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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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열린 결말 (창 50:22-26)

창세기의 열린 결말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1.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지향점, 합일

야곱은 죽었지만, 요셉은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아들들에게 요구된 가장 이상적인 합일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축복은 받았지만 언약 밖의 사람이었고, 언약을 받은 이삭을 괴롭히다가 쫓겨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영원히 분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 역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그에게서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은 야곱을 죽이고 싶어 했으며, 화해한 이후에도 각자의 민족을 이루고 영원히 분리되어 살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역시 그렇게 우애가 좋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 탓에 형들은 요셉을 박해하고 팔아먹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결말부인 50장에 들어서면서 형제들은 완벽히 화해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은 이삭에게만 이어졌고, 이삭에게 이어진 언약은 야곱에게만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이삭이 분리되는 것과 에서와 야곱이 분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언약 백성이 언약 밖의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면서 야곱의 후손들을 언약 백성으로 확정지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2 형제들은 분리되어져서는 안되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은 결국 완전한 화해를 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결말부인 50장에 가서야 화해를 하고 있지만, 종국적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형제들의 화해는 고통받은 자의 용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감정대로 하거나, 옳고 그른 것을 가리자면, 형들은 용서받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나,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 자매의 합일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되는 가치는 바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지나치게 옳고 그른 것을 가리다가 합일을 헤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함께 뜻을 모아 동역해야 할 동역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두고 으르렁거리다가 합일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감정의 문제로 인해 합일의 가치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아 버립니다.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보다 자신의 의나 감정을 앞세운 결과이지요. 우리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련을 겪은 요셉이 그 형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합일을 이루었던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하나됨이 자신의 감정이나 의로움보다 소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족장들 나이에 숨겨진 수열

요셉은 110세를 향유했습니다. 요셉이 110세를 산 것에 대해 ‘라부스카그네’라고 하는 학자는 아주 재미있는 수열을 하나 제시합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유익이 있으므로 소개하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으며, 그 수열은 7×52 입니다. 이삭은 187세를 살았으며 그 수열은 5×62입니다. 야곱은147세를 살았으며, 그 수열은 3×72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110세를 살았으며, 그 수열은 1×52+62+72 입니다. 숫자를 좋아하시는 분은 이미 발견하셨겠지만,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의 수열은 7,5,3,1로 일정한 간격을 타고 내려옵니다. 또한 요셉의 수열은52+62+72로서, 조상들의 수열을 종합한 숫자입니다. 즉, 요셉은 조상들의 계승자 (7,5,3,1)이자, 또한 조상들의 종합자 (52+62+72)라는 것이지요. 약간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라브스카그네가 도달한 결론만큼은 사실입니다.

 

요셉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의 계승자이며, 언약을 종합하여 이루는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이 요셉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이 비록 쉽지 않고 예기치 않은 불행들이 몰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요셉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인간 각자의 아젠다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도중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3.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

요셉은 에브라임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을 그 슬하에서 키웠습니다.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했다는 말은 그들을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닌 애굽 땅에서 손자의 손자들을 보도록 살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만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모두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요셉은 임종을 앞두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형제들은 요셉의 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들과 온 식솔들을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보다 10-20살 정도 많기 때문에 요셉의 임종 시에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요셉의 유언에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것이지요. 애굽 역시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는 싫으나 좋으나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4. 마침내 가야 할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도 여전히 그 백성을 돌보시지만, 애굽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된 땅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애굽에 거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의 주제는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것은 넓게는 모세 오경 전체의 주제이자,

좁게는 요셉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50장에서야 화해가 이루어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요셉과 형제들은 45장에서 이미 화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화해였을 뿐입니다. 형들은 여전히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이미 용서한 요셉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형들은 야곱이 죽은 후에야 보복이 두려워 요셉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이는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50장에서 결론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명확히 언급을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꿔 생명을 구원하셨다는 것이지요 (50:20).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원은 현재 애굽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내용이었지요. 이제 먼 훗날 약속된 4대가 지나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번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경험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종국적으로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완성될 미래적 천국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땅을 천국처럼 살다가, 그날이 오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영광스럽게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구원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이 세상을 마무리 하는 순간에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날을 앙망하고 살아야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땅이 없다면 우리는 풍요에 잠식되어지고 말것입니다. 요셉은 총리로써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때에 애굽의 풍요에 취하지 않고 약속의 땅을 갈망합니다. 해골이 되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정도로 약속의 땅에 대한 사모함이 강렬했습니다. 바로 그 소망이 애굽에서의 그의 삶을 아름답고 가치있게 빚어 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천국의 소망을 명확히 해야 이 땅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자는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따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열망하는 자는 이 땅에서 겪게 되는 슬픔과 아픔 등의 감정에 메이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가 풍요에 휘둘리고 욕정에 휘둘리며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이유는 결론적으로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바로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흐릿하다는 것입니다.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5. 창세기의 열린 결말

창세기의 결말은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합니다. 요셉의 죽음으로 족장 시대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다는 요셉의 몸이 미이라가 된 채 관 속에 누운 것으로 끝난다고 하는 측면에서는 불완전합니다. 약속의 땅에 묻히기 원하는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과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까요? 창세기는 그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것은 곧 출애굽을 위한 열린 결말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세오경 전체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에는 화려한 장례식에 대해 언급을 자세히 했던 반면, 요셉의 장례식은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야곱의 장례식이 화려했던 이유는 야곱이 총리인 요셉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총리의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러했다면 총리의 장례식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더 화려하면 화려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장례식 이야기는 고작 미이라로 만들어서 관에 집어넣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왜일까요?

 

야곱의 시신은 가나안에 묻혔으나, 요셉의 시신은 아직 애굽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가나안으로 가는 화려한 행렬을 다룹니다. 야곱의 장례식 자체가 출애굽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들어올 때는 고작 70명이 들어오지만 출애굽을 할 때에는 200-300만의 대행렬을 이룬 채, 은금 패물을 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장례식과 닮아 있지요.

 

그러나 요셉은 아직 약속의 땅에 가지 않고 애굽에 남아 있기에 장례식 따위를 다룰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어서 장례식이 화려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곱의 장례식은 구속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니 화려하게 다루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히 11:21-22은 야곱과 요셉의 임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야곱과 요셉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한 것이 왜 믿음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장차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곳에서 살아갈 모습을 예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임종 시에 반드시 애굽을 떠나라고 말한 것과 자기 뼈를 가나안 땅에 매장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왜 믿음이 될까요? 풍요의 땅을 살면서도 약속의 땅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바로 약속의 땅 천국을 바라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앙망하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창세기가 열린 결말로 끝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세상 나라가 아닌 영원한 천국을 열망하면서 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창세기와 모세오경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신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그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망가지거나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풍요와 번영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이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살아내야 하며, 주님 오시는 그날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영광스럽게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이룰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하는 자는 고통의 잔에 참예하였으므로 영광의 잔에도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봅시다. 그것만이 거룩해지는 방법이고, 만족하는 방법이며, 성결해지는 방법이요, 사랑과 능력 가운데 사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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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 50:15-21)

  •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 용서를 구하지 않은 마음의 결과, 죄책감과 두려움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던 일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두려워 합니다. 그들은 그 일로 인해 요셉이 자신들을 미워하고 있지만,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기 때문에 보복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창세기 27:41에 기록된 미움을 연상했을지도 모릅니다.

 

[27:41]…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야곱이 에서의 축복권을 빼앗은 이후, 에서는 야곱을 향한 미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심중에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이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에서의 살의는 겨우 억눌려 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형들은 요셉 역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죽이고 싶을 것이나, 아버지 야곱때문에 참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야곱이 죽었으니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요셉은 45장 이후로 줄곧 형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시사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임한 것은 그들 스스로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처음 만난 순간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죄책감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함께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상처입은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도 없습니다.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고, 상호 간에 화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됩니다.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2. 용서를 구하는 방법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이 두려워진 형들은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많이 늦었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형들의 용서를 비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중재인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용서를 빌기에 요셉이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용서를 구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직접 용서를 구하기 힘들 때는 중재인을 세워 마음을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아버지 야곱이 용서를 지시했다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실 믿기가 어렵습니다. 형들이 22년 만에 요셉을 만난 후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말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 형들의 죄악을 굳이 연로한 아버지에게 고해서 고통을 추가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형들은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요셉의 특성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3) 두 차례 용서를 구합니다. 그들은 중재인을 세워 용서를 구하였고, 또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중재인을 세워 용서를 구했더라도 직접 용서를 구하는 것만큼 힘을 갖지는 못합니다.

 

4) 악, 허물, 죄를 솔직히 인정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사악한 행위를 표현하는 4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악과 허물과 죄와 죄악입니다. 그 중에서 그들은 악, 허물, 죄 등의 3가지 단어를 써서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했습니다. 용서를 구할 때에는 항상 죄에 대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죄를 인정해야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한 사람의 마음이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형들은 요셉이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들을 용서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에게 있어서 이만큼 강렬한 도전은 없다는 사실을 형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해줄 것을 간청한다는 것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이 인간의 마음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악한 행위였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의미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안되지만, 요셉이 사랑해마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 준다면 용서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형들은 요셉의 사랑에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팔고 있고, 또한 요셉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며 용서를 빌되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3. 용서한 자의 눈물

요셉은 형들을 이미 용서했으며, 그것을 수차례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요셉에게 절절 매며 용서를 청해 왔습니다. 그러한 형들을 보며 요셉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용서를 구하는 형들의 메시지를 중재인으로부터 받은 후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 눈물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1) 형들이 이미 용서한 문제를 가지고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2) 형들이 아버지를 언급했기에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했을 것입니다.

3) 형들이 과거의 죄악을 처음으로 시인하며 직접 용서를 구했기에 마음이 만져졌을 것입니다.

4) 형들의 죄악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삶에 대한 회상이 눈물샘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5) 형들이 하나님을 언급했기에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용서한 자의 눈물은 아름답습니다. 그 눈물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의미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함께 아픔이 씻겨 나가고, 눈물 방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묻어 나옵니다. 고통으로 울었던 눈물 방울들은 아름다운 진주가 되어 천국의 보화로 맺혀집니다. 우리의 눈에서도 용서한 자의 눈물이 흘러 아름다운 보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4.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 것이 용서의 비결

우리가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에 대해 심판을 가할 존재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스스로 심판하려고 듭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형들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도 용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용서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자일 뿐, 용서를 할만한 자들이 되지 못합니다. 형제가 지은 동일한 죄를 나도 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악을 범하곤 합니다. 혼자만 교회를 사랑하고, 혼자만 의로우며, 혼자만 거룩한 척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쉽게 판단을 해버립니다. 심지어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여 판단하고, 사람들 앞에 드러내며,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를 서슴치 않고 범합니다. 또 많은 성도들이 한 사람의 분탕질에 놀아나 한 순간에 신뢰를 버리고 동일한 판단과 정죄를 쏟아 붓습니다.

 

많은 믿음이 사람들이 한 사람의 분탕질에 넘어가 사실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수치입니다. 죄를 지은 자마저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짓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괴롭히는 것은 사악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서려고 하는 행위를 넘어 서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사람의 판단과 정죄에는 늘 실수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력은 부재하면서, 흐릿하고 어줍잖은 판단력을 가지고 심판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그 결과는 불행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됩니다.

 

5.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용서의 비결

요셉은 형들이 용서를 빌기 전에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비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용서받았음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다 형들 스스로 인정했던 그 사악한 죄악을 요셉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영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악을 오히려 선으로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형들의 악을 통해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순간 동행해주심을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형들의 악이 있었기에 요셉은 7년의 기근으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을 살리는 위치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자기 스스로 죄지은 자를 심판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섭리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판단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드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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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창 50:1-14)

  •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 창세기 50:1-14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1.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요셉이 죽은 야곱의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창 46:4에서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야곱은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당장에라도 달려가 보고 싶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나님의 약속처럼 요셉이 야곱의 눈을 감겨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열두 아들들 중에 가장 사랑했던 아들, 그것도 무려 22년이나 죽은 줄로 생각하고 가슴에 묻었던 아들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는 야곱의 행복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그러한 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주셨던 또 다른 약속은 야곱이 애굽으로 가는 길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과 반드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만, 애굽으로 가기를 꺼려 했습니다. 바로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은 무려 22년 동안이나 죽은 줄로 알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아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무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들어가 객으로 살다가 4대 만에야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내용이 야곱의 대에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구원의 청사진입니다. 애굽에 들어갔다가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다는 스토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이 있고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애굽에도 함께 가실 것이라는 약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애굽도 곧 하나님이 나라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명확히 알아야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야곱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며 마침내 들어갈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2. 역사와 운명의 주관자 하나님

요셉은 야곱의 몸을 미이라로 만듭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므로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을 애굽식으로 치루고 있는 것이지요.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내장과 뇌를 제거하여 부패를 막은 후, 온 몸을 향품으로 채우고 몸을 천으로 감아야 합니다. 그렇게 처리를 하는 데에 40일이 소모되었습니다. 야곱의 시신이 미이라로 처리되는 40일동안 애굽 사람들은 곡을 합니다. 그리고 미이라가 된 후에도 30일을 더 곡을 합니다. 모두 70일을 애곡을 한 것이지요. 70일의 애곡 기간은 바로왕이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과 동일합니다. 게다가 야곱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집니다.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이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야곱이 묻힐 가나안을 향해 장례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성경 전체를 통털어 가장 화려한 장례식입니다. 바로 급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와 명망과 바로의 요셉을 향한 신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인 종에 불과했던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바로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라고 하는 역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운명과 자연과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운명과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시면서 그 사랑과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가운데 주눅들지 마십시오. 세상이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앙망하며 당당히 고개들고 어깨 펴고 사십시오.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명확히 인식을 한 채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영광

