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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 (행 2:1-8)

* 오순절 성령강림

* 사도행전 2:1-8

 

1. 성령강림절이 된 오순절

성령님은 오순절 날에 오셨습니다. “오순”은 “50”이라는 뜻입니다. 유월절로부터 50일이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어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첫열매를 드리는 초실절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가 있다는 말은 그 뒤를 이어 맺히게 되는 수많은 후속 열매들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구약 절기상 초실절 이후에 그 열매들을 수확하는 시기가 바로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오순절은 7x7은 49의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칠칠절이라 불리웠고, 추수를 하는 날이라 맥추절이라 불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그로부터 10일 후, 즉 부활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구약에서 곡식을  추수했던 절기인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한 영혼들에 대한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한 성도의 천국 구원과 구원받은 영혼의 풍요가 시작된 것이지요. 오순절은 출애굽을 한지5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즉 출애굽 직후의 오순절에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완전히 조직하셨던 것처럼, 부활 직후의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교회를 조직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히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율법의 시대를 시작했던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의 시대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심으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고, 초실절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성도들에 대한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하시게 된 일련의 과정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오묘하고 섬세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에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은 장막절에 있을 것이라 예측을 하기도 합니다. 재림은 천국에 새로운 장막이 지어지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측일 뿐, 언제 오실지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가운데 있으며, 그 전능자의 손 안에 붙들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환란, 작은 곤경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우리 삶을 조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오차가 없는 하나님의 타이밍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시점은 이미 오순절로 셋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언제 성령님이 오실 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전심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오순절이 되자 성령님은 정확히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기대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닌 전심으로 찾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날이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바람처럼 홀연히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때는 기도하는 자의 것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셨지만 그날 성령을 받은 이들은 열정적으로 기도하던 120 문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가 동일하게 만끽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마니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 하나님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체험하면서 살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의 공로없이 이루어집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때로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찾아 오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도한 그릇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제목을 내놓는 사람은 많으나 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청탁교인이 되어있는 것은 참 마음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청탁은 하는데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지요. 더 마음아픈 것은 청탁받은 사람도 청탁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기도하겠다고 백지수표를 남발하는데 정작 기도하는 사람은 적어 백지수표가 공수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기도제목만 여기 저기 널부러지고 정작 기도는 없습니다. 그래 놓고 계속 기도해왔는데 왜 응답이 더디냐고 따집니다. 이는 수박 껍데기를 핥았는데 왜 달콤하지 않느냐는 말과 같고, 밥그릇을 핥았는데 왜 배부르지 않느냐는 말과도 같습니다.

 

또한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정작 기도는 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기도제목이 너무 장황하다 보니 정작 기도할 시간은 줄어 들게 되는 것이지요. 세 사람이 한 시간 기도하자고 모였는데 기도제목을 나누는 데에만 57분을 쓰고 애들 밥차려 줘야 한다고 3분 기도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한 사람 당 15-20분 기도제목을 나누었지만 실상은 2분이면 되는 내용들입니다. 기도제목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고 그저 하소연일 뿐입니다. 그를 통해 속은 후련해질 수 있을지 모르나 기도의 능력은 맛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기도제목을 늘어놓지 않아도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각종 교회 모임에서 똑같은 기도제목이 1년이고 2년이고 변함없이 올라오는 이유, 문제가 해결되어서 기도제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서 기도제목이 바뀌고 마는 이유, 세월이 지나도 신앙이 늘 제 자리 걸음인 이유,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의 고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모든 일을 접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동반자가 있다면 기도제목을 간결하게 나누는 법을 익히시고 함께 기도하는데 시간을 더 할애하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4. 자아를 깨뜨려야 드러나는 성령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순절에 드리는 제사는 소제였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빻아 알갱이의 형체가 조금도 남지 않게 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형체는 남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죽어야 성령님이 드러납니다. 자기의가 깨져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자기 열심이 깨져야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납니다. 자기의로 인한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없음은 물론 사람들에게 아픔을 남깁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섬겨야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5. 성령으로 충만해야 깨어지는 자아

우리는 스스로 자아를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충만해야 자아가 깨집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으면 성령이 드러나지 않고,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다니 어렵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마치 물풍선과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물이 풍선을 터트릴 정도로 차지 않으면 풍선은 터지지 않고, 풍선이 터지지 않으면 안의 물은 밖으로 나오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내면에 충만하면 성령님을 담고 있는 자아는 팽창하다가 터져 버리게 되고, 그러면 안에 있는 성령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님을 눈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시에는 성령님의 임하심을 볼 수 있는 뚜렷한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현상들은 세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세 감각기관은 바로 귀와 눈과 입이었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성령이 오심을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나타난 것이었으며 그들이 기도하던 장소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 바람 소리는 잔잔히 부는 산들 바람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였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성령이 오심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강림은 가시적인 현상이었던 것이지요.

 

셋째, 제자들은 또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처럼 불처럼 임한 성령님은 그들을 충만케 하였으며, 그들의 입술은 그들이 평생 배워본 적이 없는 언어들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현상들은 바람, 불 등의 자연적인 것으로 비유되어졌지만 사실 초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람소리’가 아닌 ‘바람소리 같은 것’을 들었으며, ‘불’이 아닌 ‘불의 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배워서 습득한 언어’가 아닌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언어’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함은 그들로 하여금 가시적인 현상을 드러내게 했고, 그 결과 그들은 밖으로 뛰어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숨어지내던 자아를 깨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성령의 일을 나타내 보였던 것입니다.

 

6. 생명을 주는 성령

오순절 날에는 구약의 율법이 주어진 날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때에는 황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죄악으로 인해 3천명이 죽이믈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인 신약의 오순절에는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 3천명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요, 복음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님은 한 곳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바람소리가 아닌 바람같은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소리요, 생명과 권능의 소리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생명의 바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실 때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콧구멍에 바람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을 가로막은 홍해바다 위에 밤새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죽음을 앞둔 그들의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골짜기 마른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형체를 갖추었던 에스겔의 환상에서도, 성령의 바람이 불어 오기 전에는 생명이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 생명을 주는 성령의 바람이 오순절에 불어옴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드디어 그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죽은 영입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환풍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됩니다.

 

7. 죄악을 태우고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

성령님은 불에서 갈라져 나온 혀처럼 각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임하셨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로 임하셨고, 불기둥 가운데에 임하셨으며, 시내산에서도 불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정결함과 그로인한 권능을 주시기 위함이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불 앞에서 정결하여 졌으며, 권능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죄를 태우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불은 우리 안에서 폭발적으로 타올라 권능을 갖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저주와 죽음을 가져옵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이기에 죄의 결과인 죽음의 그림자들을 태우는 권능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시작된 질병과 고통과 슬픔과 질고 등을 모든 인간은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지만 성령의 불이 임하면 그것들은 불태워져 버리곤 합니다. 성령님 안에는 소멸하는 불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8.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성령

오순절에는 두 개의 빵을 흔들어 요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성령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하게 하였습니다. 15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자기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의 저주로 인해 흩어져버린 언어가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른 언어로 말하게 하심은 성령님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도 성령님은 역사하실 것이며, 죽었던 그들의 영을 살리시고, 잃어버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권능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바람같은 성령은 생명을 주는 권능을, 불같은 성령은 정결하게 하는 권능을, 다른 언어의 성령은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임하는 권능을 각각 나타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람같이 임하셔서 죽어버린 우리 영을 소생시키실 것이며, 불같이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태우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라야 우리는 권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목이 말라야 합니다. 세상은 갈 수록 혼탁해지고 있으며, 마귀의 세력은 오늘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기 위해 달려 드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아무런 생명력도 권능도 없이 교리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다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까? 오순절에 임했던 그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대로 체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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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 (행 1:3-11)

  •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

  • 사도행전 1:3-11

 

1. 죽어도 살아도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지내면서 하신 사역과 가르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였습니다. 부활하신 40일 동안 나타나신 예수님의 몸은 부활체로서 지상에 계셨던 33년의 몸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첫 설교에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셨으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회복 운동”이었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가르치신 내용도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도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시는 최고의 가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시 사셨으며, 승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40일 동안이나 추가로 머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여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 성령충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과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나라의 3대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곧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러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내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란 예수님을 통해 말씀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물로 주는 죄씻음의 세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 후, 즉 부활하신 지 50일 후,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과만 함께 하셨지만, 성령님을 통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온통 세상 나라에 있지요. 하나님의 나라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넓혀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땅과 백성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도와 선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따로 분리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한 복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나라와 혼재 가운데 살아갑니다. 세상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 아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성도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에 이루는 첫번째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또한 전도와 선교를 통해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어두운 세상의 나라에서 참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소망없이 죽음의 날을 기다리는 영혼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한 영혼이라도 더 그 나라의 빛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화도 전도도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본성이 죄성으로 가득찬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예수님의 품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우리의 부족한 지혜와 능력으로는 단 한 사람의 마음도 돌이켜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오직 성령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성령님께 이끌려야 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부인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빛이 드러날 때에 비로소 자신의 변화도 복음전파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3. 권능을 주시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자아가 아닌 성령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권능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셔도 성령님께서 마음껏 일하시지 않으면 성령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권능은 소수의 몇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간다면 적어도 귀신 한번 정도는 쫓아 보고, 병자 한명 쯤은 고쳐보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라고 의미를 축소합니다.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말씀을 전달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능력으로 그 말씀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입니다. 사도행전은 말씀을 전하고 능력으로 말씀 자체를 증명하거나, 능력을 행하여 말씀 전할 기회를 얻는 이야기들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와 비교한다면 사람들은 축적된 지식체계과 문명으로 인해 하나님을 받아 들일 틈을 도무지 제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악은 날이 갈수록 흉악해져가고 있으며, 지성적인 접근만을 통해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초대교회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만약 성령님의 임재가 지금 이 시대에 멈추어 버렸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환난과 핍박을 이기며, 무엇으로 말씀이 말씀됨과 복음이 복음됨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4. 다시 오실 예수님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지상사역을 정리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는 순간 예수님의 몸이 들려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이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려오는 그런 구름이 아니라 성막에 임했던 “쉐키나”의 구름입니다. 쉐키나란 “임재”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기둥과 함께 임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변화산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쉐키나의 구름은 등장했었습니다.

 

강보에 둘러싸인 채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구름에 둘러싸인 채 가장 존귀한 모습으로 승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환상이나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자적이고, 육체적이며,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똑똑히 보는 앞에서 영이 아닌 육신이 들려 올라간 사건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합니다. 구약을 보면 욥19:25, 26, 단7:13,14, 슥14:4, 말3:12 등에 초림과 구별되는 재림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 318회나 등장합니다. 평균 25절마다 한 번꼴이지요. 오늘 본문은 그 많은 재림에 관한 예언들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이처럼 자주 재림에 대해 말해준다는 사실은 재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육신, 십자가 죽음, 부활과 더불어 재림은 기독교를 존립케 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5. 하늘로 올라간 모습 그대로 오신다는 말의 의미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옆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누가는 두 사람이라 표현을 했겠지만 이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 두 천사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늘로 올라간 모습 그대로 오신다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 부활하시고 승천을 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께서 친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일 뿐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눈으로 볼 수 있었듯, 재림시에도 역시 육체로 올 것이며 직접 눈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계시록 1:17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의 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영적인 임재가 아니라 가시적인 등장일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럽게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듯이, 재림시에도 영광스럽게 오실 것입니다.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초림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0). 그 때에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가 들려 올 것이며,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실전 4:16).

