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시간 순으로 묵상하는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는 기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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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눅 1:67-75)

  •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 누가복음 1:67-75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1. 요한과 예수라는 이름에 얽힌 뜻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세례 요한이 탄생한 순간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가랴의 예언이 세례 요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가랴의 예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베풀어질 구원을 노래하고 있고, 후반부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났는데 왜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가랴가 예언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예언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은 이미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아이를 잉태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고 부정적인 대꾸를 했다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살아야 했습니다. 말을 못하는 10개월의 시간동안 사가랴는 천사가 일러준 예언에 대해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탄생하는 순간 입이 열려졌습니다. 사가랴는 자신의 입술을 통해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가 기억하는 예언과 묵상에 더해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셔서 사가랴로 하여금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바로 세례 요한이 온 목적이 메시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오지 않으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메시야에 앞서 반드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올 것이라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과 메시야 예수님은 한 세트와도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친족들은 모두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사가랴로 하기 원했지만,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할 것이라 고집합니다. 이 때 아직 입이 풀리지 않은 사가랴가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어서 보여줍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은 여호와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여호와의 구원이란 뜻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름을 통해 천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찬송의 이유

사가랴는 그 예언을 찬송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찬송이야말로 메시야를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하시기 위해 구원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망해도 천국이고, 죽어도 천국입니다. 즉 망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마 어마한 은혜를 값없이 받고도 우리는 찬송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없이 주어진 것이고, 하늘의 복락이 아직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혀지지 않다 보니, 천국을 유업으로 주신 은혜가 너무 하찮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원망하거나 불평할 눈꼽만큼의 자격도 없습니다. 고통이 오면 그 고통이 없는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가 더욱 더 또렷해져서 찬송을 해야 하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돌보신다는 말은 도움을 주기 위해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살피기 위해서는 방문해야 합니다. 어루만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고 살피시고 찾아와주시고 어루만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백성을 속량하신 분이십니다. 속량한다는 말은 몸값을 치루고 놓아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값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대신 치루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뿔은 권능을 상징합니다. 사가랴는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능력입니다. 능력이 없이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 앞에 서계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뿔을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경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 종 다윗의 집에서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다윗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다윗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시 132:17-1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다윗에게서 뿔이 날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뿔입니다. 구원의 뿔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에게 수치를 옷 입히고 그리스도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예표된 바 있습니다 다윗의 모든 원수와 대적들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요. 그 예표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역시 그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원수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우리의 왕관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3. 그리스도의 오심은 언약의 성취

사가랴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만 무려 300개 이상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예언들을 문자 그대로 성취하시면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다 하늘로 올려 지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구원이 있다, 저기에 구원이 있다 떠들어 댑니다. 예수님 이외에 구원이 있다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 주장들에는 어떠한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에는 역사성과 예언의 성취와 논리라고 하는 측면에서 그 어떠한 오류도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다음의 간추려진 예언들과 그 성취를 보십시오.

 

* 창 3:15 - 여자의 후손으로 올 것이다 –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됨

* 창 12:3, 창 17:19, 민 24:17, 창 49:10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의 후손이어야 한다 – 족보 일치

* 사 9:7 – 다윗의 왕권을 이은 자라야 한다 – 법적 아버지와 육신의 어머니 모두 다윗의 후손

* 미 5:2 –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한다 – 부모가 갈릴리에서 살다가 호적신고를 위해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와서 애를 낳아야 했음. 호적신고는 10년에 한 번 있는 흔치 않은 이벤트였음.

* 호 11:1 – 탄생 시에 애굽으로 피할 것이다 –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건너감

* 렘 31:15 – 탄생 시에 유아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 헤롯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비슷한 또래의 모든 남아들을 학살함

* 사 40:3-5, 말 3:1 –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지자가 광야에 있을 것이다 – 세례요한

* 시 2:7 –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것이다 – 세례요한 외 다수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

* 사 9:1 – 갈릴리에서 사역할 것이다 –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본부였음

* 시 78:2-4 – 비유를 사용할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비유로 하심

* 사 53:3 –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을 것이다 – 동족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버림

* 슥 9:9 –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다 – 예수는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 시 41:9 – 제자의 배반을 받을 것이다 –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함

* 슥 11:12 – 은 30에 팔릴 것이다 – 예수를 판 대가로 유다가 받은 돈은 정확히 은 30

* 슥 11:13 - 토기장이의 밭 값에 팔리실 것이다 – 예수님 사후에 유다는 후회하며 돈을 돌려주고,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음

* 시 109:7,8 – 예수님의 판 자는 죽게 되고, 그 자리를 타인이 대신 할 것이다 – 유다는 자살하고, 유다의 자리를 맛디야가 대신하게 됨

* 시 35:11 – 거짓 고소를 당할 것이다 – 예수님은 죄가 없었으므로 거짓으로 고소를 했음

* 사 53: 7 – 심문에 침묵하실 것이다 – 빌라도와 유대 종교자들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심

* 사 50:6 - 침 뱉음을 당하고 매맞으실 것이다 – 문자대로 성취됨

* 사 53:12 - 악인들과 함께 못박히실 것이다 – 왼 편과 오른 편에 강도들이 함께 못박혔음

* 슥 12:10 - 손발을 찔리실 것이다 – 유대의 형벌은 돌로 치는 것이었음. 예언 당시 손발이 찔리는 형벌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마형벌인 십자가에 박힘으로 성취

* 시 69:21 - 쓸개와 신포도주를 받으실 것이다 – 십자가 위해서 실제로 이루어짐

* 시 109:4 - 원수를 위한 기도를 할 것이다 –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심

* 시 22:17,18 - 옷이 제비뽑혀 나누어 질 것이다 – 예수님의 통으로 짠 속옷을 차지지려고 로마병정들이 제비를 뽑음

* 시 34:20 -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실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버리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소리치심

* 시 22:1- 그 뼈가 꺾이지 않을 것이다 – 십자가 형벌 시 빨리 죽여 고통을 줄여 주려고 다리 뼈를 꺽는 것이 상례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다리뼈를 꺾지 않았음

* 슥 12:10 - 옆구리가 찔리실 것이다 – 다리 뼈를 꺾는 대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음

* 사 53:9 –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다 –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의 묘에 장사됨

* 시 16:10 – 부활하실 것이다 –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하심

* 시 68:18 -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것이다 –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심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알 수 있도록 미리 구약 성경에 구원자에 대해 그림을 그려두셨습니다. 그 그림에 정확히 일치하시는 분만이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와 사상에는 바로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주장은 하되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구원이 거기 있다 떠벌일 수 있지만, 신뢰할 만한 근거의 유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4.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사가랴는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언약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이전에도 언약되어 있는 것이었지요.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화된 언약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례요한의 부모들의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이름이 한 셋트를 이루는 것처럼 세례 요한의 부모들의 이름도 한 셋트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이름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 뜻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둘을 합해 놓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들의 이름마저도 의미를 두시는 하나님의 기가 막힌 섭리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공고케 해주어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닻을 제공해주곤 합니다.

 

5.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사가랴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짧게 요약합니다.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기 위함과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심이라는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대적은 수치로 옷을 입고, 우리의 왕관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결정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결정된 승리를 누리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고, 의롭게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늘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밀려 옵니다. 성결하게 못 살았으니 구원을 잃지는 않을까, 의롭게 못 살았으니 하나님께서 호적에서 파버리시지는 않을까 두려워 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은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성결과 의에 실패했다고 하여 예수님의 피값이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없이 다시 일어나 성결과 의를 향해 다시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실패했다고 하여, 또는 반복적으로 실패한다고 하여 소멸될 구원이라면 우리는 이내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던져 애를 써도 완벽한 성결과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에 제약이 없기에, 우리 안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또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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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 (마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

  • 마가복음 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탄생 설화 없이 바로 공생애가 시작되는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설화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구절 하나를 제시하고는 바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에 진입합니다. 마가는 왜 이처럼 급하게 휘몰아치는 저술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가복음의 주제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왕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래서 왕의 족보가 등장하고 탄생설화도 간략하게나마 제시가 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 사람은 전 인류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의 왕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 요한의 탄생설화까지 기록되어 있지요. 누가복음의 주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탄생으로부터 시작하기에 탄생설화에 시간을 많이 할애합니다. 탄생설화 후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삽입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족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마태의 족보와는 다릅니다. 마태의 족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족보라고 한다면,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올라가 다윗을 넘고 아브라함을 넘어 아담을 만나는 족보입니다. 누가복음의 독자는 헬라인이었기때문에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족보가 있습니다. 그 족보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곧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요. 누가는 족보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논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탄생 설화도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요한이 그리고자 했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족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저 위에서 은혜로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자, 생명이시자, 빛이라는 말씀으로 선포하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탄생 설화와 족보가 없습니다. 종에게 무슨 족보가 있겠습니까? 종이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종은 그저 맡겨진 임무를 다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공생애로 바로 들어가 할 일을 묵묵히,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하실 뿐입니다.