야곱의 장례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신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입니다. 야곱은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찾아온 미약한 모습으로 애굽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애굽의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작 70명의 식솔들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애굽에서 나갈 때는 200-300만의 민족을 이룬 채 나가게 될 것입니다. 민족을 이루어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예표하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가운데 초라한 모습으로 살며,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기도 할 것이지만, 결국 어마 어마한 군대를 이루고 빛나는 영광을 발하며 천국의 도성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곳을 바라보며, 또한 바로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만이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어 줍니다. 성도에게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있기에 성도는 궁핍함 가운데에서도 오늘을 이겨내며, 풍요로움 가운데에서도 오늘을 투자하며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풍요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바로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 주어진 풍요를 투자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4. 성도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야곱이 묻힌 땅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을 합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막벨라 굴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실상 그가 소유한 땅은 매장지로 삼은 막벨라 굴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언제 약속대로 주어질지 너무나도 흐릿하고 아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 하나를 사두고 그 흐릿하고 아득해 보이는 약속을 붙듭니다. 성도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흐릿해 보이고 아득해 보이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해주신 작은 체험,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작은 사건들을 붙들고 흐릿한 천국을 명확히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사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래에 완성될 나라이지만, 현재의 막벨라 굴로 우리 삶속에서 만져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이미 찾아온,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국을 살다가, 장래에 결국 완성되게 될 천국으로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그 곳은 이미 우리 앞에 펼쳐져 있고, 주님의 재림하시는 그날 비로소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세상에 발을 딛은 채 작은 천국을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세상의 험준한 과정을 살아내면서도 내일 완성될 천성을 향해 한 걸음 씩 발을 내딛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은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까, 천국의 도성을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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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물어 뜯는 이리 (창 49:27)

  • 베냐민, 물어 뜯는 이리

  • 창세기 49:27

27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신명기 33:12  ]

32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1. 베노니와 베냐민

베냐민은 야곱의 열 두 번째, 즉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엄마 라헬은 그가 태어날 때 죽고 말았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 지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슬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는 6명의 아들을 낳았고, 심지어는 몸종들인 실바와 빌하도 2명씩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자신만 유일하게 아들을 못 낳으니, 아들 낳는 것을 여인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던 시대에 살았던 라헬이 느끼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겨우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이름을 요셉이라 짓습니다. 요셉의 뜻은 ‘하나 더’입니다. 몸종들도 둘 씩을 낳았으니 하나로는 부족한 것이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라헬은 아들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이제야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니 슬펐고, 어미 없이 혼자 자랄 아들을 생각하니 또 슬펐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내 베냐민을 각별히 사랑한 아버지 야곱은 그를 슬픔의 아들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막내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른 손”은 권능과 힘을 상징했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에서 “권능의 아들”로 옮겨 진 것이지요.

베냐민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우리의 인생은 베노니였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인생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에 붙들린 인생, 즉 베냐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더이상 베노니가 아닌 베냐민으로 살아갈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2. 물어 뜯는 이리와 사랑을 입은 자

야곱은 베냐민에 대해 축복하면서 그를 “물어 뜯는 이리”라 불렀습니다. 어머니 없이 10명의 이복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베냐민은 슬픔과 아픔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그를 호전적인 성격으로 자라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 요셉의 각별한 과잉보호와 사랑 가운데에 있었기에 실제로 아버지의 권능의 팔 아래 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야곱의 예언처럼 “호전적인 이리”임과 동시에, 모세의 예언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제비를 뽑아 얻은 땅은 유다와 요셉 자손의 사이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땅이 유다 지파와 요셉 자손 사이에 위치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셉은 어머니 라헬이 낳은 유일한 형이었습니다. 즉, 자기형인 요셉 지파 곁에 자리 잡음으로 형제가 나란히 기업을 얻은 것이지요. 또한 이는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영토는 가나안의 남북을 잇는 전략상의 주요 도로에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특성상 호전적인 기질을 가졌던 베냐민 지파는 더욱 호전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야곱이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고 한 예언과 일치합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의 성전과 법궤가 머물게 될 예루살렘 곁에 있게 되어 후에 남북 왕국이 분열할 때에 유다 지파와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라고 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3. 형제를 물어 뜯는 이리와 대적을 물어 뜯는 이리

그의 호전적인 기질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에는 이스라엘 다른 열한 지파와 물러섬 없는 전쟁을 했고, 그 전쟁에서 지파 전체가 사라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질이 있었기에 그들은 궁수와 돌팔매질의 명수들을 보유한 채, 이스라엘을 공격해오는 적들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던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유대 민족 전체를 구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던 예레미야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망의 구덩이 들어가고 전 민족의 왕따가 되었지만,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모두 베냐민 지파 특유의 야성입니다.

크리스쳔은 “물어 뜯는 이리의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창백한 크리스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쓰여져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쪽도 못 쓰고 살면서, 교회에서만 형제 자매들을 이리 물고 저리 뜯는 이리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성이 아니라 야만성입니다.

베냐민 지파였던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을 때,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한 용맹이 있었지만, 시기심에 불타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을 때에는 충신 다윗을 야만스럽게 박해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레위인의 첩을 집단 윤간하는 야만성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나머지 11지파가 모여 주동자들을 처단하고자 했을 때, 범죄자를 내어놓는 대신 과감하게 11지파와의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열심은 세상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일에 목숨을 걸게 하였습니다.

한 기질은 이처럼 양면성을 갖습니다. 그 기질의 장점을 잘 활용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게 되지만, 그 기질의 단점이 드러나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기질의 장점이 드러납니까, 단점이 드러납니까? 우리의 기질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사용되고 있습니까, 무너뜨리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까?

4. 영적 베노니와 영적 베냐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베냐민은 “오른 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오른 손이 늘 베냐민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오른 손, 권능의 손에 거하는 자들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적인 베냐민입니다. 베냐민이 야곱의 사랑을 입은 자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보호하시고, 우리로 자기 어깨 사이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엄마가 없는 슬픔의 아들 “베노니”에게는 아버지 야곱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 양 어깨 사이에 아들을 품고 늘 보호했습니다. 그는 더이상 베노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우리는 베노니 였습니다. 슬픔과 절망이 우리를 감쌌고, 우리는 어미 없는 자식처럼 방황하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양 어깨 사이에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베노니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권능자의 권능의 오른 손에 붙들린 베냐민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얻은 땅은 유다지파의 바로 위, 곧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곁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베냐민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양 어깨 사이에 거하며, 밤이 맟도록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양 어깨 사이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베냐민에서 베노니로 회귀하게 됩니다. 우리는 베냐민입니까, 베노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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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담을 넘는 가지의 축복 (창 49:22-26)

  • 요셉, 담을 넘는 가지의 축복

  • 창세기 49:22-26

 

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1.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의 축복

요셉이 받은 복은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의 복입니다.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샘 곁에 심기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 뿌리를 내려야 인생의 나무가 무성해질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나무는 의인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시편의 1편의 묘사된 복있는 자도 보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인생의 나무는 담을 넘기는 커녕 자기 마당도 제대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뭄 가운데에서도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렸기에 그 인생나무가 시들지 않았습니다. 고통가운데에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의로운 삶이 그를 무성한 나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무성함은 담을 넘어갔습니다. 자기만 총리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그 주변국의 모든 사람들이 7년의 기근을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양식을 제공하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는 보디발의 온 집이 복을 받았고, 감옥에 있을 때에는 죄수들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을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담을 넘은 가지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배고픈 이가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는 열매를 제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집 마당을 꽉 채우고 담 너머로까지 가지를 뻗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로 인해 덩달아 복을 받아야 합니다. 나눠주고 베풀면 부족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담을 넘는 가지는 먼저 대부분의 가지를 집 안에 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쓰고 남으니 나눌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사람은 이처럼 담을 넘는 가지로 삼아주십니다.

 

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 전능자의 손의 힘으로 사는 자

요셉은 전능자의 손의 힘으로 사는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대적들로 인해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활쏘는 자의 화살로 비유를 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팔았고, 미디안의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은 인신매매를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무고한 요셉을 기소했으며, 요셉이 충성을 다했던 주인 보디발은 요셉의 말은 듣지도 않고 요셉을 감방에 밀어 넣었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에게 은혜를 입고도 요셉을 무시하여 무려 2년이나 요셉을 잊고 지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인생의 화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히려 강해지고 높아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인생에 형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자의 손이 요셉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러한 하나님을 반석이요, 목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반석이 되어 주시면 그 인생 집은 어떠한 풍랑에도 무너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 주시면 그 양은 푸른 초장에 안연히 거하며, 배불리 꼴을 먹으며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 한다면 우리는 대적의 화살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붙들려 살면, 우리의 반석이시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돌보실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강성하고 높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3.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

전능자의 손이 돕는 인생은 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 복은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누릴 복에 대하여 운율을 맞추어 노래합니다. 하늘의 복은 샤마임의 복이고, 샘의 복은 샤다임의 복입니다. 젖의 복은 테홈의 복이고, 태의 복은 레헴의 복입니다. 끝이 모두 비슷하게 끝나고 있지요? 라임을 맞추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이란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의 복을 말합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깊은 샘이 넘쳐 흐릅니다. 비가 오는데,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이 있으니, 뿌리가 마를 리가 없으며, 무성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은 남성이 주도하는 산업에 주어지는 풍요의 복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업장이 잘된다는 것을 말하겠지요. 젖의 복과 태의 복은 여성에게 주는 다산과 풍요의 복입니다. 당시에 여성에게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보다 큰 복은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정이 풍요롭고 평안한 복을 말합니다.

 

요셉이 누리는 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이자 땅에서 올라오는 복이었고, 밖으로는 산업의 복이자, 안으로는 화목하고 풍요로운 가정의 복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복입니다. 이 복들은 모두 전능자로 말미암아 오는 복입니다. 전능자가 열어주지 않으면 인간에겐 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은 오직 전능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4. 영원한 산처럼 한이 없이 주어지는 복

요셉이 마지막으로 받은 복은 영원한 산처럼 한이 없는 복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산처럼, 요셉의 복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로 죽는 순간까지 그 지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이스라엘 온 가문이 총리의 가문으로 풍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죽은 후에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요셉을 아는 한 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야곱은 요셉을 그 형제 중 뛰어난 자로 표현을 합니다. 요셉은 형제 중 가장 탁월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탁월함의 근원은 요셉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과 지혜와 명철을 주셨고, 요셉은 그것을 누렸을 뿐입니다. 요셉이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뛰어난 영성을 소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영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셉과 늘 함께 하시면서 요셉을 도우시는 전능자의 손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가장 뛰어날 수 밖에 없었고, 담을 넘어 뻗어가는 무성한 가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결한 자로 섭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과 지혜와 명철로 인해 가장 뛰어난 자로 섭시다. 그것이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게 합니다.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과 젖의 복과 태의 복을 누리되, 의연한 산처럼 영원히 그 복을 잃지 않는 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한 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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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달리,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놓인 암사슴 (창 49:21)

  • 납달리,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예수님의 암사슴

  • 창세기 49:21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신 33: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1. 아픔의 이름 납달리

납달리는 야곱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빌하의 차남입니다. 납달리의 어머니 빌하는 원래 라헬의 몸종이었습니다. 아이를 못 낳던 라헬은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임신하게 한 후 자기 무릎 위에서 출산하게 함으로써, 두명의 아들을 얻습니다. 첫째는 단, 둘째는 납달리입니다. 라헬은 빌하를 통하여 둘째 아들을 낳은 후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는 의미에서 아들을 ‘납달리’라 부릅니다. 납달리는 “경쟁, 다툼”의 뜻입니다. 이름 안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라헬의 아픔이 담겨 있고,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에 치기어린 주인의 감정이 실리는 빌하의 아픔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2.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놓인 암사슴

야곱은 납달리를 축복할 때에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라고 예언합니다. 암사슴은 아름다움과 빠름의 상징입니다. 암사슴은 아름다우며 겁이 많은 짐승으로 위험이 닥치면 항상 빠른 발을 이용해 도망할 준비부터 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사슴을 길들여서 짐을 실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암사슴처럼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지파였습니다. 납달리를 매여있는 암사슴이 아니라 풀어 놓은 암사슴으로 비유한 야곱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납달리는 실제로 뜀박질에 가장 능한 지파였다고 합니다. 한마리의 아름다운 암사슴이 그 빠른 발로 자유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납달리가 받은 복이었습니다. 납달리는 또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할 것이라고 예언되어졌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3. 자유를 누리는 예수님의 암사슴

납달리 지파가 빠른 발을 가졌고, 자유로웠으며,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는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 이면에는 구속사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납달리가 분배받았던 땅은 갈릴리 지역으로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천국복음이 가장 먼저 발하여 진 곳이 곧 납달리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납달리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본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풀어놓은 한마리의 아름다운 암사슴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짐을 지고 이 땅을 살다가, 죽음의 사슬에 묶여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며, 형벌의 멍에를 지고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가 풍성하고 하나님의 복이 가득한 자들, 즉 납달리로 택정되어졌기에 그 어떤 짐도 사슬도 멍에도 매지 않은 “풀어놓은 암사슴”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짐과 사슬과 멍에를 예수님께서 감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암사슴이라 불러 주십니다. 암사슴은 아름다운 신부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가서 8:14는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라고 노래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우리는 꽃들이 아름답고 그 향내가 진동하는 아름다운 초원에서 신랑되신 예수와 함께 뛰어 노는 한마리의 아름다운 암사슴인 것입니다.

납달리의 출발은 아픔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라헬의 아픔을 그 이름에 담고 있으며, 그 친 어미 빌하는 이복 형 르우벤과 간통을 하는 죄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슬픔과 더러움의 아들 그것이 납달리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그런 납달리를 놓인 암사슴으로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아픔의 아들이요, 죄의 아들인 우리를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고 빠르게 뛰어노는 암사슴으로 불러주셨습니다.