 

 4) 제자들이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작스레 승천하셨듯, 예수님의 재림도 밤에 도적이 찾아오듯 생각지 않은 때에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심지어는 예수님도 모르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자기 맘대로 정하고 기다리는 행위 역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예수님보다 우위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6. 심판의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구원주이시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주이십니다. 용서받은 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를 구분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용서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거부하여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불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로 오신 초림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심판이 아닌 완성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소망이요 힘입니다. 아무리 큰 환란과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쳔에게 있어 고통은 순간이지만 행복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으로 모든 것을 인내하며 이겨야 합니다. 재림의 날, 우리의 모든 눈물과 땀과 피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며, 우리를 위한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7. 세상을 향해 달려 나아갈 때.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시대의 종결이자, 성령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은 오직 누가의 두 책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사이자 뛰어난 역사가이기도 했던 누가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상 사역을 강보에 둘러싸인 채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시작하여, 구름에 둘러싸인 채 하늘로 돌아가심으로 마치십니다. 모든 것에 시작과 끝이 있듯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도 시작과 끝이 있었습니다. 시작과 끝을 중시하는 역사가로서 누가는 그 사실을 명확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하기에 새로운 시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지상사역의 마지막이자, 성령시대의 시작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는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오시는 시점에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성령님께 붙들리어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에 열정적으로 편승해야 합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명쾌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 2) 성령이 오셨다; 3)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예수님을 증언하러 나간다; 4)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시점까지 모든 성도는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써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은 땅만 바라본 채 하늘의 일을 망각하거나, 하늘만 바라본 채 땅에서 해야 일을 망각하고 맙니다. 지금은 세상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본질입니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교회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머물러 있고자 했을 때, 그들에게 핍박과 환난이 임하였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흩으셨고, 비로소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강요되어졌습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강제가 작동을 합니다.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야 비로소 지상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했던 교회사의 오류를 우리는 재탕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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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날 때 (요 21:15-17)

  • 다시 일어날 때

  • 요한복음 21:15-17

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만남의 순간을 떠오르게 해주셨고, 또한 식사를 친히 준비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있어 그 시간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시간임과 동시에 마음을 찌르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밀려오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회복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을 했으니 그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제자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요한이었지요. 시몬이란 이름이 흔한데다가 12사도 중에 또 다른 시몬이 있기에 베드로는 ‘바요나 시몬” 즉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불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는 순간에 이미 그에게 “베드로” 라는 사명자로서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은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 대신 그의 본명인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금의 베드로는 감히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지만, 그는 반석과 같은 굳건한 믿음과 신의를 보여주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닌 시몬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몬. 너는 아직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이야. 너는 연약한 인간이고, 네 스스로 너의 사랑과 신의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그러니까 괜찮아. 네가 무너진 그 자리,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면 되는거야. 그리고 베드로로 다시 세워져 가면 돼.”

 

2.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냥 사랑하느냐가 아니고 비교 대상을 두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참 많습니다. 부모, 형제, 자매, 친구 등의 사람은 물론, 화려한 집, 좋은 차, 돈, 명예, 권력, 성공 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하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한 가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도 던질 수 있다고 장담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다짐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가치로 두겠노라 고백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은 두려움과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진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에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찾아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고 말았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대제사장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의 뒤를 밟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을 지킬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컸기에,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을 베드로 스스로도 용납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그리고 네 앞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답을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면 베드로는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세 번의 부인, 세 번의질문, 세 번의 대답, 세 번의 사명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신 때문도 아니고, 베드로를 괴롭게 하려고 소심한 복수를 하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였기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밖으로 뛰어 나가 한 없이 통곡하며 회개하였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베드로의 마음을 주님께서 만져주고 계시는 과정인 것이지요. 회복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한 순간의 만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터치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상처가 깊을 수록, 죄책이 클 수록, 회복은 더욱 더 많은 터치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여, 세 번씩이나 똑같은 대답을 받아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의 사명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그 사랑을 증명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과거의 실수와 아픔을 회복해야 합니다.

 

삼중 부인- 삼중 질문 – 삼중 답변 – 삼중 사명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4.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직전에 했던 베드로의 고백에 비하면 매우 절제된 고백입니다. 당당하게 사랑한다 말을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표현을 씁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백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감히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낼 힘과 거룩이 우리 안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얘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우리의 부족한 입술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물든 검붉은 손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곳을 향해서도 뛰고 있는 부정한 심장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사랑합니다” 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노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걸핏하면 시험들고, 걸핏하면 상처받고, 걸핏하면 정죄하고, 걸핏하면 원망하고, 걸핏하면 교만해지면서 “저는 순백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위선이요, 자기 교만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마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많은 저의 입술로, 죄로 물든 심장과 손을 들어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내 양을 먹이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베드로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 사랑을 고백하면 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동작입니다. 사랑은 의미가 아니고 움직임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이 거짓 믿음이듯, 수고가 없는 사랑도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자기 연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꼭 행동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들이 “내 심장을 꺼내서 보여줘?”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심장 꺼내서 보여 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랑의 수고를 보여주면 작은 것에도 상대방은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질 때에 비로소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이 기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억지로 짜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이 사랑하는 자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인이 생기면 부모한테도 사주지 않던 선물을 여친에게 사주느라, 아빠 크레딧 카드를 긁었다가 된통 혼나게 되는 것이지요. 평소에 안하던 짓을 사랑하니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기뻐하는 것을 보는 행복이 부모님의 핍박을 이기게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 너무도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표현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을 잃은 양, 힘없는 양, 상처난 양을 돌보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을 증명해보십시오.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사랑의 수고를 주님을 위해 감당하고 있습니까?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로, 주님께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한번 사랑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를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 적용질문

1. 지금 현재 회복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까?

2. 주님 앞에서 한 범죄 때문에 죄책감으로 시달려 보신 적이 있나요? 어떻게 회복하셨습니까?

3.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4. 주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고 계십니까?

5. 지금 현재 돌보고 있는 양이 있습니까?

6. 공동체 내에서 소외된 양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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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리다 (마 27:45-50)

  •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리다

  • 마태복음 27:45-50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1. 버림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3시간이 지났습니다. 유대식으로 제 6시 (지금의  낮 12시)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가장 강렬해야 할 정오의 햇살이 가리워지며 칠흑 같은 어둠이 덮친 것입니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인 제 9시 (지금의 오후 3시)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받으시는 그 심판의 자리는 어두움의 자리요, 고통의 자리요,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빛을 주기 원하지 않으신 버림의 시각이었습니다. 대신하여 짊어지신 죄인들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시각이기도 하였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상에 버려 두신 아들을 차마 보기 힘들어 하는 하나님의 아픔이 어두움으로 표현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무서운 어둠 속에서 3시간 동안을 묵묵히 고통 받으시던 예수님은  오후 3시, 침묵을 깨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네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신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고통을 침묵으로 받아 내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를 진 채 갈보리를 오르시며, 대못에 박혀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안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정신적인 고통 역시 침묵으로 받아 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배반 당하시고, 따르던 자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유대 당국자들과 군중들에게 비난을 받으시고, 심지어는 로마 군인들과 십자가에 달린 살인 강도에게까지 조롱 당하시는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살이 찢기우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욱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고통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즉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에 예수님은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버리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 때문입니다. 하박국 1:13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선이므로 악을 참아 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가는 예수님은 그 짊어진 죄때문에 이미 사랑의 대상이 아닌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닌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사람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왕이 되어 살기 위해 하나님을 버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을 버리십니다. 그 사람은 곧 사람이 되어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취하시기 위해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 받으셔야 했던 이유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를 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라며 조롱을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바로 그 순간마저도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받으신 이유입니다. 죄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동정이 아닌 조롱을 퍼붓고 있는 인간의 패역한 죄성,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성을 바로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버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 처절히 절규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지만 이 절규는 사실 우리를 향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 라고 하는 절규입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으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참고 볼 수 없는 나, 저주 아래 버려져야 하는 나를 찾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여 우리는 우리를 위해 버려진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저주와 버려짐은 이제 예수님께로 넘어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그 순간 마저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던 무리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신을 위해 버려진 예수님, 자신을 위해 아들을 버린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손을 잡지 못하였으므로 여전히 저주 아래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지 못하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께서 버려지신 이유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절규하신 예수님의 네번째 말씀은 바로 그들을 향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3.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리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크게 외치시고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 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버린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말합니다. 그냥 천 쪼가리가 아니라 두께가 10cm나 되었으며, 양쪽에서 각각  5마리씩 10마리의 소가 전력으로 끌어야 찢어질 수 있는 그런 휘장이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던 이유는 지성소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 들어가면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뚜겅에는 하나님을 모시는 그룹천사 둘이 서로 날개를 맞대고 있는 조각이 있었습니다. 휘장 위에도 그룹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모두 지성소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장소였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 날에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죽기 때문에 대제사장 역시 양의 피로 그 죄를 씻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업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이자,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섰다가 죽는 것을 방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했던 셈이지요. 하나님의 공의이자 하나님의 사랑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곧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휘장의 재료는  고운 흰 천 위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았습니다. 흰 천은 예수님의 죄 없으심과 완전한 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수놓는 실들 중 청색은 하늘을, 자색은 왕권을, 홍색은 예수님의 피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 사람을 위에 찢어지신 그 예수님의 피를 바른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밖에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에 의하여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다. 중요한 것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에서 위로 찢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찢으셨기에 위에서 아래로 찢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이 찢긴 것도 표면상으로는 사람이 한 것같지만 실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그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4.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의 특권

성소의 휘장이 찢겼다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과 하나님의 사이를 막아선 장벽과 보호막이 해체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제 죄인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나 몸이 찢기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그 분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누구의 중재도 필요치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목사의 도움이 없이도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직접 자신의 죄를 고할 수 있고,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할 수 있으며, 자신의 필요를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길이 열렸음에도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 앞에 서면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싶어도 감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이 찢겨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 두렵고 떨림으로 기피했던 일을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어느 때든 할 수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분의 거룩한 임재를 마음껏 누릴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빽빽하게 채우시는 그 공간과 시간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특권을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그냥 날려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위해 버림 받으시고 몸이 찢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지성소로 들어가기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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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기름짜는 틀 (마 26:36-46)

* 겟세마네, 기름짜는 틀

* 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1. 예수님의 번민과 슬픔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께서는 기도하기를 마치신 후 습관에 따라 (눅22:39)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올리브 산에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의 동산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에 도착하시자 예수님께서는 8명의 사도들을 동산 입구에 남겨 두신 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더 깊이 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몹시 괴로워하며 세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죽을만큼 마음이 고민스러웠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한 사람의 어깨에 지고 죽어야 하기 때문에 오는 죄의 무게때문이요, 그 죄책의 중압감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본 적이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 너무도 민감하십니다. 죄의 경험이 없으신 분이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게 되었으니 그 무게가 너무나도 괴로웠던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받게 될 십자가 형벌의 참혹함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와 똑같이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감당하셔야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완전한 인성을 입고 인간이 되신 것도 모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무게는 죄인을 향한 사랑의 무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깊이를 깨닫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죄인임을 더 깊이 느낄수록, 그 죄때문에 받는 마음의 고통이 무거운 사람일 수록,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인임을 깨달은 깊이가 바로 영성의 깊이가 되곤 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있습니까?