 

2. 마가가 예수님을 고난의 종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입니다. 요한 마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여호와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으로 망치라는 뜻이지요.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사도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베드로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가복음의 독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1차 독자는 로마제국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로마시대는 특별히 황제를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라 불리웠습니다. 신이 인간화 된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환난과 궁핍과 죽음을 향한 지름길이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마가복음을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집필의 목적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가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는 바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길의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있지요. 마가복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는 영광으로 끝납니다.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에 의해 변절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짧습니다. 확확 지나가지요. 종이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강해설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종은 말을 할 시간이 없지요. 또한 곧장, 즉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종은 명령에 즉각 순종해야 하니까요. 족보도 없습니다. 종이 족보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요. 또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에 특별한 관심과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3. 마가복음의 핵심 주제: 제자도와 제자들이 받게 될 영광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핍박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지탱하게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첫째, 마가복음에는 제자도가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았으니, 그 제자도 당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메시지입니다. 마가는 이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것을 잘 활용합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삽입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의로운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한낱 십대 소녀의 춤바람에 그 목숨이 날아갑니다. 그 이야기를 굳이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 사이에 삽입을 합니다. 이것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선교하는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순교 – 선교보고하는 제자들”의 순서로 되어 있는 모습이 샌드위치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삽입하여, 세례요한의 모습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는 세례 요한처럼 의를 위해 핍박받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받게 될 영광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허무하게 죽고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광스럽게 승천하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인 16:20절은 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제자도를 다시 강조하고 있지요.

 

공생를 사시는 동안에도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종처럼 즉각적인 순종을 하며 사시는 모습을 그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일화들을 소개를 합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치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고, 오병이어나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베푸는 것 등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은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여인과 회당장 야이로는 믿었기 때문에 영광을 누립니다. 여기서도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샌드위치 기법을 씁니다. ‘죽어가는 딸을 둔 야이로의 이야기 – 혈루증 여인 치유이야기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보면 구조가 샌드위치같지요? 이런 기법을 쓴 이유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믿음을 보았기에 회당장 야이로가 죽은 딸도 살아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으면 영광을 본다는 것이지요.

 

믿음을 통한 영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이방인이나 여인에게도 열려 있지요. 그것을 잘 드러내는 본문이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장면입니다. 이방인이며, 여인이었고, 심지어는 가나안 족속이었던 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4. 모든 이야기를 응축한 한 구절

마가복음 1:1절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복음

복음이란 단어는 원래 성경적 용어가 아니라,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황제가 태어났을 때, 전쟁에서 로마군이 승전했을 때, 쓰던 용어입니다. 그러나 황제가 탄생한 것이 정말로 기쁜 소식일까요? 황제를 섬기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까? 로마가 승리하는 것이 기쁨일까요? 로마의 압제 아래서 얼마나 많은 민족이 아픔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복음은 황제의 탄생도 아니고, 로마의 승리도 아니고 진정한 기쁨의 소식이 있다라는 말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고 예표된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갈릴리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발할 것이라 예언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 중 에봇받침 겉옷에는 금방울과 석류모양의 공이 번갈아 가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서 아름다운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이지요. 이 역시 복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로마 황제가 신이라 거짓 주장을 하지만 그는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로마 황제를 믿는 사람은 핍박을 면하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보장 받습니다.

 

그 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 하나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오셨으니, 그 구원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직분이라고 했지요? 메시야가 약속된 구약시대에는 기름부음을 받는 세 직분이 있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원래 우리가 지니고 있던 세상에 대한 왕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으로 오셔서 단 한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마가복음,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누가복음,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사복음서가 모두 합을 이루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마가는 특별히 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자,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또한 선지자이자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 역시 함축을 해두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 제사장, 선지자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면서도 강조점은 역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둠으로써 제자도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3)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의 가장 강력한 강조점은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마가는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을 견디고 이겨낼 당위성과 함께, 그것을 이겨낼 용기와 희망도 함께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마가복음은 고난의 책임과 동시에 영광의 책인 셈이지요. 고난에 참예한 자가 영광에도 참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하나님의 영광의 잔에 참예하기 위해 오늘 고난의 잔에 참예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성탄은 분명 그러한 날입니다. 성탄이 진정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기뻐하고 즐거워함과 동시에 십자가를 향한 결단이 있는 날이어야 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결단하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꿈꾸는 즐거움이 있는 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No Thorns, No Throne.

No Gall, No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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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임마누엘 (마 1:18-23)

  • 예수, 임마누엘

  • 마태복음 1:18-23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 왜 처녀가 아이를 낳아야 했는가?

예수님은 그 탄생에서부터 논란거리를 제공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것이 예수님이라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즐겨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처녀가 어떻게 애를 낳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예수의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마리아가 판테라라는 로마 병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낳은 것이 예수’라는 헛소문까지도 만들어 낸 바 있습니다. ‘처녀 생식’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처녀 잉태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사실 처녀 잉태는 성경이 사람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썼다면 누가 봐도 믿을만한 이야기, 누가봐도 경건해 보이는 이야기를 실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종교를 만들면서 교주가 처녀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교주나 그런 교주를 가진 종교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비웃을만한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어느날 갑자기 처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는 그 순간에 처녀의 몸에서 난 자(여자의 후손)가 마귀(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700 년 전에 이사야라는 선지자에 다시 예언이 되어집니다. ‘메시야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가 사생아였기 때문에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미화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예언이 이루어진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애를 낳을 수 있냐고 물으시겠지만 이는 전능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망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흙으로 형상을 빚은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한 줌의 티끌로부터 사람을 만들어 내신 전능자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생물인 티끌에 생명을 부여하신 바 있는 전능자 하나님께 이미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 아이가 생기게 하는 것쯤은 전혀 힘든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처녀의 몸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인간이 믿을 만한 방식이 아닌 아무도 믿지 못할 방식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가 유전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첫사람 아담의 죄는 그 다음 대로 유전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유전은 오직 남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 결국 남자의 몸을 받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의 값인 죽음을 죄인들 대신 맞이해야 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죄가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남자를 통하여 탄생하면 죄가 유전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처녀의 몸에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죄인인 인류를 대표하여 죽어야 하므로 인간이어야 하고, 죄가 없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하므로 남자의 육체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여야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수 천년, 수 백년 전에 미리 예언을 해주시고, 의심많은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근거까지 마련해 두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사생아가 아니라 사람임과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란 자리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그 흉내낼 수없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2. 죄를 단죄하지 않은 요셉을 의롭다 하는가?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이라 설명하였건 간에 요셉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요셉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결혼 예법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다음과 같은 3단계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1) 약정: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부모가 결혼할 상대를 미리 정했습니다.

 2) 약혼: 약정을 했더라도 당사자들이 성년이 되면, 약정에 동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약정에 동의 하면 당사자간에 약혼이 성립됩니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이었는데, 만일 이 약혼을 파기하기 원하면, 적절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을 때는 바로 이 약혼 단계였습니다.

3) 결혼: 1년의 약혼 기간이 지나면 당사자들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에 약혼한 사람은 같이 살지만 않을 뿐, 부부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에, 약혼 중에 간음한 여인은 간음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약혼한 여인이 간음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마을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여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배신감과 함께,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배신감이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혈기로 바뀌어 약혼녀를 고발했을 것이고, 돌로 쳐죽이는 일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통 사람들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고발하지 않고 파혼 증서를 주어, 조용히 그녀와 맺은 약혼을 파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리아는 처벌 받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요셉의 행위를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은 다른 이들의 부정을 밝혀내고 헤집고 정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반대의 행위를 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녹아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자면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하는 자의 죄를 덮는 사랑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이자, 율법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의는 사람의 죄를 모두 씻게 하는 사랑을 위해 사용됩니다. 사람들의 죄를 전가받고, 예수님의 공의를 인간에게 전가하여 사랑과 공의를 모두 이루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를 덮는 사랑에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를 덮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이라 부른 것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데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고 오히려 그의 살 길을 모색해주는 넉넉함과 자비로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자신은 성결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극도의 성결을 요구하는 현대 크리스쳔들의 일그러진 모순 속에서 요셉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인류 가운데 보내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그림언어로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요셉을 왜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게 될 요셉의 법적 아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족보로 그의 책을 시작했던 이유는 바로 그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담으로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담은 최초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며, 또한 유대인들의 조상이 아니라 전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일단 메시야의 족보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메시야는 유대인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왕권을 물려 받고 와야 합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하며, 다윗의 후손이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첫번째 조건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마태와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들을 각각의 관점에서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부친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 탄생 사건을 기록한 반면, 누가는 실제로 예수를 낳은 모친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생리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닌 요셉의 족보를 취하지 않고, 실질적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를 따라 기록한 것이지요. 누가는 누가복음 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눅3:23).

사람들이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요셉의 아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의 피 한방울 섞이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족보는 남자의 이름을 기록하여야 했기에 요셉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아버지입니다.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1:16).

 

결론적으로 요셉도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요셉의 족보(마1장)와 마리아의 족보(눅3장)는 다윗의 아들까지 동일하다가 그 밑에서 갈립니다. 요셉은 다윗과 밧세바의 넷째 아들인 솔로몬의 후손이고, 마리아는 다윗과 밧세바의 셋째 아들 나단의 후손입니다.

 

이는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언약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즉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를 통해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원이 철저히 언약에 근거함을 하나님께서는 족보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요셉을 굳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확고하게 합니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뿐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영접한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언약이 있기에 우리의 구원은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4. 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성취인가?

요셉은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말씀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 단어들이 어떻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단어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 틈에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구약에서 수도 없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은 그곳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서기를 두려워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를 이기게 해주겠다고 하는 말보도 더 위대한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구원도 승리도 성공도 번영도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나, 이사야나, 다윗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수많은 위경에서 구원받는 삶이었고, 승리를 경험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델은 그저 그림자일 뿐이며, 진정한 임마누엘은 예수를 통해 성취되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특별한 임무를 할 수 있도록 동행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임마누엘 하신 이후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이사야 등과 같은 신앙의 선진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그 임마누엘의 은혜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구원을 베푸시고 승리를 주시는 은혜와 영광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 임마누엘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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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생명, 빛 (요 1:1-18)

로고스, 생명, 빛

요한복음 1:1-18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육신이 되어 이 땅위에 오셨습니다 (요1:14). 말씀=예수님, 말씀=하나님, 그러므로 예수님=하나님이는 공식이 성립되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삼위일체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구절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관점에서 복음서를 쓰기를 원했기 때문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입니다. 왜 요한은 로고스라는 용어를 썼을까요? 신약성경은 모두 당시의 제국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그 대상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록이었으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만한 용어를 선별하였습니다.

