 헛소문이나 자작 소설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4.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야고보의 복안

야고보는 바울의 신변이 위협 당하고 있음을 염려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유대 전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공격하게 될 것이 뻔했으니까요. 야고보의 복안은 바울이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결례를 지킴으로써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친 예루살렘 교회에는 서원한 사람이 4명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결례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결례를 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바울이 부담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드려 머리를 깎게 하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서원한 기간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다가 서원이 끝날 때에 머리를 깎아 그것을 태워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서 서원을 마감했습니다. 다른 가난한 사람의 결례 비용을 부담해주는 것을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바울을 최대한 경건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야고보의 묘책이었던 것이지요.

결례 비용은 희생제물에 바치는 비용으로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었습니다.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등 세 마리의 양을 바쳐야 했고, 거기에 무교병이 추가되었습니다 (민 6:1-21). 결례를 행하는 사람이 4명이니 총 12마리의 양과 4사람 분의 무교병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지고 오해가 생기고 나면 해명을 해도 무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해명할 기회조차 사람들은 꺼려 하지요.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입이 봉해진 채 오해를 풀어야 하는 순간, 유일한 해결책은 말없이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이 그렇게 해주기를 제안한 것이지요.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 교회들에 편지를 써주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총회가 유연성을 발휘하여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기로 결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울이 유연성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해달라는 부탁한 것이지요. 야고보의 지혜와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야고보는 유대인의 전통을 중요시 했던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조차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의인 야고보’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으로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 무릎꿇고 기도하느라 무릎이 낙타무릎처럼 딱딱해져 있었습니다.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5. 반드시 얻어야 할 것, 사람의 마음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은 전적으로 수용하여 결례를 행합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보고 소동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를 볼 것이 아니라 야고보와 바울의 의도를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고작 헛소문을 가지고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왜 그런 제안을 했을까요? 그리고 바울은 왜 그 제안을 받아 들였을까요? 우리는 바울을 아끼는 야고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굳이 그 제안을 받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주님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었지요.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하나씩 둘씩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오는 것을 통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서 어떻게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하는 유연성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복음의 진리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복음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유연성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독불장군처럼 자기만 옳고 의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비본질에 묶여 이 사람 저 사람과 등을 지고 살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자신있게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키와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원칙을 고수하면 당연히 미움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모두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얻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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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뜻대로 (행 21:1-16)

* 주의 뜻대로

* 사도행전 21:1-1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1. 타락한 도시에 세워진 교회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순절에 맞춰 들어가기 위해 서두르느라 에베소를 미처 방문하지 못합니다. 대신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작별을 고합니다. 바울의 다음 행선지는 바다라였습니다. 바다라에서 두로로 가는 직항 선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브로 섬을 왼편에 두고 갔다는 말은 배가 중간에 다른 도시에 정박하지 않고 바로 두로까지 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배는 두로에 일주일을 정박했습니다. 짐을 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일주일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로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찾았다는 말은 원어의 뜻을 생각할 때에 교회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는 것입니다. 수소문해서 찾아야 할 정도니 교회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로의 교회는 작지만 성령의 감동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두로 교회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고난을 겪을지를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두로는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성도들은 교회는 작았지만 성령님과 교통이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일주일 정박하는 시간 가운데 쉼을 가질 법도 하지만 이 교회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물론 결박과 환난이 예정된 길을 가는 바울의 신앙은 그들에게 깊은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타락한 도시의 속의 한 작은 교회로 살아가는 두로 교회에 있어서 바울 일행의 방문은 적지 않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짧지만 강력한 방문이었을 것입니다.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2. 바닷가에서의 서로를 위한 기도

두로에서 일주일 지내는 동안 바울과 두로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떠나려 하자 교회의 모든 가족들이 다 나와 바울과 작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바울은 두로 교회 성도들이 타락한 도시에서 믿음을 지켜내고 그곳의 빛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한 두로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다 이겨 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도해 주었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해주는 것으로 극대화 됩니다. 서로를 위해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자기 일처럼 절실히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3. 신앙의 명문가

바울은 가이사랴에서도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머문 곳은 빌립 집사의 집이었습니다. 여기서 빌립은 12사도 중 하나가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 빌립 집사를 말합니다. 누가는 그를 전도자라고 표현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빌립은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고,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환관에게 복음을 전하는 등 열정적인 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이사랴에 머물며 가이사랴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정은 신앙의 명문가였습니다. 자신만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 딸 넷이 모두 예언을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가정들에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거나 믿음이 자라지 않아 속을 썩이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가정이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빌립 집사의 가정처럼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4. 주의 뜻대로 순종한 바울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머무는 동안 유대에서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왔습니다. 아가보는 유대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예언은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예언이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끌려 갈 것을 일러주는 예언이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은 보다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전해졌습니다.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으면서 띠의 임자인 바울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방식이었지요. 시각화된 예언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행 뿐 아니라 가이사랴의 성도들까지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예언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가는 성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떤 성도들이 하는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박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해야 할 것임을 이미 예언받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또한 그가 결박 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팔리는 것은 예수님이 걸었던 길과 동일한 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는 결국 결박당한 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바울이 꿈꾸던 비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죄수의 신분이라야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향한 주의 뜻임을 알았기에 그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던 것입니다.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5. 주의 뜻대로 순종한 성도들