 

2. 나의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해야 하는 번민과 슬픔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무릎을 꿇고 (눅22:41)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앞으로 불과 몇 시간 이내에 죄책을 감당해야 하는 시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절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낮아짐이 고스란히 표현된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처럼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고통의 잔을 지나치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잔은 고통스러운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결코 피할 수 없으심도 아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바로 그 잔을 마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해 주시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고통과 번민의 시점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손수 보여주십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나의 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의 원”은 고통의 순간이 오면 그것을 모면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도, 죄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버지의 원”이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기꺼이 “아버지의 원”이 아닌 “나의 원”이 깨어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인류의 죄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나의 원”을 버리고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하는 “아버지의 원”을 택하겠다 고백하고 계십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연약한 인간 예수가 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수난이 더욱 빛나게 대조되어 우리의 가슴에 박히는 위대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원”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아버지의 원”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3.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한 시간 가량의 기도를 하시고 돌아온 예수께서는 세 제자가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을 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특별히 베드로를 꼭 집어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죽겠노라 호언장담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겠다더니 졸리는 것 한 시간을 못 견디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나머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 역시 베드로와 뜻을 같이 하겠노라 말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에게 함께 깨어서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시간도 깨어서 함께 기도를 해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능력이 안되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는 그들의 마음도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마음을 살아낼 육신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육신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지요. 기도는 육신의 연약함을 이겨 내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마귀의 지속적인 공격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화가 터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놀이터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기 저기 터지는 폭탄을 마치 폭죽 바라보듯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상하고 찢기어도 왜 상했는지 왜 찢겼는지 영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터 안에 있고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전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최종병기는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물으십니다. 한 시간의 기도도 결코 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 시간의 기도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고작 한 시간입니다. 오늘날 하루 한 시간의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니 가끔이라도 한 자리에서 한 시간을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도가 없는 신앙 생활은 성도들을 창백하게 만듭니다. 아무런 능력도 역사도 경험하지 못한 채 표본실의 박제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요.

 

4.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누가복음 22:43절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 44절에서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대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그 기도에 힘을 더하였습니다. 기도는 숨을 쉬듯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전력을 쏟을 때는 중노동처럼 힘든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영적전쟁으로서의 기도가 되면 천사가 와서 힘을 더해야 할 정도로 고역이었습니다. 그 돕는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혹자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때문이었다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는 일이 그만큼 큰 부담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사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입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천사의 돕는 힘까지 모두 쥐어짜서 더욱 힘쓰고 더욱 간절히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것을 짜내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겟세마네의 뜻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산에서 채취된 올리브로부터 기름을 짜내는 장소가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기름짜는 틀을 통해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올리브가 으깨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한 알의 올리브로 으깨지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시는 기도를 하셨고,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으깨기로 최종 결단을 하신 장소였습니다. 올리브가 으깨져서 기름을 제공하듯, 예수님께서 으깨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제공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짜내시는 기도를 하시고, 스스로를 으깨어 성령의 기름을 주신 예수님께 우리는 과연 우리를 으깨어 그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역시 우리를 짜내는 기도, 우리를 으깨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겟세마네로 올라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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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치 (마 26:1-16)

* 예수님의 가치

* 마태복음 26:1-16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 예수님의 가치

고난 주간의 넷째날입니다. 음모의 날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것을 본격적인 음모를 꾸밉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그 때에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씻어드립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치 품삯이니, 노동자의 일년치 연봉을 단 한번에 깨어서 발에 부은 거지요. 제자들이 이를 보고 분노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는 걸 깨서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지 돈 지가 쓰겠다는데 왠 말들이 그리 많은지….  어쨌든 여인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의 장례를 기념합니다.

 

반면, 가롯 유다는 그 보다 훨씬 가치가 적은 은 30에 예수님을 팔기로 합니다. 300 데나리온에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한 여인과 은 30에 예수님을 파는 제자의 이미지가 명확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의 가치가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반면, 또 어떤 이에게는 돈 몇 푼에 팔아 넘길 정도로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그렇게 높게 쳐드리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동네 아저씨 대하듯 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 분을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고난 주간에 마저도 그 분을 바라보기에 우리의 삶이 너무 분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향유옥합을 깨트린 여인에게 계산이란 없었습니다. 이것을 깨트려 드리면 예수님이 100배로 갚아 주실 거라는 둥, 천국에 상급이 쌓일 것이라는 둥의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너무나 귀했을 뿐입니다. 단 한번에 깨트려서 발을 씻겨 드리고 마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발 한번 씻겨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반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계산이 많고 이성적입니다. 연인에게 이벤트를 해주는데에 백만원 정도를 써도 아까워 하지 않는 남자가 있는 반면, 만원에도 벌벌 떠는 남자도 있습니다. 아끼지 않는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그 행위가 터무니 없을 수록 더욱 많은 감동을 주지요. 그러한 사랑의 공식은 하나님에게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나님께 터무니 없는 사랑의 표현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앞 뒤 재지 않는 낭만적인 표현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2. 행위의 가치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어 주시려 이 땅에 오셨기에 유월절이 다가온다는 말은 곧 십자가 수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었으나 백성들이 두려워 섣불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제자 중 한명인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찾아옵니다. 예수를 넘겨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유 때문에 유다라는 이름으로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생겨났습니다. 다음 단어들은 유다라는 이름이 얼마나 배반의 아이콘이 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1) 유다 염소는 다른 양이나 염소들을 도살장으로 유인하는 데 사용되는 염소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다른 사람들을 유인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확장되어 사용됩니다.

2) 유다의 키스는 배반행위나 다른 뜻을 숨겨놓은 채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3) 유다구멍이나 유다창문 등은 몰래 들여다보기 위해 만든 문 등의 구멍을 뜻하는 말입니다.

4) 이름 표기법마저 다릅니다. 같은 유다라도 가룟유다에 대해서는 Judas로, 나머지 유다는 Judah나 Jude로 표기할 정도입니다.

 

우리의 이름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기억이 됩니다.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때로는 사람들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일그러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하고 우리의 내면과 행실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이 되어질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 순간부터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이름을 새로 써가고 있는 것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주님 앞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려져 가고 있을까요?

 

반면 여인의 헌신에 대해서는 복음을 전할 때에 온 천하에서 여인이 행한 일을 함께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도 마태도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여인으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조차 기록되어지지 않지만, 그녀의 행위만큼은 온 천하에 기억됩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러해야 합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드리는 순전한 사랑의 행위가 주님께 올려져야 합니다. 한 여인의 이름은 이 땅에서 기억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님께는 영원히 기억되어질 이름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의 행위만 남고,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서 기억되어지는 그런 헌신이 값지고 멋진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가치

예수님께서 팔리신 은30이라고 하는 돈은 당시 예수님의 명성에 비하면 헐값에 불과했습니다. 한 사람의 노예가 팔리는 값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처럼 헐값에 팔리신 데에는 중요한 영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인 인간을 대신하여 팔리는 것이기에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팔리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를 묶고 있던 모든 묶임이 풀렸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묶고 있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제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속박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묶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노예로 팔리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선포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가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고작 은 삼십이었습니다. 우리가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 짜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려 하나님께서 몸을 바쳐 사신 그런 가치있는 자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4. 가치에 맞게 사는 삶의 가치

우리의 가치를 노예 짜리에서 예수님 짜리로 바꾸어 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가치에 둔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짜리는 예수님을 위한 순전한 사랑을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가치에 맞는 삶이 됩니다. 가치에 맞게 사는 삶이 가치있는 삶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깨뜨렸던 순전한 나드만큼이나 순전한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에 불순물이 섞이는 이유는 예수님의 순전한 사랑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께 순전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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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 렙돈 (막 12:41-44)

  • 과부의 두 렙돈

  •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양보다 질을 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신 채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양을 지켜보셨습니다. 당시에는 헌금할 때에 헌금의 액수를 밝히고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의 화폐는 지폐가 아닌지라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 헌금 액수가 적나라하게 노래를 합니다. 어떤 헌금은 “땡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랑”하고 소리를 낼 것이고, 어떤 헌금은 “띠딩”하고 말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갈 것이고, 적게 하는 사람은 헌금을 하는 손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겨우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얘기가 등장을 합니다. 렙돈은 헬라의 화폐로서 가장 낮은 화폐 단위였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로마 화폐인 고드란트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고드란트는 로마 화폐 중 최소 단위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1불도 안되는 돈을 헌금한 것이지요. 마가는 많이 넣는 부자와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부류를 대조하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일부를 바쳤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헌금하였다고 칭찬을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를 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를 남겼느냐를 보십니다.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보십니다. 헌금의 양이 아닌 헌금의 질을 보신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헌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다. 시간이 남아 돌아 교회에서 더 많이 섬기는 것도 귀하지만, 도무지 섬기기 힘든 상황가운데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섬기는 그 헌신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헌신의 양이 아닌 헌신의 질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2. 두 렙돈이 생활비의 전부여야 하는 과부의 존재가 문제

과부의 두 렙돈 얘기는 헌금 얘기가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시고 무리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시는 것을 주목해 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전후 문맥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이전에는 부유하고 권세있는 서기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부유했으며,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존경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이후에는 아름다운 돌들과 화려한 금으로 치장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훼파될 것을 경고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즉 전후 문맥을 통하여 전달되는 전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의 위선에 대한 지적 – 전 재산을 바치는 과부에 대한 칭찬 – 가난한 자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웅장한 성전의 훼파 경고.”

 

즉 예수님께서는 지금 헌금을 정성껏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비 전체가 두 렙돈인 과부가 존재하는데, 서기관들은 부유하게 살면서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전의 건물은 금으로 치장되어 있는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과부는 꼴랑 두 렙돈이 전 재산인데다가 그나마 그것도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돈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서기관들의 부는 과부를 착취한 데에서 나온 돈이었습니다. 화려한 성전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 없이 부의 축적에만 집중하는 성전을 가르켜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과부는 강도의 굴혈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것이지요. 이러한 헌물은 성전의 화려한 건물이 되었고, 서기관들의 배를 채우는 자금이 되었습니다.

 

문맥 상 과부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자들의 사랑의 표현을 가로채서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고, 성전을 향해 파괴의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3.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말라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결핍과 소외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은 과부와 고아들에 대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보호할 것을 엄중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원한을 갚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출 22:22).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 10:2).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었고 (신 14:29), 추수를 할 때에도 그들을 위해서 곡식을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레19:9-10).

 

신약시대에 와서도 디모데전서 5장, 야고보서 1장 등은 아예 교회의 책무와 경건생활의 요소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즉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며, 성도가 해야 할 경건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돕는 행위는 반드시 갚은 바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빚쟁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신지라, 반드시 그것을 갚으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돕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나만, 내 가정만, 내 교회만 하나님을 예배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건생활은 성경읽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경건은 성경, 기도, 교제, 전도와 더불어 구제로 완성이 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돌보는 것, 그것은 곧 경건생활의 화룡정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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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막 11:12-25)

  •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 마가복음 11:12-25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유대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둘러보신 후 베다니로 돌아가 머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가는 길에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 앞으로 가십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아예 뿌리채 말려 버리십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 앞에서 열매를 따먹으러 가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행위입니다. 더구나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를 저주까지 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괴팍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있겠지요. 그동안의 예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본문만 보면 예수님은 미련한 성격파탄자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나고 자라신 예수님께서 무화과의 때가 아닌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본문은 샌드위치 구조의 일부입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성전정화-무화과 나무 마름”이라고 하는 구조로 내용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갖췄으나 예배자의 삶을 살지는 못하는 형식적이고 죽은 성전 예배를 무화과 나무라는 이미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9: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화과 나무의 첫 열매로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상징합니다. 당시 유대교는 종교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화려한 종교예식으로 경건한 척, 거룩한 척 포장한 채 자기 이득만을 챙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라고 하는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 종결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2. 나는 어떤 나무인가?

예수님께서 크리스쳔이라고 하는 무화과 나무를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우리는 어떤 무화과 나무입니까?

