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사사기 새벽묵상입니다.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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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에 담긴 10가지 메시지

* 사사기를 통해 주시는 10가지 메시지

우리는 무려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사사기를 묵상해왔습니다. 이제 사사기를 마치며, 사사기에서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압축하여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세상과 양다리를 거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이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충성하고 불순종하는 백성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셨고, 홍해와 광야를 넘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으며, 자기들이 건축하지 않은 성읍에서 살며, 자신들이 경작하지 않은 열매를 따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불순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알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도 섬기면서 다른 신들도 섬긴 것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행위라고 규정하십니다.

이것을 잘 이해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주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비유하곤 하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2층에는 돈 잘버는 기업인을, 옥탑방에는 잘 나가는 정치인을, 지하실에는 잘 생긴 연예인을 데려다가 번갈아 가며 잠을 잡니다. 그러면서 남편과 마주치면 사랑한다고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교태를 부립니다. 이 여인의 남편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사사기의 백성들은 이 비유 속의 아내와도 같은 짓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 1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 빼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시에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결코 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사기의 백성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사기를 읽을 때면 으례히 “왜 이렇게 신실하지 못할까?”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겼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버리셨다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버릴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신실한 일들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2. 종교적 타락은 반드시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반드시 윤리적으로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윤리란 사람들이 마음대로 세운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스스로 윤리체계를 세우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윤리를 세우면 윤리 자체가 타락한 것인데, 그 윤리를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선하다 여기고, 의롭다 여깁니다. 사사기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왕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죄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반을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는지를 우리는 목격해 왔습니다. 레위인의 첩사건은 그 사실의 정점이지요.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사람을 함부로 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죄악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해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왕좌에서 끌어 내렸으니, 자신을 통제할 분이 계시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기 생각이 곧 법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법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윤리가 대부분 사람을 향한 사랑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 중 1-4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5-10계명은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3. 번영과 풍요를 숭상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이다.

사람이 하나님 이외의 종교에 심취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잘되고 싶어서, 더 행복하고 싶어서입니다. 한마디로 번영과 풍요를 얻기 위해서 종교를 갖지요. 가나안의 우상들은 모두 번영과 풍요를 추구하는 가운데 형성된 것들이었습니다. 바알도, 앗세라와 아스다롯도 모두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몰록을 섬기는 자들은 더 많은 번영과 풍요를 얻기 위해 아들을 태워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블레셋이 고대판 인어인 다곤을 섬겼던 이유도 그놈의 풍요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성공하고 번영하며 풍요롭고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번영과 풍요는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힘을 얻고 싶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고, 행복을 느끼고 싶은 것 역시 내면의 번영과 풍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그런 것들을 누리도록 창조되어졌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그런 것들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목적없이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찐사랑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찐이니,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소유가 다 우리의 소유가 되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런 것들을 찾기 위해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보시며,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영과 풍요와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그냥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추구가 찐이기만 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4. 세상과 섞이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종교가 상호 배타적이거나 모순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바알은 땅의 주인이라고 믿었습니다. 각자 관장하는 분야가 다른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여호와를 섬기면서 동시에, 아스다롯 신상을 가지고 있었고, 드라빔과 에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섞여버린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의 문화와 풍습에 젖어 들기 시작합니다. 바알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백주대낮에 음행을 행하고,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일들까지도 서슴치 않습니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도, 그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주저함 없이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전혀 죄로 여기지를 못하게 되지요. 그것이 혼합주의의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과 섞여 버리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윤리를 범하며 살게 하고 맙니다. 가나안 종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믿게 하는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을 동성연애, 축첩, 윤간과 죽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음을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든지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든지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 종교와 가나안 종교를 혼합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보십시오.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가 온통 강간, 윤간, 아동학대, 유괴, 인신매매, 살인, 학살 등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모두 세상의 풍조일 뿐입니다. 이런 풍조 속에 섞여 버리면, 하나님의 백성도 그 풍조 속에서 놀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생각보다 훨씬 거세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을 주셨는데, 안식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유는 그 땅에서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신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주변나라를 강대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 땅 안에 남겨두신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의 목적으로 주어진 땅에서 살면서도 실상은 압제와 고난과 박해의 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믿는 자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부활하신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안식일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였고, 이제 진정한 안식이 왔으니, 주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진정한 안식을 주신 주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안식이 아닌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식의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불안과 혼란의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시대의 땅을 살고 있습니까, 사사시대의 땅을 살고 있습니까?

6. 인생이 당신을 속일 때에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믿는 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인생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고통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세상 가운데에 들어 왔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역시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한 생의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녀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를 하면 고통이 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고통을 받게 되면 고통의 원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이 극심해지고, 이방 민족의 압제가 견딜 수 없게 되면,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자신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근원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건 고통 가운데에서 부르짖는 절규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긍휼은 자주 부르짖음 가운데 임하십니다. 힘들다면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이 속히 임할 것입니다.

7. 왕이 없는 사회

사사기의 주제는 결국 사람에게 왕이 없었으므로 누구든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긍정적으로 보면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평등사회이며, 각자가 자기 일을 책임지는 사회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일정한 규율이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무질서와 방종의 사회였다는 뜻도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왕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왕정이 아닌 사사정치로 시작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사정치 안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만 하면, 율법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려 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유인이 아닌, 그들 스스로가 왕이 된 자유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원했던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종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는 말은 그러므로 이중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되심 안에 살라는 영적인 의미와, 이제 사사시대가 아닌 왕정시대가 임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은혜로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다가 그만 예수님을 왕의 자리에서 내어 쫓아버리고 자신이 왕이 된 “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우리가 얻게 될 것은 사사기의 혼란 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사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나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라, 내가 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왕인 인생을 살라 등의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는 누구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8. 하나님만이 진정한 사사가 되신다

사사기에서 유의할 점은 사사들에 대해 사사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사들 전체를 가르칠 때에 사사라는 표현을 쓰긴 하였지만, 사사 개인에게 사사라는 호칭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사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쓰임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로 들어 쓰신 사람들은 대부분 연약하거나, 좋지 않은 가문 출신이거나, 멸시받거나, 치명적 약점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은 용맹하게 일어서서 대적의 손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던 이유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자요, 통치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우리의 재판관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통치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9.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 곧 비범함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사사들의 면면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음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인간의 능력이 비범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 비범함을 만든 것이기에, 우리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기만 하면 비범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들의 연약함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 세상적 비범함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사사들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음에도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자주 무너지고 실패를 범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로 마쳐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비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 때문에 비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파트너를 꿈꾸어야 합니다.

10. 당신은 사사기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전해 주신 메시지를 기록함으로써, 사사기를 통해 주시는 10가지 메시지를 완성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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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없는 자의 방종 (삿 21:13-25)

* 왕이 없는 자의 방종

* 사사기 21:13-25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죄악의 연결고리.

내전으로 인해 베냐민 지파의 대부분이 죽고 겨우 600명만 림몬 바위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화친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베냐민 사람들에게 야베스 길르앗에서 잡아온 처녀들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하였습니다. 이것은 더 많은 가정을 만들어야 더 빨리 베냐민 지파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산술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아내를 차지할 2/3가 될 것인가 하는 형평성의 문제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누가 아내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또 다른 분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확히 600이라는 수를 맞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들이 한 맹세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맹세를 어기고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었다가는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베냐민 지파에게 줄 처녀가 부족한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솔하게 맹세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중의 장로들이 모자라는 200명의 처녀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여인들을 납치할 것을 합법화하고 권장하는 엽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실로에서는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어서, 그 날에는 실로의 여인들이 밖으로 나와 춤을 추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추러 나오면 포도원에서 나와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서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고 했습니다. 만약 납치하다가 걸려서, 처녀들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따지면 장로들이 적극 변호를 해줄 것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 사람들에게 딸을 주기를 꺼리는 것은 그들이 한 맹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딸들이 납치당한 것이면,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게 되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논리로 계획된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악이 지속적으로 꼬리를 물고 새로운 죄악을 양산해내는 죄의 확장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죄로부터 시작하여, 간음한 레위인의 첩, 기브아 사람들의 레위인과의 동성애 시도, 기브아 사람들의 집단 윤간과 살인, 첩의 시체를 12토막 낸 엽기적인 행각, 이스라엘의 헛된 맹세, 죄를 옹호하고 묵인하는 죄, 도를 넘어서는 과잉 정죄, 야베스 길르앗에 대한 학살, 실로 여인에 대한 납치 사건 등, 한 사람의 범죄 이야기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 민족의 범죄 이야기로 확산되어 갑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타락해 있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은 모든 개인의 영역에 스며들어 있었고, 공동체 전체의 영역에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었음을 이 일화 하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절대적인 윤리 기준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죄가 당연시 되어지고 맙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죄를 지적하는 사람을 오히려 공격하는 오만을 낳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스스로 의로워지며, 냉혹해지고 잔인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점점 육신을 붙들고 있는 마귀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의 실수인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이스라엘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있었던 내전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경험하게 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1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베냐민 지파를 무참히 학살한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수인가 하는 의문을 낳습니다. 야베스 길르앗의 거민들을 모두 죽이고 그곳에서 처녀들을 취한 것 역시 비슷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의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명확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몹시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5절의 기록을 통해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죄악 중에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이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의 첩을 집단폭행한 기브아 불량배들의 극악한 죄악을 심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그런 극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응징하기는 커녕 그들을 응징하려는 이스라엘 지파와 맞서 전쟁을 불사했습니다. 그것은 베냐민 사람들이 그런 극악한 죄악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태도를 동일한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베냐민 지파 전체를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 지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들은 지나치게 칼을 휘둘렀고, 불필요한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베냐민 지파는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도와 인간의 실수가 만나는 접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이지요.