4. 자유를 주는 하나님의 은혜

납달리에 대한 모세의 예언도 예수님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납달리에 대해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라고 축복합니다. 납달리는 모세의 예언대로 갈릴리 바다의 서쪽과 남방까지를 경계로 차지했습니다. 그 땅은 비옥하고 풍요로와서, 성전에 바치는 첫 열매를 가장 먼저 바쳤던 지파가 납달리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납달리가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역시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소리”가 가장 먼저 발해진 곳이 납달리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납달리는 천대받고 멸시받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땅에 등장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땅은 은혜가 풍성하고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통해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속박과 멍에를 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먼저 이 땅에 실현된 곳,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곳, 그곳이 곧 납달리였던 것입니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암사슴이 더욱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과거가 아픔이었고 더러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암사슴이 이제는 더이상 슬픔과 죄의 멍에를 홀로 감당하는 자가 아닌, 강하고 멋진 신랑 “예수”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전의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5. 암사슴이 빨리 달리는 이유 – 율법이 아닌 은혜

암사슴이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자유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로부터의 속박도 속박이지만, 율법의 속박을 풀어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인들은 율법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그 율법의 멍에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크리스쳔들은 율법으로 다시 회귀하곤 합니다. “이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이렇게 살아야 해, 저렇게 살아야 해” 등등의 올무로 자기 스스로를 학대할 뿐 아니라,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자유입니다. 진리는 그것을 받아 들인 자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유는 우리에게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멍에를 매는 것이 아니라 심령에 내주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씀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 속에 거룩함이 임한다는 것이지요. 율법주의에 매여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복음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6. 예수님의 암사슴이 달려가야 할 길과 발해야 할 소리

암사슴은 빨리 달리며, 아름다운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풀려진 암사슴은 빠른 발로 달려야 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벌판에서 혼자 고고, 디스코, 트위스트 추라고 자유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인 우리를 풀린 암사슴으로 만들어 주시면서 푯대를 주셨습니다. 그 푯대를 향해 달리라는 것이지요. 그 푯대는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리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소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슬픔과 고통에 매여 있는 또 다른 암사슴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지 못한 수많은 매인 암사슴들을 향해 우리는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목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하나는 풀린 암사슴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줌으로 복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는 별개로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못할 지라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선포되는 말씀에 신뢰가 가기 위해서는 역시 말씀을 전하는 자가 우아해보여야 합니다. 사슴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데, 그 삶의 모습은 꼬질 꼬질 때가 타 있다면, 매인 암사슴들은 코웃음을 치며 말할 것입니다. “글쎄… 나는 너처럼 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삶을 통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암사슴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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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형제에게 기쁨을 나누는 기쁨 (창 49:20)

  • 아셀, 형제에게 기쁨을 나누는 기쁨

  • 창세기 49:20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신33:24-25]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1. 아셀, 복으로 인한 기쁨

아셀의 이름 뜻은 ‘기쁨’입니다.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두번째 아들이고, 야곱의8번째 아들입니다. 레아가 아들을 넷이나 낳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야곱과 동침하게 하여 단과 납달리 두명의 아들을 낳게 합니다. 이에 질 새라 레아 역시 자신의 몸종 실바를 야곱과 자게 한 후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동생이자 라이벌인 라헬과의 아이 낳기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레아는 아셀을 얻은 후 기쁨에 겨워서, “기쁘도다 모든 여자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이름을 “아셀(기쁨)”이라고 부릅니다.

 

아셀은 단순히 기쁘다는 의미가 아닌 축복에 겨워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앗쉐레”인데,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27번은 복이라는 의미로, 18번은 기쁘다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문맥상 “복”도 되고 “기쁨”도 되는 단어입니다. 그 유명한 시편 1:1절의 “복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앗쉐레”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자의 이름이 곧 “앗쉐레” 또는 “아셀” 인 것입니다.

 

야곱은 아셀에 대하여 “기름진 음식을 생산할 것이고, 왕의 수라상을 차릴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그 축복은 성취되어 아셀은 12 지파 중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곡물 지파”라고 불릴만큼 “풍요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셀은 가나안 북서쪽 끝에 있는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지금의 레바논과 그에 접경하는 지역들입니다. 아셀 지파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들어있는 아주 기름진 알짜배기 땅을 얻었습니다.

 

2. 기름진 땅, 왕의 수라상에 올려지는 음식의 복

혹자는 복을 비는 것 자체를 악한 것처럼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식은 거룩하지도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최고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복만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기복행위”이지만, “복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신앙 행위입니다. 아셀은 왕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기름진 음식을 생산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풍성한 열매를 생산하여, 그 열매가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의 상에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풍성한 물질의 열매를 생산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는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쳔이라면 아셀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는 제자도의 고난과 함께 형통함의 영광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제자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를 고행의 종교로 만들어 버리고, 어떤이는 영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를 번영의 종교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는 넘치는 복과 기쁨이 제자도와 함께 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아셀”이 되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3. 형제들 중에서도 으뜸인 복,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는 복

모세 역시 아셀에 대하여 12 지파 중 가장 큰 복을 받을 것이고 아셀이 형제들의 “기쁨”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아셀은 자기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마저 기쁨이 되는 자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아셀이 늘 형제들 사이에서 기쁨이 되는 존재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선물 받았던 것임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풍요를 구하는 것은 그릇된 이기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를 통해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며, 우리 주변에도 기쁨이 흘러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셀은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받으면 자기 혼자만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면 그저 똥뱃살만 늘어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에게도 아셀, 형제들에게도 아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아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쁨만을 생각하는 절름발이 아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4. 발에 기름이 잠기는 복

모세는 또한 아셀에 대하여 그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을 예언합니다. 아셀은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발에 기름이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기름이 우리의 발목을 적셔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물질적인 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 기름부으심이 넘쳐서 우리의 발목까지 벙벙하게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기름과 땅의 기름진 것들이 동시에 우리의 발목을 적셔야 합니다. 물질의 복만이 발목을 채우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은 사람의 마음에 탐심과 게으름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기름으로 적셔지고 그 발이 잠겨있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전제되는 데에서 옵니다. 기름진 양식은 육신의 떡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영의 양식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땅의 기름진 것들로 벙벙하게 잠겨 있는 한 크리스쳔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나이길 소망하십시오.

 

5. 철과 놋의 문빗장을 가진 복

모세는 심지어 아셀이 받은 복에 자물쇠를 채울 것이라 축복합니다. 풍요를 통한 기쁨을 누리는데 그 문 빗장이 철과 놋이 되어 그 복을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아셀은 그저 풍요의 복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풍요를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켜 주시겠다는 복까지 받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빗장이 나무로 되어 있으면, 풍부한 재물은 도둑을 부를 뿐입니다. 하지만 철과 놋으로 된 문빗장이 있는 집은 견고합니다. 그 누구도 그 풍요를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대적에게 우리의 풍요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 풍성함과 기쁨이 늘 보호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겐 아셀의 복이 필요합니다.

 

6. 죽을 때까지 쇠하지 않는 능력의 복

아셀이 받은 마지막 복은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쇠하지 않고 넘치는 복입니다. 한번 번뜩 타고 마는 폭죽같은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생에 그 능력이 쇠하지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100미터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쉼없이 가야 하는 그 길에서 우리는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 풍요와 기쁨을 우리의 평생을 통해 결코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마지막 기름을 짜내어 태우는 관유처럼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아셀의 복입니다.

 

저에게는 제 마지막을 위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제가 만약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거든 저를 주저없이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셀이 되어져야 하는 이유이고, 또한 우리가 아셀로 부름 받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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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님의 심판 (창 49:16-18)

  • 단, 하나님의 심판

  • 창세기 49:16-18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신 33:22]

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1. 단, 하나님의 심판

단이라고 하는 이름은 심판, 또는 판단의 뜻입니다. 단이라는 이름은 남편 야곱의 사랑은 받았지만 아이를 좀처럼 잉태하지 못했던 라헬의 아픔이 묻어 있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4번째 아들까지 낳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유다라 칭했습니다. 아직까지 단 한명의 아들도 낳지 못한 라헬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몸종이었던 빌하를 자기 대신 야곱에게 들어가게 했습니다. 당시는 몸종이 여주인에게 속했으니 몸종이 낳은 아이도 여주인의 것이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빌하가 아들을 낳자 라헬은 그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 칭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는 것이지요.

 

야곱은 단에 대해 예언을 하면서 그 이름의 뜻을 그대로 사용을 합니다. 단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할 것이라 예언한 것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단은 이미 이스라엘의 한 지파인데,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단 지파의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단 지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여겨주겠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에 단 지파가 받은 기업은 블레셋에 접경한 부분이었습니다. 강대한 적인 블레셋을 몰아내고 그곳을 정복해야 할 사명이 단 지파에게 주어졌던 것이지요. 그들이 차지한 영토 안팎에는 강한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땅을 취하는데에 박차를 가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정복된 땅만을 가지고는 유다 지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인 64,400명이 살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정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던 그들은 결국 북쪽의 메롬 물가 쪽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레센'을 쳐서 정복한 후 그 이름을 단이라 불렀습니다. 레센은 라이스의 다른 이름입니다. 라이스는 다스리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싸움에 능한 단이 그곳을 취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기에 그들은 600명의 전사만으로도 그 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평화로운 땅을 침범한 단의 이 의롭지 못한 행동은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단에게 예언할 때에  “길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라 하였고, 모세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라"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샛길의 독사처럼 그들은 갑작스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마치 바산에서 뛰어나와 덮치는 사자 새끼와도 같았습니다. 바산은 라이스가 있던 지역이었으며, 라이스 바로 위에는 바산이라는 산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비옥하여 먹이가 많았으며, 그에 따라 당연히 사자들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 바산에서 뛰쳐 나오는 사자처럼 단은 급작스럽게 라이스를 덮쳤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엉뚱한 곳에 쓴 지파

단은 독사와 사자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용사요 전쟁에 능했습니다. 숫자로만 봐도 왕권을 약속받은 사자지파 유다에 비해 서열 두 번째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그 능력을 가지고 그들에게 허락된 땅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포기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된 땅을 취하는 대신, 허락되지 않은 땅을, 그것도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공략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설설 기고, 약한 자에게는 막 대하는 뱀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야곱으로부터 뱀이라는 예언을 받았으나 그들 스스로 그것을 싫어하여 자신들을 상징하는 깃발에는 뱀대신 독수리를 새겨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하는 행동은 독수리가 아닌 뱀이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데 썼습니다. 샛길의 독사가 갖은 힘이 주어졌으나, 그 힘으로 독사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  

 

3.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지파

그들의 잘못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를 취하러 가는 길목에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우상을 빼앗아 갔습니다. 미가의 집은 그들이 라이스를 정탐하러 갈 때에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곳입니다. 그들은 대접을 받는 동안 그곳에서 신상을 발견하였고, 라이스를 치기 위해 다시 올라가는 길목에 미가의 집에 들러 그것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던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지요.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 늘 옆에서 힘이 되어줬던 사람을 한 순간에 등지고 앞에서 상처주고 뒤에서 험담하는 일들이 크리스쳔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발견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교회 안에서 깊은 친구를 사귀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함께 생명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 오히려 세상 친구보다 못한 관계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도 성도들이 일반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악해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싫건 좋건 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부딪힐 일이 많아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고작 세상 사람들이 비교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는 세상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함께 웃으며, 함께 즐거워 했던 사람을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순간에 공격하는 행위는 세상에서나 하는 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가져야 합니다.

 

4. 도덕적 타락의 원인은 결국 영성의 타락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탈취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닌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그 조각 덩어리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첫번째 지파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들의 죄악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단은 분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여로보암이 우상을 세웠던 두 장소 중 하나입니다. 여로보암은 10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세울 때에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 대신 그것들을 섬기게 합니다. 단은 스스로 우상을 세웠던 장소였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우상을 세웠던 장소가 되고 만 것이지요. 하나님의 귀에 대고 스테레오 돌비 시스템으로 외친 셈입니다. “난 당신 백성 안 할 거야!”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떠난 영적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무뎌지면 반드시 도덕적 타락으로 치닫게 됩니다. 기준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두 돌판 중 첫째 돌판을 지켜야 둘째 돌판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해주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십계명을 요약한 두 계명은 한 계명인 셈입니다. 따로 노는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의 기억 속에 각인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

결국 단 지파는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뱀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인침을 받은 12 지파의 이름들이 나열되는데 그 속에서 단의 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파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멀리 요한 계시록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역대상에 나열된 족보에도 단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록 속에서 지워 져버린 것이지요. 단 지파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단지파의 이름이 영원히 삭제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단도 결국은 회복되어 땅을 분배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겔48: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억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파처럼 그 이름이 아예 기억되지 않다가 선택되었으니 겨우 회복되는 수준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살아 생전 주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아무런 업적도 없이, 그저 구원받았으니 겨우 이름이 회복되는 수준에 머무르는 비참한 꼴이 되면 안될 것입니다.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가면 우리가 주님을 하루 이틀 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치열하게 분투하여 하나님이 기억에 각인될 만한 멋진 신앙의 추억들을 만들어 두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렷한 추억으로 살고 있습니까, 흐린 기억으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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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사갈, 헌신과 지혜의 아이콘 (창 49:14-15)

  • 잇사갈, 헌신과 지혜의 아이콘

  • 창세기 49:14-15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신33:18-19]

18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1. 값을 치루고 보상으로 얻은 아들, 잇사갈

잇사갈은  레아가 낳은 5 번째 아들이며, 야곱의 12 아들 중 9번입니다. 야곱과 모세의 예언이나 땅 분배에서는 스블론이 먼저 등장하지만, 사실 잇사갈이 형입니다. 잇사갈이 동생인 스불론보다 더 나중에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잇사갈에 대한 예언이 스불론에 대한 예언보다 더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잇사갈의 이름 뜻은 “값” 또는 “보상”이란 뜻입니다. 값을 치루다는 뜻인 사카르와 연결된 이름입니다. 잇사갈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잇사갈이 태어나기 직전,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옵니다. 합환채는 성욕을 증진시키고 임신 능력을 높이는 특효약으로 여겨졌습니다.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으므로, 첫째 부인 레아에게서 합환채를 사는 대신 그 날밤 남편 야곱을 레아에게 팝니다. 야곱은 영문도 모른 채 레아에게 끌려가 잠을 자게 되고, 그렇게 해서 레아가 임신하게 된 아들이 잇사갈이었습니다. 레아는 잇사갈을 낳기 직전, 라헬과의 자식 낳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 몸종 실바를 남편과 자게 하여 갓과 아셀을 낳게 하였습니다. 레아는 남편 야곱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하긴 했지만, 아마도 그것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잇사갈을 낳았을 때, ‘시녀를 남편에게 내어주고 받은 보상’이란 뜻으로 아들 이름을 잇사갈이라 붙였으니까요. 합환채를 판 값으로 남편과 자서, 시녀를 남편에게 들여보낸 보상을 받아 낳은 자식이 잇사갈이었던 것이지요.