1) 잎도 없고 열매도 없는 앙상한 무화과 나무

2)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 나무

3) 무성한 잎들 사이로 빽빽이 열매를 맺고 있는 무화과 나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5:22-23절은 명확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9가지 열매입니다. 이들 중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 금요기도회까지, 심지어 열심을 내어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열매가 아닌 무성한 잎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온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신앙의 열매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행위가 아닌 그저 종교적 열심이거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열매가 아닌 잎에 불과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시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은 채, 그것들에 대해 그저 열심을 내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잎이 무성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열매는 삶 속에서 맺는 것입니다. 성경을 10독 했다면 10독한 사람으로서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 많이 읽은 것이나, 기도 많이 하는 것이나, 신앙의 연수가 많은 것이나, 직분과 맡은 사역 등이 자기의와 자기자랑이 되는 사람은 열매가 아닌 잎이 무성한 사람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기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늘 peace maker로서 활동하며, 환난과 고난 가운데 인내할 줄 알고, 사람들에게 자비와 선한 일을 베풀며 살고 있다면 신앙의 열매가 풍성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예배는 대부분 1시간의 주일예배에 국한될 때가 많습니다. 1 시간 짜리 크리스쳔인 것이지요.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맞습니다. 과일 나무에 있어서도 잎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잎이 있어야 광합성을 하고 나무가 자라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잎이 없으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드리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섬기는 등의 모든 신앙의 요소들은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열매는 당연히 맺혀지지 않습니다. 잎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주일 1시간 드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통째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형식으로서의 예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즉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때라야 그는 진정한 예배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내 삶이 거룩한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나는 어떤 열매를 맺는 무화과 나무인지를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적용질문

1. 나는 어떤 열매를 맺는 무화과 나무입니까?  9가지 열매중 내가 맺는 것과 못 맺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그 분의 허기진 배를 채우실 수 있을까요?

3. 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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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헌신 (요 12:1-11)

* 값진 헌신

* 요한복음 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 예수님께 안식을 주었던 가정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는 자주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편하게 쉬어가실 수 있는 집이 나사로의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늘 지극 정성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마르다, 항상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폭 빠져들곤 했던 마리아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온 가정이 예수님께 안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 기쁨을 주며, 위안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받는데에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마침표를 찍으면 안됩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행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 가치를 둔 자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진정한 가치를 예수님께 둘 때에 가능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치를 두었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역팀 전체를 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돈과 시간과 땀과 정열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하면 헌신하게 되어있고, 그 헌신은 기쁨이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깨어서 부어드렸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돈이 아닌 예수님께 가치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종처럼 낮추고 예수님을 주인이라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발을 머리털로 닦는 행위도 역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머리털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머리털로 발을 닦기 위해서는 머리를 발에 가까이 조아려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가치를 두었기에, 돈도, 자아도, 시선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 하나를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많고 많은 집들 중에 하필 나사로의 집에 거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마음의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 편안한 집입니까?

 

3. 돈이 가치인 자

반면 유다는 돈에 가치를 둔 자였습니다. 예수님보다 돈이 소중했지요. 그래서 그는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공금을 빼가곤 했습니다. 속은 도둑이면서 겉으로는 또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포장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팔아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유다같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런 저런 거룩한 이유들을 들이대면서 실상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팔고, 성도를 팔고, 하나님을 팔고, 의를 팔고, 교회를 팔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이득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돈이 가치가 되면 사람이 타락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4. 헌신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

사람들은 마리아가 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 줄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헌신의 가치를 알아주십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를 드렸지만, 사실 순전한 헌신을 그것에 담아서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드렸을 뿐이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구속사의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도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이 바로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원래 선지자나 종교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을 제쳐두고 예수님께 기름부음을 준 이는 이름없는 한 여인, 마리아였습니다. 그녀의 헌신이 순전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헌신을 그토록 멋지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한 헌신의 가치를 알아주시고 그것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헌신은 과연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에 기록이 될 수 있을 순전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5. 대조 1: 주님을 위해 아끼지 않는 자와 자기를 위해 인색한 자

오늘 본문에는 여러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조는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마리아와 이를 책망하며 화를 내는 가룟유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낌없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름붓는 자의 영광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의 다른 말로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은 왕, 제사장, 선지자 입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 선지자들처럼 고난을 받을 것이고, 제사장처럼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죄속함의 제사를 집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왕으로 등극 하실것입니다. 이 세 역할을 위해서는 공식적인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으심을 행해야 할 종교지도자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에 그 시대에는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한 여인이 그 영광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한 여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반면 가룟유다는 예수님보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따위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영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이유를 들먹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는 천사처럼 위장하지만 사실은 돈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좇은 이유도 바로 그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맞지 않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역할을 감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아끼지 않은 한 여인의 영광과 돈을 사랑하여 스승마저도 팔아넘기는 유다의 추락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받는 대상이 무엇을 꿈꾸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등에 모든 관심이 쏠리게 돠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유다처럼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예수님을 이용해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는 행위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거룩한 이유를 들어 포장합니다. 실컷 다른 성도를 욕하고 도마질 해놓고 기도해주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행위, 자기 맘대로 교회에서 혈기를 부려놓고 교회를 위해서 였다라고 하는 행위 등 열거하자면 끝도 없겠지요.

 

6. 대조 2: 죽음에서 살아난 자와 죽음을 준비하는 자

두번째 대조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와 이제 죽음을 맞이할 예수님이 한 잔칫상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모든 자의 부활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내가 곧 수난을 받고 죽음을 맞이할텐데 그것은 곧 너희들에게 저 나사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의 생명과 나의 죽음이 한 자리에 있음을 보아라 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 한 장면에 한 장의 스틸 샷으로 찍혀 있는 것입니다.

 

7. 대조 3: 살리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세번째 대조는 모든 인류를 살리시려는 예수님과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의 대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유대인의 큰 무리가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보기를 원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부패까지 된 시체가 살아 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지요. 그런데 그 틈에도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은 물론 나사로까지 죽이려 모의 합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목적에 맞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이려 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들이란 사실이 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처럼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까지도 팽개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을 음해하고 가십하고 상처주며 아프게 합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웃고 인사하다가도 조금만 수 틀리면 바로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경건한 척, 가장 믿음이 좋은 척 위선을 떱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민낯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의 민낯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그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의 생명이 오늘도 한 자리에 앉아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던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의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지금 마리아로 서있습니까 아니면 가룟 유다로 서있습니까?

오늘 하루는 내가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는 자인지 나를 위해 주님을 이용해먹는 자인지 묵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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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의 비유 (눅 19:11-27)

* 열 므나의 비유

* 누가복음 19:11-27

 

* 내용이 너무 길므로 본문은 생략합니다. 직접 찾아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1. 사람의 생각 vs 하나님의 생각

삭개오를 찾아와 구원해주신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삭개오 사건의 결론을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려주신 비유가 바로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와 오셨습니다. 즉 이제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나면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로마를 전복시키고 시온의 제국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교정해주시기 위해 모두의 미움을 받는 삭개오를 구원해주었고, 또 므나의 비유를 말씀해주심으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해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인류의 구원에 있는데, 사람들의 생각은 온통 자신의 유익과 승리에 가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호산나, 호산나”를 연호하면서 예수님을 왕처럼 대접하였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뜻대로 로마를 전복할 뜻이 없음을 알게 되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조롱하는 무리들로 돌변을 해버리고 맙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과 성공을 위해 하는 신앙생활은 모두 거품이요, 가짜입니다.

 

2.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열 므나의 비유는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가는 것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귀인이 왕위를 받아 돌아오기 전에는 그 나라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제 먼 나라인 천국으로 가실 것이고, 세상 끝날에 왕위를 받아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당장 로마를 전복하는 것으로 올 것을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일단 천국에 가셨다가 다시 돌아와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올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먼 나라 천국에 가 계신 상태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돌아오는 날에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날이 오기 전까지는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전에 있을 구원사업을 위해 종들을 부르시고 각각 한 므나씩을 맡겨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왔으나 그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살아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열 므나의 비유를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 한 토막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간다는 비유는 당시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을 비유로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당시에 유대의 분봉왕은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에돔 사람,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에돔사람은 에서의 후예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가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분봉왕은 반드시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로마 황제가 헤롯 대왕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승인을 해버린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그것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헤롯대왕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3년씩이나  전쟁을 한 끝에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헤롯대왕은  37년 동안 통치를 하다가 BC 2년에 죽게 됩니다. 그는 죽으면서 자기가 다스리던 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세 아들이 분할 통치할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그리고 헤롯 아켈라오가 그 세 명입니다.

 

하지만 헤롯대왕의 유언했다고 하더라도 로마 황제가 승인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아켈라오는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헤롯 아켈라오의 엄마는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에돔사람에 어머니는 사마리아 사람이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을 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을 해서 본격적으로 반대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만 로마가 아켈라오를 왕으로 승인을 해버린 것이지요. 그 뒷 일은 안봐도 그림이지요. 아켈라오는 로마로 돌아온 후 그 일을 주동하거나 관련된 모든 세력을 깡그리 죽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므나에 비유에 투영을 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악하고 잔인하고 부도덕한 아켈라오와 선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감히 비교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뼈 아픈 역사와 정황이 비슷하기 때문에 비유 속에 활용함으로써 그 비유가 피부에 와 닿게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아켈라오를 시기하고 질투하여서 왕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무리들은 결국 아켈라오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여서 그 왕되심을 거역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에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왕이 돌아올 때에 결정이 됩니다. 우리는 다행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끝날에 있을 엄중한 심판을 피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장사하는 것입니다.

 

4. 왕이 돌아올 때까지 해야 할 일

비유 속의 귀인은 왕위를 받으러 떠나면서 종 열명을 부른 후, 은화 열 므나를 주며 말합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열 므나는 각각 한 므나씩 열명에게 나뉘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관심있게 봐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귀인은 장사를 하라 했지 이윤을 남기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장사에는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장사를 해서 많은 이윤을 남길 수도 있지만, 원금을 홀라당 날려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귀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종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주인의 말대로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종은 장사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수건으로 싸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장사를 하다 날려 먹으면 주인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 종은 당시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합니다. 므나를 가리고 있는 수건은 율법이라고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율법에 가리워 버린 것이지요.

 

헌신의 동기가 두려움이면 안됩니다. 실패하거나, 실수하면 하나님께 혼날 것 같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성취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고, 반대로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이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고 하는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와 실수에도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을 할 수가 있고, 실패와 좌절에도 평안과 기쁨 가운데에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실수도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면 흘릴 수록 실패와 실수의 빈도는 높아집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공동체에 해를 입히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장사를 하라 했지 이윤을 남기라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수고하고 땀흘리기를 원하십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주님 오실 날까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두려움 없이 장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 왕의 귀환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에 가있는 동안 종들에게 장사를 맡기는 비유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 갔다가 세상 끝날에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불과 삼십여년 전의 역사를 활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유에서처럼 왕은 돌아올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는 왕은 구원주가 아닌 심판주로 오십니다. 이미 죽었던 사람들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 낱낱이 자기 행위를 자기 입술로 읍조리며 두려워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돌아온 왕이 두 가지의 일을 하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그 종들을 불러 그동안 왕이 명한 장사에 대해 셈을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귀인의 왕됨을 거부했던 모든 자들을 숙청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의 왕되심을 거부했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되심을 거부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받아 들이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던 사람들은 세상 끝날에 있을 심판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또 다른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은 후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셈을 하는 심판대입니다. 그 심판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받을 영화가 달라집니다.