야베스 길르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공동체의 죄악을 도려내는 자리에 나오지 않은 죄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진멸합니다. 그들의 지나친 맹세도, 그들의 잔인한 도륙도 모두 그들의 실수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극악한 죄악을 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범죄를 한 것으로 판단하셨고, 그에 대한 심판을 하신 것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의도와 인간의 실수가 만나는 접점이 생깁니다. 역시 판단이 어려워지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너무나도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죄악을 묵인하는 것 역시 그 죄악을 범한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실수일까, 하나님의 심판일까를 고민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신가를 더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악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악이 덮여진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범하거나, 죄악을 묵인해도 큰 탈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악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과 죄악에 대한 둔감함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 가운데 머물 때에 우리를 보고 아파하시며 속히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범죄한 것들에 대해서만 죄로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묵인한 것도 죄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은 것도 죄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도 죄로 여기십니다. 죄를 규정하는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죄 여부는 우리의 판단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우리는 더욱 죄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자.

베냐민 자손은 이스라엘 총회의 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들은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만큼 아내로 붙들어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곳에 거주하였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다시 건축해야 했습니다. 내전을 통해 성읍이 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도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 후에야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이 비극을 맛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이들은 과연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경험한 후, 그 삶의 양식에 진전을 보였을까요? 우리는 이미 그들이 진전은 커녕 오히려 더욱 타락해 갔음을 압니다. 이 일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사사시대 초반에 생긴 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기록된 사사들의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이 사실은 이 사건 후의 일들인 셈이지요. 사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았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한 삶을 살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타락의 정도가 심해져만 갔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그 이유에 대해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니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는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기준 없이 살다가 타락해버렸다는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넘어 왕이 통치하는 왕정시대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는 왕정시대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왕정시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혼란을 기록한 책이기도 합니다. 인간 왕이 있다고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 왕의 유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것을 우리는 왕정시대가 포로시대로 이어진 것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백성은 육체의 소욕을 떠나 살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마귀가 붙들고 있는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마귀화 되고 맙니다. 종교적 타락이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우리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사기를 맺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나의 왕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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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으로 위장된 악행 (삿21:1-12)

* 거룩으로 위장된 악행

* 사사기 21:1-12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혈기가 부른 비극

이스라엘 지파 대 베냐민 지파의 내전은 이스라엘 지파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한 언약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12개의 지파가 모두 온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2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가 장정 600명만을 남겨둔 채 몰살을 당한 것입니다. 남겨진 600명의 남자가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낳으면 회복될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과의 전쟁을 위해 미스바에 모였을 때, 자기의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기로 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맹세를 깰 수가 없었습니다. 맹세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민족의 순수성이 깨어져 온전한 언약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회복할 씨앗은 있되, 씨앗을 퍼트릴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이제 이스라엘의 한 지파는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날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죄악을 이스라엘 중에서 정화시키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들은 공의보다는 인간적인 분노와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는 것은 베냐민 자손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태도가 있었기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모두 멸절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한 후 베냐민 성읍으로 들어가 베냐민 지파의 모든 사람들과 가축까지 죽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시에 가나안 족속에게 행했던 헤렘 전쟁, 즉 진멸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에 대하여 헤렘을 명하신 이유는 가나안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형제인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족속 취급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부녀들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를 응징하겠다는 그들의 공명심은 인간적인 혈기와 맞물리면서 도를 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형제 자매에 대해서 우리가 심판할 권한을 하나님께서는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열심이 특심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혈기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행위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에 자신의 행위를 범죄로 여기지도 못합니다. 혈기가 거룩으로 포장되어 버리면,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휘두르는 칼날에 성도들은 다치고 상하게 되며,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아예 교회를 등지게 되곤 합니다. 혈기는 늘 비극을 부릅니다. 혈기는 거룩으로 포장될 때에 그 파괴의 힘이 더욱 강해지며, 더 큰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하여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인간적인 분노와 혈기가 버무려져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옳은 일은 행하되, 혈기가 섞이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2. 잘못된 눈물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에 모여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큰 소리로 울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자기들의 혈기와 불필요한 맹세로 인해 문제가 생겼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냐고 묻습니다. 처음 죄를 범한 기브아 사람들, 그를 옹호한 베냐민 지파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고 싶었겠지요. 심지어는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어찌하여…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새 울고, 이튿날에 일찍 일어나서 벧엘에 단 하나를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들이 이와 같이 한 것은 베냐민 지파의 멸족 위기가 마음이 아파서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냐민의 멸족을 마음 아파할 것 같으면 애초에 그렇게 잔인하게 진멸작전을 감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멸절은 단순히 한 지파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언약 공동체 중 한 지파가 빠진다는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성립 요건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형제의 슬픔에 대한 눈물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곤란한 상황으로 인해 슬퍼하는 눈물이었고, 그것을 다른 이의 탓, 심지어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원망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세상의 눈물과 달라야 합니다. 자신의 곤란함 때문에 우는 눈물이 다인 사람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그리스도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세상의 고통으로 인해, 형제 자매의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의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눈물의 존재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하는 것입니다.

3. 헛된 맹세가 부른 또 다른 비극

통곡하면서 베냐민을 회복할 방법을 모색하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들이 베냐민과의 전쟁 전에 했던 또 다른 맹세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를 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을 때에 참석하지 않은 지파가 누구였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회에 불참한 자들의 성읍을 쳐서 그 성읍의 처녀들을 잡아다가 베냐민 남자들에게 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전쟁 전에 했던 두 가지의 맹세를 다 지키면서도,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을 수 있는 묘책이었습니다.

조사 결과,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 총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용사 12,000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내어, 그곳의 거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게 했습니다. 죽음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남자와 자지 않은 처녀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젊은 처녀 400명을 붙잡아 실로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의 ‘진멸하다’는 말 ‘헤렘’은 ‘구분하다’, ‘봉헌하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도 헤렘을 행하더니, 야베스 길르앗에도 헤렘을 행합니다. ‘헤렘’이란 그냥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여 진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하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혈기, 자신들의 분노, 자신들의 입장이 온통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맹세를 합니다. 또한 그 맹세를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이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악이 될까봐 지킵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의 이기심과 불의한 행동을 거룩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악이 자행되며,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은 그들 손에 의해 악하고 잔인한 하나님으로 그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섣불리 맹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맹세를 지켜낼 힘이 없습니다. 맹세는 자주 인간에게 올무가 됩니다. 모든 상황을 지배할 수 없는 인간은 결국 맹세를 깨거나, 맹세를 멍에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맹세를 지켜도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지, 맹세때문에 질질 끌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맹세를 깨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면서도 꼭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입니다. 실컷 다른 성도들을 욕해놓고, 끝에 ‘기도해주세요’ 한마디 붙이면 기도제목으로 포장이 됩니다. 실컷 혈기를 부려 놓고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난다’ 한마디 붙이면, 거룩한 분노로 포장이 됩니다.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싶을 때만 꼭 성경을 갖다 붙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지식이 풍부한 것도 아닙니다. 몇 구절 주워 들은 풍월과 수박 겉 핧기 식의 알량한 지식 가지고 거드름을 피웁니다. 모든 주장을 성경에 근거해서 펼치려는 좋은 시도를 흠집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기 주장을 펼치면서도, 하나님의 것인 양 포장하는 위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탐욕을 포장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장하게 되면, 그 파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는 행위보다 더 심각해지고 맙니다. 인간의 악이 하나님이라는 정당성을 입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악한 의도를 가리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것만을 고민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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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용납한 죄 (삿20:29-48)

* 죄를 용납한 죄.

* 사사기 20:29-48

29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30 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31 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32 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33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34 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36 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37 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38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39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40 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41 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42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43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44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45 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46 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47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죄를 품은 자의 일시적 번영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내전에서 두번의 참패를 당합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하나님께 진심어린 회개를 하고 금식기도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제서야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승리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숫자만 믿고 교만하여져서 무턱대고 전면 공격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들은 이번에는 신중하게 매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실패는 사람을 낮아지게 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고, 또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는 겸손을 선물합니다.

그들은 베냐민 군을 성읍 밖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지난 두 번의 패전때와 같은 전투대형을 갖추어 베냐민 지파를 유인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번에도 자신들이 이기는 줄 알고 의기양양해서 이스라엘 연합군을 추격하며 30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유인 작전을 펴는 것도 모른 채, 기세 등등하게 이스라엘을 추격하면서 기브아 성읍을 멀리 떠났습니다.