 

로고스는 헬라철학에서는 ‘절대이성’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모든 사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헬라철학에서 로고스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헬라문명에 익숙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로고스’란 단어는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이성, 또는 절대진리가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 확 느껴지는 용어가 바로 로고스였습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를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말씀이나 지혜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말씀이나 지혜는 구약 성경에서 자주 의인화되어졌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하나님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있어서 로고스 즉 말씀은 곧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 하나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에게 효율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였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 사이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저 한 인간이 사랑을 베풀며 살다가 십자가 형벌을 받은 사건 정도가 아니라, 창조주가 그 피조물들 중의 하나로 오신 사건입니다. 그것도 의롭고 선한 태초의 피조물이 아닌, 더럽고 추한 죄인으로서의 피조물 사이에 오신 것이지요.

 

2. 생명과 빛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로고스는 창조한 피조물에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무로부터 유를 창조했기 때문에는 태초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신 로고스가 생명을 주입한 것이지요.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는 흑암과 무질서였습니다. 로고스는 그 흑암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로고스가 창조한 세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죄로 인해 피조물인 인간이 생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은 빛대신 어두움으로 가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 결단은 스스로 피조물처럼 물질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잃은 인간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고, 빛을 잃고 어두움 속을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빛이 되어 주고자 했습니다. 즉 스스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그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진 부분은 사실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보다도 성육신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형체를 버리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형체를 입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없는 인생은 죽음이요, 어두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죽음 속에 거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어두움 속에 거하는 우리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처럼 살며, 어둠의 자식처럼 사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같은 심령과 인생이 생명력있는 심령과 삶으로 바뀌고, 어두운 심령과 인생이 빛나는 심령과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3. 육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바꾸시는 예수님

구약의 제사 형태에는 번제와 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고 소제는 곡식을 빻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번제와 소제는 모두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번제가 되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불태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소제가 되어 자신의 형체를 철저히 버리셨습니다. 소제로 드려지는 곡식의 가루는 그 형체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한 줌 집어 바람에 날리면 이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사라질 정도로 고운 가루로 빻아서 드려지는 것이 소제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로 소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자신이 형체를 철저히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처럼 연약함과 고통과 슬픔을 몸소 느끼면서 살아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한 번제와 소제로 드려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죄인인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빛이 들어온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심령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그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의 영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므로 심령에 성령님을 모신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의 변화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에는 반드시 권세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신을 통해 전달된 죄된 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영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4. 은혜에 은혜를 더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표현합니다. 독생자라는 표현은 외아들이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독자라는 뜻이 아니라, 발생이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부류라는 뜻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감히 죄인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오히려 그 영광을 보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영광을 보기를 원했던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 직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시는 속성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내 주신 것이 예수님이었기에 예수님의 영광은 곧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충만 그 자체이십니다. 충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중에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심령 안에 거주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을 안에 모시면 예수님의 충만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충만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본문의 말씀은 옛 은혜를 새 은혜로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째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충만이시기 때문입니다. 충만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한번의 은혜가 아니라, 주어진 은혜를 다시 덮어 버리는 더 큰 은혜로 밀려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충만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은혜는 기존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덮는 은혜입니다. 은혜의 파도가 지나갔다 싶으면 더 큰 은혜의 파도가 옵니다. 어제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위에 오늘의 은혜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은혜의 파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위에 내일의 은혜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더한 은혜로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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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은 좋은 그릇에 (마 9:14-17)

* 좋은 음식은 좋은 그릇에

* 마태복음 9:14-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 본문해설

세리였던 마태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지에 대해 트집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조라는 우월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당 수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함께 있을 때는 늘 금식을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더니 금식을 하지 않더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스승이 그 모양이니, 제자들이 그 모양이지’ 않겠느냐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스승은 왕에게 의로운 말을 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데, 예수는 한가로이 죄인들과 식사와 포도주를 즐기고 있으니 납득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원래 율법이 제정한 금식일은 속죄일(7월 10일) 아침부터 저녁 하루 뿐 (레16:29)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러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국가적 재난(삿20:26)이나, 병들었을 때(시35:13), 애곡할 때(삼상31:13), 회개할 때(왕상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20:3) 등입니다.

특별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동안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으므로, 회개를 위해, 그리고 구원의 호소를 위해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일은 당연히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는 날들로 지정이 되었지요. ① 성전이 불탄 날(5월 7일 / 왕하25:8-9), ② 그달리야 피살일(7월 2일 / 왕하25:23-25), ③ 성전 포위 개시일(10월 10일 / 왕하25:1), ④ 성전 함락일(4월 9일 / 왕하25:3-4) 등이 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율법을 특별히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이 외에도 일주일 두 번 금식을 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목요일 날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날 월요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개인의 신앙에 따라 더 많은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금식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히브리어로 ‘아나 나페쉬’라 하여 “영혼을 괴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본성 중 하나인 식욕을 제어함으로써 온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을 통회하는 심령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해하고, 하나님 없이는 단 한줌의 소망도 없음을 가슴아파하는 것이 곧 금식의 목적이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오는 육체의 고통은 그러한 심령의 고통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었던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금식은 어느덧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금식은 자기 신앙을 과시하는 행위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금식을 하니 육신은 괴로운데, 영혼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로 충만하여 오히려 즐기는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금식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저 끼니를 거르면서 자신의 육신만 괴롭게 하는 굶식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금식은 오히려 해롭습니다. 급식을 먹는 초등학생들처럼, 금식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악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금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즐거워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애통해 해야 할 때가 있고, 춤을 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는 금식을 할 때가 아니라, 먹고 즐겨야 할 때였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은 엄청난 핍박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금식을 밥먹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릴 일이 많아질테니까요. 금식은 폼으로 하는 굶식이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치기어린 행동이 아닙니다. 금식은 괴로운 심령(아나 네페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가 막힌 비유를 하심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여 팽창할 때 낡은 부대는 터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헌 부대’는 유대교를 의미합니다. ‘새 포도주’는 복음을 의미하고,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낡은 포도주는 ‘율법’을 의미하겠지요. ‘새 부대’는 새 포도주인 복음을 담을 새로운 그릇, 그리스도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낡아터지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유대교의 형식 안에 복음의 생명력을 담아 둘 수가 없다는 말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 적용

1. 금그릇이라도 담배 재를 털면 재털이가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형식 뿐인 금식이었고, 자신을 보이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기적으로 금식하는데에다 덤으로 더 많은 금식을 하였으며, 금식을 할 때에는 씻지도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아 “나 금식한다”고 티란 티는 다 내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은 멋있게 보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칭찬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며 호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들 내면에 있는 악을 아셨고, 그들의 형식에 담긴 의도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형식만을 중요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겉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금그릇이라 할지라도 담배 재를 털면 재털이가 되고, 금항아리라 할지라도 분뇨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면 요강이 되는 것입니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지는 내용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2. 산해진미를 요강에 담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내용은 좋은 그릇에 담겨야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재털이나 요강에 담아 먹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리가 좋을 수록 좋은 그릇에 담아 한껏 아름다운 모양을 내서 내놓습니다. 눈으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으며, 마음으로 먹는 음식 그것이 최고의 음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마음만 가지고 나아가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 있다면 당연히 우리의 모양도 경건의 모양을 품게 됩니다.

금식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어떠한 마음으로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무용론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할 때가 있고, 즐거워 할때가 있는데 지금은 즐거워 할 때라는 것입니다.

3. 아름다운 신앙생활

아름다운 신앙생활이란 결국 좋은 그릇에 담긴 좋은 음식과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마음이 하나님과 성도들과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결실을 맺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오면 손에 물한방울 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폭포수처럼 받았다 하면서도 성도들을 전혀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반면,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너무 많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섬기는 만큼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의 헌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이 들어 길길이 날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좋은 그릇에 분뇨를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금그릇이면 뭐합니까, 그 안에 든 것이 분뇨인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 그릇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 적용질문

1.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2. 열심히 섬기고 헌신한다는 이유로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시지는 않습니까?

