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의 표식 (눅 24:36-43)

* 영원한 사랑의 표식

* 누가복음 24:36-4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1. 인생의 가운데 서서 외치시는 예수님이 평강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 납니다. 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고, 빈무덤을 보고 제자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만났으며, 이어 베드로가 만났습니다. 시간을 흘러 저녁이 되었고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채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때에 엠마오로 떠났던 두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제자들은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굳게 닫았던 문만큼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 이라 하신 것이지요. “샬롬”이야 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샬롬”의 축복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자가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샬롬”의 복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샬롬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진정한 샬롬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서 샬롬을 빼앗아가고 말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중심에 서서 샬롬을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중심에 서셔서 샬롬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한 가운데 서서 샬롬을 외치시기 원합니다. 주님을 심령과 삶의 중심에 모셔야 평강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은 풍랑의 연속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샬롬을 잃지 않는 유일한 길, 그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을 인생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사랑의 표식

하지만 제자들은 갑자기 등장한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몸과 뼈가 없으나 나는 있다” 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난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몸이 뚫리셨던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서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너무 기쁘고 놀란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기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활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너무 기쁜 나머지 믿어지질 않을 정도의 감격과 기쁨이 있었다는 뜻닙니다. “It was too good to believe” 정도의 표현인 셈이지요. 그런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주님께서는 그것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영은 먹을 수가 없는데 먹는 것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 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확신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자상하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명장면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완벽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샬롬”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아직도 못자국과 창자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전의 연약하고 못생긴 몸이 아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몸을 그대로 갖고 부활한다면 우리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부활하기 싫을 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죽은 사람은 늙은 몸으로 부활해서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해야 할 것이고, 알츠하이머를 앓다 죽은 노인은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 폭탄에 의해 죽은 사람이나, 불에 타서 순교한 사람들은 몸이 흩어진 채 부활을 하겠지요.

 

부활이란 완전히 새로운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구멍이 메워지지 않고 뚫린 채로 부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그 몸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 못자국 난 손과 발을 볼때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창에 뚫린 옆구리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 구멍난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평강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과 불안은 오직 그분의 구멍난 손과 발이 만져질 때라야만이 평강과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이곳 저곳을 마음껏 날아 다닐 때에, 유일하게 구멍난 몸을 지니고 살아가시는 한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고통의 흔적을 영원히 안고 사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고통의 흔적이 곧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의 흔적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영원히!” 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지니신 예수님, 그 분 앞에 우리는 어떠한 사랑의 표징을 보여 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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