베냐민 군대 앞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던 이스라엘 지파들은 성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신호로 하여 급히 돌아서서 뒤에서 공격하는 복병과 함께 베냐민 군을 협공하였습니다. 결과는 베냐민의 참패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전체 군인은 26,700명이었는데, 그 날 하루에만 25,100명이 전사했으며, 도망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겨우 600명에 불과했습니다. 숫자에 민감한 사람은 1,000명의 수가 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6,700-25,100-600 = 0이 아닌, 1,000입니다. 숫자가 안 맞지요? 1,000명은 아마도 앞의 두 번의 전쟁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40,000이나 죽었으니,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1,000명 정도는 죽었으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베냐민 지파는 그때서야 자기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았다는 단어 “라아”는 보았다는 말입니다. 참패하게 된 현실을 눈으로 직시하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들은 패하기 전까지는 의기양양 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승리를 하니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인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실수가 없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가증한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전체에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므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회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의 전투는 이스라엘이 패하게 하셨습니다. 반면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의 지파 내에서 범죄를 하였음에도 두 번의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형통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에 앞서 아예 하나님께 물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파 내의 패역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15:1의 무모한 싸움을 감행할 정도로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거기에 두 번의 승리까지 임했으니,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찢을 기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두 번의 승리가 그들에게 시간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 멋대로 심판을 감행하려는 이스라엘 지파도, 자기 지파 내의 범죄를 회개하지 않고 범죄자들을 품는 베냐민 지파도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는 처절한 패배를 통해 그것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은 두 번의 승리에 취해 오히려 더 의기양양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결국 베냐민 지파는 겨우 남자 600명을 남기고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죄를 품은 채 번영하는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채, 형통하고 번영하는 것이 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작은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야 멸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마치 시한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타고 고공비행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되면 빵 터져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높이 올라간다고 생각할 때에, 재빨리 내려올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2.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의 함정

본문 38-48절은 이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전쟁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모두 전멸하고, 겨우 600명만 림몬의 바위 동굴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46절에서는 이날 죽은 자의 수가 25,000이라고 기록하여, 35절의 25,100명과 100명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정확한 수를 밝혔기 때문에, 뒤에서는 다시 정확히 수를 언급할 필요가 없고, 대략적인 수치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38-46절의 기록은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 자손의 멸망 과정을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숫자는 상대적으로 대략 기록을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모두 색출해 죽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이같이 베냐민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이유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죄악을 범한 기브아 불량배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옹호하는 것을 동일한 죄를 범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죄를 옹호하다가 같은 범죄의 씨앗을 뿌렸고, 결국 죽음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하셨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에는 무서운 함정이 들어 있습니다. 죄가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죄와 죄인을 분리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지어 행할 것인가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풀지 않으면, 우리는 이 말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은 죄에 대해 묵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묵인하면 결국 같이 죄를 사랑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철저히 죄에 대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죄악을 도려내야 하고, 죄를 다시 범하지 않으려는 뼈를 깎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죄는 옹호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죄로 품고 함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더러운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한 것으로 인해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한 바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죄악을 범하고, 성도들을 더럽히는 자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자를 용납하고 옹호하는 것은 함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되고, 함께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 되며, 함께 멸망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을 그대로 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기에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해야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여 멸망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세리와 창기도, 바리새인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죄 가운데에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 안에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랑도 가르침도 거부하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닫고 맙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향하여 죄가 죄라는 것을 당당하고도 치열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죄로부터 떠나게 해야 하고,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들로부터 성도들이 오염되어 같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교회가 치리와 권징의 기능을 상실하면, 교회는 사회보다 더 악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회에서는 사법이라는 정화 작용이 있는데, 교회 내에서는 은혜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정작용을 내동댕이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죄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로 죄를 옹호하는 함정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죄라 외쳐야 합니다. 멸망으로 가는 그 비행선에서 당장 뛰어 내리라 소리쳐야 합니다. 그것이 죄인을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3. 긍휼로 시작했으나, 기쁨으로 마감하는 삶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13절 이후에 기록된 사건이 일어날 때 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 동안을 숨어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에 진노하셨지만 징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고, 600명을 남겨 두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로부터 베냐민 지파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것은 열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파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라 징계 가운데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 긍휼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고, 또 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징계 가운데 베풀어지는 긍휼을 빨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겨우 600명 남아서 이상한 방법으로 회복되어지는 그런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자리에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을 마감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긍휼하심으로 은혜를 받았으면, 기쁘게 하심으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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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독이냐? (삿20:18-35)

* 누가 감독이냐?

* 사사기 20:18-35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1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하나님은 조연배우가 아니다.

레위인의 첩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파들과 베냐민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전에, 누가 먼저 베냐민 지파와 싸울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묻는 행위는 매우 거룩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분명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 자손의 참패였습니다. 무려 22,000명이 베냐민 지파에게 전사를 당합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여쭈었고,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물론 현대에 이 장면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몹시 당황스러운 사실입니다. 기도하고 응답받았는데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전쟁 직전에 하나님께 나아가 묻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관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적들과 전쟁을 하기 전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는 방법대로 전투를 시행하기 위해 늘 하나님께 묻곤 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 전통을 따라 하나님께 질문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승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실수는 베냐민 지파를 형제로 여기지 않고, 대적들과 동일시 했다는 것입니다. 베냐민의 죄악은 공동체 내부의 죄악이었으므로, 그들은 총회가 모였을 때, 회개운동, 영적각성운동, 하나님과의 회복 운동을 먼저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 내부의 죄악을 슬퍼하며 회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적으로 여기고 싸우려 했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실수는 ‘누가 먼저 싸울까’를 묻기 이전에, ‘싸울지 말지’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싸우기로 이미 결정을 해놓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는 장면에 맞춰서 개입을 해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감독이 아니라, 자신들이 감독이고 하나님은 빛나는 조연 등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종의 종교쑈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종교쑈를 패러디 하셔서 쑈로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즉, 이스라엘 지파의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도 쑈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응답하셨지 승리를 주시겠다고 응답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형식적인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관점과 우선 순위의 문제를 지적하시기 위해 그들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의 세 번째 실수는 그들이 자신들의 숫적 우위만 믿고 교만을 떨었다는 것입니다. 10절의 ‘전열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적을 포위하는 대형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능력은 파악하지 못한 채, 숫적우위만 믿고 베냐민 지파를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굳이 나서지 않으셔도 이길 수 있다는 과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교만이 하나님을 감독이 아닌 조연의 자리로 밀어낸 이유입니다. 자신의 힘을 맹신하고 하나님은 들러리 쯤으로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본질이 빠진 채, 조금 나아진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패배를 맛본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맹신하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본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여호와 앞에서 울며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싸우기로 이미 결정을 해놓고 ‘누가 먼저 싸울지’를 물었던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싸울지 말지를 울며 묻는 개선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본질적인 문제는 울면서 졸라대는 것도, 조금 더 나은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닌,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의 과정은 생략한 채, 그저 울며 졸라대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와 싸울지를 묻는 그들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응답하십니다.

“올라가서 치라.”

그러나 올라가서 치라 하셨지 승리를 주시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두 번째 전쟁에서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18,000명이 죽임을 당한 처절한 패배였습니다. 진정한 회개없이 흘리는 그들의 눈물은 그저 전쟁의 승리를 위한 그들의 욕구를 담은 눈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눈물 역시 종교쑈였던 것입니다.

운다고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기도를 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물로 기도하면 모두 응답이 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하나님을 인생의 감독이 아닌, 조연배우로 내버려 둔 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감독이 되고, 하나님이 때맞춰 등장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울어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주객이 바뀐 채, 떼 써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감독이 되셔야 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두 번의 패배를 통해 군대의 1/10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제대로 된 회개를 합니다. 그들은 울며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두 번의 참패를 당하고 나니 그들의 교만이 꺾이고, 자신들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고민해볼 정신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감독이고 하나님이 조연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감독으로 모셔야 그들의 스토리가 진행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들은 숫적 우위를 믿고 하나님 없는 승리를 확신한 채, 하나의 요식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던 과거의 모습을 청산하고, 이번에는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공동체의 죄를 붙들고 진정으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 백성이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금식을 하여 힘을 빼는 행위는 인간적으로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앞두고 금식을 한 것은 자신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자기 의와 자기 열심을 다 태워 없애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결단의 표현이지요. 화목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은 패배의 원인이 공동체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그러진 데에서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드려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관계를 먼저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서 벧엘로 옮겨 왔습니다. 당시 제사장이었던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서있었습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입니다.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사사시대 초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말기가 아닌 초기부터 이미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온 것은 전쟁에 하나님의 임재를 앞세우겠다는 결단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두 번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그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두 번의 패배를 통해 그들은 그들의 능력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임재를 앞세워야 승리할 수 있음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모든 과정을 마친 후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은 이제서야 베냐민 자손을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적이 아닌 형제이기에 베냐민 지파의 죄는 곧 자신들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눈물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번제의 예배와 법궤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을 조연이 아닌 감독으로 모셨습니다. 드디어 본질이 회복이 된 것이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도 쑈가 아닌 진정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과연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음 전쟁에서 승리를 얻게 될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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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꼬 빠진 찐빵 (삿20:8-17)

  • 앙꼬 빠진 찐빵

  • 사사기20:8-17

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12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15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16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하나님이 빠진 공의

레위인을 통해서 사건의 내용을 재차 확인한 회중들은 대책에 대해 논의했고, 결국 모든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범죄를 징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서 내린 결정이었으며, 이를 위해 40만명의 백성 중 한 사람도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기브아를 치는 일에 보병 40만이 모두 동원 될 필요는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회중 40만명 중 1/10 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악행을 행한 불량배들을 내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베냐민의 온 땅에 공식적인 전갈을 보낸 것은 베냐민 지파 모두를 대상으로 전쟁을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게 하라고 촉구를 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요구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십계명의 6,7,10 계명을 범한 것으로서 사형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의 죄악을 공동체 내에서 스스로 제거하지 않을 경우, 공동체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은 경험과 율법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과정에 있어 이들의 모습은 썩 괜찮아 보입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입각하여 회의를 했고, 만장일치로 결의를 모았으며, 이스라엘 내에서 기브아 사람들이 행한 악행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 전체가 아닌 기브아의 불량배들만 징계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의 회의에 하나님이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회의를 진행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시는지, 품어야 하는지 쳐야 하는지, 쳐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쳐야 하는지 등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목만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2) 두 번째 문제는 그들의 회의에 회개가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회의 내에 하나님이 없으니, 회개는 없고 정죄와 분노만이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범죄한 자들이 공동체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을 보여주는 자화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징계와 심판을 결정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했습니다.