3. 자신의 신앙생활을 요리로 묘사한다면, 어떤 그릇에 담긴 어떤 요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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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눅 5:27-30)

*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 누가복음 5:27-30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0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본문해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종합해서 본문을 조화시켜 보면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후 갈릴리 해변가로 나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십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마태는 그 이름을 마태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지요.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받아 유대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에 내야 하는 돈보다 더 많이 받은 후, 남는 돈으로 자기 배를 체우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돈을 받아 로마에 바치는 데다가, 더 많은 받아 자기 배를 채우는 세리들을 매국노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상종하기를 꺼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관 앞을 지나가다가 주저함 없이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입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한 직후에 바닷가에 가서 많은 이들을 가르친 사건이 있음에도 거기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략하고, 마태, 마가, 누가가 모두 곧바로 이 장면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토리의 주제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지붕에서 달아 내렸을 때, 그를 치유하시기 전에 그의 죄를 먼저 사해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중풍병을 고쳐 주시지요.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는 이것이야 말로 복음이었습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때문에 묶인 저주, 즉 죽음과 모든 죽음의 그림자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이 바로 복음의 핵심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죄를 사해주실 권한이 있고 죄인의 죄를 사해주기를 기뻐하시는 예수님께서 죄인 마태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죄인이었던 마태는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지탄을 받던 죄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은 너무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부르시고, 제자들은 따릅니다. 주저함이나 계산이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른 것이지요.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환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시로는 충격적인 일이 하나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 틈에서 웃고 대화하며 식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은 결코 그런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인이 따르는 선생이라고 하는 분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요?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우리같은 의인들을 버려 두고 저들같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죄를 사해 주시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는 장면과 연결되어 기록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의인이란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죄인이면서도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던 영적인 장님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을 의인이라 착각하기에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무리 뛰어난 암전문의가 있어도 환자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그 의사를 찾아가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처지가 사실은 그와 같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반면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자신이 세리임을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세리일 때 불리웠던 레위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아무런 공로없이 그저 선물로 받았던 그는 죄인이었을 때 불리웠던 레위라는 이름보다 하나님의 선물로 죄사함을 받은 후의 이름인 마태라는 이름을 더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 적용

1.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음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죽음도 유익합니다. 죽으면 영원한 나라에서 죄도 슬픔도 고통도 없이 주님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을 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 하나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고 이처럼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마태를 부르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습니다. 두번째 목적은 마태를 제자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묶인 자를 자유케 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회개하고 죄용서 받은 것에 만족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죄사함 이후의 삶을 꾸려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마태를 보십시오. 죄인이었던 그는 잔치를 열어 다른 죄인들을 예수님 앞으로 초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천국의 잔치 가운데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들을 초대하는 것이지요.

3. 부르심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소명 앞에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기에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지요.

물론 현대에는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난다는 말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으로 적용을 해야 합니다. 소위 3T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재물(treasure)과 재능(talents)과 시간(time)을 주님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주님 주신 물질을 무엇을 위해 쓰고 계시나요? 주님 주신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시나요? 주님 주신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쓰시나요?

그 대답에 기꺼이 “주님을 위해!!”라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자신의 상태를 모르면 결코 치유받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배척하고 시기하며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암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모르면 자신의 몸에 칼을 대려는 의사의 멱살을 잡는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의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결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도 인정해야 하며,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와 연약함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괜찮은 척 하지 마십시오. 의로운 척 하지 마십시오. 아픔을 감추고 웃으려 들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그 모든 것을 핸들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과 아픔을 주님 손에 맡겨 드리십시오.

* 적용질문

1. 죄인이 용서받았다는 구원의 감격이 있으십니까?

2.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본인의 행복에 집중하며 사십니까?

3. 재능과 재물과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계십니까?

4. 혹시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거나 위장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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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난 믿음 (막 2:1-12)

* 안달난 믿음

*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안달난 믿음

예수님께서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역을 하시다가 가버나움의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중풍병자를 친구로 든 친구 4명도 찾아왔습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친구를 데리고 반드시 예수님 앞에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자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의 타일을 벗기고 구멍을 낸 후 침상을 줄에 매달아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 예수님 바로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친구를 고치겠다고 남의 집 지붕을 뜯다니 너무나도 무례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를 보시고 무례하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절박한 믿음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현대 크리스쳔들은 너무 밋밋한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체면 문화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안달난 믿음은 천박한 믿음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은혜를 찾는데 있어서 만큼은 안달이 나있어야 합니다.

2. 무례한 믿음이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안달난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무례한 믿음으로 오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집 지붕을 뜯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고 항변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붕을 뜯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 스토리 자체가 실화가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식 집의 지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붕과는 다릅니다. 일단 높고 뾰족한 지붕이 아니고, 낮고 평평한 지붕입니다. 한번 뜯으면 대공사가 필요한 지붕이 아니고, 늘상 뜯고 구멍을 냈다 닫을 수 있는 그런 지붕이었습니다. 물론 허락없이 남의 집 지붕을 뜯은 것은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할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집주인인 예수님께서 뭐라하는 대신, 오히려 칭찬을 하셨으니 논란거리가 되지 못하겠지요. 집주인이 괜찮다는데 뭐…

그러므로 이 사건은 믿음만 있으면 무례해도 된다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또한 이 사건이 믿을만 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3. 같은 은혜, 다른 생각

친구들의 탁월한 믿음 때문에 한 사람이 죄사함을 얻는 아름다운 장면에 시험이 드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는 열렸으되 가슴이 닫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서기관들은 마음 속으로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들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마저도 읽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훤히 알고 계신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서 동일한 사건을 보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판단을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아둔한 머리로 조금 똑똑하다고, 조금 더 배웠다고 아는 체 하고, 으시대면서, 이런 저런 평가와 판단을 쏟아 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지식 때문에 망합니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깡통은 채워져 있을 수록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개는 용맹할 수록 짖지 않습니다.

많이 배울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낮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더 아는 것, 자신이 더 가진 것 때문에 은혜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4.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떤 말이 더 쉬울까요? 당연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긴 하지만,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 말이 이루어졌는지 마는지는 하나님만 아실테니까요.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몇 초후면 들통이 나버릴거거든요.

그런데 중풍병자를 즉각적으로 고칠 수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겠지요. 그러니까 죄사할 권한도 있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걷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을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권한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5. 친구따라 강남됩니다.

중풍으로 움직일 힘조차 없던 약한 남자가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 강남, 즉 강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걷게 된 그도, 그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건은 친구의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고 질병을 치유하게 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친구따라 강남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친구가 있으면 친구따라 강남이 됩니다. 친구의 믿음이 좋으면, 그 믿음의 기도로 살기도 하고, 죄사함을 얻기도 하며, 강해지기도 하고, 부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있으십니까? 나를 위해 믿음으로 간구해줄 친구, 나를 위해 안달나 미쳐하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으신가요? 나는 누구에겐가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친구가 은혜 받게 하기 위하여, 친구를 위경에서 건지기 위하여, 안타까움으로 안달나 있는 친구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적용질문

1.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서 안달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2. 지나치게 체면을 따지고 주변을 의식하다가 은혜를 놓치고 계시지는 않나요?

3. 은혜가 떨어지는 자리에서 교만과 아집때문에 은혜를 떨어뜨려 버리지는 않나요?

4. 중풍병자와 같이 옴짝 달싹하지 못하게 나를 묶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5. 믿음의 친구가 있나요? 누군가에게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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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정결케 하는 힘 (막 1:40-42)

* 세상을 정결케 하는 힘

* 마가복음 1:40-42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본문해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나병처럼 가혹한 질병도 없었습니다.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육체적 고통은 물론, 부정하다 여겨져 회중으로부터 격리가 되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성벽이 있는 성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순간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는 게 율법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사람 역시 부정하다 여겨져 나병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스스로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육신의 질병에, 회중으로부터의 격리에, 스스로를 부정하다 고백해야 하는 고통에,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처참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처지의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가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 적용

1. 내 안에 있는 나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십시오.

나병환자는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할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아무런 소망 없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그에게 예수님은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육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얼마든지 그를 그 비참한 수렁에서 건져내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예수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나병마저도 고칠 수 있는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곳은 우리의 인생에 매우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그 집단에 일익을 담당하는 수준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대한 인식이 갈 수록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경영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왕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은 것은 그에게 그의 모든 처지를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진정한 왕으로 예수님을 모신다는 뜻이었지요. 그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 앞에 감히 달려나와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은혜를 갈구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모든육체적인 고통과 사람들은 물론 가족과 격리된 채 외롭게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정하다 되뇌이어야 했던 그의 아픔의 깊이를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에 손을 댄 자는 같이 부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정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외면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졌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꺼이 손내밀어 우리의 더러움과 아픔을 만지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처지가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멋진 말로는 통회하는 심령, 상한 심령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근사한 처지에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존귀함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주님 앞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3. 부정한 것이 예수님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십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정결한 자라도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은 항상 격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은혜의 시대에는 정결한 것에 접촉이 되면 부정한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온갖 죄악이 관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오염되곤 합니다. 부정한 것에 닿아서 정결해진 것이 다시 부정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살고자 합니다. 교회사 속에서 수도원 운동이 성행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탓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부정한 것을 주님 앞에 정결한 것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을 치고 다니지만 회를 떠보면 바닷물의 짠맛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바다 속에 살지만 바다의 짠물이 흡수가 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 크리스쳔들이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세상의 부정한 문화와 패역한 습관들이 우리의 손을 통해 거룩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접촉했으나 부정해 진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를 정결케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고통받는 자들의 친구이십니다. 주님 앞에 나간 사람은 그 어떠한 죄와 고통을 가진 사람이라도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망에 처한 나병환자가 마지막 운명을 걸고 빛되신 주님 앞에 나아가 외쳤던 그 눈물의 고백의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의 모든 고통을 깨끗케 할 수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적용질문

1. 나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2.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갈구하며 무릎을 꿇습니까, 아니면 혼자 해결해보려 발버둥을 치십니까?

3.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염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킬 힘이 있으십니까?

4.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늘 듣고 계시고 우리의 아픔을 고치시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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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교회다 (마 4:23-25)

* 아프니까 교회다

* 마태복음 4:23-25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 본문해설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온 갈리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명확히 하시면서 갈릴리 전역을 순회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육, 전도, 치유가 예수님의 3대 사역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소문은 곧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환자들과 귀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또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도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루살렘 유다 뿐 아니라, 멸시와 천대를 받던 땅 갈릴리에서도, 이름조차 이방인의 색채가 너무도 강한 데가볼리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요단 강 건너편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파되고 가르쳐 졌으며, 사람들은 치유를 얻었습니다.