 

6. 비유와 실제의 간극 – 공간의 제한이 없는 왕

비유는 현실을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비유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데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귀인은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먼나라로 가있는 동안 종들과 함께 할 수가 없지만,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즉 주님께서 왕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비유에서의 귀인은 종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맡겨두고 나중에 돌아와서 셈만 할 뿐이기에, 종들의 장사는 망할 수도 빚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장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고 가셨지만,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망할 수도 빚을 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힘을 들여 주님께서 기뻐할 일을 하려는 시도를 쉬지않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혼자 하실 수 없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겨두고 가신 유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처럼 쓸모없는 자들을 불러 주님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게 하시고, 함께 아버지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기회를 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고,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7. 비유와 실제의 간극 – 실패를 가장한 성공

비유 속의 귀인은 떠나기 전 종들에게 장사를 하라 합니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하라 했기에 종들은 실패를 무릅쓰고 장사를 하면 되었습니다. 사실상 장사란 대박을 칠 수 있는 잠재력과 함께 망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므나의 비유에서는 장사를 하다 쫄딱 망한 예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비유와 현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장사에서는 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장사에서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유에서도 망한 예를 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패하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쫄딱 망했다 싶을 때도 있고 도무지 일어날 힘이 없다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은 실패도 망한 것도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도 하고, 주님의 심정을 더 깊이 깨닫기도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남긴 것이 됩니다. 비유에서는 남긴 것을 열 므나, 다섯 므나 식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실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제, 깨달음, 성숙, 성장, 눈물, 기도 등의 모든 요소가 다 남긴 것에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가 실패가 아니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것들은 천국의 상급으로 고스란히 적립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8. 비유와 실제의 간극 –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공

비유에서는 장사를 잘하고 못하고가 눈에 보이는 무게로 정해집니다. 열 므나 다섯 므나 정확히 측량이 가능합니다. 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건졌나, 얼마나 큰 교회를 운영했나, 목장 식구들이 세례를 몇 명을 받았나, 얼마나 열심히 헌신했는가, 헌금은 얼마나 크게 했나, 교회를 몇 개를 개척했나, 가난한 사람은 몇 명을 도왔나 등으로 그 공적을 따지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성도는 남을 돕기는 커녕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성도는 남긴 것이 없는 것일까요? 목자는 상황에 따라 헌신과 열정과 반대되는 결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일년에 세례받는 영혼 하나 나오지 않는 목장의 목자는 남기 것이 없는 것일까요? 왕처럼 군림하며 영혼에 큰 관심이 없는데도 큰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가 있는 반면, 한 영혼을 천하처럼 여기며 양떼를 사랑하지만 개척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척교회 목사는 남긴 것이 없는 것일까요? 몸이 건강하고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항상 앞에 나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몸이 허약하고 성격도 소극적이어 헌신하고 싶으나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약하여 많이 헌신하지 못한 사람은 남긴 것이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을 가장 많이 한 헌금으로 여기십니다. 즉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심없이, 순전히 드려진 것만이 무게로 측정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공로주의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소원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만큼 최선을 다해 주님 앞에 충성을 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므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적은 눈에 띄는 업적을 얼마나 쌓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로 결정됩니다.

 

9. 충성한 자에게 주어질 영광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구원의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에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되심을 거절하지 않고 그 분을 왕으로 모셨기에 기본적으로 칭의구원을 받습니다. 칭의 구원은 믿는 순간 이미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 우리는 영화롭게 바뀌게 됩니다. 그것을 영화구원이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에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영광이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이룬 성화의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비유에서 귀인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못했던 자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기본구원인 칭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인은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의 권세를 주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줍니다. 반면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던 종은 그 한 므나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종들이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기는 과정은 바로 이 땅에서 이룰 성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들이 남긴 만큼 왕이 갚아주는 것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화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기와 눈물과 땀과 피와 헌신과 사랑과 열정과 꿈과 비전을 모두 알고 계시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행위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삶이 어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제 남겨진 삶을 어떻게 장사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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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목마름 (눅 19:1-10)

* 삭개오의 목마름

*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 삭개오, 우리의 자화상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발걸음은 여리고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라고 이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뜻은 "순수함"(pure) 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돈은 많으나 멸시받는 직업이 세리입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치는 일을 했고, 그 과정에 세금을 착복하며 거머리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셈이지요. “순수함”이 “더러움”으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은 더러운데 이름은 깨끗함으로 불리우고 있으니 이름 자체가 딜레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삭개오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창조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이 되고 일그러진 형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결해야 할 존재가 더러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특별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더러움으로 세상을 살아가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우리 안에 딜레마가 되고 맙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2000년전 한 세리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2.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이유, 목마름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다가 키까지 짜리몽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개역한글에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사실 우리가 아는 뽕나무가 아니고 돌무화과 나무입니다. 삭개오는 왜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에 부자였습니다. 세리들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나이도 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나무에 오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가 나무에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있는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목마름은 체면, 자존심, 시선, 손가락질 등을 넘어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돈이 있었고, 지위도 어느정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갖기 위해 그는 사회적인 지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손가락질 당하며 돈을 모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것을 누리며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심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충족되어질 수 있는 갈증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갈증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로 그 갈증을 채워보고자 애를 씁니다. 돈으로, 힘으로, 세상의 짜릿함으로, 사람으로, 학식으로, 명예로 어떻게 하든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만족을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만족에 속고 맙니다. 갈증이 채워졌다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목마름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가져 보았지만, 그런 썩어질 것들이 썩지 않고 영존할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목마름이 자신의 영혼을 살리게 될 열쇠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말이지요. 육체의 감각이 아닌 영혼의 갈증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3. 목마른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목마른 자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목마른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곳을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다른 잡다한 것으로 갈증을 축여보려 하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진정한 생수의 근원에 목말라 하는 모든 인생을 찾아 오시는 예수님을 삭개오를 통해 보여주시기 원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발걸음을 틀어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로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예수님은 왜 많은 사람들 중 삭개오를 주목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야 할만큼 목마른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에게 임재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마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4. 목마름의 대상, 예수님

사람들은 돈, 번영, 승리, 사랑, 행복 등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목마름을 충족시켜줄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갈증이 대상이요, 삶의 목적이며, 존재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다른 것이 없어도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은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이 말라 바닷물을 퍼마시면 어떻게 될까요? 더욱 더 큰 갈증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바닷물을 퍼마시기 위한 더 큰 바가지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커지듯이 세상 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들을 향한 갈구가 더 커지고 맙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말라 죽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수를 받아 마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바닷물이나 퍼마시라고 제공되어진 바가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실 생수, 즉 성령님의 임재에 목말라야 합니다.

 

5. 생수로 대체되는 바닷물

삭개오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목마름이 해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갈증이 해결되는 순간, 이전에 그의 목마름을 채워줄 것으로 여겼던 돈이 더이상 목마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가질만큼 가져보았고 그것을 갖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그것이 그의 갈증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정한 생수를 만난 것입니다. 생명의 물을 만나는 순간, 그에게는 더이상 잡동사니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떼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또한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4배를 갚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생수를 만난 사람에게 있어서, 바닷물은 그저 배가 떠있는 장소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는 것은 생수를 두고도 바닷물을 벌컥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수를 맛보면 맛볼 수록 세상의 것들이 가치가 없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은 과연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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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바디매오 (막 10:46-52)

  • 막차 탄 제자, 소경 바디매오

  •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1. 화려한 성읍 vs칙칙한 거지 소경

예수님의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다투었던 제자들의 이야기는 먼저 되었으나 나중된 자들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나중 되었으나 먼저 된 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디매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정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이 아니라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며, 디메오는 “더러움”, “어두움” 이란 뜻입니다. 소경으로 살아가므로 “어두움의 아들”이요, 앞이 안 보여 거지로 살 수밖에 없기에 “더러움의 아들”입니다. 그의 거주지는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향기의 성읍”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아름답고 쾌적한 곳이었습니다.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성읍에서 “어둠의 자식, 더러움의 자식”으로 버려진 채 사는 것이 바디매오의 인생이었습니다.

 

인생의 본질은 여리고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어둠의 자식이요, 더러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바디매오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저마다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속은 죄로 더러워져있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과 허무로 어두어져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은 모두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2. 육신의 눈 vs 영혼의 눈

화려한 성읍 속에서 어두움과 더러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눈 먼 거지 바디매오에게 한줄기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 앞을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아에 대한 별칭입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눈을 뜨고 그 하시는 일들을 뻔히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약속된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혼의 눈은 감겨 있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바디매오는 육신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영혼의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디매오는 더러움에서 벗어나 죄씻음을 받았으며,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의 눈이 더욱 많이 열리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는 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눈, 썩지 않을 하늘의 영광을 보는 눈 등이 바로 영혼의 눈입니다. 육적인 눈은 열려 있지만 영적인 눈이 닫힌 사람은 그저 멸망하는 짐승처럼 한 세상 아둥거리며 살다가 지옥의 땔감으로 멸망해갈 뿐입니다.

 

3. 어둠의 자녀 vs 빛의 자녀

바디매오는 어두움과 더러움 속에 묻혀 의미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리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일생에 딱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을 보내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 갑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만져서 열어 주십니다. 눈을 뜬 그는 예수님을 쫓는 제자가 됩니다.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단순히 앞을 보기 때문에 빛의 자녀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에 속해 어두움 속에 거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으로 들어와 빛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두움과 더러움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는 사람은 목청을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긍휼하심을 얻고 “어둠에서 빛으로, 더러움에서 정결함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어두움과 더러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면, 지금의 상태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되신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절박함으로 나아가는 자는 결국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벗어야 할 옷 vs 입어야 할 옷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 나아갑니다. 거지였던 그의 푸른 겉옷은 그의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있어야 사람들이 그가 거지인 줄 알고 돈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로 달려가는 그의 행위는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거지로 살지 않을거야, 이제는 더이상 어두움속에 살지 않을거야”라는 결단이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집착하는 것들이 사실은 바디매오의 겉옷 같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당장 죽을 것 같지만, 그것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손에 쥔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며, 눈 앞의 보배를 쥘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벗어야 할 옷이 있고,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죄악의 옷, 탐욕의 옷, 집착의 옷을 벗어야, 보혈의 옷, 성령의 옷, 은혜의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5. 가라 vs 따르니라

예수께서는 바디매오를 고쳐 주신 후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나 바디매오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가는” 대신 “따르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소경이요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공생애 3년 사역을 마무리하고 이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막차를 탄 셈이지요. 먼저 된 열두 제자들이 결코 가기를 꺼려했던 십자가의 길을 이 이름없는 제자는 기꺼이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이 이러했으면 합니다. 남들 다니니 다니고, 비지니스때문에 다니고, 외로워서 다니고, 복을 빌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주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주님을 좇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 세워져 갑니다. 오늘 하루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 적용질문

1.   화려한 세상에서 홀로 어둠 속을 헤메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2.   어둠가운데에 있을 때에, 또는 더러움 가운데 있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을 찾으십니까?

3.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빛가운데로 나아온 간증이 있으신가요?

4.   바디매오가 겉옷을 벗고 예수님께 달려가듯,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달려 가십니까?

5.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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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밭, 나그네의 무덤 (마 27:3-10)

* 피밭, 나그네의 무덤

* 마태복음 27:3-10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1.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도 되는 이유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보고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파는 값으로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다시 돌려 줍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가서 목매어 자살을 합니다. 유다는 자살한 곳에서 떨어져 창자가 배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편 대제사장들은 그 은이 예수님을 판 피값이었으므로 성전고에 넣지 않고 의논을 한 후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그 밭은 피값으로 샀다 하여 피밭이라 불렀으며,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계획과 경영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스스로의 입장 때문에 예수님을 팔 것을 결단하고 감행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시41:9). 대제사장들과 유다가 예수님의 몸값을 은 삼십으로 결정하지만,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릴 것도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슥 11:12). 대제사장들이 열심히 머리를 맞대어 의논한 뒤 돌려받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의 밭을 사지만, 그것마저 성경에는 이미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슥11:13). 그 은 삼십이 한 남종의 몸값이었다는 구약의 사실이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로 와서 인류를 위한 남자 종으로 팔린다는 것마저 우연이 아닙니다 (출2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팔고 죽이는 모든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결정을 하고 행동하지만, 그 모든 것이결국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해가는 일부분이 됨을 보는 것은 전율마저 일으킵니다.