3) 세 번째 문제는 이스라엘의 총회에 베냐민 지파가 빠졌다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전체가 범죄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냐민에 속한 기브온의 불량배들 몇 명이 행한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의에 베냐민 지파의 리더들을 아예 배제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지요.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리더들을 함께 불러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맞서 싸우는 대신 그들 스스로 불량배들을 척결했을 수도 있습니다.

4) 네 번째 문제는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대적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40만 대군이 모여 그들을 치기까지 떠나지 않기로 결의를 하고, 베냐민의 리더가 회의에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전갈을 보내 불량자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입장에서 보면 힘을 이용한 협박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무엇이 옳은가 하는 공의의 문제를, 우리를 뭘로 보느냐는 자존심의 문제로 전환을 시켜 버리고 만 것이지요.

2. 하나님이 빠진 자존심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파 내에 가증스러운 범죄 행위를 한 사람들을 내어주는 대신에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을 배제한 채, 미스바에 모인 40만 대군을 보면서 분개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군대를 모아 협박하듯 범죄자들을 내어달라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태도로 인해 자존심에 흠집이 났던 것 같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량배들에게 공의를 행하려는 이스라엘 지파들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고 있습니다. 기브온의 불량자들이 한 악행에 대한 공의보다 지파의 자존심이 더 소중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그림입니다. 기브온 불량배들의 행위는 무서운 범죄 사건이긴 하지만, 지파의 자존심까지 걸 정도로 심각하게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 사건과 비슷한 일이 대한민국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태도와 다음 사건에 나오는 판사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적용점을 찾아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최근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포르노 싸이트를 운영하던 범죄자가 적발이 되었습니다. 무려 32개국의 수사기관이 대대적인 공조를 해야 했던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웰컴 투 비디오’라는 이름의 이 음란 싸이트의 운영자는 “손정우”라는 한국인이었습니다. 아동 성학대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아동 학대 영상을 하나 올려야 하는 악마적인 방법으로 싸이트가 운영되었습니다. 영상을 보기 위해 다른 영상을 찍어서 올려야 했으므로, 힘없는 아동들을 학대하는 범죄가 확산될 수 밖에 없는, 악의 양산과 증폭 구조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피해 아동들이 속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가슴아픈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악마 손정우가 받은 형량은 꼴랑 징역 1년 6개월이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아동과 여성을 우습게 보는가를 전 세계에 알린 부끄러운 판결이었지요. 미국 법무부에서는 한국의 이러한 판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인해 같은 죄목으로는 손정우를 심판할 수 없는데, 다행히도 아직 손정우가 심판을 받지 않은 죄목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미국 법무부는 마지막 남은 죄목을 걸어, 손정우를 양도해 줄 것을 한국에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그 죄목으로 아들을 고소합니다. 미국에서는 평생을 감옥에서 썩는 판결을 내릴 것이 뻔하니,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지요. 전국민은 손정우가 미국으로 송환되어 엄벌을 받기를 기대하고 사법부를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맡았던 강영수라는 판사는 미국으로의 죄인 송환을 거부했습니다. 주된 이유는 주권의 침해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공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결국 손정우는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고, 그에 대한 기소는 기각되었습니다. 계란 한 판을 훔친 생계형 범죄자는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전 세계를 아프게 하고 경악하게 한 아동 포르노 싸이트의 운영자는 고작 1년 6개월의 형량을 치루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정우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으나, 초범인데다가 반성을 하는 기미가 있고, 부양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2심에서 감형을 받았습니다. 반성하는 기미는 그가 썼던 몇 장의 반성문 쪼가리로 평가한 것이었고, 부양가족이란 그가 체포된 후 허위로 한 혼인신고로 평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변호했던 7명의 변호인단이 가르쳐 준 방책이었을 테지요.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날까요? 손정우도, 손정우의 아버지도, 강영수도, 돈에 환장한 변호사들도, 대한민국의 사법부도 온통 아동과 청소년과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수준 이하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온통 타락을 한 결과인 것이지요.

세상이 타락을 하면,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혈연, 지연, 학연이나 자신의 유익 등이 결부가 되는 순간, 공의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자주권 운운하며, 범죄자를 활개치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 명예와 이미지 실추라고 하는 막대한 무형적 손실을 입혔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 하는데, 강영수만 떳떳합니다. 변호인단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돈을 받고 법을 피해갈 방법을 알려 줍니다. 똥을 보면 달라드는 똥파리들처럼 돈만 보면 달라 들어 죄인을 옹호하고 변호하며, 공의를 저버리는 짓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자들처럼 인격은 없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 떼돈 벌며 사는 인생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초등학생도 내리지 않았을 웃기는 판단을 내린 강영수를 보면서, “죽고 살고 공부해서 점수 잘 받은 사람이 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 정신으로 재판을 해줄 인격을 갖춘 사람이 판사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썩어 있고, 사회 전체의 인식 자체가 망가져 있으면, 그 안에 사는 구성원들은 동일한 사고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손정우, 손정우 아버지, 강영수, 변호인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 인식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인격보다는 성취를 선호하며, 사랑과 공의보다는 현실적 유익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독 윤리에 너무나도 약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갖기 보다는, 세상의 논리로부터 자기 자신의 신앙을 보호하는 것마저 버거워 합니다. 삶을 보호하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을 갖는데, 세상을 변화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히스토리 메이커로 사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나 강영수처럼 공의보다 자기 집단의 자존심을 우선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3. 하나님이 빠진 재능과 담력

베냐민 지파는 지파 내에서 일어난 가증스런 범죄에 대해 회개하고 공의를 행하기는 커녕, 이스라엘 총회와 맞서 싸우려고 군사를 모았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모두 26개였으며, 각 성읍은 한 가족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기브아 외의 다른 성읍에서 모인 병력이 26,000명이었고, 기브아 성읍의 병력이 700명이었으므로, 베냐민 지파의 군사는 모두 26,700명이었습니다. 기브아에서 선발한 700명에 대해 특별히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특별히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모두 왼손잡이로서 물매를 사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칼을 들고 싸우는 시대에 물매의 명수가 있다는 것은 궁수부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파워를 갖습니다. 적들이 오기 전에 돌을 날려 쓰러 뜨릴 수 있으니 매우 효과적인 전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이들은 왼손 뿐 아니라 오른 손에도 능숙한 양손잡이들이었으며 싸움에 있어 매우 용맹스러웠습니다 (대상 12:2). 이스라엘 전 지파 400,000에 대항하여, 26,700의 군대로 전면전을 결단할 것도 능력과 담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15배에 달하는 숫적 열세를 무시하고 싸움에 나설 정도이니 말 다 했지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재능과 담력이 있는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 좋은 능력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에 쓰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일에 사용을 합니다. 공의를 위해 사용하고 대적을 무찌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 안에서 지지고 볶는데에 사용을 합니다.

손정우라는 인물도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인재였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해킹을 하여 친구 집 컴퓨터의 웹캠을 켜고 잠자는 친구의 모습을 촬영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구축한 아동 포르노 싸이트의 운영 방식은 전문가들도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좋은 재능과 머리를 자신의 부를 쌓는데 사용하느라, 죄를 범하고,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했으면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 아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정우가 한 일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를 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사실 손정우는 아버지를 보고 배웠음이 틀림없습니다. 악인이 악인을 양육한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아까운 재능과 능력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자신만을 위해 쓰다가 타인을 아프게 하며, 하나님의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재능은 결국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재능은 하나님이나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을 양산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재능이 탁월할수록 그 죄악의 크기도 커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재능 얻기를 먼저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아는 것보다 재능 얻기를 먼저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공의, 하나님이 빠진 자존심, 하나님이 빠진 재능은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그것들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만 인간의 존엄이 나오며,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재능이라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을 진정으로 복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이 들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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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눈물의 방패(삿19:28-20:7)

* 회개는 눈물의 방패

* 19:28-20:7

19: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20: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3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내겐 잘못이 없을까?

레위인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 자기 대신 자신의 첩을 내주고 자신은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기브아를 떠나려고 집을 나서던 그는 첩이 두 손을 문지방에 얹은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자기 첩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증오심에 휩싸인 레위인은 집에 도착하자 즉시 아내의 시신을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복수를 민족의 힘을 빌려서 하고자 한 것이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왕정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억울함을 호소할 마땅한 통제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당한 일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책 중 하나는 12지파 모두에게 죄를 공개하여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12토막 내는 끔찍한 일을 자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분명 악한 짓입니다. 그 일은 공개되어야 하고, 응징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레위인이 맨 처음 보였어야 하는 반응은 적개심의 불길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대신 첩이 희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가 악한 일을 만난 배경 속에는 그의 죄악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으로만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죄악을 회개하고 이성을 되찾은 후,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공의를 위해 기브온의 불량배들을 고발해야 했습니다.