 

2. 헌신과 지혜의 아이콘

야곱은 잇사갈을 축복할 때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 비유를 합니다. 유다가 사자로 비유되었다면, 잇사갈은 나귀로 비유가 되고 있습니다. 비실 비실한 나귀가 아닌 건장한 나귀였습니다. 실제로 잇사갈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므깃도 전투에서 사사 드보라와 협력해 혁혁한 공을 세운 후 그 용맹을 인정받았습니다.

 

잇사갈은 또한 건장한 나귀처럼 인내심있고 열심히 일하는 지파였습니다. 본문의 “양의 우리”라는 단어는 “두 개의 짐”이라고 번역될 수 있으며, 사실 그 번역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즉, 두 개의 짐 사이에 어깨를 내리고 짐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나귀라는 것이지요. 두 개의 큰 짐을 지고 불평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인내하며 감당하는 아주 좋은 장점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잇사갈은 지혜마저 가졌습니다.  역대상 12:32절에 보면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시세라는 말은 ‘시대의 흐름’이란 말입니다. 잇사갈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혜마저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끄는 리더들이 200명이나 잇사갈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잇사갈은 참 많은 것을 소유한 지파였습니다. 강한 체력과 힘이 있었고, 늘 나귀처럼 성실히 섬기는 열심과 꾸준함이 있었습니다. 많은 짐들 사이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짐을 지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헤로워서 분별력과 판단력도 뛰어났습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불평도 원망도 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감당해내며, 두개의 짐 사이에서도 기꺼이 그 짐을 감당하기 위해 어깨를 내려놓을 줄 아는 그런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잘 지치지도 않고 일에 대한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구슬 땀을 흘립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 영적인 분별력마저 있습니다. 이런 성도 한 사람을 갖는 것은 그 교회의 복입니다. 물론 찾아보기 힘든 희귀종이기도 하지요.

 

3. 스불론의 영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잇사갈의 영성

잇사갈은 스불론 바로 동편에 땅을 얻지만, 척박한 땅을 얻은 스불론과는 달리 매우 기름진 땅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잇사갈을 축복할 때에 스불론과 같이 묶어서 예언을 합니다. 스불론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잇사갈은 장막에 거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이니다. 두 지파의 땅은 나란히 접해 있었지만, 땅의 형세는 달랐습니다. 척박한 땅을 가진 스불론은 밖으로 나아가 해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반면, 비옥한 땅을 가진 잇사갈은 자기 땅에 머무르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으로 예언은 성취가 됩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자기 ‘쉴 곳을 좋게 여기고, 자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겼던 것’ 이지요.

 

교회는 건강한 나귀인 잇사갈처럼 땀흘리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모세는 잇사갈과 스불론을 싸잡아서 축복하되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축복합니다. 이는 잇사갈과 스불론이 있었던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님의 주요 사역이 이루어지며 복음이 처음 선포되었던 것으로 성취가 되어졌습니다.  

 

모래에 감추인 보배는 일차적으로 모래알과도 같은 세상 것들 속에서 참보배가 되시는 그리스도나 또는 복음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영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불론처럼 밖으로 나가 전도와 선교에 열을 올려 보배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헌신과 땀과 열심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감추인 보배를 찾아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잇사갈형 성도입니다. 아무리 많은 영혼을 데려다 놓아도 땀흘려 섬기고 돌보는 사람들이 없으면, 모래 속의 감추어진 보배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스불론과 잇사갈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있는 반면, 내보내는 선교사도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데려오는 전도자가 있는 반면, 섬기고 헌신하는 양육자가 있어야 합니다. 잇사갈과 스불론은 함께 손을 잡을 때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4. 풍요에 안주한 채 장막에 머무르는 신앙의 폐해

잇사갈의 문제는 좋은 지형과 풍요로움 때문에 이곳은 다른 지파의 땅보다 훨씬 더 자주 침략과 공격을 받았으며 노예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라는 야곱의 예언처럼, 그들은 아름다운 토지를 가진 것에 대한 “값”을 치루며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잇사갈에게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장막 안에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불론과 짝을 이루지 못하면, 그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요’의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잇사갈은 땅이 너무 비옥하다보니 항상 장막에 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압제에 시달리며, 조공을 ‘보상’으로 바치며 먹고 사는 노예같은 삶이 된다 할지라도 기름진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은 아합 왕이었고, 가장 악한 여인은 그의 아내 이세벨이었습니다. 아합왕이 바로 잇사갈 출신이었고, 그 때문에 이세벨의 바알숭배, 앗세라 숭배의 진원지가 된 곳도 바로 잇사갈이었습니다. 아합은 악한 왕이었지만 사실 그의 시대는 정치적인 풍요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에 묻히다 보면 영적인 궁핍을 피할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전부는 아닙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적인 풍요이며, 영혼들의 풍요입니다. 교회는 풍요로울 때일 수록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합니다. 잇사갈을 축복할 때, 스불론과 묻어서 같이 축복하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풍요에 파묻혀 안에 거하기만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울 수가 없습니다. 풍요로와 질수록 스불론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자기가 밖으로 갈 수 없으면, 보내기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 풍요를 주신 이유는 풍요에 목매라는 것도, 그저 풍요를 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모래에 감추인 보배들을 찾아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끼리만 풍요롭게, 우리끼리만 즐겁게, 우리끼리만 하나되어, 우리만의 평화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교회는 마귀의 압제를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미 풍요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풍요는 마귀가 쳐놓은 가장 힘있는 덫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풍요 속에 안주하게 하고, 정적으로 머물러 있게 합니다. 우리의 쉬는 땅이 보기에 좋고, 우리의 차지한 땅이 아름답게 여겨져, 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그 풍요를 누릴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 값은 ‘마귀의 종 노릇’이라는 치욕적인 값입니다.

 

우리는 분명 건장한 나귀와 같은 헌신과 시대를 읽는 분별력과 그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성이 무너져 있다면 순종과 헌신과 지혜는 악한 것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본질이 무너져 있다면, 순종은 잘못된 관습에 대한 순종이 되고, 헌신은 악한 전통에 대한 헌신이 되며, 지혜는 세상 풍요를 탐하는 지혜가 되기 쉽상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지혜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본질 안에서 발휘되는 헌신과 지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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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불론, 거하라 그리고 나가라 (창 49:13)

  • 스불론, 거하라 그리고 나가라

  • 창세기 49:13

 

13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신 33:18-19]

18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1. 스불론, 거한다는 이름을 갖고 나가는 자

스블론은 레아가 낳은 마지막, 즉 6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10번째이지요. 스블론의 이름 뜻은 “거함”이라는 뜻입니다. 동생 라헬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레아에게는 깊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레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라헬이 아이를 못 낳는 동안 아들을 6명이나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아무리 낳아줘도 야곱의 사랑은 늘 라헬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들 스블론을 낳고 난 다음 레아는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거할 것이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후에 야곱은 스블론에 대해 예언할 때에,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라고 예언을 합니다. 스불론이 해변에 거한다는 말은 사실 언어 유희입니다.  ‘거하는 자가 … 거한다’ 의 라임을 맞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사실은 여호수아서에서 스불론이 분배받은 땅이 해변이 아니라 내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스블론이 받은 땅은 비록 내륙에 있었지만, 동으로는 갈릴리 해변, 서로는 지중해 해변을 가까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분배받은 땅은 갈릴리 땅으로서 매우 박한 땅이었으므로, 농사를 지어서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서의 두 해변으로 나아가 왕성한 무역활동을 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좀 특이한 방식으로 예언이 성취된 것이지요. ‘해변에 거한다’ 할 때의 거한다는 단어 역시 일시적으로 장막을 치고 거한다는 뜻입니다. 해변에 아예 사는 것이 아니고 산업을 위해 잠시 거한다는 뜻이지요.

 

2. 스불론, 거하라

우리는 스블론의 이름 뜻이 “거하다”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블론’에 해당하는 가장 가까운 신약의 용어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말로는 ‘임재’이겠지요. 스블론은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에 ‘거하신’ 장소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그 땅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블론 땅에서 자라셨으며, 스블론 땅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첫 기적의 장소, ‘가나’ 역시 스블론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스불론 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스블론 지역은 땅이 박한데다가 역사적인 여러 연유로 인해 멸시를 받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거하심”으로 인해 영광스럽게 바뀌어진 땅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는 스불론과 같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슬픔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순간, 우리의 땅은 빛과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임재’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슬픔과 좌절과 어둠이 아닌, 기쁨과 소망과 빛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레아는 그저 남편과 함께 거하기를 원해 지었던 이름 스블론, 그런데 막상 그 땅에 예수님이 거하셨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세월을 뚫는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주님의 임재가 있으면 우리는 인생의 역전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3. 스불론, 나가라

모세는 “스불론은 나감을 기뻐하고 잇사갈은 장막에 있음을 기뻐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속한 기름진 땅을 분배 받았던 잇사갈 지파는 땅이 기름지므로 한 장소에 웅 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반면, 박한 땅을 받았던 스블론은 해변가로 나아가 활발한 무역활동을 함으로써, 스불론에 대한 야곱과 모세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스블론은 거함의 장소임과 동시에 나감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거하셨던 곳이며,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선교 지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건너편이요, 다른 하나는 요단강 건너편이었습니다. 그 양쪽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스불론 지역이었습니다. 스블론은 복음이 시작된 곳이며, 열방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나간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가장 박한 땅을 분배 받았지만 선교 전략상 가장 중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해변은 헤엄치고 선텐하는 아름다운 해변가가 아니라 항상 출항을 준비하고 있는 복음의 교두보로서의 해변이었습니다. 복음을 들고 뱃고동을 울리며 열방을 향해 흩어져 나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세의 예언은 적중했다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라고 예언했습니다. 열국의 백성들을 불러 하나님의 산에 모이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일을 스블론이 감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한 ‘거하심(스블론)’이 있으면 우리는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임재는 반드시 흩어짐을 초래합니다. 그것이 스블론의 역설입니다. 거하지만 흩어지는 자, 그것이 스블론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스블론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임재 안에 거하지만,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닌 복음을 들고 흩어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거하고 나가야 하는 이유, 모래 속 진주를 찾아라

모세는 또한 스블론에 대하여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귀한 보화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비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저 모래입니다. 그러나 모래 속에 감추인 보배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러나 모래 속 감추인 보배는 감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맡기기만 하면 발견될 수밖에 없는 보배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보배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안에 더 깊이 거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보배는 알면 알수록 더 깊이 감추인 것들이 그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알고 또 알아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인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값진 보배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상인은 그 값진 보배를 발견했을 때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팝니다. 남의 땅을 갈던 소작농은 밭을 갈다가 보배를 발견하자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도 보배가 더 값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도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자는 반드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모래 속에 감추인 또 다른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는 바로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한 영혼입니다. 바다에 풍부하게 널부러져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하는 영혼들입니다. 스불론 지파는 문자 그대로 바다로 나아가 어업을 하여 바다의 풍성한 것을 취하였으며, 배를 타고 여러 지역에 나아가 장사를 하여 많은 보화들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로 넘어가면서 스불론 땅은 새로운 의미로 그 예언을 성취합니다. 스불론이 복음의 시발점이자 확장점이 된 것이었습니다. 즉 척박한 모래땅 스불론에 우리의 보배 예수님이 거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중심으로 영혼이라는 또 다른 보배를 캐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스블론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아가 바다의 풍부한 것, 즉 영혼들을 취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여러 지역에 나아가 모래 속에 감추인 보배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취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셨으며”, 지금도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 안에서 발견된 ‘모래 속에 감추인 보배’였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래 속에 감추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배’를 찾아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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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하나님의 찬송 (창 49:8-12)

  • 유다, 하나님의 찬송

  • 창세기 49:8-12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1. 유다를 향한 야곱의 축복

   1) 형제 가운데 찬송이 될지라(창 49:8)

유다의 이름은 ‘찬송’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의 뜻처럼 유다는 형제들에게 찬송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서 왕권을 가진 다윗이 나올 것이고, 또 영원한 왕권을 가진 메시야가 나올 것이므로 백성들은 영원히 유다지파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2)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유다는 대적을 잡아 굴복시키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 예언처럼 다윗은 주변의 대적들을 모두 섬멸했고, 솔로몬은 영토를 더욱 확장합니다.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원수 사단의 머리를 으깨게 하실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3:15). 메시야 예언인 셈이지요.

 

   3)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 또한 유다가 지도자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 5:2), 일차적으로는 유다 지파에서 왕권을 잇는 자손이 나온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할 것을 가리킨 예언입니다 (마 28:18, 빌 2:9-11).