 

2. 우리가 힘을 내고 살아야 하는 이유

피조물인 우리는 절대자의 손 안에 있습니다. 똑똑하다고, 가졌다고, 능력있다고 까불며 살지만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서면 그저 먼지와도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피밭이 하필 토기장이의 밭이어야 했던 것도,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리셔야 했던 것도, 피밭을 하필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사용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장엄하신 하나님은, 장엄함 속에서도 섬세한 터치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신음을 아시는 섬세한 분이시며, 동시에 모든 우주의 역사를 뒤흔드는 장엄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장엄한 능력으로 세심한 보호와 인도를 하시는 그 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3. 피값으로 산 밭이 토기장이의 밭이어야 했던 이유

원래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토기로, 인간을 빚으신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를 합니다. 토기는 토기장이의 용도와 목적을 위해 지어집니다. 밥그릇, 술잔, 장식용, 제사용, 잿털이, 심지어 요강 등 셀 수없을 정도로 많은 용도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가운데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토기가 망가지고 맙니다. 이제 그 토기는 다시 빚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것이 토기장이의 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는 멸망하는 옛자아의 토기를 깨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새자아의 토기로 새롭게 빚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몸값이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인 이유

우리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토기장이의 밭에서 새롭게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더이상 마귀에게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가 선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말씀을 많이 알아서도 아닌, 오직 예수님의 피값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빚어졌다는 사실 하나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유업을 당당하게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돈에 눌려, 질병에 눌려, 세상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당당히 받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은 삼십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종이 소에 받혀 죽으면 소 주인은 그저 은 삼십을 던져주면 가볍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출21:32). 예수님의 목숨이 이처럼 가볍게 취급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노예의 몸값에 팔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예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신 것은 모든 인류를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8:15).”

 

우리는 누가 뭐래도 전능자의 자녀입니다. 전능자의 자녀는 세상에 눌려 사는 것 아닙니다.

 

5. 피밭을 하필 나그네의 묘지로 쓴 이유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에게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습니다. 그 본향은 원래  우리가 온 곳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에서 왔으므로 나그네의 무덤에 묻혀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무덤을 통과하면, 우리의 영혼은 새몸을 입고 영혼의 원래 고향인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없이 우리는 본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와 같은 신세였습니다.예수님은 그 피값으로 우리의 영혼이 찾아갈 나그네의 본향, 즉 천국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값으로 나그네의 묘지를 삼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나그네 된 세상이 아닌 본향인 천국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습니다. 이 나그네 인생이 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그네의 여행은 잠시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원래의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가 고작 한달 동안 머물 여행지에서 집사고, 살림장만하고, 모든 것을 걸어 투자하고, 열심히 사업계획을 세우다가 한 달후 자기 집으로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나그네는 집에 돌아가 잘 살수 있도록 여행지에서는 최대한 부피를 줄이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그네 인생길에 모든 것을 짜내고 살다가 본래의 고향인 천국에는 빈털털이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는 하나님의 새로운 토기로서, 본향을 찾은 나그네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 적용질문

  1.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특권을 얼마나 누리고 사십니까?

  2.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좋은 그릇입니까, 진열장의 그릇입니까, 온갖 잡동사니로 꽉찬 그릇입니까?

  3. 나그네 인생길을 마치고 영원한 본향을 찾을 준비를 하고 사십니까?

  4. 여행지인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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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지상명령 (마 28:16-20)

* 예수님의 지상명령

* 마태복음 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 각기 다른 소명으로 도달해야 할 모두의 사명.

오늘 본문의 19-20절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 또는 ‘대위임령’ 또는 ‘대사명’이라 불리웁니다. 지상명령은 예수님께서 그 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동일한 사명을 갖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면서 이 일을 감당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것을 ‘소명’이라 부릅니다. 모두가 같은 사명을 받았으되, 또한 다른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각기 다른 소명을 가지고 완수해야 하는 이 공동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대에서 정산하게 될 가장 핵심적 주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아버지께 받은 모든 사명을 스스로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후에 제자들에게도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지상명령을 내리신 장소는 갈릴리의 한 산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사역하셨던 곳으로 제자들을 부르셔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기를 명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2. 믿음이 연약하고 흔들림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걸어야 할 길.

제자들 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보통 육신과는 달리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은데다가,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 현실화되면서 오는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기에 아직도 실제인지 믿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대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믿음이 약하여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고, 달려야 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에서 믿음이 굳어질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절감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고, 그 권세는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달리는 모든 이들을 통하여 고스란히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자 삼는 것.

대 사명에는 동사가 4개 나옵니다. 1) 제자 삼아라, 2) 세례를 줘라, 3) 가르쳐라, 4) 지키게 하라 입니다. 그 중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입니다. 나머지 동사는 ‘제자 삼으라’는 동사에 복속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1) 누가 누구를 제자 삼는 것이고, 2)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3) 누구의 제자를 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누가 제자를 삼는 것인가?

이 사명을 직접 받는 사람은 열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를 삼아야 하는 것은 그 열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고작 11명의 제자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려면 한 500년을 살아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명령은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사명 모든 이들의 사명입니다. 곧 제자된 자가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는 제자삼는 제자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그와 같은 제자를 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신 길을 동일하게 걷는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3) 누구의 제자를 삼는 것인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자신의 제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제자를 삼고, 자신의 추종 세력을 키우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이끌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스승되는 순간 다같이 멸망의 길로 가고 맙니다. 오직 우리의 주인이요 스승되신 주님의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야 할 따름입니다.

 

4. 예수님의 제자를 삼기 위한 첫단계, 영혼구원.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하여 세례를 받게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은 곧 영혼들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성부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5. 제자훈련의 컨텐츠.

우리는 제자를 삼아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을 가르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요약하면 대계명과 대사명으로 압축될 것입니다. 대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개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면서,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일을 감당하면서,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재생한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자훈련의 내용입니다. 수많은 성경공부와 세미나와 기도회와 모임들과 훈련들이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6.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켜 행하는 것.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은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키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지켜지고 행해지는 곳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지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고자 하는 사람은 처절한 몸부림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키는 것 이상을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온전한 제자를 삼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제자삼기 위해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히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 한명도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무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제자 삼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걸은 만큼 걸어오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자삼은 자가 거기에 도달하거든 함께 손맞잡고 몸부림치며 예수님의 분부하신 바를 지켜 나가면 됩니다. 누군가를 인도해야 하는 것만큼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갈 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인도해야 하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본을 보이며 가게 됩니다. 제자 삼는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온전한 제자가 되어가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 적용질문

1.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2.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시겠습니까?

3.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이십니까?

4. 내가 현재 제자삼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5. 누군가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로 인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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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의 표식 (눅 24:36-43)

* 영원한 사랑의 표식

* 누가복음 24:36-4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1. 인생의 가운데 서서 외치시는 예수님이 평강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 납니다. 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고, 빈무덤을 보고 제자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만났으며, 이어 베드로가 만났습니다. 시간을 흘러 저녁이 되었고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채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때에 엠마오로 떠났던 두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제자들은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굳게 닫았던 문만큼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 이라 하신 것이지요. “샬롬”이야 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샬롬”의 축복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자가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샬롬”의 복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샬롬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진정한 샬롬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서 샬롬을 빼앗아가고 말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중심에 서서 샬롬을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중심에 서셔서 샬롬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한 가운데 서서 샬롬을 외치시기 원합니다. 주님을 심령과 삶의 중심에 모셔야 평강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은 풍랑의 연속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샬롬을 잃지 않는 유일한 길, 그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을 인생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사랑의 표식

하지만 제자들은 갑자기 등장한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몸과 뼈가 없으나 나는 있다” 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난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몸이 뚫리셨던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서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너무 기쁘고 놀란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기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활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너무 기쁜 나머지 믿어지질 않을 정도의 감격과 기쁨이 있었다는 뜻닙니다. “It was too good to believe” 정도의 표현인 셈이지요. 그런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주님께서는 그것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영은 먹을 수가 없는데 먹는 것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 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확신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자상하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명장면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완벽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샬롬”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아직도 못자국과 창자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전의 연약하고 못생긴 몸이 아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몸을 그대로 갖고 부활한다면 우리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부활하기 싫을 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죽은 사람은 늙은 몸으로 부활해서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해야 할 것이고, 알츠하이머를 앓다 죽은 노인은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 폭탄에 의해 죽은 사람이나, 불에 타서 순교한 사람들은 몸이 흩어진 채 부활을 하겠지요.

 

부활이란 완전히 새로운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구멍이 메워지지 않고 뚫린 채로 부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그 몸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 못자국 난 손과 발을 볼때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창에 뚫린 옆구리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 구멍난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평강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과 불안은 오직 그분의 구멍난 손과 발이 만져질 때라야만이 평강과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이곳 저곳을 마음껏 날아 다닐 때에, 유일하게 구멍난 몸을 지니고 살아가시는 한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고통의 흔적을 영원히 안고 사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고통의 흔적이 곧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의 흔적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영원히!” 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지니신 예수님, 그 분 앞에 우리는 어떠한 사랑의 표징을 보여 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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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누가복음 24:13-35)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누가복음 24:13-35

본문이 길므로 해설과 적용도 깁니다. 본문은 직접 성경을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1. 실의와 낙망의 땅 엠마오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제자들에겐 믿기 어려운 허황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해 하던 두 제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실의에 빠져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도들과 함께 머물던지 아니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갈릴리를 향해 가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땅 엠마오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엠마오는 히브리어 하맛을 헬라어로 바꾼 것입니다. 온천이란 뜻이지요. 그들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의 꿈을 떠나 자신들의 몸이나 덥힐 곳 엠마오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를 향하는 시점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가 아닌 부활하신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빈무덤에 대한 소식,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천사들의 등장에 대한 소식,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빈무덤을 확인한 사실까지 이들은 모두 들은 후였습니다. 이쯤 되면 부활을 믿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만 3번, 논쟁 중에 말씀하신 것 포함 총 6번이나 예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회복의 땅 갈릴리가 아닌 자아의 땅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네, 천사를 보았네 하는 허탄한 소리를 지껄이는 동료들을 보며 ‘야~, 이제 다들 맛이 갔구나. 갈 때까지 갔네’ 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잠식한 낙망은 그들의 발걸음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2. 예수의 개입으로 구원의 샘이된 엠마오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안이 열려 멀쩡히 세상을 바라보며 걷고 있지만 영안이 가리워 가야할 길도 분별하지 못하고, 길을 인도할 예수님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을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것이라는 세밀하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낙망에서 벗어나 소망 안에서 새 비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는 온천이란 뜻이지만, 오늘날은 구원의 샘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곳의 온천에 몸을 담그면 치유가 일어난다 믿어져 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천물의 치유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온천의 의미가 구원의 샘의 의미로 전환된 것이 엠마오에 대한 이미지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몸을 덥히는 온천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구원의 샘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엠마오로 치닫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함께 손잡고 주님을 위해 뛸 동역자들이 있는 곳,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예수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전혀 중요한 인물들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입니다. 글로바가 누구인지 성경은 정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글로바와 함께 했던 다른 제자의 이름은 언급되지조차 않습니다.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엑스트라 같아 보이는 두 제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온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친히 찾아 오시고 말을 건네기를 원하십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믿음의 땅을 떠나 자아의 땅을 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메시야라고 오해된 채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추억 속의 스승’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믿음의 땅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더라도 그들이 향해야 하는 땅은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는 첫사랑의 장소요 회복의 땅입니다. 믿음이 사라져 버리고 소망도 날아가 버렸을 때, 그들이 찾아야 하는 땅은 갈릴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회복의 소망마저도 끊겨 버렸습니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가 아닌 엠마오를 향합니다. 엠마오는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아의 땅입니다. 이제 그들은 엠마오를 향해 발걸음을 하나씩 옮길 때마다 예수님께 걸었던 소망의 단편들을 하나씩 떨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절망되고 낙심되는 일이 생겼을 때 너무도 쉽게 믿음의 땅을 떠납니다. 애써 회복의 장소마저 피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 꼭꼭 숨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실망했어요. 이제 절 내버려 두세요.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할거에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래 오셨던 것처럼, 제 인생에서 빠져 주세요. 언제부터 저한테 관심이 있었다구…”

이렇게 중중거리면서 갈릴리의 반대 방향인 엠마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믿음의 땅으로 회복의 땅으로 돌리시길 원하십니다.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시고 우리 옆에서 나란히 동행하시며 말을 걸어 오십니다.