비참한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반응은 나에게는 잘못이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과오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더 큰 잘못을 해놓고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만나게 됩니다. 교회 내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넘쳐 나는데, 상처를 입힌 사람은 없고, 아파 죽겠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가해자라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이 미세하게 실수한 부분이 있지만, 상대방의 잘못이 너무나도 명백하고, 그로 인한 피해가 참담하리 만큼 클 때에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미세한 실수 하나를 붙들고 회개하고 돌이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임한 참혹한 일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의 징계를 막을 수 있는 눈물의 방패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위로로 바꾸시며,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방패가 되어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2. 공동체에는 잘못이 없을까?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을 야기했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천인공노할 죄악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소돔성의 몰락을 떠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훗날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할 때,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정도로 이 사건은 심각하고도 충격적인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최북단인 단에서부터 최남단인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요단 서편의 길르앗 땅에 살던 지파까지 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온 백성의 지휘관들이 백성들 앞에 섰고, 백성의 수는 사십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정은 거의 다 모인 셈이지요.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재판하고 응징하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불량배들의 범죄 문제로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은 곧 베냐민 지파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시체의 토막들을 12지파 모두에게 보냈으므로, 베냐민 지파 역시 시신의 일부를 받았으며,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회는 당사자인 베냐민은 제외된 채 소집이 되었으므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총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원고인 레위인을 불러서 사건의 내용을 다시 한번 듣기로 했습니다. 레위인은 사건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를 합니다. 물론 이 보고에서도 자신의 치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지요.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고발하지만, 자기가 첩을 그들에게 내어 준 이야기는 쏙 빼놓았습니다. 첩의 시체를 토막내어서 온 이스라엘에 보낸 일 역시 잔인하고 엽기적인 일인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은 정당하다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한 일을 기브아 주민 전체가 한 것처럼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옳지 않은 보고입니다. 그는 특별히 “이스라엘 중에서”라는 말을 집어 넣음으로써 개인의 분노를 이스라엘 전체의 분노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공분할 만한 극악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동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회개입니다. 공동체 일부의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한 개인이나 그룹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공동체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 저런 인간들이 있지?”, “치리해야 하는 것 아니야?” 등의 사고들을 하기에 앞서 공동체 전체가 먼저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부정한 것은 그만큼 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때가 많습니다. 각 개인이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지체라고 하는 관점에의 보면, 그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손이 타인의 물건을 훔치면 손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쁘다고 하듯, 공동체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죄악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공동체 전체가 부글거릴 때에, 공동체는 공분에 휩싸이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그에 합당하게 징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회개가 이루어진 이후에 할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일처리를 하면 일처리 과정에서 더 많은 문제들이 양산되고 맙니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그 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고발하고 지적할 때에도 자신의 것을 숨기면 안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부분까지 모두 회개하며 얘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응징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은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또한 증오심으로 인해 상대방의 잘못을 원래 사실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최대한 숨기고, 상대방의 잘못은 최대한 부풀려서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지요. 그러한 행위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잘못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잘못은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면 됩니다. 사실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하고 공의로운 처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지요. 공분을 살 만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개인의 미움과 증오를 앞세워 확대하고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보고를 하여 공의가 제대로 행해지게 해야 합니다. 개인 감정 때문에 행해질 공의 역시 부풀려져서 수행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이 기브아 불량배들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 앞으로 끌고 간 것은 분명 잘 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도 공동체 내부의 죄악을 좌시하지 않고, 죄악을 스스로 절제해내려 시도한 것은 분명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공의와 응징에 앞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에게 문제는 없는지, 공동체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돌아봐야 하며, 개인이나 한 그룹의 죄악을 놓고, 자신의 죄악인 것처럼 눈물 흘리며 회개해야 합니다. 베냐민 지파 역시 전 이스라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였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후에 이어질 민족적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회개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방패이고,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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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Glory Jesus Glory

죄가 죄가 아닌 세상 (삿19:16-27)

* 죄가 죄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

* 사사기 19:16-27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본문해설 및 적용

1. 형통이 아닌 성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레위인 일행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묵을 곳을 찾았으나 날이 저물도록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돌아오다가, 어둠 속에 서있는 레위인의 일행을 발견하였습니다. 노인은 원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기브아에 거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율법대로 나그네를 선대하는 사람은 베냐민 사람이 아닌 타지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노인은 레위인에게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는 길이며, 베들레헴에 들렀다가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집이란, 성막을 의미하며, 당시에는 성막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70인역은 ‘여호와의 집으로’를 ‘나의 집으로’로 번역을 합니다. 여호와의 집이 있는 실로로 간다는 뜻을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냥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간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여 숙소를 얻을 가능성을 높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레위인은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모든 일행이 먹을 양식과 포도주도 충분히 있기 때문에 잠잘 장소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레위인에게 안심하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쓸 물건을 담당할테니, 거리에서 자지 말고 자기 집으로 가서 유숙하라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비로소 나귀들을 먹이고 발을 씻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율법 이전 사람인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것이 아예 하나님의 명령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노인은 전통적 관습과 율법의 가르침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나그네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 없을 때에 노인만 유일하게 나그네를 영접해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으로 노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없었습니다. 그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던 이유는 그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한 것 뿐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생각할 때, 선행을 하면 복을 받는다로 연결을 합니다. “이렇게 섬겼더니 저렇게 복이 왔다”, “하나님을 이렇게 잘 믿었더니, 하나님이 저렇게 잘 갚아주셨다” 등의 무수한 간증들과 설교들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이러한 간증과 설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갚으시는 것을 즐겨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는 자칫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통한 형통에 초점을 두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변형된 형태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을 하면 복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선행을 통한 형통이 목적이 아니라, 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이고 당당함이 되어야 합니다.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선의를 베풀되, 우리 선행의 동기와 이유를 묻는 이에게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2. 사람이 죄라 여기지 않아도 죄는 여전히 죄다.

레위인 일행이 평온하게 먹고 마시고 있을 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으로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겨 댔습니다. 곧장 문을 부시고 들어올 것처럼 위협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그들의 소란에 노인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문을 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레위인과 관계 할테니 레위인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나그네를 선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겨우 숙소를 찾은 나그네를 내어 놓으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습니다.

‘관계한다’는 말로 번역된 ‘야다’는 ‘성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동성 성교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소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의 집을 방문한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사용했던 용어도 바로 ‘관계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에 녹아 내렸으며, 사해 깊은 곳에 도시 전체가 잠기는 결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만드시고,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지, 아담과 아식이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순리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스리는 반역 행위입니다. 세상이 악하여 성소수자의 권한 운운해도 죄악은 어쩔 수 없는 죄악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향이 동성을 좋아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성향을 하나님께서 죄라 규정하신다면, 그것은 통제되어야지 릴리즈 되면 안됩니다.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면 사실 죄가 될 만한 것이란 아예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죄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건을 보면 탐내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도둑질이 죄가 아니어야 하고,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안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성향이므로 성폭력도 죄가 아니어야 하며,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죽이고 싶은 성향이 강하므로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종교적 의미의 죄를 얘기하는 것이지, 법적인 의미의 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건 안 주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기독교에서 규정하는 죄입니다. 성향이 있어도 그 정욕을 억제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죄라 규정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혹자는 동성애가 유전자에서 오는 성향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것도 사기입니다. 동성애에 관여하는 유전자란 지금까지 발견된 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 졌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LGBTQ 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어야지, 죄 자체를 품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죄인을 사랑하되 여전히 죄는 죄로 규정해야 하며,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3. 악이 관영한 세상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이다.

노인은 불량배들에게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노인은 자기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놓고 레위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이 너무나도 완악하여 설득 불능인지라 궁여지책으로 레위인의 첩과 자신의 처녀 딸을 대신 내어 주려 했던 것입니다. 더 크다고 생각되는 죄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다고 생각되는 죄를 허용해도 된다는 발상을 한 것이지요. 당시 여인들이 얼마나 무시받고 살았는지를 잘 반영해주는 대목입니다. 당시의 여인들은 그저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개념이었습니다.

불량배들은 자신의 딸을 내어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을 거절한 채,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빡빡 우겼습니다. 불량배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건드리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번 지나가는 나그네니 해를 입혀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변태적인 성행위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 때문에 노인의 딸까지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본 레위인은 자기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내어주고 맙니다. 베들레헴까지 찾아가서 여인을 달래고 설득하여 데려온 여인이지만, 레위인은 첩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첩을 사랑했다면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첩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자기 살자고 자기 대신 여자를 내어 줍니다.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못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랑이란 말만큼 학대를 당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 자기 맘대로 휘두르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 같은 일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동일하게 진정한 사랑을 하기를 원하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요15:13). 사도바울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엡 5:25). 죄악이 관영한 세상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가족에 대한 사랑도 모두 식어지고, 자신에 대한 애착과 자신을 위한 소유욕만 늘어납니다. 세상이 사랑에 그토록 목마른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사랑을 어디에서도 채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면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불량배들은 레위인의 첩을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미명에야 놓아 주었습니다. 밤새도록 불량배 들에게 욕을 당한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채, 죽어가는 몸으로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땅에서 몹쓸 일을 당하고, 자신을 버렸을지라도 그나마 남편이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기에, 마지막 힘을 쏟아 그곳에 도달한 후 숨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문지방에 그녀의 손이 얹어져 있었던 것은 그녀가 살고 싶어 안간힘을 썼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고대에는 문지방에 영들이 넘나든다는 미신이 있었으므로 문지방에 손을 걸쳐 놓으면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지요.

한편, 아내를 비정하게 버렸던 레위인은 일찍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첩이야 어찌 되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그의 남편”이라 부르지 않고, “그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라, 여자를 소유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이라면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시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밤새도록 한 여인을 능욕한 베냐민의 불량자들도, 자기 대신 아내를 내어 주고 생사여부조차 확인할 생각 없이 도망칠 궁리만을 하는 레위인도, 모두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 버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죄에 대한 기준을 세웁니다. 그 기준은 모두 제 멋대로라서 시대와 공간에 따라 기준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죄였던 것이 지금은 죄가 아니고, 이곳에서는 악인 것이 저곳에서는 선인 예들을 수도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기준이 고무줄인 것이지요.