* 적용

1. 인생의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 보내심을 받으신 분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순간도 그 사명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로부터 멸시받던 땅 갈릴리 구석 구석을 친히 밟으시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보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행복, 내 번영, 내 풍요, 내 만족을 위해 주님께서 값진 피를 흘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내가복음”에 심취해 살아갑니다. 나만 잘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착각하며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아직 하나님께 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주님께 돌려 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2.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은혜가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소망없고 빛을 잃은 세상에 주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이 일을 누가 해야 할까요?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3. 교회는 또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 66권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깊이가 깊을 수록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 구석 구석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들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말씀은 삶가운데 살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저 모여서 먹고 놀고 수다 떨며 마음에 쌓인 것들을 배설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씀이라는 검으로 세상을 수술하며, 말씀이라는 약으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없이 사는 크리스쳔은 크리스쳔으로서의 사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4. 아프니까 교회다.

“아프니까 교회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 받아 교회에 깊이 관여하면 할 수록 아파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아프니까 교회를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상하고 지친 마음을 교회에 와서 어루만짐을 받고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의미로서의 “아프니까 교회”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자아만 살아서 펄떡이고 예수님은 그 심령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을 수록 교회는 아픈 곳이 되고 맙니다. 교회 오면 상처받고, 교회 오면 짐이 되고, 교회 오면 스트레스가 밀려 오는 그런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두 번째 의미로서의 “아프니까 교회”인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죄와 허물이 용서되고, 부족함이 품어지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룹니다. 서로를 향한 험담이 없고, 헛소문도 난무하지 않으며, 격려와 칭찬과 좋은 소문이 오가는 곳이 바로 좋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오면 사람들은 지친 마음을 쉬고, 아픈 마음을 치유하며, 병든 육신마저 나아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교회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일까요?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를 전염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5. 지친 새들이 쉬어가는 나무같은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광고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수리아에서, 데가볼리에서, 유대와 광야에서, 심지어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비밀을 가지셨고, 하나님의 계획을 너무 잘 가르치셨으며, 예수님께 나아오면 회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비밀을 말해 줄수 있고, 자세히 잘 가르쳐 줄 수 있으며,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모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러한 씨앗을 우리 안에 심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싹틔우고 자라게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친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를 쉬어가고, 우리의 열매를 통해 그 목마름과 배고픔을 축일 수 있는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까, 아니면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는 가시나무와 같은 존재입니까?

* 적용질문

1.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까?

2. 구원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계시나요?

3.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말씀의 실력을 갖추시고 계십니까?

4. 아파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 아픔을 만져주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사시나요?

5. 사람들이 모이는 과일나무입니까, 아니면 가까이 하기 싫은 가시나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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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버스터스 (막 1:29-34)

* 고스트 버스터스 (Ghost Busters)

* 마가복음 1:29-34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 본문해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권위있는 말씀을 전하신 후,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심으로써, 그 능력으로 권위를 증명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을 예수님께서는 사역본부로 사용하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나아가서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병을 꾸짖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열병을 꾸짖으시며 일으켜 세우는 장면으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몬의 장모는 언제 아팠냐는 듯, 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았고, 곧바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어 고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가만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소문을 냈을 것이고, 온 동네에 병든 사람이란 병든 사람은 다 몰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office hour 가 끝났으니 다음에 와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들을 괴롭게 하는 귀신들을 모두 몰아내셨습니다.

귀신들이 나갈 때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뭐라도 한마디 쫑알거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귀신 따위가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 적용

1. 자신의 집을 사역본부로 내어 놓은 베드로의 믿음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주인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난 8개월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았습니다. 그 분께서는 친히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베드로의 빈 배를 만선으로 바꾸어 주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 뽁 빠졌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걸 주인을 만난 것이지요.

베드로는 뱃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오면서 구입해 살고 있던 자신의 집을 예수님의 사역 본부로 내어 놓았습니다. 인생을 건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 놓되 그것이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것이지요.

2. 주님을 위해 드리는 자를 주님께서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베드로의 장모는 왜 하필 열병으로 앓아 누웠던 것일까요? 베드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고 그를 위해 집을 내놓았지만, 베드로의 가정이 모두 예수님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힘겨워 했을 법한 사람은 아마도 베드로의 아내였겠지요. 갑자기 남편이 생업인 고기잡이를 그만 두고 목수인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지를 않나, 집을 통채로 내놓고 사람들이 그곳에 바글거리게 하지 않나 그 모든 상황을 납득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딸의 번뇌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베드로의 장모였겠지요.

베드로의 아내도, 그 장모도 예수님을 만져 알아야 했습니다. 때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꾸짖음 하나로 열병을 고쳐 버리십니다.

그러자 장모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늘 하던대로 집안에 들어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시작합니다. 똑같이 수종을 들지만 예수님을 경험한 후의 수종은 이전의 수종과는 달랐겠지요. 이전에는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접했갰지만, 이후에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대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주님을 만져서 알 수 있는 경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의 아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을 것임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Ghost Buster!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은 마귀의 나와바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귀의 세력들인 귀신들이 세상을 장악하고 판을 치면서, 인간들에게 질병은 물론 각종 불행을 가져다 주곤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마귀의 세력이 그 지배권을 주장할 수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통치자가 바뀌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마귀는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땅에 왔지만 아직 완성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마귀의 세력은 힘을 잃고 도망갈 수 밖에 없습니다. Ghost Buster 이신 셈이지요. Ghost는 그 어원이 ghastly와 같습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하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aghast 하게 하는 ghosts의 힘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여러가지 목적 중에 하나는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4. 우리는 ghost busters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마다 성령님을 부어주시고 우리 안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성령님으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이 따에서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지배력을 벗어나기 위해 주님께 의지한 채 바둥거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그 세력을 파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ghost busters로서 이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마귀의 지배권 아래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마귀의 묶임과 눌림을 몰아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도대체 왜 크리스쳔들이 그러한 열망을 품지 않는 것일까요?

* 적용질문

1. 일생을 걸만한 인생의 주인을 만나셨습니까?

2.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분께 무엇을 내어 놓고 계십니까?

3.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해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4. 마귀와 세상이 가져오는 시련과 유혹을 예수님의 힘으로 물리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5. 마귀의 세력을 결박하고 그들의 일을 멸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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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품은 달 (눅 4:31-37)

* 해를 품은 달

* 누가복음 4:31-37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 본문해설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인 갈릴리 1차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단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늘 가르침이 본질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지 등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지요.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본문의 놀랐다는 단어는 헬라 원어로는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은 늘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르침은 항상 능력으로 검증이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마귀의 지배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치시고 또 증명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권위있는 말씀을 전하시자 귀신이 드러났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그를 붙잡고 있는 귀신의 말이었습니다. 귀신은 좀처럼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에 마귀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었기에, 예수님을 부를 때는 고향 나사렛을 앞에 붙여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봤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지만, 귀신은 적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정확히 알아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사렛 사람들은 사실 귀신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비로소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분별만 할뿐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적용

1. 해를 품은 달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품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의 직분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빛을 내기 위해서는 발광체이신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해라면 우리는 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해를 품은 달입니다. 해를 품은 달도 역시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해를 품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회복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심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심령과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대리 통치자가 됩니다. 마치 해의 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달처럼, 예수님을 가진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통치권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품을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주어집니다. 바로 권세와 권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표현대로 하자면 권위와 능력이 되겠네요.

권위는 다스릴 권한이고, 능력은 실제로 다스릴 수 있는 힘입니다. 그 권위와 능력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2. 해를 품은 달이 진정으로 빛을 내기 위해서는 해의 빛을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말씀없이 예수님만 믿는 것으로는 제대로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가르침으로 먼저 시작하신 이유는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품었다고 하면서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말씀을 모르는 달은 겨우 먹구름 뒤에 가려진 아련한 빛만을 받은 달이겠지요. 그런 달은 어두움을 밝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지의 먹구름을 걷어 내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만큼 해로부터 받는 빛의 양이 많아집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말씀입니다.

3. 지식만으로는 안됩니다.

어떤 이들을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만 커집니다. “특공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요. “특별히 공부도 못하면서 머리만 큰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머리만 커진 크리스쳔이 되면 안됩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고백을 귀신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을 알아보고 조잘대는 것을 오히려 불쾌해 하십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틈에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이 주인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귀신같은 사람” 아닐까요?

4.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셨으면 능력을 발하십시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며 정체를 드러냈지만, 귀신은 여전히 그 사람의 속에서 그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잔소리말고 꺼져”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야 그 귀신은 사람에게서 떠나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이 귀신들린 것과 같은 처지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 장악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면 그것은 귀신들린 상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 주님이 다스려야 할 우리 인생을 왜 악한 것들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언제까지 악한 것들에게 인생의 고지를 내어준 채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안에 빛을 주신 우리의 태양 예수님을 빛을 드러내십시오.

“우리의 빛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인생에 어두움을 드리는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라고 외치십시오. 우리 안에 채워진 말씀의 끝은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명할 때에 귀신이 떠나가고, 우리가 명할 때에 질병이 떠나가며, 우리가 명할 때에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세력들이 그들이 드리운 먹구름과 함께 떠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러한 권위와 능력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5. 소문난 사람들이 됩시다.

예수님께서 권위있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을 능력으로 증명할 때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결국 소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누가 말하라 하지 않아도 입에 입을 타고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소문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갖춘 삶을 살면 소문은 자연스럽게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집회를 따라 광고하고 홍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고, 사람들이 무수히 모이면 그것이 곧 집회가 되곤 했습니다.

우리가 굳이 끌어오려 애쓰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말씀의 권위와 그 권위를 증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 적용질문

1. 해를 품은 달로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가 받은 빛의 양과 발산하는 빛이 양은 얼마나 됩니까?