 

4. 영의 눈이 닫힌 제자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옆을 동행하시며 늘 말씀을 걸어 오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믿음의 땅, 회복의 땅, 소망의 땅, 사명의 땅으로 돌려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의 눈이 닫혀서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닫힌 이유는 눈을 가리는 지성의 커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간적인 지식이 눈을 가린 것이지요. 사람의 상식이라고 하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린 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지성의 커튼을 지성으로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풀어 주신 것이지요. 말씀을 알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눈을 가리워 버립니다.

 

눈을 가린 또 하나의 커튼은 감성의 커튼입니다.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 때문에 결국은 그 어떠한 소망의 메시지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감성의 커튼 역시 말씀을 통해 함께 걷어 내십니다. 말씀을 듣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고 그들을 잠식했던 절망은 이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5. 미련하고 믿음 없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예수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불쾌해 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미련하고 믿음 없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뭘 믿는지도 모른 채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자기의 의견, 자기의 생각대로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란 이름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련하고 믿음없는 그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의 무지와 불신을 거두어 주십니다. 이 때에도 역시 말씀이라고 하는 툴을 사용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우리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두사람은 우리에겐 소망을 던져 줍니다. 결코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 쉽게 믿음의 땅을 떠나 자아의 땅을 찾아 나서는 사람, 영안이 가리워져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도무지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옆에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첫사랑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소망을 되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감지할 수 없을 뿐이지요. 그 분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만져져야 합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이미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저 지식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만져져야 합니다.

 

말씀이 완벽한 진리가 되어 우리의 지성을 완전히 장악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뜨겁게 하여 우리의 감성을 완전히 장악해야 합니다. 더이상 내 생각 내 뜻이 내 삶을 지배하여 엠마오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삶을 이끌어 믿음의 땅으로 되돌아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진정 말씀이 각주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번호가 달리고 그 번호마다 각주가 매겨져야 합니다. 그 각주에는 우리의 언행 하나 하나가 어떤 말씀에 입각한 것이었는지가 성경구절로 적혀져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좌절과 낙망과 무지와 불신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도 말씀이 각주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6.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말씀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풀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두 제자는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10km를 걸어온지라 이미 해는 저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행을 하려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그 곳에서 유숙해달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양하셨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졸라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매달린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계속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탁월한 성경 학자 쯤으로 알고 존경하며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풀어 주시는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더 듣고 싶어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끈질기게 졸라대는 그들의 성화를 예수님은 이기지를 못하십니다. 가끔씩 엠마오의 두 제자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이 든데, 말씀을 전해달라 초대하는 사람도 있고 성경공부를 시켜달라 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다가도 끈질기게 졸라대면 더 사양할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을 내어 말씀을 전해도 귀에 막대기가 꽂혀 있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시간과 열정이 참 아까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알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영의 눈이 열린 제자들이 달려갈 길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그들과 함께 마을에 머무셨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고 축사하신 후에 그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오병 이어의 기적과 유월절 만찬의 데칼코마니이지요. 물론 두 제자는 최후의 만찬에는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순간에는 있었겠지요. 떡을 떼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뾰로롱하고 사라지십니다. 부활하신 몸은 우리의 육신과 달라서 시공의 제한이 없습니다. 또한 부활한 몸은 생전의 겉모습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나그네로,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은 어부 중 한 사람 쯤으로 오해하기도 했으니까요.

 

두 제자는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이미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까지 열려,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당장 일어나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 갑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고 이미 10km를 걸어온지라 육신은 지친 상태이지만 그 위험한 밤길을 지친 몸을 이끌고 앞뒤 잴 겨를 없이 급히 나섭니다. 그들이 향하는 예루살렘은 믿음의 성이지만 또한 위험의 성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를 잡아죽인 대제사장들의 무리가 여차하면 예수님의 잔당들을 잡아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린 자리입니다. 위험을 피해, 절망 가운데 도망나왔던 그 성을 향해 이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8. 함께 손잡고 뛰어야 할 동역자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했을 때에는 제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보았고, 여인들이 보았으며, 베드로까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저 빈무덤으로 예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 역시 엠마오 도상에서 자신들을 만나 주신 예수님에 대해 간증을 나눕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부활은 점점 만져지는 사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 중에 예수님을 깨닫게 되고 삶을 통해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면 그냥 앉아만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위험한 밤길도 지친 육신도 타이트한 스케쥴도 제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이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뛰는 심장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저 표본실의 박제처럼, 박물관의 모형처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이들로 교회는 넘쳐 납니다. 마음의 평안, 개인의 위로와 안식을 얻으면 그것이 다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정적이거나 개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뛰어 다녔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그 삶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두 제자는 자신들의 부활의 첫 증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시라도 빨리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들은 밤길을 마다 않고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또 다른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네번째 증인들이었을 뿐임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들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에이 1빠 놓쳤네” 그랬을까요?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려고 결심만 하면 그 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할 자를 예비해 놓으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기나긴 여정은 결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함께 하며 서로 나눔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함께 가기 위함이고, 외롭지 않기 위함이며 힘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 주며, 아껴주는 귀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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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옆을 걷는 사람들 (눅 23:26-31)

* 십자가 옆을 걷는 사람들

* 누가복음 23:26-31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1.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 하나를 소개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있듯이 그는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살다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잠시 방문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놀라운 기적의 사람이 처형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중들에 섞여 그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번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의 눈앞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붙들리신 이후로 심문을 받느라 잠을 한 숨도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온갖 구타와 매질을 당하시고, 채찍질로 인하여 몸은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찢겨져 나간 살점이 있던 자리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야말로 서있기만도 힘든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고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벼운 작대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로대 40kg, 세로대 60kg의 무거운 기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가차없이 가해지는 채찍질에도 도무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군인들은 십자가 행렬을 구경하던 건장한 청년 시몬을 불러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억지로” 말이지요. 그렇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의 첫만남을 대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을 특이한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막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 소개를 하는 것이지요.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입니다. 마가는 로마의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즉 구레네 시몬의 아들들은 로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루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루포는 로마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인 구레네 시몬의 부인 역시 바울의 영적 어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함께 지는 과정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통해 구레네 시몬은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후에 예수님을 위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아들 루포도 교회의 핵심적인 일꾼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한 가정의 구원을 가져온 것이지요.

 

2. 십자가의 영성이 실종된 시대 속에서 십자가 붙들기

현대의 크리스쳔들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교회를 고르는 기준은 십자가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리더들마저도 십자가를 지기 보다는 면류관을 쓰기를 기뻐합니다.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성도들이 모여 행복하게 교제하고 누리고 놀다가 한 세상 마감하는 것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를 찾을 때에 내가 질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없이 묻혀서 하는 일 없이 왔다갔다 하며 교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늘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감당이 안될 때에는 쉬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섬기는 물질이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과 힘듬을 모두 이해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에 기쁨이 없고 힘만 들다 할지라도, 그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자신이 회복에도, 하나님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 죽도록 섬겨도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욕얻어 먹을 것이 뻔한 일, 그런 일들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십자가는 숙명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상이지만, 가끔은 억지로라도 지고 가야 합니다. 처음엔 억지로였던 것이 결국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악용하여, 십자가를 버린다면, 진정으로 힘들고 고독한 그 십자가는 누가 지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탈진한 상태에서도 지셨던 십자가, 주님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십자가를 이제는 우리가 지고 갑시다. 십자가를 온전히 못 지겠거든 십자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따라갑시다. 십자가에 흘려진 피와 땀은 단 한방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은혜로 갚으십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옆자리를 지키는 여인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실 때 그 뒤를 따라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절대적 약자인 여인들이었습니다.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자신들을 찾아와 사랑으로 감싸주고, 삶의 무게를 덜어주었으며, 절망을 지워주신 그 분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분, 은혜를 베푸신 분이 땀과 피로 얼룩진 채 비틀거리며 십자가를 지고 걷다가 수도 없이 넘어지는 광경을 봐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여인들은 죄 없는 분이 학대를 당하고, 선하신 분이 십자가의 저주를 지며, 의로우신 분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닌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으로 울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에 대한 경고요, 회개에 대한 권고였습니다. 심판의 날이 올텐데 그 날에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 걱정할 것없이 자기 몸만 챙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차라리 산사태가 나서 자기들을 묻어 버리기를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가 너무 심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위하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자손들의 죄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있을 진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가르키고, 마른 나무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가르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신 것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그 죄들의 원 주인인 마른 나무같은 우리에게 가해질 진노는 도대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미 일차적인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날이 되면 이 경고는 다시 한번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 경고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영성과 하나님을 떠나는 아이들,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4. 오늘날 우리가 위하여 울어야 할 것들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울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르며 가슴을 치던 여인들처럼 예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의 가시 하나 하나, 예수님의 몸에 내리쳐진 채찍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의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것을 우리는 왜 가슴 아파합니까? 고통받는 한 인간의 아픔때문입니까, 그 아픔을 야기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까?

 

죄인인 우리에게는 죄가 하찮게 여겨지지만 절대선이신 하나님께 죄란 너무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공의를 행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죄를 진 죄인들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임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인생의 해가 저물고, 그 날이 오면 영혼에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쓰나미를 죄인인 인간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할 길은 오직 하나 은혜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법에 등록을 하는 자는 은혜에 의해 산다는 법입니다. 푸른 나무인 예수님께 가해졌던 진노와는 비교될 수 없이 참혹할 진노를 피하고 싶다면, 은혜의 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은혜의 법안으로 이미 들어와서 마른 나무에 임할 진노를 이미 피했다면, 우리의 눈물의 의미는 달라져야 합니다. 동정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사와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 결단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오르시는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울고 있습니까?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품어 보신 적이 없다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향한 감동이 죽어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그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아야 할 세가지의 물이 있습니다. 눈물, 땀, 피입니다. 주님을 위해 땀을 흘려 헌신하고, 피를 흘려 순종하기 전에 반드시 흘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물입니다. 죄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 죄를 용서받아 흘리는 감격의 눈물, 주님을 사랑하여 흘리는 사랑의 눈물, 주님을 향하여 살겠노라는 결단의 눈물로 우리의 심령이 촉촉히 적셔져야 합니다. 그 눈물없이 흘리는 땀과 피에는 열매도 기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헌신의 땀을 흘리고, 눈물이 있기에 고난의 피,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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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정, 하나님의 뜻 (눅 23:1-12)