“나영이 사건”에 대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조두순이라는 짐승같은 인간이 8세 여아를 교회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폭행하고 강간하여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소녀는 지금 21세가 되었지만, 당시 생식기와 항문의 80%를 잃어 버렸기에 아직 불편한 몸으로 살고 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조두순이 받은 형량은 꼴랑 12년이었습니다. 원래 15년 형량을 받았지만, 재심에서 만취 중에 저지른 일이라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형량이 줄었습니다. 술취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기독교 윤리와는 달리 세상의 법은 술취한 것이 잔인한 죄를 가볍게 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올해 12월이면 조두순은 석방이 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조두순의 아내는 아직 피해자의 집에서 500m 밖에 되지 않는 곳에 버젓이 살고 있습니다. 조두순은 출소를 하면 그 집으로 와서 살게 되겠지요. 조두순은 자신을 붙잡은 경찰들에게 12년 동안 감옥에서 몸을 잘 만들어서 나올테니 그 때 보자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물론 경찰들마저 조두순의 출소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조두순의 아내는 조두순에 대하여, 술에 취해서 그렇지 술만 아니면 좋은 사람이라며, 피해자가 어디에 살건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죄를 전혀 죄로 규정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죄를 죄로 보지 않는 것은 항상 비극을 빚어 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범죄 가운데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맘대로 산 결과는 자유와 만족이 아니라, 범죄의 홍수 속에서 겪어야 하는 불안과 공포와 비극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소망이고, 그것만이 빛입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잔소리말고 죄라 인정되는 세상이 되어야만 인류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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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답게 살자 (삿19:1-15)

* 그리스도인 답게 살자

* 사사기 19:1-15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4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교회가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진다.

우리는 사사기 19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 17, 18장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다룬 이야기라면, 사사기 19장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타락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은 동시대에 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사람과의 관계 역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의 탐욕을 억제하는 기준이 무너지고, 인간의 방종을 제어하는 통제자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사사기 기자는 한 마디로 압축하여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 사건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로 19장을 시작합니다. ‘그 때에’ 라는 말은 17, 18장의 일이 일어난 시대에 19장의 일도 일어났음을 말해줍니다. 즉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떠났기에,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이 동시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18장에 이어 본문에 나오는 주요 인물도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레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성별된 레위인이 종교적 타락과 연결되어 있듯, 도덕적 타락에도 역시 레위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으로 실로 근처이거나 실로 자체일 것입니다. 실로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모셔진 곳이었습니다. 종교적 타락도, 도덕적 타락도 모두 실로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윤리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지요. 미가 집에서 일어났던 작고 개인적인 일이 단 지파 전체의 이주와 연결되듯이 이번에도 레위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회 전체와 연결될 것입니다. 이제 그 작지만 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첩이 행음을 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일단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두는 일은 사회적 통념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첩을 두는 일은 늘상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오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1부 1처제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지, 아담과 하와, 하순이, 하숙이, 하정이, 하연이, 하랑이, 하주, 하미, 하자 등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축첩제도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결혼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회적 통념을 따라 살면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축첩제도라고 하는 통념을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크게 노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통해서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는 등의 일을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하시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윤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첩을 두는 일이 늘상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음을 보여 줍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실했던 기드온의 가정이 첩에게서 나온 아비멜렉 하나 때문에 파멸이 된 바 있습니다. 19장, 20장에서도 레위인이 첩을 둔 것으로 인해 민족적인 불행이 시작됩니다.

레위인의 첩은 음행을 한 후에 자기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내용에는 어느정도 번역의 한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행음을 했다는 말인데, 히브리 원문에는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인 ‘알라이우’가 ‘행음했다”는 말과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첩이 행음을 한 이유는 남편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레위인이 먼저 행음을 했기 때문에 첩이 맞바람을 피운 것으로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둘째, “남편을 떠났다”는 말은 화가 나서 친정으로 혼자 짐싸서 확 가버렸다는 말처럼 보이지만, 히브리 원어에는 양자 간에 생긴 불화로 인해 서로 헤어졌다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행음하다’는 ‘자나’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그러한 성향의 행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남편이 맘에 안 든다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아예 창기처럼 행음을 한 것은 더욱 더 큰 문제이지요. 남편 말고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도 아니고, 남편에 반항하기 위해 바람을 피운 것이니, 그 모양새가 창기의 행음과 유사해질 수 밖에 없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첩이 친정으로 돌아간 지 4달이 지났을 때에, 레위인은 첩이 그리워졌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기로 결심을 합니다. 율법상에 의하면, 어떠한 제물로도 죄를 속할 수 없는 죄목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살인죄, 부모를 때리는 죄와 함께 간음죄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율법은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행음한 첩을 데려 오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율법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일을 하는 레위인부터 율법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부터 윤리적으로 철저히 무너져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도덕적 타락과 방종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도 세상의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어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염되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통념이 괜찮으면 그리스도인에게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에서 죄악으로 인정을 하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괜찮은 것으로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집단이라기 보다는 세상의 또 다른 축소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세상이 바라볼 표준이 없어져 버린 것이고, 세상의 소망이 무너져 버린 것이지요. 교회가 서야 세상이 섭니다. 성도가 서야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레위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지 않으면, 세상은 소망의 빛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빛을 보고 세상은 구원의 보다 큰 빛을 찾아 들어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다.

레위인은 자기 첩을 데려오기 위해서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끌고 첩의 집으로 갔습니다. 한 필은 자기가 타고 한 필은 첩을 태우기 위해 나귀 둘을 끌고 가는 배려를 한 것이지요. 첩 역시 자신을 데리러 온 레위인을 냉대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로 데려 갑니다. 첩장인은 도망온 자기 딸을 찾으러 온 레위인을 크게 환영하였습니다. 시집 간 딸이 행음을 하고 돌아와서 네 달 씩이나 집에 들어 앉아있는데, 사위가 그 딸을 다시 데려 가겠다고 왔으니, 흥분이 될 만도 하지요. 그래서 장인은 레위인을 융숭하게 대접을 합니다. 딸을 바로 데려가게 하지 않고 무려 4일 동안을 강권하여 머물게 하면서 극진히 대접을 한 것이지요.

행음을 하고 돌아온 딸을 데리러 와준 데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딸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해달라는 애원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비의 마음은 사위를 잡아 두고 잡아 둬도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대접하고 더 많이 기쁘게 해줘야 딸을 버리지 않고 살아 줄 것이라는 과도한 걱정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시대가 악해져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의 모습만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윤리일 것입니다. 레위인은 장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곳에 유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음을 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아비에게 있어서는 변함없이 소중하고 귀한 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지요. 우리가 악한 길을 치달은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러 대하면 안됩니다. 육신적으로는 누군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녀이기 때문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배우자를 막 대하면 안됩니다. 배우자는 가장 가까이 살을 맞대고 사는 사이라, 사람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여과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위선을 떨어도 배우자 앞에서는 위선의 껍질이 벗겨집니다. 즉, 배우자에게 하는 행동이 진정한 자신의 인격이라는 것이지요. 자기 자녀에게는 끔찍히 대하면서 배우자는 막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가 누군가의 귀한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내 소유물이 아닌 누군가의 귀한 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막 대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끔찍히 아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첩장인이 행음을 한 딸을 안타까워 하는 그 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부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자식한테 좀 잘해주면 안되겠니? 욕하지 말고,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말고, 좀 잘 챙겨주면 안 될까?”

3. 그리스도인의 윤리대로 살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레위인은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이번에도 음식을 먹고 그 날 저녁에 떠나라며 다시 사위를 붙잡았습니다. 레위인은 이번에도 그 청을 받아들여 장인과 함께 음식을 먹은 후에 저녁에 첩과 하인을 데리고 길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아직도 아쉽기만 한 장인은 날이 저물었다는 것을 핑계로 다음 날 아침에 떠나라고 다시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레위인도 이번에는 장인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성소에서 봉사하여야만 했습니다.

길을 떠난 레위인 일행은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여부스 맞은 편이란 예루살렘의 서편을 말합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명칭입니다.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여부스라 불렸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출발하여 여부스 이르렀으니 약 1시간 반 가량을 걸어온 셈입니다. 저녁 늦게 출발을 했기에 여부스에 가까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레위인의 종은 주인에게 여부스 성읍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했지만,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이 아닌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서 유숙하기를 원했습니다. 안전의 문제도 있지만, 이방인의 집에 머물 수 없다는 종교적인 이유가 컸을 것입니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기브아에서 머물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는 기브아로 들어가서 성읍의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나그네를 대접할 것이 명령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는 그를 영접해서 접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야 나그네를 집으로 들이지 않는 것이 더 상식적인 일이지만, 이스라엘의 윤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윤리적 표준인 율법이 나그네를 대접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레위인 일행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윤리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자기 멋대로 살지만, 나름 율법을 지키는 모양새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성소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규정도 지키고, 이방인과 섞이지 않는다는 규정도 지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실질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형식은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일을 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눠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껍데기 뿐인 신앙이 되고 맙니다.

기브아 사람들 역시 명목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제시된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규정이 전적으로 무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그들의 타락한 모습을 더욱 더 명확히 목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늬 뿐인 신앙인은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만족시켜, 경찰에 안 잡히고, 감옥에 안 가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지 않는 수준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표준을 낮추면 표준보다 낮아집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려다 보니, 세상에서마저 지탄받는 수준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윤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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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억 속의 나 (삿18:27-31)

* 하나님의 기억 속의 나.