2.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읽기, 듣기, 연구, 암송, 묵상, 다섯 가지 중 게을리 하는 것은 없습니까?

3. 말씀이 지식으로만 끝납니까, 마음으로 내려와 결국 손과 발로 이어집니까?

4. 내 안에 악한 영을 몰아낼 능력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러한 능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5. 내 안에 크리스쳔으로서 좋은 소문이 날만한 능력이나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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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임을 깨달으라 (눅 5:1-11)

* 죄인된 나를 발견해야 예수를 따를 수 있다

*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본문해설

이 사건은 아직 예수님께서 제자도 없이 홀로 사역을 하고 계시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릴리 지방의 한 어촌을 찾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는 장면과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 정박된 두 척의 배 중 하나에 올라 서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올라서신 배는 바로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배는 요한의 배였겠지요.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시몬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려 시도를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와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에게 다시 가서 그물을 내리라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더구나 시몬은 어부였고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물고기에 대하여 논하다니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지요.

 

그러나 시몬은 그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만남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생 안드레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라 시몬을 전도했고, 시몬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 예수님과 하룻밤을 지내며 밤새도록 말씀을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열병에 걸려서 시름 시름 앓던 시몬의 장모님을 꾸짖음 한번으로 불과 몇 초만에 낫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시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거절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어부로서는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시몬은 마지 못해 예수님의 말씀에 응합니다. “물고기를 딱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선생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던져는 볼께요” 대충 그런 느낌이었지요. 그런데 잠시 후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마리도 안 잡혔던 물고기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그물로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이 몰려들어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동업자였던 요한의 배를 불렀습니다. 두 배가 꽉찬 만선이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고백한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지금까지 시몬은 예수님을 “선생이여” 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증명되는 순간 “주여”라고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배를 가득 채운 물고기 떼에 기뻐하기 보다는 자신이 죄인임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9절에 놀랐다는 표현은 “매우 두려워 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는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취하는 사람이 되게 해줄테니 따라 오라 부르십니다. 시몬으로 살았던 어부가 베드로라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 요한과 안드레 형제, 이렇게 네 사람은 두 배에 가득 실은 물고기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 분의 첫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 적용

1.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아직 시몬이었을 때에,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주님이 아닌 그저 선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좋은 가르치심을 주시고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지만 자기와 별로 관계가 없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인생은 평범한 어부에서 예수님의 사도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없이 그저 교회를 오갑니다. 교회를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교훈이나 가르침을 받는 곳, 또는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한 곳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도무지 변화시키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생이 아닌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2000년 전 유대땅을 거닐었던 한 성자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와 손잡고 걸으시는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에 그의 첫번째 고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반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을 결코 주인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죄가 깨달아 지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깊이 알 수록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 깊이 깨달아집니다. 또한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록 우리가 죄인임이 더욱 깊이 깨달아집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깊이가 곧 영성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영성이 깊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많은 경우에 이 말은 기도의 길이와 열심, 성경을 아는 지식, 아름답게 표현하는 미사여구 등과 혼돈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성이 깊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얼마나 깊이 깨달았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얼마나 담았느냐 하는 것이 곧 영성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나약한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극악한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기도 없이는 단 한줌의 소망도 없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3.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으면 가치의 기준이 세상에서 주님으로 옮겨 갑니다.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은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만선이라고 하는 복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의 가치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꿈이었던 그들의 삶을 이제 자신들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이룰 나라가 꿈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어부였던 그들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초대 일꾼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삽니까, 하늘의 가치를 좇아 삽니까?

 

* 적용질문

1.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2. 예수님은 나에게 어떠한 존재이십니까?

3. 내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고 계십니까?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깊이 깨닫고 계십니까?

5. 내 인생의 가치는 세상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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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의 색안경 (눅 4:22-30)

* 익숙함의 색안경을 벗으라

* 누가복음 4:22-30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이사야서 61:1절의 말씀을 펴서 읽으시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경이롭고 은혜로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늘상 듣던 그런 시시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익히 아는 옆집 아저씨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너무도 잘 아는 목수의 아들이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하고 있으며, 그의 품격과 은혜가 메시아의 것임에 틀림없으니 놀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다운 말씀으로 판단하는 영적인 판단보다는, 자신들이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판단하는 육적인 판단에 매이고 말았습니다. 말은 메시아 같이 하지만, 늘상 봐온 요셉의 아들이 메시아일리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익숙함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익숙함때문에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가버나움에 가서 활동하실 것을 시사하십니다. 너네가 싫다면 가버나움에 가서 메시아로서의 기사와 이적을 행하겠다는 것이지요. 그 때가 되면 나사렛 사람들은 네 고향에서도 그러한 일을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익숙함으로 인해 믿음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 시대에 큰 흉년이 와서 모든 사람이 기아에 허덕일 때, 엘리야가 찾아가 기근을 해결해 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이 혜택을 본 것이지요.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시대에 나병을 앓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엘리사에 의해 문둥병이 나음을 입은 사람은 이방인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그런 은혜를 받을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자신의 고향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분을 거부하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엘리야나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 여겨진 자신들보다 이방인들이 나을 수도 있다는 전제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 모두가 아닌 믿는 사람 일부에만, 그것도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미친다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예수님을 낭떠리지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사이를 뚫고 유유히 걸어 나가십니다. 이제 그들은 메시아의 은혜를 맛볼 기회를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 적용

1. 익숙함의 함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익숙하다는 것때문에 우리는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동경하고 가까운 사람은 잘 인정하지 못합니다. 부흥강사가 오면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데, 담임목사가 하면 그저 그렇게 여겨집니다.

저도 가끔 다른 곳에 초빙 강사로 갈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너무나도 큰 은혜가 임합니다. 저라고 하는 사람은 변함이 없는데, 저를 동경의 눈으로 보고 뭔가 있는 사람으로 믿으면, 질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귀신이 떠나가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랑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말씀을 전해도 모두 튕겨져 나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익숙함의 함정입니다. 익숙하니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지요.

2. 아무리 보석같은 사람이라도 가치를 몰라주면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장점을 잘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장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보석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며 더 개발시켜 주면 그 사람은 큰 힘이 되어주곤 합니다. 그러나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가치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그 사람을 잃게 됩니다. 새로운 사람이 더 잘할 것 같지만, 멀리서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 같지만, 지내보면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품어주고, 장점은 격려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산소가 결핍된 지역에 있어봐야 산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껴야 할때라면 이미 몸은 버거움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3.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앙생활도 너무 익숙해지다보면 그 역동성을 잃어 버리고 본질을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늘 새로와 져야 합니다. 주님이 식상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늘 기대되고, 늘 더 큰 은혜를 주실 분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지금의 신앙 생활보다 더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성장했다 할지라도 죽는 순간까지 끝임없이 더 있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지혜와 능력은 우리의 작은 인생에 담기에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로워 지기를 꿈꾸십시오.

* 적용질문

1. 익숙함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치를 몰라볼때는 없습니까?

2. 익숙함때문에 가치를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발견한 적은 없으십니까?

3.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아무런 기대도 감동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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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은혜의 해 (눅 4:16-19)

* 은혜의 해

*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갈릴리 1차 사역을 개시하시는 시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청결을 통해 공식 무대에 데뷰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맨 먼저 찾으신 곳은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회합 장소였으므로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할 주요 거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서셔서 구약 성경 한 군데를 펴서 읽으십니다. 이사야서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옛날의 성경은 지금의 책처럼 페이지가 매겨지고 장과 절이 매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였습니다. 돌돌 말아진 성경을 쫘악 펴서 정확히 말씀하시고자 하는 구절을 펴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책을 펴서 읽으신 곳은 이사야서 61장 1절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하게 될 일을 예언해 놓은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려 700년이 넘는 시간을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사야 61:1은 예수님의 “사명선언”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Mission Statement!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신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사람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은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모든 억압과 묶임이 풀리는 “은혜의 해”가 온 것입니다.

은혜의 해란 구약의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제 7일은 안식일, 제 7년은 안식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년들의 안식년이 있었는데 그것을 희년이라 불렀습니다. 7년이 7번 지난 다음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이 되면 저당 잡혔던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 줘야 하고, 노예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속박과 에속이 풀려지는 해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마귀에 예속된 상태였습니다. 마귀의 종이며, 마귀가 주는 모든 억압에 묶이고 눌려 있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마귀에게 묶여 있던 모든 묶임이 풀려질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마귀에게 묶여 있던 자들에게 이것만큼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이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귀와 죄와 죽음에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될 것입니다. 눈 먼자가 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소경이 되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질병에 눌리고, 세상에 눌리고, 두려움에 눌리고, 억압에 눌리고, 우울감에 눌렸던 모든 사람들이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스스로 인생을 경영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은 심령이 부자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복음을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한 줌의 소망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의도 능력도 소망도 없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들은 은혜의 해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적용

1.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페이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 성경을 확 펼치셔서 원하시는 부분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어디 갔지? 어디 갔어?” 하며 뒤적뒤적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아십니다. 각 페이지를 원하시는 대로 펼쳐 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인생의 페이지를 뒤적거립니다. 내일이 어찌될지, 내년이 어찌될지, 이 걱정, 저 걱정, 남걱정, 자기 걱정 하는데에 너무도 많은 시간과 정열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페이지를 아시는 분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맡겨 보십시오. 아무리 뒤적여도 우리는 어차피 인생의 페이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 맡기면 그 분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부질없이 뒤적이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마시고 그 시간을 주님과 교제하고, 영혼들을 섬기는데 사용해 보십시오. 놀라운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 은혜의 해를 누리십시오.