 

   4)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그 앞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지요. 사자는 유다지파의 상징 동물이며, 그 깃발에는 사자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유다 지파가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가진 ‘왕의 지파’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유다의 사자 같은 성품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표상으로 사단과 끝까지 싸워 승리하는 정복자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5) 홀이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홀’은 왕이 들고 다니는 막대기입니다. 왕의 통치적 주권과 권위와 권능을 상징하는 막대기입니다. 이는 유다의 후손이 끊이지 않고 왕권을 계승할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윗 이후 남 유다의 왕들은 모두 유다 지파였으며,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도 족보상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하면서 왕권이 끝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유다지파이자 다윗의 후손인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이 예언은 성취가 됩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였던 요셉 역시 다윗의 혈통이었으므로, 예수님은 혈통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완벽히 다윗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데에는 단 한치의 오차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6)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다지파의 왕권을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 2000년 전에 이 모든 것이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7) 평화롭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

나귀와 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고,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빤다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고 (슥 9:9), 포도나무는 풍요의 상징 (시 4:7) 입니다. 유다 지파의 자손과 그 땅이 평안할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는 그 후손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또한 유다로부터 시작된 왕국은 메시아의 탄생에 이르러 그 축복의 정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요 10:10). 그 왕국에 머무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와 풍요가 보장된 것입니다.

 

2. 유다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명기 33장에 등장하는 모세의 축복 역시 유다지파의 왕권에 대해 예언합니다. 유다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야곱의 축복을 재확인 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을 분해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왕관을 쓰고 백성들 앞으로 인도되어 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2)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여기서 '자기'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킵니다. 왕에게 있어서 나라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유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대적들과 싸우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3)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원수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다윗왕은 주변의 대적들을 모두 싹쓸이 했으며, 예수님은 대적 마귀를 쳐서 물리쳤습니다.

 

3.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

야곱은 유다에게 유별나게 많은 축복을 합니다. 유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하게 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죽이려는 공모에 형제들과 함께 동참을 했었습니다 (창37).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역시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창38). 유다의 첫번째 아들 엘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는 형사취수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해 아들을 낳게 함으로써 형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해주는 전통이지요. 그래서 차남 오난을 다말에게 줍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의 후손을 남기지 않고 자기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질외사정을 합니다. 그것을 악하게 여기신 하나님은 오난마저 죽게 하십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마저 잃을까봐 약조를 깨고 다말에게 셀라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창녀로 위장을 하고 유다와 잠을 자 쌍둥이를 낳습니다. 비록 실수이긴 하지만 며느리와 동침을 했으니 제대로 빈파우더 집안을 만든 것이지요. 더구나 문제는 창녀와 잠을 자려 시도를 하다가 며느리랑 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창녀란 가나안의 이방신전에서 일하는 성창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이방신전의 창녀와 잠을 자려다가 실수로 며느리와 잠을 잤으니 이 얼마나 꼴사나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유다는 세상의 왕권을 가진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영원한 왕권을 가진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심지어 그 왕권은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가 공짜로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4.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던 유다

야곱은 레아를 제치고 라헬을 자신의 첫째 부인으로 여겼습니다. 레아가 첫번째 부인이긴 하였지만 속아서 아내로 맞이한데다가 그의 첫사랑도 그가 결혼하고자 했던 것도 라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곱은 레아의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의 첫째 아들인 요셉을 편애했고, 그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창37:3). 채색옷을 입혔다는 말은 그에게 장자권을 줬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물질적인 장자권을 받았다면, 유다는 영적인 장자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윗왕의 조상이기도 하면서, 메시야 예수의 뿌리가 된 사람입니다.

 

야곱은 유다에게만 유난히 장황한 축복을 합니다. 유다는 그 행위를 볼 때에 야곱이 예언했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격없는 유다에게 영원한 왕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요,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모두가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챈 르우벤도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은혜를 받지요.

그러나 유다는 유독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한가지로 이해합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가장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사람이 유다였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장자였던 르우벤은 아버지의 후처였던 빌하와 동침한 일로 장자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창 35:22). 아버지의 아내를 범한 것은 곧 아버지의 영광을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행한 것을 투영하여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보신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이 여동생을 범했다는 이유로 세겜성 사람들 전체를 잔인하게 학살한 일로 이미 축복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창 34:25-26). 이들은 세겜성을 학살할 때에 할례라고 하는 하나님 백성의 표징을 사용합니다. 사적인 감정을 푸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세겜성을 학살함으로 인해 아버지를 곤궁에 빠뜨렸습니다. 장자권은 다음 순서인 유다에게 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형제들을 설득해서 요셉을 죽음의 위협에서 건져 냈습니다 (창 37:26). 실수 가운데에서도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억한 것이지요. 이후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훗날, 형제들은 세상에 흉년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팔아먹은 동생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베냐민의 짐에 은잔을 넣어 베냐민을 도둑으로 몹니다. 그때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이 애굽의 종이 되기를 간청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요셉과 형제들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됩니다 (창 44:18-34, 45:1-15). 야곱은 그런 유다를 신뢰하고 의지했을 것입니다. 애굽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할 때, 유다를 요셉에게 먼저 보낸 것을 볼 때, 야곱은 유다를 가정 전체의 대표격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6:28).

 

유다는 비록 물질적 장자권을 받지는 못했지만, 영적 장자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축복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축복의 원인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탓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삶이 실수 투성이이고, 아무런 자격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실수를 딛고 일어설 뿐만 아니라,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유다지파의 대표적인 후손인 갈렙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대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고, 그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헤브론 땅을 취하여 헤브론의 영주가 됩니다.

 

유다의 또 다른 후손 다윗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골리앗 앞에서 의연히 맞서 승리를 거둡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수많은 대적들을 멸절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유다의 복을 받게 됩니다. 대적을 이기게 될 것이고, 평화와 풍요를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강성하게 할 것입니다. 유다의 축복이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의 삶에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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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 혈기로 인해 찢기다 (창 49:5-7)

  • 시므온, 혈기로 인해 찢기다

  • 창세기49:5-7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1. 혈기는 사람도 영광도 빼앗아 간다

야곱은 시므온과 래위를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가 모두 12명인데 굳이 두 사람만 형제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저질렀던 악행을 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밧단 아람으로부터 돌아온 야곱은 벧엘로 가서 하나님 안에 살아야 했지만, 세겜에 머무르며 세상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딸 디나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한 세겜 성주 하몰의 아들이 그녀를 억지로 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이 때 시므온은 레위와 함께 복수를 계획합니다. 디나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하몰의 아들과 세겜 성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 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세겜성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 모두 할례를 취한 직후,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을 급습하여 세겜 성의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자녀들에게 축복의 유언을 남길 때에 시므온을 저주합니다.

 

야곱은 시므온에게 예언할 때에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모인 곳에는 있고 싶지도 않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혈기를 자주 부리는 사람 옆에는 붙어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혈기부리는 사람은 갈라진 홍해바다와도 같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쫘악 갈라져 떠나게 됩니다. 혈기부리는 사람은 또한 갈라진 요단강과 같습니다. 그를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멈추고, 그에게 있던 사람들마저 하나 둘 떠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곧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혈기부리는 사람은 마치 정거장 같습니다. 옆에 사람이 있을지라도, 오래된 친구가 드뭅니다.

 

혈기를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람의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도 머물지를 않습니다. 혈기있는 자들의 집회에는 핏빛 행악과 그에 따른 불행과 저주만이 남을 뿐입니다.

 

2. 혈기는 불행을 초래한다

혈기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가인은 혈기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유리하는 자가 되었고, 모세는 혈기를 부린 사건이 계기가 되어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혈기는 혈기있는 자들이 모일 때 더 큰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야곱은 예언할 때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레아가 나은 형제는 레위 말고도 르우벤, 유다, 잇사갈, 스블론 등 네명이나 더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분을 품은 사람들끼리 분을 풀기 위해 연합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늘상 있다고 해서 그 일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혈기” 또는 “분냄”을 육신의 일로 간주하고 있으며,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여서 당을 짓는 것은 더욱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 지도자의 자질 중에 혈기 부리지 않는 자를 집어넣고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 안수 집사, 권사는 혈기를 부리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딛 1:7). 혈기를 부리는 순간 스스로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혈기는 결국 시므온 지파의 역사적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시므온의 땅은 유다 자손의 땅 중에서 취해졌습니다. 유다 지파는 열심을 내어 주어진 땅을 개척하였으므로 땅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일부를 다른 지파를 위해 내어 놓았고 시므온 지파가 그 땅을 제비 뽑았던 것입니다. 모두 자기 지파의 고유 영역을 가질 때 시므온 지파만이 유다 지파가 취하고 남은 찌끄러기 땅을 취한 채 다른 지파 가운데 섞여 살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므온 족속 중 일부는 새로운 영토를 찾아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대상 4:27, 39, 42).

 

고대 유대 학자들의 문서에 의하면, 시므온 족속은 그들의 땅에서 너무나 곤궁한 나머지, 그들 중 대다수가 다른 지파의 땅으로 흩어져 다른 지파 자녀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시므온 지파가 유다 땅의 일부를 차지한 것은 제비뽑기로 된 것이므로 불평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운명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그 운명은 500년전 그들의 조상 시므온이 부렸던 혈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므온이 제비뽑기에서 유다의 땅 중 남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은 야곱의 예언이 현실화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패역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질 때에 남유다에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았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 내부에 있었으므로 유다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은 유다 지경내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다른 지파들 틈에 섞여 살게 된 것이지요.

 

시므온은 결국 자신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중에 유업을 얻지 못하고 흩어져 살게 됩니다. 야곱의 저주는 야곱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은 혈기를 싫어하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분노의 감정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노를 죄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즉 분을 내는 것까지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존심이 상할 때, 불의를 볼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는 제때 적절하게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분노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속에 품은 채 하루를 넘기면 그 분노를 틈타고 마귀가 지배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안으로 쌓이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밖으로 터지면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3. 분노는 하나님 안에서 해결되어져야 한다

분노는 발산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노를 하나님 안에서 잘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을 밖으로 터쳐 내서는 안됩니다. 밖으로 터쳐진 분은 폭언과 폭행으로 이어지며, 이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에게도 불행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분을 밖으로 터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 터쳐지지 않으면 안으로 터지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터쳐진 분은 결국 자기를 삼켜버리고 맙니다.

 

시편 기자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릴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시 37:8, 9).

 

분노가 날 때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곳곳에서는 분노를 토설한 장면이 나옵니다. 분노를 발하되 하나님 앞에서 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노를 감당할 능력이 안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핸들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토설해야 합니다. 마음이 상한 대로, 화가 난 대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화가 난다고, 용서할 수 없다고,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토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핸들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사람에게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는 방법입니다. 분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분노와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자신의 땅을 떠나 유리해야 했습니다. 단 한번 혈기를 부린 탓에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시므온 역시 자신의 혈기 때문에 변변한 땅이 없이 흩어지는 결과를 맞아야 했습니다. 팔복에서도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라 나옵니다. 물론 여기에서 땅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지요. 분노와 혈기에 묶인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잃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 안에서 분노와 혈기를 다스리고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4. 반복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시므온과 레위는 모두 자신들의 혈기로 인해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져 살아야 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지파가 걸었던 길은 사뭇 다릅니다. 레위 지파는 나중에 자신의 혈기를 선한 일에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머물 때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사이 백성들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이에 분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돌판을 던져 쪼개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주동자들을 처단할 자들을 콜링한 것입니다. 이 때에 혈기 등등했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 칼을 들고 나와 주동자들을 처단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분노를 발했던 것이지요. 그 일로 인해 레위 지파는 땅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기업으로 얻게 됩니다. 그들은 야곱의 예언대로 흩어져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의 임무를 위해 흩어져 살게 되는 영광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컨 챈스를 잘 활용하여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아버지로부터 편애를 받는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를 할 때에 가장 앞장 섰던 장본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움이 살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를 주동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동한 자가 바로 시므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올 것을 요구하면서 인질로 잡아 두었던 것이 시므온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시므온의 악행은 출애굽 이후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떠돌 때에 모압왕 발락이 제사장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자 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우상숭배와 음행을 자행하게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진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염병이 돌게 합니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무려 24,000 명이나 됩니다. 이 때에 음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죽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시므온 지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건 이후 시행된 인구 조사에서 시므온 지파가 반토막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유다 땅의 한 켠을 차지해서 사는 운명이 된 것도 이 때에 세력이 약화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시므온 지파의 족장이었던 시므리는 미디안 귀족 여인이었던 고스비를 자기 장막으로 데려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족장이 이 모양이니 그 지파 전체가 음행에 적극 가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족장의 영성이 곧 지파 전체의 영성이 되곤 합니다. 시므리와 고스비는 결국 거룩한 분노를 품은 비느하스에 의해 죽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느하스는 아시는 바와 같이 레위지파입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시므온 지파, 혈기를 거룩한 분노로 승화한 레위 지파가 엇갈리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혈기와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승화하여 저주가 아닌 축복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생겨나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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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우벤,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창 49:1-4)

  • 르우벤,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 창세기 49:1-4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1. 어머니도 아들도 아팠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째 부인인 레아에게서 난 야곱의 맏아들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한 사람은 라헬이었지만, 삼촌 라반에게 속아 레아를 첫번째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비록 첫번째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동생 라헬만 사랑하는 남편 야곱의 편애로 인해 레아는 마음의 아픔이 컸습니다. 그런 레아에게 아들이 생겼습니다. 아들을 얻으면 남편의 사랑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던 레아는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었습니다. 르우벤은 “봐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레아의 아픔과 절망과 희망이 뒤범벅이 된 이름입니다.