* 사사기 18:27-31

27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9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30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단 자손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땅을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북쪽 끝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서 우상들과 제사장을 탈취했으며, 한가하고 걱정없이 사는 라이스 사람들을 쳐서 그들의 땅도 빼앗았습니다. ‘만났다’로 번역된 ‘보알’은 어떤 사람을 갑자기 덮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무고한 라이스 거민들을 갑자기 덮쳐 칼날로 치고 불로 성읍을 살랐습니다.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해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었기 때문에 라이스를 약탈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가나안 족속을 칼날로 치고 불로 성읍을 살랐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은 이미 죄악이 극에 달해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된 상태였고,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 후손들이 실제로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려 4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이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거민들이 심판을 받기로 결정되는 순간까지는 침범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단 지파는 약속의 땅도 아니고, 심판이 결정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땅인데도 그 땅을 유린하였습니다. 또한 거기에 더해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던 것입니다. 힘이 없어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신보다 약한 민족을 이유없이 유린하는 단 지파의 당시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해치면 안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면 더더욱 안됩니다. 세상에는 찍 소리 못하고 눌려 살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나 만만한 사람을 보면 이빨을 드러내는 짓을 하는 사람들은 단 지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은 해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별 것 아닌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으르렁 거리는 것을 “자주” 발견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밥상머리에서 깐족거리는 아들에게 입에 넣으려던 고추를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사람은 꼬추로도 때리지 않는 거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미쿡 아이의 유쾌한 실수이지만, 사람은 때리지 않는 것이라는 말만큼은 맞습니다. 사람은 때리지 않는 겁니다. 꽃으로도, 꼬추로도, 그리고 언어로도.

2.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진 자들.

단 자손은 라이스를 강도질 한 후에 그 곳에 정착하기 위해 성읍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업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가나안 족속들과 블레셋 족속들에게 떠밀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을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그들의 꿈 때문에, 같은 꿈을 갖고 살아가는 라이스 거민들을 죽이는 악을 자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길은 순적하고 형통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라 불리웠던 땅을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 이름을 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후부터는 이스라엘의 전 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단이 최북단이고, 브엘세바가 최남단이었으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하면 이스라엘 전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로 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악행을 그냥 놔두고 보시며 오래 참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단에게 돌이킬 기회를 충분히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후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 외에는 단 지파에 대한 기록이 아예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족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역대기에조차 단 지파에 속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보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은 단지파가 거족적인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의 땅 밖으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통해 하나님을 버렸고, 약속의 땅을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경계 밖으로 튀쳐 나갔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기억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이지요.

모든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 순적하고 형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제 멋대로 살아도, 남을 해치고, 우상숭배를 해도 일은 순적할 수 있습니다. 일이 순적하게 풀리는 것은 악한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시간을 주시는 것 뿐입니다. 극악한 가나안 족속에게도 400년의 시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이 임하기까지 그들은 누구보다 강하고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단 지파에게 돌이킬 시간을 허락하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길을 선택할 때에, 우리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끝이 되면, 가나안 족속이나 단 지파처럼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역시 찾아오고 맙니다. 그야말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악한 행위가 제지되지 않고, 오히려 순적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악한 일에 징계가 주어지는 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론을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다 사랑하지만, 어떤 자녀는 참고 견뎌야 하고, 어떤 자녀는 기쁨과 자랑거리가 되듯이 하나님 아빠에게도 참아내야 하는 자녀가 있고, 자랑과 기쁨이 되는 자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각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다.

단 자손은 라이스 땅을 정복한 후, 그 곳에 자기를 위해 그 새긴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단 지파가 사로잡히는 날까지 그들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바로 그 ‘레위청년’입니다. 그 위대한 모세의 손자가 이처럼 타락한 레위청년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반전이요, 충격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맨 나중에야 밝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모세의 손자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어에는 ‘눈’이라는 알파벳을 중간에 삽입하여 ‘므낫세의 손자’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게 타락한 사람이 그들이 하나님처럼 여기는 모세의 손자라고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므낫세 지파의 시조이지 레위지파의 시조가 아닙니다. 탈무드,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수리아역 등에는 모두 ‘모세의 손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자손이 타락하는데에는 3대가 채 지나지 못합니다. 신앙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3대째, 4대째 예수를 믿는 것 따위 모두 의미 없습니다. 순교자의 집안이네, 초창기에 교회를 세웠던 사람의 후손이네 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의 창립멤버고, 수십년의 역사를 교회와 함께 해왔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고,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하는 것이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기억되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떠한 자로 서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떻게 기억될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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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소중한 것 (삿18:21-26)

* 목숨보다 소중한 것

* 사사기 18:21-26

21그들이 돌이켜서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나더니

22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붙어서

23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하니

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과 신상을 훔쳐낸 후에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길을 떠납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이란 ‘하타프’로 ‘약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 뿐 아니라, 노인들과 여인들과 기타 약한 자들을 앞에 세웠습니다. 혹시라도 미가가 도둑 맞은 사실을 알고 뒤에서 쫓아올 상황을 대비했던 것이지요.

미가는 제사장과 신상들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 알고 이웃 사람들과 함께 모여 단 사람들을 추격했습니다. 단 사람들은 약한 자들과 가축들과 무거운 짐을 앞세우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미가가 그들을 따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미가와 이웃들은 단 지파 사람들이 보이자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단 사람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자신들이 훔친 물건 때문에 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미가의 답은 더 볼만합니다.

“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내가 만든 신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만든 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사람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자기 스스로 신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피조물 앞에서 복을 빕니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도 우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는 또한 우상들과 제사장이 없으면 자신에게 남은 것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작 돈만 있으면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고백을 합니다. 미가의 모든 것들이었던 우상들은 단 지파의 강도질에 미가의 집안은 물론, 자기 스스로도 지켜내지 못한 채, 소리없이 짐들 틈에 섞여 있습니다. 만약 미가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고백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이런 상황을 맞이 하였다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닌 죽어있는 피조물들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았기에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주인 삼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모든 것을 잃을 날이 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주신 바 있습니다 (눅 12:13-21).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너무 풍성해 그것을 쌓아 둘 곡간이 작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심하다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거기 쌓아 두리라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소중한 것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실질적으로 소유하지 못했으면 마음 속에라도 그것을 간직한 채 평생을 그것만을 좇으며 살아가지요. 그것이 다인 것처럼,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번도 자신이 소중한 것을 소유해보지 못한 채 헛물만 켜다가 죽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모든 인간의 결말은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소중했던 것들은 이미 만져질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인생이란 바람과도 같고, 안개와도 같고, 아침풀꽃과도 같습니다. 눈 앞에 있는 듯 하다가 갑자기 훅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갈망하며 그것들을 위해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덧없이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들이 자신의 모든 것들이라 고백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삼는 사람이 진정한 지헤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것들만 영원하고, 모든 세상 것들은 일시적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이라 고백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은 언젠가 바람처럼 사라질 것이며, 그 날에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았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스스로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그 소중히 여기는 것도 잃지 않게 됩니다.

2. 헛된 것들을 위한 다툼

우상들과 제사장을 돌려 달라는 미가의 항변에 단 자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미가가 더 이상 그들에게 따지고 들면, 단 지파 사람들이 노하게 될 것이고, 결국 미가는 그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까지 잃게 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 말을 한 후, 단 지파 사람들은 돌아서서 자신들이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갔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상 쫓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미가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이라 고백했던 것들을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사실은 그것들이 자신의 모든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한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란 그것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좇는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허상이고 신기루일 때가 많습니다. 잡으면 만족을 줄 것 같지만, 막상 잡고 보면 원하던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나 있곤 합니다. 오래 전부터 들어가고 싶었던 직장이 막상 들어가보니 지옥같은 곳이 되어 있고,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 여겼던 파트너가 막상 만나고 보니 평생원수가 되어 있고, 귀여운 자녀 하나 얻고 싶어 온갖 지성을 들였는데, 막상 얻고 보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험하는지요?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모든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헛된 것을 위해 서로 다투고 욕하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영원한 시간에 대입하여 본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는 잠시 후 터질 비누 방울을 쫓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새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품같은 물질에 미련을 거두지 못합니다. 마치 용암에 빠져 녹아 드는 순간까지도 싸우론의 반지를 향한 손을 거두지 못해썬 골럼의 이미지가 바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마귀가 만든 탐욕이라는 이름의 반지를 향해 자신들의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불구덩이에 잠식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이라 주장해야 할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내야 할, 단 한가지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하나님이라고 답하셨다면, 당신은 영원한 것을 절대 놓치지 않을 지혜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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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돈 사람들 (삿18:13-20)

* 돈에 돈 사람들.

* 사사기 18:13-20

13무리가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14전에 라이스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만든 신상이 있는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5다섯 사람이 그 편으로 향하여 소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고

16단 자손 육백명은 병기를 띠고 문 입구에 서니라

17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할 때에 제사장은 병기를 띤 육백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19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20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돈이 갖는 마력.