* 인간의 사정, 하나님의 뜻

* 누가복음 23:1-12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1. 종교지도자들의 사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씌워 사형을 선고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갑니다. 밤을 꼬빡 새도록 심문과 구타와 모멸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한숨도 못 주무신 채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직접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가 사형 집행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정은 마20:18-19에 예언된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것,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라는 것, 죽일 권한이 없으므로 이방인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하는 것, 로마병정들에게 조롱받으며, 채찍질 당할 것,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 등의 예언이 로마의 섭정 하에 있다는 역사적 정황과 종교지도자들이 사형집행권을 못 가지고 있다는 사정에 의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2. 빌라도의 사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하필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성경의 예표가 현실이 되는 장면입니다. 원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유월절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대중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대중의 지탄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어야 한다는 예표가 성취가 되어집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평소에는 총독의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으나 유월절 축제기간이라 민란이나 소요를 대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가이사랴에 있었다면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이방인의 손에 죽는다는 예언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말한 예수의 죄목은 행악자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언도했지만,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통하는 범죄 사실이고 로마의 법은 그것이 통할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런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는 "행악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이 고발한 예수님의 죄목은 백성을 미혹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자라고 몰아 세워 로마법으로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의 구약들의 기록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 나무에 매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을 성취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모든 저주를 대신 지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인의 법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이 아닌 돌에 맞아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로마총독에 의해 죽는 것이므로 나무에 매달려 저주를 짊어진다는 예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흥분된 감정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을 처리해 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셔야 하는 저주는 바로 우리가 져야 할 저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기꺼이 나무에 매달리시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빌라도의 손에 의해 죽으시는 것 같지만, 사실 빌라도를 그곳에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3. 빌라도의 아내의 사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는데에 빌라도의 아내인 클라우디아도 한 몫을 합니다. 마27:19은 클라우디아의 사정을 소개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클라우디아는 꿈에 예수님으로 인해 애를 태워야 했기에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 꿈 얘기를 들려주며 예수님께 손대기를 만류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말하는 예수님의 말도 정치적인 입장이 아닌 종교적인 입장에서 하는 것임을 알아 차렸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피를 묻히기 싫은데다가 아내의 꿈 얘기까지 더해지니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이 꺼림직 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우유부단하고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정치적 입장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일로 유대인들의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면 그의 정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을 처헝하라고 소동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려운 일을 관할 지역의 왕인 헤롯에게 넘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고 채찍질하여 놓아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위해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그 결과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이사야서 53장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기록되어 있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채찍에 맞으셔야 했던 것이지요.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4. 악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인계받은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이적 행하시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수많은 질문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와중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헤롯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저런 죄목을 고하느라 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왕복처럼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 보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빌라도, 헤롯 등은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차이때문에 원수처럼 지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조롱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에는 모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악인들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괴롭히는 상황과 그 앞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고난의 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악인들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5. 역사를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

성경에서 예언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형태는 로마의 형벌 방식이 아니었다면 성취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손과 발이 뚫리고, 옆구리가 찔리며,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신포도주를 마시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행악자의 하나처럼 죽고, 부자의 묘실의 장사되고, 다리뼈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수많은 예언들이 십자가 사건 하나를 통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법에 의해 처형되셨더라면 돌에 맞아 죽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로마법에 의해 처형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역사의 시간과 공간이 모두 성경을 이루기 위해 맞추어지는 모습에 그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미리 수많은 예언을 주시고,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켜 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역사도 제국도 통치자들도 모두 떡 주무르듯 하십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우리는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주님 앞엣 신실하게 서서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잔머리 굴릴 필요도 없고, 악한 일을 도모할 필요도 없으며, 안달복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신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서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관자는 어차피 우리의 아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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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가리워진 자들 (눅 22:63-71)

* 눈이 가리워진 자들

* 누가복음 22:63-71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1. 눈이 가리워진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을 잡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안나스 역시 AD 7-14년까지 대제사장 역할을 했지만, 탐욕과 부정으로 인해 해임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탐욕으로 눈이 가리워진 자였습니다. 안나스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5명을 대제사장으로 만들었고, 사위 가야바까지 대제사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성직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돈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심문할 자격이 없었음에도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리고 안나스의 종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구타하며 예수님께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불법이었습니다. 안나스가 심문을 한 것도 불법이요, 변호인이 없이 심문을 한 것도 불법이요, 증인에 의해 죄가 확정되기 전에 구타를 한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법한 자들이었습니다. 입으로 법, 법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고 법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렸지만, 실상 눈이 가리워져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자들은 안나스와 그 종들이었던 것입니다.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2. 불법을 행하기 위해 의도적을 눈을 가린 자들

안나스에게서 1차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야바에게로 넘겨져 2차 심문을 받습니다. 안나스의 집과 가야바의 집은 한 집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소가 있는 아주 큰 집이지요.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두 군데나 되니 얼마나 큰 집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안나스가 1차 심문을 한 이유는 가야바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를 밤에 소집하는 자체가 불법이었습니다. 밤에는 피고인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는 해가 뜨기 전에는 모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재판을 하다가 해가 지면 재판을 중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예 밤에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형을 결정해놓고,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있는 죄목을 찾아 면밀한 분석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야바와 공회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진술에 대한 정확성 여부보다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는 것과 서로 일치하는 증언을 하는 최소 두 명의 증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두 증인은 율법을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공회에서는 수많은 거짓증인들이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그러나 단 두명의 일치하는 증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증인들이 거짓 증언을 남발하는 거짓 법정에 드디어 증언이 일치하는 두 증인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증언도 사실은 일치만 했을 뿐 거짓 증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요2:19)고 하셨던 것이지 "내가" 헌다고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지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으킨다”의 원어 “에게로”는 “깨우다, 일어나다"의 뜻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성전을 다시 짓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무너뜨리라는 성전 역시 헤롯 성전이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즉, “너희가 나를 죽이라 그러면 내가 삼일만에 부활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으므로 그 목적에 부합하는 대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죄목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노력하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죄목은 없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헐겠다니 이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치하지 않는 증언이었기에 사형을 위한 그 어떤 명분도 제시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도심문을 합니다. 하나님께 맹세하고 말을 하게 한 것이지요. 그것 역시 불법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불법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공회원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법을 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가리워진 자들은 의도적으로 눈을 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의 현실의 유익이고, 자신의 아젠다와 감정이 우선이기에 늘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법을 이용해 먹곤 합니다.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3. 눈이 가리워진 결과

불법을 행하며 불의의 재판을 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그 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비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예수님의 승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실제로 의자가 있어 성부 옆에 성자 예수님이 나란히 앉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지금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심판하고 사형에 처하겠지만,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공회원들이 심판을 받는 역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다시 부활하여 영광을 회복하시겠지만, 공회원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소멸되지도 못한 채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경고를 했는데도 공회원들은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하는 유도심문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말씀하셨으며, 공회원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들은 영의 눈이 가리워졌고, 육의 눈을 스스로 가리웠습니다. 그들은 지도 않는 재판을 불법적으로 자행하면서도 온갖 거룩한 행세는 다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눈이 가리워진다는 것은 그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4. 눈이 가리워진 자로 살지 말라

우리는 눈이 가리워진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눈이 가리워지는 이유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눈이 멀면 영의 눈이 가리워집니다. 자신의 감정과 지식에 묶여도 눈이 가리워집니다. 눈이 가리워진 자는 주님을 제대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청결히 하고 주님을 온전히 아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서 청결케 할수록 주님을 아는 깊이는 깊어져 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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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눅 22:14-23)

* 마지막 만찬

* 누가복음 22:14-23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 새로운 유월절을 주시길 원하고 원하셨던 주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과 문기둥에 발라졌을 때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던 출애굽 사건의 예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심령의 문에 발라졌을 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결코 감당하기 쉬운 잔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알 수 있듯,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했던 참혹한 고통을 거쳐야 했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때를 위해 지금껏 묵묵히 걸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기를 원하고 또 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피를 흘려 주셔야 바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그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문으로 들어가는 때는 곧 인간이 영광의 문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열리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온전히 사랑하실 때, 인류에게 진정한 유월절을 허락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죄를 사하실 때, 바로 그 때가 온 것이지요. 우리는 이 때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함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2. 완전한 유월절을 허락하실 주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먹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은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영원토록 그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게 됩니다. 그 때 먹고 마시게 될 유월절이야말로 진정한 유월절이 될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을 지키면서도 온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짐승의 피가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로 인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새롭고 진정한 유월절이 도래한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을 대표하여 흘리는 참인간 예수의 피요,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존재로 흘리는 참하나님의 피이기도 했습니다. 그 피를 믿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여전히 사람들은 온전한 해방을 이루고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하늘에서는 어린양의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날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승리와 영광의 의 유월절 만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때에야 비로서 유월절 만찬을 다시 드시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함께 하는 영광을 우리 역시 예약한 자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3. 새 언약을 주시기 위해 살과 피를 주신 주님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시간표는 이제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험한 길을 오르게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잔을 받으신 주님은 감사기도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빵을 먼저 나누고 잔을 먼저 나눈 것으로 되있지만, 유독 누가복음에서는 포도주-빵-포도주의 순서로 포도주를 두 번 나눈 것으로 기록을 합니다.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유월절 만찬에서는 포도주를 4번 나누었습니다. 그 중 누가는 첫잔과 마지막잔을 언급을 한 것이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마지막 잔만 언급을 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잔을 나눈 햇수가 아니라, 잔을 나눈 의미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최후에 완성될 하나님나라가 있으며 그 날에 유월절 만찬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빵 한 덩어리를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또 예수님은 잔을 나누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새 언약이란 신약, 즉 은혜의 약속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구약이 주어졌지요. 구약의 시대에는 율법의 시대였습니다. 신약의 시대는 은혜의 시대요, 성령의 시대이지요.

 

모세의 때에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감으로써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는 참인간이자 참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살 길을 열어주시는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으신 몸과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그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와 사망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은혜의 언약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친히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수혜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피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4. 은혜 안에 들어올 사람을 구별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들은 만인구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도무지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확히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에서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작정된 대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시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판 사실로 인해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목을 매어 자살했다가 목을 매었던 나무가 부러지는 바람에 당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창자가 튀어나오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의 영혼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만이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값없는 선물이지만,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인 사람만 그 선물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5.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기 원하시는 주님

누가는 본문에서 의도적으로 가룟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만찬의 자리에서 오가는 긴 대화와 이야기도 과감하게 생략합니다. 가룟 유다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누가의 관심은 철저하게 은혜로 주어진 새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랍들은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해 살이 찢겨지고 피를 흘리셔야 했던 예수님을 기념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찬식의 의미를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일년에도 몇 번씩 기념하는 예식이고 반복되는 설명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찬식을 통해 기념식은 거행하되 참된 기념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기억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예배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번거로운 절차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성찬식을 반복해갈수록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찬식에서는 크게 두 가지가 기억이 되어져야 합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성찬식은 한 그릇의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것이고, 한 빵을 나누어서 뜯어 먹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기억되어져야 하며, 빵을 먹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찢겨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와 그 살은 우리에게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져야 합니다. 나의 피 나의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극명한 차이 중 하나 역시 성찬식입니다. 카톨릭에서는 화체설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성찬식을 할 때에 실제로 포도주와 빵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되어 우리를 채우게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순히 성찬식을 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40년, 50년을 넘게 하며, 수백번이 넘는 성찬식을 해도, 자아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옹고집만 늘어갑니다. 화체설이 틀렸다는 증거이지요.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영적임재설로 해석을 합니다.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영이 임재를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 임재 안에서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린 사람은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찬식의 햇수가 늘어날 수록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성찬을 대충 하기에 예수님의 자리는 없고 자아만 펄펄 살아 뛰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기억되어져야 할 또 한가지는 바로 우리가 한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큰 포도주 잔 하나를 돌려 가며 마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서로 나눠 마시게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마시고 그 잔을 돌려 모두들 마시게 한 것입니다. 빵도 한 빵을 두고 거기에서 뜯어 먹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나눈 사이이고, 예수님의 살을 나눈 사이라고 하는 것이 성찬을 통해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크리스쳔 가정에서도 여전히 불화가 존재하고, 크리스쳔 시어머니와 크리스쳔 며느리가 사는데도 고부 갈등은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성찬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폼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는 더욱 심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 싫고 저 사람은 저래 싫습니다. 땀흘리고 헌신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고, 영적 전쟁을 함께 치루어야 할 전우인데 서로를 공격하고 헐뜯고 비방합니다. 성찬을 대충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이라면 자아는 죽고 예수님만 사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을 찢고 피를 흘려 그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만 사랑을 말할 뿐,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모욕이요, 예수님의 피값을 헐값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죽고 예수님만 우리 안에 사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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