 

르우벤은 그러한 어머니의 아픔을 가장 오랫동안 보며 자랐던 사람입니다. 장자로서의 책임감은 어머니의 아픔을 더욱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아내 중 한 명이자 자신의 서모인 빌하와 통간을 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의 타락에는 사실 야곱의 편애가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지나치게 편애했습니다. 라헬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레아가 부인이라면 부인으로서 받아야 할 사랑을 주는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만을 편애했습니다. 레아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거절감은 르우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 자체가 ‘봐라, 아들이다’ 인데다가, 자라는 내내 어머니가 사랑받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장을 했습니다. 십대에 불과했던 르우벤은 합환채를 구해다가 어머니 레아에게 줍니다. 강력한 최음제였던 합환채가 있으면 어머니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겠지요. 르우벤은 어머니의 아픔을 같이 안고 성장한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하게 된 동기에 대해 침묵합니다.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한 시점이 공교롭게도 라헬이 죽은 직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라헬이 죽은 직후 라헬을 향했던 야곱의 사랑이 빌하에게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르우벤이 계획적으로 빌하와 잤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실제로 구약 위경 중 하나인 “유빌레 33장” 에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빌하와 잠자리를 갖지 않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기가 르우벤의 단순한 욕정이었건, 어머니를 위한 계획이었건, 우리는 르우벤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가정에는 편애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받아야 할 존중과 사랑과 격려와 위로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서로 힘써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은 너무나도 자주 한 인생의 향방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곤 합니다.

 

 

2.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비록 어머니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못 받았다 할지라도 르우벤은 엄연한 장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장자권을 물려 받기 때문에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첫째로 태어난다는 자체가 복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르우벤은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아버지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의 몸종이자 야곱의 첩이기도 한 빌하와 통간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여자와 잠을 잔 것이지요. 성경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고전 11:7). 아버지의 아내는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르우벤이 빌하를 취한 사건은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챈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르우벤은 장자의 권한을 빼앗기고 맙니다. 역대상 5:1-2은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래서 요셉지파 대신, 요셉의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한 지파 씩을 이루게 됩니다. 장자는 두 몫을 받으니까 두 아들들이 지파를 이룬 것이지요.

 

그러나 르우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투영하곤 합니다.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첫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며, 약속이 있는 유일한 계명인 이유 역시 하나님과의 연결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소중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영광이 그러할진대,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영광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리에 서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내리쳤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영광에 취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고 자신은 소리처럼 사라지는 일에 너무나도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존경받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싶어하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받을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3. 상처가 죄가 되게 하지 말라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열 두 아들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그중에서 르우벤에게 한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르우벤은 태어나면서 부터 장자의 권한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르우벤은 태어날 때부터 능력이요, 야곱의 기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위풍과 권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조건들을 다 가지고 태어났으나, 자신의 상처와 욕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것이 죄로 확산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주어진 탁월함을 빼앗기고 맙니다. 마치 물이 끓는 것처럼, 열이 가해질 때는 바글 바글 끓다가 이내 식어 버린 인생이 되고 만 것이지요.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한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그 행위는 육에 속한 사람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르우벤이 죄를 범한 이유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욕정때문에 죄를 범하였다 해도 심각한 죄이지만, 어머니를 위해 계획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면 그 죄악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계획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레아도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자이지만, 빌하도 역시 같은 성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레아가 르우벤의 소중한 어머니이듯, 빌하 역시 동생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자기 입장이 소중하면, 타인의 입장도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욕정이 동기이건, 어머니를 위한 마음이 동기이건 죄악을 범하는 순간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이기에 달콤하고 짜릿하게 여겨집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삽니다. 육신이 만족되는 순간은 즐겁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죄악에는 반드시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 열매는 독을 품고 있어서 우리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맙니다.

 

 

4. 죄가 더 깊어지게 하지 말라

르우벤에 대한 좋지 않은 예언은 모세에 의해 더욱 더 심화됩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모세 역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이스라엘의 12지파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거의 저주 수준의 예언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한 것으로 보아 모세는 르우벤 지파가 멸절의 위기에 처하고, 그 수가 극도로 줄어드는 것을 계시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이러한 예언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르우벤 지파가 나중에 모세의 시대에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는 커녕 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적함으로써 범죄를 한 것이지요. 고라의 반역 때에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반역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로 인해 르우벤 지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고라 일당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예언처럼, 훗날 르우벤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먼저 패망해버린 지파가 되고 맙니다.

 

모세는 당시 르우벤 지파에게 품었던 개인적인 감정을 예언에 담았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도 모세도 자신의 개인 감정을 실은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 감정은 예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언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12 아들들과 12지파들의 행위를 모두 달아 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결국 보응을 하시고 계십니다.

 

르우벤 지파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좋지 않은 예언을 받았습니다. 좋지 않은 예언을 받은 것은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셋째 레위는 나중에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통해 오히려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좋지 않은 예언을 받은 르우벤 지파는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성결하게 돌아보는 태도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레위처럼 주어진 저주를 축복으로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는 조상 르우벤이 범했던 죄악을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던 르우벤처럼, 르우벤의 후손들은 모세에게 대항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위임 권위자인 모세에게 도전을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범한 죄악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지파가 패망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투영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아비도 하나님을 투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문제는 위임권위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요셉을 편애함으로써 다른 아내들과 아들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아버지의 영광은 범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불평과 원망 투성이인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죄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일은 하나님께서도 하지 못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에게 도전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영적 리더도 모두 하나님의 위임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도, 살아가는 이유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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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 (창 48:12-22)

  •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

  • 창세기 48:12-22

 

12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 기르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자신의 실질적 부인이라 할 수 있는 라헬이 일찍 죽음으로 인해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므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삼겠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습니다. 노환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고 그들을 축복합니다. 야곱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였기에 요셉은 야곱의 오른편에 장자 므낫세를, 왼편에 차자 에브라임을 앉게 해줍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 손을 엇갈려 안수하며 축복합니다. 손만 엇갈렸을 뿐 축복의 내용은 두 아이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집니다.

 

야곱이 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요셉을 위하여 축복합니다. 요셉을 위한 축복이 곧 두 아들을 위한 축복으로 동일시 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근원으로 우선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그가 복 자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지만 장자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일방적으로 택하셔서 그 복을 잇게 하셨습니다. 어떤 행위의 의로움을 보지 않으시고 그저 주권적으로 택하셔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은 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택하셨던하나님께서는 장자 에서를 제쳐 두고 문제 투성이였던 야곱을 택하셔서 그를 기르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지키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문 대대로 섬겨왔던 하나님, 선조들의 삶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여지없이 나타나 친히 기르고 보호해주셨던 하나님을 찾으며 부어주는 축복보다 더 위대한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길러주신 하나님이요, 환난 날에 건져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평생의 삶을 주님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물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늘 성장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르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라나가는 삶에는 환난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이 없는 삶을 약속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환난이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 건져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환난을 통해서만 체험되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17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2. 차자 선택의 원리, 택정과 부르심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엇갈려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늙으신 아버지라서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을 뿐 화가 난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억지로 아버지의 엇갈린 손을 다시 정정해주려 합니다. 눈이 안보이는 터라 일부러 자리 배치까지 해드렸는데 굳이 손을 엇갈려 축복을 바꿔서 하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수정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에브라임에 대한 장자권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야곱은 자기도 누가 누구인지 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므낫세는 한 족속을 이루는 반면, 에브라임은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이 더 풍요롭고 강대하게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족장 시대의 족장들의 축복은 인간의생각으로 하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성격을 갖습니다.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장자로 택한 것은 야곱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던 셈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택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차자선택의 원리라고 하는 테마로 풀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에만 이러한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등에서 이러한 선택이 반복됩니다. 르우벤이 아닌 요셉을 택한 것이나, 다윗의 일곱 형들을 제쳐두고 다윗을 택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적인 순서를 무시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혈육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명확히 해주기 위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탄생 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보내심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이는 첫째 사람 아담을 실패하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실 것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또한 처음 말씀을 맡은 유대인을 제쳐두고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 들이고 충만한 수가 찬 다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마지막으로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 있다라고 하는 일반적인 신앙의 원리까지도 차자선택의 원리를 통해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 부르심을 받은 복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할 자가 그 누구도 없기에 우리를 택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변궤될 수 없는 어마무시한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거리에 버려진 유기견과도 같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자녀 삼아주시고, 사랑한다 말해주시며, 죽을 때까지 길러 주시고, 환난 날에 보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1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3. 택정받은 자가 앙망해야 할 땅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택정을 받은 자가 앙망해야 할 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 천국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예언합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애굽에 들어와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머물러야 하는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 땅에 장사지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만 가나안에 묻히고자 하는 개인적인 열망이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이 결국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21절에서는 아예 요셉에게 명확하게 그 말을 해줍니다. 자신은 죽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사 이스라엘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9장에서는 아들들 모두가 조상들이 묻힌 가족묘에 묻힐 것을 당부합니다.

 

특별히 요셉에게는 세겜 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서 가나안 전체가 약속의 땅임을 표현하고자 했듯, 야곱은 세겜을 사서 가나안 전체가 약속의 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야곱이 세겜을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난해한 부분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장차 이스라엘이 빼앗을 것을 기대하며 한 말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제 견해로는 이러한 해석은 문맥 상 맞지를 않습니다. 이는 세겜 성주가 디나를 욕보였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을 학살하고 빼앗은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야곱이 충분한 힘이 되지 않아 세겜을 떠나야 했지만, 나중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까지 가축들을 몰고 가 목축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야곱이 강성해지면서 세겜 전체를 자신의 땅으로 삼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훗날 출애굽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뼈를 들고 가나안에 들어가 세겜에 안치를 시킵니다. 세겜은 야곱이 돈을 주고 샀고, 또 빼앗은 땅이므로 장자권을 받은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막벨라굴이 아닌 세겜에 묻힌 것입니다. 그리고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땅이므로 요셉의 장자권자인 에브라임이 그 땅을 이어 받은 것이지요. 여호수아서에 보면 세겜을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진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세겜이 원래 야곱의 소유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택정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앙망해야 하는 땅은 세상이 아닙니다. 부르신 이가 계신 곳, 바로 하늘을 앙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앙망하며 부르심 받은 자로 합당한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다 친밀하게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평생동안 기르시며, 또한 환난가운데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하나님께 철저히 붙들리어 그의 나라를 사모하며 앙망하는 삶을 살아 냄으로써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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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라 (창 48:1-11)

  • 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라

  • 창세기 48:1-11

 

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1. 숨질 때에 회상할 만한 체험이 있는가?

야곱이 147세의 나그네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임박했습니다. 야곱이 노환이 들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을 찾아갑니다. 야곱은 요셉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을 회상합니다.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하는 길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돌베게를 베고 노숙을 하던 중 자신을 찾아와주신 하나님을 회상한 것이지요.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그 이름을 벧엘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 장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친히 찾아와 만나 주시고, 복을 주신 땅이기도 합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장소를 마지막 숨쉬는 순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 앞에서 회상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숙명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본질은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 한 순간 살다가 덧없이 가는 것이지요. 이 땅을 떠나고 나면 가야할 땅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본향인 천국입니다. 본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간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자녀들 앞에서 회상하면서 들려줄 믿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2. 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을 찾아와 주신 복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 약속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4절에 소개된 복은 분명 35:11,12에서 말씀하신 복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복과, ‘많은 백성’이 나게 하신 복은 28:3의 이삭에게 주신 복을 반향하고 있고, ‘영원한 소유’라고 하는 복은 17:8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고, 이삭에게 약속된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머문 이삭에 의해 이어지며, 이삭의 복은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의 20년 세월을 청산하고 가나안으로 들어옴으로 인해 이어집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이제 야곱의 후손들은 언젠가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야곱은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요셉에게 맹세하게 했던 것입니다.

 

애굽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소유일 뿐입니다. 그들은 결국 영원한 소유인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들에게도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소유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가 돌아가 영원히 살아야 할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을 얼마나 명확히 바라보는가가 신앙의 질을 결정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성별된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 시험을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이 명확한 사람은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땅의 썩어질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3. 영원한 소유를 바로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행복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들로 입양합니다. 요셉에게 장자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요셉에게 두 몫을 주는데, 그 두 몫은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각각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요셉을 두 아들을 입양하는 이유로 라헬의 이른 죽음을 들어 설명합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에 이어 두 번째로 결혼하기는 했지만, 사실 야곱이 사랑했고 야곱이 결혼하고자 했던 여인은 라헬이었기에 야곱에게 있어서 법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첫째 아내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만 가나안 땅 에브라다로 향하는 길에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야곱은 만약 라헬이 죽지 않았다면 베냐민 말고 또 다른 아들을 낳았을 것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레아에게 6명의 아들이 있고, 실바와 빌하에게도 각각 두 명씩의 아들이 있는데, 야곱이 생각에 라헬이 두 명만 아이를 갖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두 아들을 취해 라헬의 아들을 셋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훗날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루는데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12지파 안에 들어가지 않게 되는데 요셉 지파가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뉘어짐으로 인해 결국 온전한 12지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야곱이 만약 요셉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베냐민을 위로 삼아 요셉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요셉을 산 채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낳은 손자까지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물론 모든 인생이 그렇게 엔딩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는 자가 누릴 영원한 행복에 대한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영원한 것들을 위해 일시적인 것을 버리며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숨질 때에 회상할 만한 주님과의 만남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소유를 위해 일시적인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앞에는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행복과 승리가 영광스럽게 펼쳐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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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는 자 (창 47:1-12)

  • 축복하는 자

  • 창세기 47:1-12

 

1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3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5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1. 나그네 된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거주하게 하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보냈습니다. 요셉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의 70인 가족들은 애굽으로의 이주를 완료하였습니다. 이제 문제는 애굽 땅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땅 중에서도 고센을 선택하였습니다. 고센은 애굽 땅이지만, 당장이라도 출발하면 가나안에 3일이면 도착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바로가 그들이 원하는대로 고센 땅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에 들어와서 현재 고센 땅에 머물고 있음을보고했습니다. 이러한 보고 속에는 앞으로도 고센 땅에 머물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 족속이 애굽에 어떠한 사심도 없음을 나타하기 위해 그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다 가지고 왔음을 강조했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로서 그저 좋은 목초지가 필요할 뿐 정치에도 관심없으며, 경제적으로도 피해를 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이러한 내용은 형제들에게도 미리 알려준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 중 다섯 명만 대표로 데리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예측대로 그들의 생업을 물었고, 그들은 요셉이 일러준 바와 같이 조상 대대로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라 답변하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알려준 내용보다 더 장황하게 자신들을 소개를 하는데 이는 그들이 바로 앞에서 은혜를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가나안에 기근이 심하여 양떼를 칠 곳이 없으므로 애굽에 거류하고자 왔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지요.