성도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결박과 환난이 예고된 상황에서도 한사코 예루살렘에 가려는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사랑의 감정보다도 주님의 뜻을 더욱 앞세웠습니다. 주의 뜻이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겪는 데에 있다면, 그리고 바울이 그 뜻에 기꺼이 응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개인적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 막다가 책망을 들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우리의 마음, 우리의 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의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평안과 기쁨을 잃어 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일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만큼 큰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6. 주의 뜻을 위해 예비된 사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사람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랜 제자 나손입니다. 오랜 제자라는 말은 아마도 그가 120 제자 중의 한 명이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바울은 혼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려는 이방교회의 대표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집에 들이기를 꺼려 했습니다.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생각하여 그들과 한 공간에 머물거나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예루살렘에서 그 전통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벽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예비된 것입니다. 나손은 예루살렘에 집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이방인들이 대부분인 바울 일행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예비해 두십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이 일치된다면 삶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면 주의 뜻대로 사십시오. 안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일이 막히고 삶이 괴로울 때, 주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애를 쓰십시오. 주님의 뜻이 헤아려지는 순간 모든 것이 감사하고 복된 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행복은 주님의 뜻 안에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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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위에 든든히 서라 (행 20:25-38)

* 말씀 위에 든든히 서라

* 사도행전 20:25-38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파했던 말씀을 잘 지키며 살 것과 그 말씀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를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당부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됩니다. 말씀을 알아야 천국의 소망을 품을 수 있고, 말씀을 알아야 고난 가운데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말씀을 알아야 천국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일 뿐 아니라, 이 땅에 이미 도래한 것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천국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아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법은 곧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에스겔은 파수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그 피값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파수꾼이 말씀을 제대로 전했는데, 백성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 피값은 백성이 온전히 져야 합니다. 바울은 에스겔의 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자신은 말씀을 온전히 정했으므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꺼림 없이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파이프와도 같습니다. 파이프가 녹이 슬어 있으면 하나님의 생수가 흘러와도 백성들이 마시는 것은 녹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절대로 말씀을 틀어서 전해서는 안됩니다. 눈치를 보아서도 안됩니다. 교제할 때에야 사랑으로 품고 보듬으며 나가야겠지만, 말씀을 선포할 때만큼은 축복은 축복대로, 심판은 심판대로 말씀이 임하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말씀을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것이 불편할지라도, 유익에 반한다 할지라도, 순종하기 힘든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다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못한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전하는 스타일이나 사역의 방향에 다소 부딪힘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은 말씀대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모든 사역자들은 삼가야 합니다. 즉 주의깊게 자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사역자는 마귀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입니다. 사역자를 무너뜨리면 양들을 동시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신을 지켜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가 삼가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양떼들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삼가지 않는 사역자는 존경을 받지 못하며, 존경받지 못하는 사역자는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본이 되지 못하는 사역자는 양떼들을 도무지 돌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 이상을 흘려 보낼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먼저 은혜충만, 성령충만, 믿음충만, 말씀충만, 권능충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양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삼가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직분을 성령님께서 구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직분을 두려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직분에 걸맞는 삶을 도무지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사역자가 삼가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값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교회를 잘 보살피고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를 삼가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하고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된 초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실족케 하면 연자멧돌을 메고 바다에 던지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돌보는 양을 가져야 합니다. 보살피고 품고 다독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커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성령님께서 들어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란 곧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아프게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고, 성도가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성도가 곧 예수님의 몸이니까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가 당하게 될 어려움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사나운 이리 때가 들어올 것입니다.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성도로 위장하고 들어와서 복음의 본질을 흐릿하게 할 것입니다. 율법주의 이단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을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 믿음을 갖게 시도할 것입니다. 또한 영지주의 이단들이 들어와서 성도들이 범죄케 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이들을 니골라당이라 부릅니다. 영혼은 거룩하고 몸은 더러운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었으므로 아무리 육신으로 범죄해도 그 영혼은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주는 이단 사설이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받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파 이단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방탕하게 살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에베소에 쓴 편지를 보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거짓 교훈에 맞써서 얼마나 힘든 분투를 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단들과 맞서 싸우느라 첫사랑을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교리 싸움을 하느라 그만 눈물과 감정이 메말라 버렸던 것이지요. 우리는 교리를 지켜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도록 밸런스를 잘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의 또 한 가지 예견은 당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로들 중에서도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리더들 중에는 인기를 차지하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차지하려다 보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말,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고 힘들게 하는 마귀의 일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공명심에 빠지거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느덧 마귀의 일꾼이 되어 있을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장로들이 자신이 어떻게 섬겼는지를 기억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심없이 모든 것을 바쳐 사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당당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들도 그렇게 해야힙니다. 말씀 위에 든든히 서서 기업이 있게 해야 합니다. 결국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서지 못하면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그 누구에게도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은, 금, 의복을 탐하면 가질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리더들이 바울의 본을 받아 물질로부터 자유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필요를 채웠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실천한 것이지요. 힘들 때에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은 더욱 복된 것입니다. 모자란 삶이 아니라 남에게 줄 수 있을 정도로 남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십시오. 남의 물건을 탐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남에게 자신의 것을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거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매력이 터지는 것입니다. 물질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은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물질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매이지 않은 매력은 그러므로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돌이키게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한 말은 에베소 장로들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헤어지기 싫을 뿐 아니라 다시 보고 싶어하는 관계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달려야 할 길이 있기에 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크게 울며 서로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을 고합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별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에 그들은 슬프지만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헤어져도 기도 가운데 만나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사랑과 근심으로 중보하며 떨어져 있어도 그래서 보고 싶어도 주님께 서로를 맡기며 헤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함께 있으나 헤어져 있으나 사랑의 줄로 묶일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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