희년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는 마귀의 어떠한 눌림과 묶임도 모두 불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임과 눌림을 향해 선포하십시오. 그것이 합법입니다. 돈에 눌리십니까? 매일 주님 앞에 선포하십시오. 돈에 눌리지 않게 하소서. 질병에 눌리십니까? 매일 밤낮으로 선포하십시오. 네가 거할 곳이 아니므로 떠나가라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압박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불법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3.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셨고, 우리는 드디어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더 열어 주시기를 위해 소망하고 기도하십시오.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과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이나믹을 알고 통제할 수 있어야 보이는 세계의 묶임을 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많이 열리면 열릴 수록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 적용 질문

1. 예수님께 인생의 경영권을 온전히 맡기셨습니까?

2. 자기 스스로 의롭다, 능력있다 생각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3. 오늘 나를 묶고 있는 인생의 묶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향해 어떻게 대적하시겠습니까?

4.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얼마나 열려 있습니까? 그것을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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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공간을 지배하시는 분 (요 4:46-54)

* 거리와 공간을 지배하시는 분

* 요한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표적을 보이셨던 바로 그 곳, 가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표적 후,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에 유대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약8개월만에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터이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돌아 왔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는 바로 표적때문이었습니다. 더 많은 표적을 보고 싶었고, 더 많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고귀한 사람이었고, 부자였으며, 권력가였지만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을 어찌할 힘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돈이 있어도, 병들고, 죽는 문제는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다급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무려 43km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하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곳에 찾아가 주셔야 병일 나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 후의 일이긴 하지만,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던 백부장의 믿음에 비하면 미약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쓴소리를 하십니다. 아픈 자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긋나는 모습이십니다. 이것은 왕의 신하를 향한 말씀만은 아니었습니다. 헤롯 왕실과 관련된 사람들은 유독 표적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에게 표적이란 그저 마술쑈 같은 것이지요.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들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표적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해야 할 상황이 생겼으니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고, 기대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어두움 속에 있는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빛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요술봉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신랄한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심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신하는 다시 예수님을 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나았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의 신하는 그 말을 믿고 돌아갑니다. 왕의 신하는 돌아가는 길에 그의 종들에게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낫기 시작한 시간을 물으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 때였습니다. 왕의 신하와 그 온 가족이 그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표적 중 일곱가지만 선별해서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갑니다. 각 표적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영역을 지배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예수님의 능력은 “거리와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입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비록 43km가 떨어진 먼 거리일지라도 원격 통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이지요.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요한의 초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적용

1. 표적을 통해 믿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주면 더 많은 표적을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이것도 해봐라, 저것도 해봐라. 하나님이 아니라 무슨 마술사정도로 착각을 합니다. 표적을 통해 믿게 된 믿음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표적이 끊기면 쉬 식어버리기도 하고, 표적만 보여지면 사이비라도 빠져 듭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표적이 없이도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즉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표적이 아닌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기적을 베풀어 주면 할렐루야 하고 믿었다가, 조금 기대에 미치게 못 해 주신다 싶으면 하나님이 계신지까지 의심하고 마는 베이비 신앙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적을 베푸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고 우리가 그 분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꾸짖으셨습니다. 표적만을 원하는 세대를 꾸짖었습니다. 그 비난의 가장 직접적인 대상은 다름아닌 왕의 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깟 쓴소리 좀 듣는 것이 대수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43km나 되는 길을 내려와 달라고 다소 염치없는 요구를 합니다.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깟 염치없다는 소리 좀 듣는 것이 대수겠습니까? 그는 그 먼 길을 체면이고 뭐고 다 쓰레기통에 우겨 놓고 예수님을 찾아 달려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원하는 것을 얻어 냈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의 신하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을 반드시 살려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었고, 그 간절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지속적인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할지라도, 잘못된 접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그 기도를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3.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시공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장소에서 기도를 해줘야 뭔가 역사가 일어난다는 잘못된 통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장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았던 백부장의 믿음은 바로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것을 유식한 말로 “무소부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없는 장소가 없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려지는 우리의 기도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락하신 원격 요청 장치를 버려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에 있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일하십니다.

  • 적용질문

1. 나의 믿음이 하나님을 요술봉처럼 대하는 수준의 믿음은 아닙니까?

2. 나의 기도하는 방향대로 되건 안되건 하나님 그 존재만으로 사랑하십니까?

3. 왕의 신하와 같은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까?

4.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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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위한 셋팅 (마 4:12-17)

*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위한 셋팅

* 마태복음 4:12-17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혔음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대중들의 인기와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었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붙잡혀 갔을까요? 누가복음 3:18-20절은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18)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세례 요한은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잘못된 것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실세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날렸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시대의 죄악을 꾸짖고, 회개의 경종을 울리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헤롯왕도 성역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헤롯왕이 헤로디아라는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이 말다케에게서 나은 아들로서 헤롯 안디바(Antipas)입니다. 헤롯왕가에 여러명의 헤롯왕이 있었던 것 기억하시지요? 헤롯 안디바는 여러번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헤롯왕가 자체가 bean powder 집안이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삼촌인 빌립과 결혼을 합니다. 빌립은 헤롯대왕의 아들이었지만 왕이 되지 못한 평민이었습니다. 권력욕이 높았던 헤로디아의 욕구를 해소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형인 헤롯왕과 정분이 나게 됩니다. 권력이 없는 남편 빌립을 버리고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디바와 결혼을 한 것이지요. 헤롯 안디바는 유부남이었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를 버립니다. 정실이 되어야 왕비가 될 수 있었기에 헤로디아의 조르기 강도가 만만치 않았겠지요.

 

정리하자면, 헤롯 안디바는 제수이자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던 것입니다. 많이 개방된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bean powder인데,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의 눈에 이것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회개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도무지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절대군주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회개하기는 커녕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리로 물러 나셨습니다. 니고데모와 담화를 하신 후,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신 첫번째 이유는 예루살렘과 유대 근처에서의 사역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의 방해와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가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례 요한처럼 잡혀 가서 사역이 중지되면 안되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둘째는 세례요한이 잘 닦아 놓은 사역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했으며, 그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운동의 기초를 다졌던 것이지요. 세례 요한의 많은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모두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의 성취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무려 330회 이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 증명이 되려면 그 모든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가 되어져야 합니다. 이사야서 9:1은 스블론과 납달리 등의 갈릴리 땅이 복음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언을 해두었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모든 상황과 조건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무려 700년 전에 예언된 예언을 위해서 말이지요.

 

* 적용

1. 하나님의 시간표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 뿐 아니라, 헤롯과 헤로디아라는 악인까지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수백,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미세조정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한 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악한 상황들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들어 있는 자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승리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숨결 하나에도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상황에 흔들리고, 환경에 휘둘리는 것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흑암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흑암 가운데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빛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이방인들이 섞여지는 바람에 이방의 땅이라 불리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메시야를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그러한 예언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에게 예언을 해주셨고, 그러한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는 그들에게 그 예언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흑암 가운데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빛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들어 그 빛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 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어두움이 아닌 빛 가운데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 적용질문

1. 어떤 상황과 조건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까?

2. 매우 안 좋은 상황이 결국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징검다리였음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3. 오늘 나를 두렵게 하는 흑암은 무엇입니까? 그 흑암 가운데로 주님을 모시기를 원하십니까?

4. 700년의 세월을 한 뼘처럼 펴놓고 보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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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요 4:7-14)

  •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 요한복음 4:7-14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본문해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만큼 많은 설교가 행해지는 구절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장면을 가지고 씨리즈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를 모아놓은 것이 책 6권 분량일 정도입니다. 한 이야기 속에 너무나도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에 이르렀습니다. 사마리아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멸시를 하던 곳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은 아예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 사마리아 땅 수가성의 한 우물에 예수님이 앉아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 왔습니다. 시간은 6시였습니다. 이는 유대식 시간으로 여기에 6을 더하면 우리가 지금 쓰는 로마식 시간이 나옵니다. 즉 정오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정오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보통 저녁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는 시간이 아닌 정오에 홀로 물을 길러 나왔던 것이지요.

이 여인은 아픔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번째 남자와 동거 중인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말은 다섯번의 큰 상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시대적 배경 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뙤약볕이 한창인 정오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이지요.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인데다가, 당시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여자인데다가, 결혼마저 다섯번 하고 여섯번째와 동거하고 있는, “짐승” 3종 셋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여인에게 말을 걸어 오십니다. “물을 좀 달라.”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는 여인에게 할 말이 있게 해주십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오다니요. 그래서 유대인이 어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느냐고 깐족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십니다. “물을 줄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액면대로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끝내 물을 못 얻어 드시고 스토리가 끝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셔서 물을 마시고자 한 것이 이야기의 초점이 아닌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달라는 이야기로 접근을 하셨고 화제가 생수로 전환이 된 것입닏. 생수는 주님께서 주실 성령님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성령의 생수는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물입니다. 생명수인 것이지요. 여인은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는 여인의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뙤약볕에 물을 길어야 하는 자신의 자아상이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으면 저런 말을 할까요? 그러나 주님의 눈은 이렇게 아프고 상한 심령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아픔은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 적용

1. 예수를 만날 수 없는 죄인이란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짐승처럼 여겨졌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대인이신 예수님께서 접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신 이유 자체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고,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질타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상하고 깨지고 죄많은 사람들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 사람을 예수님의 눈으로 사랑스럽게 보아줄 수 있을까요? 상종도 않는 것이 마땅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얻어야 하겠기에 먼저 말을 건내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2. 상대방에게 할 말이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전도방식은 눈높이 전도였습니다. 유대인이며 율법을 중시하던 니고데모에게는 모세의 놋뱀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물을 긷기 위해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물을 달라는 말로 말씀을 거십니다. 우리는 대화하는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대화를 풀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도, 깊은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마리아 여인의 수준에 맞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할 말이 없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을 건내십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스스로 할 말이 있게 해주십니다. 여인은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도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단 그 누구도 그 여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 뿐이었습니다.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대화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말이 없는 처지의 여인에게 할 말이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여인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3. 다시는 여기에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소서.