 

여기에서 거류하기 위해 왔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창 15:13-14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살다가 4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예언해 주십니다. 그 말씀대로 야곱의 식구들은 애굽에 거류하는 나그네로 들어와 있습니다. 훗날 출애굽한 백성들은 율법을 받게 되는데, 율법은 나그네들을 선대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 스스로 나그네가 되었던 적이 있으므로 나그네된 자의 사정을 알고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지요.

 

성도가 나그네의 삶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나그네 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파본 경험이 없는 자는 아픈 자를 이해할 수 없고, 빈곤에 처해본 적이 없는 자는 빈곤한 자의 처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아무런 풍랑없이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2. 은혜입은 자

고센 땅에 목축을 하며 살기를 구하는 요셉의 형제들의 청을 바로는 수락을 합니다. 고센 땅은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한 땅으로 매우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가장 기름지면서도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살도록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족속이 그 어떠한 사심도 없음을 밝혔지만, 요셉을 극도로 총애했던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관직을 허락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로의 짐승들을 맡아서 관리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목축을 가증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목축 산업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기를 먹어야 하고, 젖을 먹어야 하며, 옷감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람세스에서만 가축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3000명 이상이나 존재했다는 기록이 존재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상 대대로 목축업을 해와서 목축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애굽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는 그들을 축산 관리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한계 이상의 것들이 부어집니다. 우리는 은혜입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의 머리 위에 머물기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3. 축복하는 자

요셉은 형들에 이어 아버지 야곱을 바로 앞에 소개합니다. 그런데 형들이 바로를 대하는 태도와 야곱이 바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들은 바로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로 서있지만,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하는 자로 서있습니다. 야곱은 바로를 만나자 마자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도 축복을 한 후 자리를 떠납니다. 은혜를 입기 위해 애굽에 들어왔지만, 사실은 바로를 축복하는 자로 서있는 것이지요.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야곱은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 답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은 험악한 세월이었음을 밝힙니다. 야곱은 그야말로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깨어지지 않은 자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인생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본향이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삶 역시 나그네 인생이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즉 모든 인생길을 다 나그네 길이라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인류가 걷는 나그네 인생 길에서 어떤 사람은 본향을 찾아가고 어떤 사람은 돌아갈 본향이 없이 나그네 길을 배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본향으로 가는 티켓을 받은 자들입니다. 본향을 찾는 자는 그저 은혜 입은 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자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는 약속을 주신 바 있습니다. 이는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러한 약속은 그들이 온전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바로는 야곱을 통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바로는 요셉을 만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요셉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그저 7년 흉년동안에 핍절하여 죽는 백성들 중 하나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만남으로 그는 이전에 누릴 수 없었던 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축복을 받은 이후 바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납니다. 기근은 해를 더할 수록 심해만 가고 곡식을 얻기 위해 바로를 찾아온 사람들은 금은보화를 다 내놓다가 급기야는 땅을 내놓게 되고, 결국 바로의 종이 될 것을 맹세하게 됩니다.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던 애굽 전체가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바로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일들이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후에 이루어진 일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성도는 세상을 축복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때로는 성도가 세상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회사에 취직하며 회사가 성도를 먹여 살리는 것 같고, 성도가 돈이 없고 힘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할 때에 불신자가 도움을 주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기 위해 애굽에게 풍년과 흉년을 주셨듯,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얼마든지 불신자에게 돈과 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불신자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또한 잠재적 성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기에서 머무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주변에 대한 축복권을 갖습니다. 성도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성도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고, 성도가 속한 집단이 성도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가 성도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때문에 회사가 잘 되어야 합니다. 성도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도로 인해 기쁘고, 성도로 인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치 유충을 탈피한 나비와도 같아야 합니다. 황량한 세상을 아름다운 꽃으로 채워내며, 맛을 잃은 세상을 달콤한 꿀로 채워낼 뿐 아니라, 결핍된 세상을 풍요로운 열매로 채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삶 속에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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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창 46:7-34)

  •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 창세기 46:7-34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1. 70명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을 400년 동안 애굽에 두시려는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가운데 야곱은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에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가족 수는 총 70명이었습니다. 야곱의 며느리들을 제외한 자들이 66명이었고, 애굽에 이미 살고 있던 요셉과 그의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까지 포함하면 69명에, 야곱 자신을 합하면 도합 70명이 됩니다. 이들은 애굽에서의 400년 동안 장정만 60만명 총 인원 200~300만명이라는 민족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민족의 위용을 갖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애굽을 인큐베이터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70명이라 기록된 야곱 가족의 수가 사도행전에서는 75명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할 때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행7:14) 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요?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당시 애굽에 들어간 사람의 수는 70명이 안되었습니다. 베냐민의 아들들로 표기된 사람들의 이름들 중에는 베냐민의 손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성경의 족보들을 살펴보면, 나아만이나 아릇 등은 베냐민의 손자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아들이나 손자나 쓰는 단어가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손자를 구별없이 아들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베냐민은 당시 나이가 20대의 청년이었습니다. 요셉이 17세에 애굽에 팔렸고, 30세에 총리가 되었으며, 7년 풍년 후 흉년 2년째였으므로 요셉의 당시 나이는 39세입니다. 베냐민은 요셉이 15-17세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당시 베냐민의 나이는 22-24세 가량이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20대의 청년이 아들을 몇명이나 낳고 손자까지 낳는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명으로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이 창세기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의도적으로 베냐민의 손자들을 숫자에 넣어 70명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지요. 이것은 히브리 문화 상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7:9-10을 보면,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의 허리에 이미 들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할 때에 레위도 십일조를 했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사고였기에, 베냐민의 손자들을 애굽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나 히브리인들에게는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왜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식구가 75명이라 했을까요? 이는 스데반이 읽었던 성경이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70인역 성경이라는 헬라어 번역본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70인역으로 번역한 사람들은 베냐민의 손자들까지 야곱의 식구들로 기록을 해야 한다면 요셉의 손자들 역시 기록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손자들 5명이 포함된 75명으로 번역을 해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베냐민의 손자들을 숫자에 넣어 70이라고 하는 수를 맞추어야 했을까요? 모세는 산술적인 숫자가 아닌 신학적인 숫자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애굽으로 들어가는 식솔들의 실질적인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애굽으로 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영적인 의미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7은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10도 완전수이므로 70은 완전하고도 또 완전한 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70이라고 하는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12 오아시스 주변에 있었던 70 그루의 종려나무나, 예수님의 70 제자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70이라고 하는 숫자를 통해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섭리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살아가고 만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하는 의미들을 담으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일들도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을 만나건 우리는 그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일들마다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연관성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2. 아름다운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회복의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가 없었던 한 아들과,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한을 간직한 채 살았던 한 아버지가 감격적인 재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요셉의 나이는 39세였고,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습니다. 무려 91세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을죽었다고 생각한 채22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살아있는 아들을 만나는 아버지의 감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유일한 자기 편이었던 노부의 품을 떠났다가 다시 그 품에 안기는 아들의 감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은 이제 22년의 아픔을 감격의 눈물로 흘려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말년에 야곱에게 가장 아름다운 회복을 주셨습니다. 베냐민까지 잃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백발이 되어 스올로 내려가는 것을 슬퍼할 것이라 말하는 야곱의 입에서는 이제 지금 이대로 죽어도 족하다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감격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회복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아픔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아름다운 회복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감격스러운 회복을 우리 가슴에 안겨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우리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요셉은 바로에게 식구들이 왔음을 보고하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보고할 내용과 바로 앞에 섰을 때에 식구들이 대답할 말들을 알려 줍니다. 요셉은 우선 자신의 가문이 애굽에 정치권력에 어떠한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합니다. 요셉은 바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당시 바로는 힉소스 왕조의 왕이라 믿어지고 있습니다. 힉소스 왕조는 애굽 토박이가 아니고 애굽을 침략하여 정복한 셈족입니다. 요셉도 셈족 출신이니 힉소스와는 종족이 같습니다. 반면 애굽은 함족이었으므로, 함족들 틈에 섞여 사는 셈족이라는 공통분모가 유대감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힉소스 왕조는 요셉이 태어나기 30년 전쯤에 시작한 왕조입니다. 아직 100년도 안된 왕조였던지라 바로가 토착민들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호족 세력들이 기세가 등등한 지방분권 정치였지요. 그런데 요셉이 7년 풍년동안 곡식을 쌓아 뒀다가 흉년이 든 2년 동안 식량을 무기화하여 호족세력의 땅을 획득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동안 그러한 일은 반복이 될 것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요셉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안주머니에 담고 다니면 시간이 날때마다 꺼내보고 싶을 정도로 예뻐 죽습니다. 그래서 총리 자리를 주었고, 실질적인 왕권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반면, 애굽 토박이 정치인들에게는 요셉이 눈엣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히브리인 한 명이 와서 이방 족속이 침략하여 세운 힉소스 왕조를 돕고 있으니 증오심이 올라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이 때거리로 몰려 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요직에 등용을 하기 시작한다면, 궁정은 이제 이방인의 판이 될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요셉은 자신의 가문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저 애굽 땅 언저리에서 목축이나 하면서 지낼 것임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애굽인들은 목축업을 가증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요셉이 지정한 땅은 고센 땅이었습니다. 고센은 애굽의 중심부가 아닌 동편 끝에 있습니다. 나일강 유역이므로 비옥하여 목초지로서는 그만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중심 권력을 이룰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애굽인들에게는 이를 통해 요셉의 가문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자신의 가문이 애굽의 경제에도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합니다. 요셉은 특별히 야곱의 식구들이 자신들의 양과 소와 염소 떼를 모두 가지고 왔음을 강조합니다. 먹을 양식이 없을 뿐이지 경제적으로 풍족한 거부이며 애굽에 빌붙어서 살 사람들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이지요. 애굽은 이러한 야곱 가문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애굽인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업은 힉소스 왕조를 일으킨 셈족의 원래 직업이었을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와 요셉 가문 사이에 또 하나의 공통 분모가 생겨나는 셈이지요.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명철로 치밀한 계획을 짜서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고 요셉의 계획대로 야곱 가문은 고센 땅에서 살 것을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그토록 고센 땅을 원했던 것일까요? 애굽의 중심부로 들어가 애굽의 풍요를 집어 삼키려는 야망을 품으면 안되었던 것일까요? 요셉은 애굽의 풍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풍요의 땅 애굽에 발을 딛고 살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시선을 두고 사는 것이지요. 고센에서 가나안까지는 고작 삼일길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의 go 싸인이 떨어지면 가나안으로 가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유업을 누리는 땅입니다. 애굽이 거쳐가야 하는 땅일 뿐이었던 것처럼, 이 세상은 그저 우리가 거쳐 가야 할 땅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은 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않습니다. 현재 주어진 땅은 고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고센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의 장차 가야 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가나안을 바라보고 살아야 고센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야 이 세상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명확한 소망을 안고 살아야 이 땅에 대한 정욕이 사라지고, 이 땅에 대한 정욕이 사라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딛고 살되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되 천국을 열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열망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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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창 46:1-6)

  •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 창세기 46:1-6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1. 야곱 안에 있는 거룩한 두려움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기록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야곱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펼쳐지는 역사적인 순간이기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 민족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대한 계획을 알 턱이 없는 야곱은 애굽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거룩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할 개인적인 이유는 사실 없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지경인 가나안을 떠나 먹을 것이 풍부한 애굽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바로 왕과 다를 바 없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야곱의 두려움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밧단 아람에서20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언약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쉽지 않은 험한 인생을 사는 동안 야곱은 그가 머물러야 하는 땅은 그 어느 곳도 아닌 가나안 땅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하고 있으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개인적인 기쁨과 약속을 땅을 떠난다라고 하는 신학적인 부담감이 서로 충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어떡하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까 등의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거룩한 곳

야곱은 자신의 두려움을 브엘세바라고 하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이삭의 거주지입니다. 브엘세바의 뜻은 언약의 샘이란 뜻입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받았으며,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대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행했던 하나님이 자신과도 함께 해주시기를 위해 간구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드린 제사는 희생제사였습니다. 희생제사로 번역된 단어 제바흐는 화목제를 뜻하는 용어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거나, 감사를 드릴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이웃들과 화목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과의 온전한 친교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제사를 드린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 야곱에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중요한 역사적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보여져 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할 때,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등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 중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애굽으로 가는 것이 야곱 개인의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애굽을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성장시킬 인큐베이터로 쓰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무는 시간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하늘에 미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시간이고, 심판받을 자들과 심판의 도구가 될 자들이 구별되는 시간이며, 나라의 위용을 이룰 때까지 이스라엘을 성장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만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이라 여기며 그곳을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거룩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땅이 거룩한 땅임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가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땅은 그 어느 곳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지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바로 성지가 되는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땅과 성전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거룩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성전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그저 의미없는 공간일 뿐입니다. 시내산은 이스라엘 밖에 있지만,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하신 바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밖에 있는 땅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에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애굽은 이방신을 섬기는 곳이었지만, 요셉에게는 거룩한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기를 신학적 이유로 두려워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거룩한 땅이 될 것임을 야곱에게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반드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의미는 야곱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리브가와 같은 땅에 묻히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을 반드시 출애굽시켜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야곱 안에 있는 또 다른 개인적인 두려움은 그가 애굽 땅에 묻힐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혹시라도 가나안에 조상들과 함께 묻히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개인적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약속의 땅에 묻히고자 하는 거룩한 두려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눈을 감고자 하는 것은 숨을 멎는 순간까지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라는 그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셉에게 약속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요셉의 손으로 그의 눈을 감기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요셉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17년동안 요셉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회상하는 것조차도 괴로움이 되었을 20년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만나는 각별한 아들의 손에 그 눈을 감기우게 될 것입니다. 야곱에게 이렇게 행복한 죽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야곱은 그저 가나안을 떠나기 전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을 뿐입니다.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아뢴 적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뿐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눈을 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이요 거룩한 염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마음을 모두 들여다 보시고, 그의 소망마저도 다 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심중 깊은 곳에 있는 희미한 소망마저도 모두 현실이 되게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두려움이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두려움이면 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미쳐 고하지 못한 심중 깊은 곳의 소망마저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의 파도를 신실하게 해쳐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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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화해의 길, 통회 (창 42:26-38)

  • 진정한 화해의 길, 통회

  • 창세기 42:26-38

 

26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1. 하나님의 선물, 가책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향했던 요셉의 형들은 총리가 된 요셉의 엄한 태도로 인해 엄청난 위협을 느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정탐꾼으로 몰린 채 사흘씩이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시므온을 인질로 베냐민을 데려와야 정탐꾼의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처지가 되어 귀향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아 위기에 몰린 형들은20년 전 자신들이 요셉을 팔아먹은 죄과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는 것이라 여기며 자신들의 죄를 자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 한 켠에 남겨두었던 양심의 가책이 건드려 진 것이지요.

 

양심의 가책은 요셉이 베푼 선의에 의해서도 발동을 합니다. 요셉은 사람들을 시켜 형들의 양식 자루에 양식 값으로 가져온 돈뭉치를 다시 집어 넣어 줬습니다.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이지만, 형들에게 돈을 받고 양식을  팔 수 없었던, 그리고 최대한 잘 대해 주고 싶었던 요셉의 선의의 표현이었지요.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먹이려고 자루를 열었던 한 사람이 돈뭉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았는데, 이제는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며 서로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으로 여깁니다. 이 일 역시 20년 전 자신들이 지었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가책이 한번 터치되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책의 목적입니다. 가책은 인간이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과 화해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의 선물입니다.

 

물론 가책은 양방성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책을 통해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가책을 받을 때에 죄책감에 묶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 아니라, 목숨까지 끊기도 합니다. 악한 마귀가 인간의 가책마저 악용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책이 들 때에 올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죄악을 자백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한 가슴 아픈 묵상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으로 인해 흐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29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2. 악한 상황을 벗어 나려는 인간의 발버둥

시므온이 눈 앞에서 결박되는 모습을 본 형제들은 시므온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일념에 불탑니다. 요셉을 팔아먹었던 죄에 대한 가책이 시므온은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죽어있던 인간성이 가책으로 인해 살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총애하던 요셉이 사라진 이후 베냐민을 특별히 편애하였스니다. 사실 베냐민은 늙은 야곱의 사는 낙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형제들은 야곱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화법으로 애굽에서의 일을 보고합니다.

 

애굽에서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다시 반복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겠지만, 사실 유심히 살펴 보면 야곱을 설득시키기 위한 형제들의 화법이 녹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우선 자신들이 정탐꾼으로 몰렸었다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다음과 같은 화법이 들어갑니다.

 

     1)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이야기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요셉에게 얘기할 때는 베냐민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을 한 다음 요셉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야곱에게 얘기할 때는 요셉이 없다는 얘기를 먼저하고 베냐민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를 가장 뒤로 미루는 화법이지요.

     2) 요셉이 시므온을 결박했다는 말은 생략을 하고, 대신 너희 중 하나를 두고 가라고 했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말을 합니다. 총리 곁에 있으니 귀빈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도록 말을 하는 것이지요. 사실을 말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상상을 할 여지를 열어주는 화법입니다.

     3) 사흘 옥에 갇혀 있었던 내용은 생략을 합니다. 열명이 모두 갇혔다는 말도, 원래는 아홉은 두고 한명만 가서 베냐민을 데려와야 한다는 말도 생략을 합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처형하겠다는 말 역시 생략을 합니다. 오는 길에 돈뭉치를 발견했다는 말도 생략을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불리할 만한 말은 쏙 빼놓고 설명을 하는 화법입니다.

     4) 마지막에는 급기야 요셉이 하지 않은 말을 꾸며서 삽입을 합니다. 베냐민만 데려오면 시므온을 다시 돌려줄 뿐 아니라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든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가 시므온을 구해 오겠다는 형제들의 몸부림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적인 노력은 그들의 자루에서 돈뭉치가 나옴으로 인해 산산조각 부셔지고 맙니다. 요셉이 베풀었던 선의가 그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의와 선의를 모두 동원하여 그 백성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순적함을 주시지 않고 인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시는 것일까요?

 

36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3. 화해를 위한 길, 통회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그 노력은 야곱을 납득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돈뭉치가 발견됨으로 인해 이제는 돌아가면 정탐꾼이라는 오해에 덧붙여 도적으로 몰리게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형제들이 보였던 모습은 야곱에게 도무지 신뢰를 줄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아내 중 한 명과 통간을 하여 야곱의 영광을 짓밟았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 주민들을 학살하여 야곱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유다는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손자를 낳았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사랑하는 요셉을 지키지 못했고 짐승에게 찢겨진 듯 보이는 옷만 들고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근사한 화법으로 얘기를 해도 신뢰를 한 번 상실하면 말에 힘이 실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야곱은 20년 전 요셉을 잃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시므온을 잃었습니다. 시므온을 요셉만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게다가 시므온을 잃은 상황이 요셉을 잃었던 악몽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현재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베냐민을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을 보냈다가 베냐민까지 잃느니 시므온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결정을 합니다. 야곱은 그만큼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내 아들’이라 말한 부분과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다’고 말하는 (38) 장면은 야곱의 편애가 얼마나 극심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아들들 앞에서 베냐민에 대해서만 ‘내 아들이’라 부릅니다. 다른 아들들은 아들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또한 요셉이 죽고 베냐민만 남았다고 말을 합니다. 다른 10명의 아들은 아들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야곱은 혹시라도 베냐민을 보냈다가 재난을 맞아 베냐민이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백발이 되도록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스올이란 저 세상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낙원이나 음부의 구별없이 죽고 나서 이르게 될 사후 세계를 스올이라 부르지요. 결론은 죽어도 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형들은 미사여구로 아버지를 설득하려 들지만, 야곱의 눈에는 요셉없이 돌아왔던 20년 전처럼, 어찌됐건 시므온 없이 돌아온 결론만이 보일 뿐입니다.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베냐민의 생명을 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야곱은 아들들이 가져온 양식을 다 먹을 때쯤이면 흉년이 끝날 것이라 예측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흉년의 기간을 7년으로 잡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야곱의 식솔들이 애굽으로 가는 것도, 그를 위해 요셉과 형들이 화해를 해야 하는 것도 정해진 일입니다.

 

그러나 화해의 시간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화해할 것이라면 한 순간에 재회를 시키면 될텐데 순적하게 일이 되지 않고 난항을 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죄를 범한 자의 통회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질로 잡혀있는 시므온을 빨리 데려와야 하는데 아버지가 허락을 하지 않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 형들의 마음은 바짝 바짝 탈 것입니다. 시간이 길어지면 시므온이 처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을 걸고서라도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르우벤의 마음에 변화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요셉을 죽이고 싶지 않으나 보호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과오를 이번에는 아들들의 생명을 걸고서라도 만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분명 르우벤은 한 단계 성장한 듯 보입니다. 다른 형제들 역시 시간이 갈수록 조바심이 났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잘못된다면, 20년전 죄악을 범했던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볼모로 잡혀있는 시므온은 말할 나위 없이 가장 괴롭고 초조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데려와야 할 형제들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는 더욱 더 악화되어지고 있씁니다. 요셉을 파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자신의 과오를 시므온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 속에서 통회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요셉과의 온전한 화해를 위해 통회하는 시간을 형들에게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더라도 상대가 통회하지 않으면 온전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하더라도 마음의 아픔은 그대로 남겨져 있기에 관계는 서먹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잘못을 저지를 상대가 통회를 하면, 그 통회의 눈물은 고통받은 자의 아픔을 녹이는 용매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팔복을 강해하실 때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해야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죄를 괴로워하며 울어야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화해를 이루는 길은 죄에 대한 온전한 통회입니다. 사소한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온전히 통회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 사람과 막힌 담을 허무는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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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첫걸음, 죄의 자백 (창 42:18-25)

  • 화해의 첫걸음, 죄의 자백

  • 창세기 42:18-25

 

18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1.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의 태도

요셉은 기근을 당해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사흘 동안 옥에 가두어 둡니다. 동생 베냐민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었던 형들의 모습과 형들을 옥에 가둔 요셉의 모습이 절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또 하나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형들은 매정하게 요셉을 팔아먹었던 반면, 요셉은 삼일 만에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열명 중 아홉은 옥에 있고 한 사람이 가서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에서,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 아홉은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지요.

 

요셉은 삼일 만에 태도를 바꾼 이유를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라 밝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긍휼을 베풀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아홉을 가둘 것을 하나만 가두고, 굶주리는 자들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이 애굽인이라고 알고 있는 형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총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진짜배기라고 하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태도는 20년 전 자신들의 죄악을 회고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절규할 때에 요셉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자신들의 시기심때문에 동생을 죽이려 시도하고, 노에로 팔아먹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문이라는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도라는 타이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 괴로워 하는 사람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것, 굶주리는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 등의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한다 고백해도 그것은 그저 거짓부렁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화해의 첫걸음, 죄의 자백

형들은 기근으로 인해 곡식 좀 얻으러 왔다가 삼일이나 옥에 갇히고, 베냐민을 데려올 때까지 한 사람을 옥에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20년 전 자신들이 한 행위를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자신들이 범죄하였노라 자백을 합니다. 동생 요셉에게 악한 짓을 했을 뿐 아니라, 요셉이 절규를 할 때에 그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자신들의 죄악이 현재의 괴로움을 불렀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한 상태였음이 분명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것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있었던 아픔을 잊게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순간, 그 모든 악한 일의 이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용서를 했다고 해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여전히 형들을 보는 것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용서해도 마음의 아픔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요셉은 통역을 두고 소통을 했기 때문에 요셉이 히브리 말을 이해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로 대화하는 내용이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의 입으로 말하는 죄의 자백으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이 죄를 자백하는 순간 요셉의 마음에 격정이 몰려 옵니다. 요셉의 마음을 터쳐 버린 것은 맏형 르우벤의 고백이었습니다.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 구덩이에 던져 넣으라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입으로는 구덩이에 넣어 스스로 죽게 하자는 것이었지만, 속마음은 나중에 자신이 꺼내주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속마음을 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20년 후에야 적어도 한 명쯤은 자신을 살려주고 싶어하는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습니다. 요셉은 그곳에서 실컫 울며 눈물과 함께 20년의 아픔을 흘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양방성을 갖습니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 용서하는 것이지만, 그 용서를 통해 이루어질 화해는 용서를 받는 쪽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직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그 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화해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각 개인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를 하셨지만, 그 용서가 적용이 되려면 자신이 용서받을 자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직 죄를 자백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끝내고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행한 사람을 고통당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했다고 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이 스스로 용서받아야 하는 자임을 인정하고 죄를 자백해야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범죄하여 관계가 무너졌다면 찾아가 죄를 자백함으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미안해, 잘못했어. 나 때문에 많이 아팠지?”라고 고백하는 죄의 고백이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도 녹이는 것입니다.

 

3. 왜 시므온인가?

요셉은 아홉 명의 형들을 돌려 보내고 한 사람만 가두어 놓습니다. 요셉이 택한사람은 시므온이었습니다. 왜 하필 시므온이었을까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장남인 르우벤을 택해야 했으나, 르우벤이 살려 주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건너 띈 것일 수도 있습니다.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데려오는 것이라, 레아의 둘째 아들인 시므온을 가둬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는 추측은 요셉을 죽이고자 할 때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시므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온은 성경 속에서 자주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세겜 성주가 동생 디나를 욕보였을 때에 레위와 함께 잔해하는 칼이 되어 세겜 성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학살극을 벌인 장본입니다. 요셉을 팔 것을 주도한 사람이 시므온이라고 하는 추측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사건때문입니다. 시므온은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 때도 미디안 여성들에게 미혹되어 음행을 저지르는 일을 주동했던 지파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시므온은 모든 지파들 가운데로 흩어져 그 흔적이 모호한 지파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므온은 아홉 형제들이 풀려날 때에 홀로 결박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십니다. 각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시고, 그 경중에 따라 보응을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씨앗이 결국 우리가 딸 열매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서 살아간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4. 요셉의 속마음

겉으로는 형들에게 모질게 대했지만, 유심히 본문을 읽어 보면 형들을 생각하는 요셉의 속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워주고, 곡식을 사기 위해 가져온 돈을 모두 자루 속에 넣어줍니다. 또한 가나안까지 가는 동안 먹을 양식까지 챙겨서 가나안으로 돌려 보냅니다. 바로 그것이 요셉의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또한 감정에도 묶이지 않습니다. 모든 감정을 하나님 안에서 해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하여 자신을 해친 형들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일을 이루셨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형제 자매들을 긍휼의 눈으로 보는 자입니까? 형제 자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 하는 영성을 가진 자입니까? 자신의 죄를 기꺼이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자입니까? 자신이 해를 입힌 자에게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입니까? 오늘 하루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묵상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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