여인에게는 물을 길으러 오는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여섯번째 남자와 동거하면서 다른 이들의 눈총을 피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 여인은 반드시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이 여인의 바람은 물길으러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제안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의 바람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 사람들에게 뛰어갑니다. 자신이 스스로 피해 다녔던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난 기쁜 소식을 전하려 달려 갔던 것이지요. 그 여인에게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이 더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발견한 기쁨이 사람들의 눈총에 대한 부담과 수치심을 모두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다시는 물 길으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생명수를 주신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우리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나야 합니다. 그 샘물이 우리의 심령을 장악하면 장악할 수록 우리 안에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물 길으러 오고 싶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의 근원들이 어떤 형태로든 말라지게 됩니다. 상황과 조건이 급격하게 변환이 되기도 하고,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문제를 이길 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밀려오는 파도를 잠재워 주시기도 하고, 그 파도를 넉근히 넘어설 힘과 능력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수가 넘쳐나게 하십시오. 별 볼일 없는 우리 삶에 주님의 기쁨이 별처럼 반짝임으로 말미암아 별 볼일 많은 삶이 되게 하십시오.

  • 적용질문

1.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안타깝게 대해 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2.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이 있게 배려해 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3.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찌할 수 없는 문제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4. 영원한 생명수가 샘물처럼 내 안에서 솟구치는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 그것을 경험해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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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 (요 3:31-36)

  • 땅에 속한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

  • 요한복음 3:31-36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본문해설

요한복음 3장 전체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이 오신 이유는 죄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음을 반복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것을 기술하였고, 두번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다시 보여 주었으며, 세번째로는 자신이 직접 해설을 함으로써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처럼 한 장에서 3번씩이나 언급을 하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을 다시 말하자면, 위로부터 오시는 분을 통해 땅에 속한 사람의 상태를 벗어나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듭남이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텐” 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노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라는 의미와 “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처음 태어나는 것이 땅에서 태어난 것이라 한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물론 창조 시에는 그 영혼을 위로부터 받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죄로 인해 그 영이 완전히 죽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그저 땅에 속한 자일 뿐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부유한 사람도, 모두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에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를 위시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당대에 유대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말은 결국 자신이 속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죽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현 상태는 머리 위에 저주가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은 이제 땅의 속한 모든 사람들의 구원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분은 땅에 속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이 갖는 저주가 그 머리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땅에 속한 사람은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즉시 하늘에 속하게 됩니다. 하늘에 속했으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땅에 속했으므로 그 저주가 머리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 적용

1.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는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질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했고 저주를 받지 아니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상속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근사한 정체성입니까?

그러므로 쫄지 마십시오. 당당하십시오. 어깨를 펴십시오. 고개를 드십시오. 처지와 형편이 잠시 악해졌을지라도 왕의 아들 딸들은 그 품위를 손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땅에 속한 자가 아닌,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십시오.

땅에 속한 사람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땅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들의 세계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 몸에 느껴지는 것이 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하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을 이 세상은 감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속한 자이면서도 실상은 땅에 속한 채 살아가곤 합니다. 땅에 것들이 우선 눈에 보이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잡히지도, 느껴지기도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자처럼 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고, 만져지지 않는 세상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 능력은 말씀으로 자기 내면을 완벽히 채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접촉됨으로 불타오릅니다.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완벽한 다스림을 받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우리의 눈이 하늘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땅의 것들이 우리를 더이상 기쁘게 하는 것일 수 없기를 소망합니다.

  • 적용질문

1.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자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2.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자유를 누리며 이 땅을 살아 가십니까?

3. 하늘에 속한 자의 품위를 유지하고 살아가십니까?

4. 하늘에 속한 자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셨습니까?

5.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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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 (요 3:25-30)

  • 내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이 중요하다

  • 요한복음 3:25-30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 머물면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와 한 유대인 사이에 논란이 생겼습니다. 주제는 정결예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정결예식, 세례 요한의 세례, 예수의 세례 중에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었을 것입니다. 문맥 상 그 유대인은 예수님의 세례에 한 표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에게 몰려오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함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공동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래로 줄곧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표를 했습니다. 세례의 원조는 세례 요한이었지만, 그 원조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해주었으니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옮겨 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원조는 스승님인데, 왜 동역자에게 사람을 다 빼앗기냐는 것이었지요. 이에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대답을 해줍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셰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신랑과 친구의 관계로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신부 삼기 위해 오신 신랑이고, 세례 요한 자신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결혼식을 돕는 친구라는 것입니다. 신랑의 결혼식에 신랑이 집중을 받는데, 친구가 서운해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지요. 친구는 신랑의 결혼식이 더욱 성대해지기를 바라며 신랑을 도울 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진심으로 예수님은 흥하고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쇠해야 하기를 소망했습니다.

  • 적용

1.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일하는 크리스쳔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기가 조명을 받아야 하고, 자기가 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고, 남이 좀 집중받으면 못 견뎌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한 일이 없음에도 자기가 한 것처럼 생색을 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이 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2.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영광을 얻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낮아져야 할지라도, 우리가 인정받지 못 할지라도, 우리가 아파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기꺼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쳔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주님이 높아지는 것을 오히려 신랑의 결혼식에 온 친구처럼 기뻐해줬던 영성이 있었기에, 모든 인류를 통털어 가장 큰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낮추십시오.

3. 동역자를 높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함께 일을 하다 보며 많은 순간, 비교가 되곤 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보다 더 조명을 받기도 합니다. 혹시 함께 일하는 동역자에게 조명이 집중되더라도 질투하거나 시기하거나 음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추하고 불쌍해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동역자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동역자에게 조명이 집중되는 것을 즐거워 하십시오. 더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며, 더 높여 주십시오. 사람들은 몰라준다 할 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반드시 높이십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그들이 높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끊임없이 낮춘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지는 자만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 적용질문

1. 헌신한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해 속상한 적이 있으십니까?

2.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낮춰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3.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낮출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4. 함께 일하는 사람, 혹은 후임자가 더 각광을 받을 때에 어떤 감정을 느끼셨습니까?

5. 함께 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인기를 누리거나, 칭송을 받을 때에라도, 그를 사랑하기에 기뻐하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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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봐야 산다 (3:12-15)

  • 하늘을 봐야 삽니다

  • 요한복음 3:12-15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본문 해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주셨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니고데모는 육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일은 영의 눈이 뜨일 때에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니고데모에게 설명을 해주십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다정하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자”라는 말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입니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인자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다 아는 상식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그 말이 내포한 뜻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정확히는 “인자같은 이”라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아 보이는데 실상은 천상의 존재란 말이지요. 다니엘은 그 인자같은 이가 세상의 왕으로 오심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다니엘서에 약속된 그 인자가 지금 니고데모의 눈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가 본 자가 없습니다. 물론 에녹이나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지요. 아브라함도 하늘에 가 있음이 누가복음 16장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지요. 하늘에 계시다가 땅으로 내려와 계신 분은 지금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늘의 일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일, 영의 일을 니고데모에게 풀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역사 속 이야기 하나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민수기 21:4-9에 등장하는 역사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교사였고 모세를 존경하는 사람이기에 모세의 일화를 예로 들어 주신 것이지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보호하시던 그분의 손길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광야에서 사는 독사(불뱀)들이 쏟아져 나와 백성들을 물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그들을 살려 달라고 중보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장대에 달아 들어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사람을 물어 죽이는 불뱀이 아니라,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처럼,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마치 장대에 걸린 놋뱀이 들어 올려진 것처럼 말이지요. 마치 불뱀처럼 영적 뱀인 마귀는 모든 사람들을 물어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장대 위의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려진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시고 게신 것입니다.

  • 적용

1. 십자가를 봐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일, 영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육신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하늘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 우리는 언젠가 죽음에 처하게 되며, 살아있는 동안에도 질병, 고통, 슬픔, 불안, 두려움 등의 죽음의 그림자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서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으며, 결국 죽고 난 이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는 둘째 사망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감당하신 것이지요. 마치 광야에서 놋뱀을 보면 불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죽음을 안고 사는 옛자아를 벗고, 영원히 사는 새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늘의 일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당시 종교적으로 가장 탁월하다는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지요. 그것으로 인해 감사가 넘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2. 하늘을 봐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미래의 구원에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고 영이 천국으로 가는 영적인 구원에 제한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영과 혼과 육과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전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죽음의 그림자들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극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숱한 상황들이 불뱀처럼 우리를 물려고 덤벼들 때에 육에 속한 사람들은 달려드는 불뱀을 바라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불뱀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들려 올려진 놋뱀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물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드는 마귀의 세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들려 올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우리를 새롭게 살리는 거듭남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존재하는 시시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어릭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 볼 때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삶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지금 당장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죽음의 길, 고통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 승리의 길을 취하십시오.

  • 적용질문

1.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구원의 감격이 있으십니까?

2. 아직도 십자가의 예수를 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십니까?

3. 나의 삶 속에서 현재 나를 물어 뜯고 있는 불뱀은 무엇입니까?

4. 불뱀이 아닌 장대 위의 놋뱀, 문제가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5. 하늘을 바라보아 현실의 문제들로부터 해방된 경험이 있으시면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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