새로운 터전을 찾아 라이스로 올라가던 단 지파는 기럇여아림을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전에 라이스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었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단 지파 사람들에게 그것을 빼앗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집에”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바바팀”은 복수입니다. 히브리 단어는 복수에 “임”이 붙지요. 미가의 집은 집 한 채가 아니라, 여러 건물이 한 집을 이루는 큰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도 얼마든지 부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풍요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은 부유하면 복을 받았다 착각을 합니다. 단 지파 사람들 역시 미가 집안의 풍요로움에 현혹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의 근원은 바로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들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미가의 집이 무너지게 생긴 폐가였다면,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가 섬겼던 신상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지파는 진정한 풍요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은 채, 풍요에만 눈이 멀어 우상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설령 우상들이 풍요의 근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남의 풍요를 훔치려는 든다는 것이 당혹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현대에도 변함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핍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풍요란 그만큼 큰 무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매력을 갖습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돈은 가장 강력한 흡인력을 갖습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라고 하는 망상 역시 어떻게 하면 돈을 균등하게 가질 것인가라고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 돈보다 더 강력한 우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돈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도 합니다. 돈만 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휴지조각처럼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마음껏 예배를 스킵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차를 굴리고 다니면 갑자기 하나님이 사라져 버리고, 부처가 진짠가, 이만희가 진짠가 온통 헷갈려 버립니다.

그러나 돈은 마귀가 쳐놓은 가장 효율적인 덫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도 돈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흉측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것도 돈입니다.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은 감각이 없고 눈도 없습니다. 그러니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남의 돈을 갈취하면서도 돈을 빼앗겨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헤아릴 이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무감각하고 무정한 짐승처럼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결국 돈과 함께 멸망의 불길 가운데에 빠져 들어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버린 우상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우상들은 불태워지고,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도 우상과 함께 불태워지는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임과 동시에, 멸망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2. 돈 때문에 돈 사람들

라이스로 정탐을 갔던 다섯 사람은 사실 미가의 집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탐을 가는 길에 집에서 머물게 해주었던 것이 바로 미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꺼리낌없이 은혜를 베푼 사람의 집에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탈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위 청년이 있는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때에 단 지파 사람 600명은 무기를 들고 문 입구에 서있었습니다.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은 그 집에 들어가서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떼강도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레위청년은 무장한 600명의 군사들과 함께 문 입구에 서 있다가 다섯 사람이 우상들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항의를 했습니다. 미가의 집안에 있는 여러 건물들 중 레위 청년이 머물고 있던 곳은 아마도 따로 떨어져 있는 신당이었을 것이고, 미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청년을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당으로 가서 그에게 호의적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레위청년도 단 지파가 새로운 땅을 찾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600명의 군사가 들이닥쳐도 그러려니 하고 군사들과 함께 문 밖에 서있었을 것입니다. 다섯 사람이 신당 안으로 들어간 이유도 새 땅을 찾으러 가는 길을 인도해 달라고 빌기 위한 것으로 착각을 했겠지요. 그러나 단 지파의 작전은 600명의 군사가 경계를 서고, 다섯 사람이 신상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가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 사람이 신당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아무 생각없이 서있던 레위 청년은 미가의 우상들을 모조리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놀라서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따집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항의하는 레위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그 말을 들은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단 지파의 백성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레위청년은 미가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미가는 오갈 데도 없고,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그를 제사장으로 삼고 넉넉한 연봉을 주었으며, 미가의 아들들 중 하나처럼 극진한 대접을 해줬습니다. 그런 정리를 생각한다면 레위청년은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미가와 제사장의 연결 고리는 결국 돈이었습니다. 미가도 돈을 더 잘 벌고 풍요롭기 위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고, 레위인도 돈을 준다니 레위인으로서의 양심을 버린 채, 우상들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돈으로 맺어진 관계가 더 많은 돈의 제안 앞에 무너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돈은 그처럼 사람을 돌게 만듭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큰 가치이기에 그 안에 다른 가치는 들어설 틈이 없게 됩니다. 단 지파 역시 더욱 번성하고 풍요롭기 위해 신상을 탈취했습니다. 결국은 돈 때문에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겐 절대 도덕이란 없습니다. 절대적인 윤리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만이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들 스스로 법을 세우고 질서를 공의롭게 유지할 수 있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법은 법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지곤 합니다. 힘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법을 세우기 때문에 법 자체가 그들에게 유리하며, 힘과 돈이 있으면 법의 제한 밖을 넘나들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들 “돈, 돈”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힘이니까요. 미가도, 레위청년도, 단 사람들도 모두 돈에 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돈에 돌 수 밖에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힘있게 하는 것, 결핍된 인간에게 풍요를 주는 것, 불안한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돈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갈구하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세상은 돈에 미쳐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다 보니, 돈이 곧 하나님이 되고, 돈이 하나님이다 보니,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행스럽게도 그 악순환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은 후에도 돈에 돌아버린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의 주인되심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돈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는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돈에 돌아버린 눈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 돈이 아닌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돈이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피어나는 순간, 돈은 인간을 멸망의 불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는 좋은 도구로 돌변을 하게 됩니다. 돈을 미워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돈벼락을 맞아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런 사람에게 돈벼락을 내리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돈을 버린 사람에게는 돈에 새로운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독이 되지 않는 순간입니다. 개인을 위해서는 돈을 미워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돈을 사랑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닌, 돈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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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평안 (삿18:7-12)

* 울타리가 없는 위험한 평안

* 사사기 18:7-12

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8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9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11 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12 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울타리가 없는 평안

단지파는 하나님의 유업을 지키고 개척할 힘이 없었기에 새로운 터전을 원했습니다. 새 터전을 찾기 위해 파견된 다섯 사람은 라이스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했습니다. 라이스의 백성들은 아무런 염려 없이 평온하며 안전하고 부족함없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독특한 지형적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라이스는 팔레스타인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헐몬 산에 가려있어서 아람이 침범을 피할 수 있었으며, 레바논 산맥에 의해 시돈 지방과도 단절되어 있는데다 거리도 멀어서 시돈 역시 그 땅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시돈의 영역이었지만 시돈은 이미 풍요와 안정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생해서 레바논 산맥을 넘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요단강의 근원인 헐몬산 바로 아래에 있어서 물까지 풍부했습니다. 풍요로운 곳에서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들을 침범하지 않고, 그들을 착취할 학정자들도 없으니, 그야말로 풍요와 안전이 보장된 드림랜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안은 위험한 평안이었습니다. 라이스 사람들은 천연적인 지형 조건으로 주어진 평화 때문에 언젠가 외세가 침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땅은 탐하는 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외시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체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정탐꾼들은 10절에서 라이스에 대해 ‘평안한 백성’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의 원어는 ‘암 보테하’로 ‘방심한 백성’이란 뜻입니다. 결국 장차 올 일을 대비하지 못한 방심함이 라이스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단지파와 라이스를 보면서, 울타리가 없는 평안의 끝을 보게 됩니다. 단지파의 땅은 사실 라이스에 비해 떨어질 것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서쪽 끝 지중해에 연접해 있었으므로 서쪽으로는 외세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암몬이나 미디안이 쳐들어 온다 해도 단지파가 공격을 당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일 수밖에 없었고, 땅도 평야가 펼쳐져 풍부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배정된 땅이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만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대적들을 몰아내고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요와 안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대신 풍요와 안정을 얻자고 우상들을 찾았습니다. 울타리이신 하나님을 떠나기 위해 자꾸 개구멍을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만든 개구멍은 외세가 침략하는 통로가 되고 맙니다. 결국 단 지파는 우상숭배라는 개구멍을 타고 들어온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일은 우상숭배를 척결함으로 개구멍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버리고 아예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울타리 안으로 자꾸 맹수가 들어오는데, 울타리를 보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아예 울타리 밖에 나가 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힘이 없고 창백한 그들에게 라이스라고 하는 땅은 최고의 장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야 말로 외세의 침입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들만의 동산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라이스를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외적들의 침입에 의해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 스스로 방어 시스템을 만들지 않아서 벌어진 정해진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풍요롭고 안전할 때, 만일에 있을 침입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연적인 장벽만 믿고 안일하게 삶을 즐기고 있다가 도둑처럼 찾아온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만 것입니다.

단과 라이스의 모습은 모두 울타리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안정되고 풍요로와 보여도 결국 하나님이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그 풍요와 안정은 헛 것이 되고 맙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혼에 관한 한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개구멍을 통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 시도를 합니다. 우리가 아예 하나님의 울타리 밖으로 뛰쳐 나오면 더할 나위없이 좋아하겠지요.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마귀의 침범 때문만은 아닙니다. 세상 끝날이 도적처럼 임할 텐데, 그 때가 되면 모든 영혼은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풍요와 안정을 찾아 무방비하게 살아가다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간 자들은 그에 대한 처절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2. 울타리를 떠나버린 신앙인들

새로운 땅의 탐지를 위해 파견되었던 5명의 대표들은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왔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그들이 땅을 정탐한 결과에 대해서 질문하였고, 그들은 라이스 땅에 대하여 그들이 본 대로 보고를 하였습니다. 땅이 보기에 매우 좋으니 가만히 있지 말고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보기에 좋다는 이 말이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그들의 라이스 정벌의 동기는 그들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하는 안목의 정욕이었습니다. 여호수아 군대의 가나안 정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취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라이스 정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떠나는 불신의 행위였으며, 자기 정욕을 위해 다른 이의 평안을 훔치는 가증스런 행위였습니다.

자신들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기 위한 전쟁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라는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여호와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이란 표현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원어로는 여호와 대신 엘로힘이란 단어를 쓴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택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을 일컬을 때 쓰는 용어이고, 엘로힘이란 표현은 신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전쟁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들은 ‘엘로힘’께서 라이스를 넘겨 주셨다’는 표현을 씀으로서, 그들 스스로 이 전쟁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땅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어서도 회개하고 돌이킬 생각은 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 남의 땅을 찬탈하는 날강도짓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는 더러운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더러운 일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랬고, 미국의 원주민 학살이 그랬으며, 남미의 원주민 축출이나 토벌이 그랬습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굳이 먼 역사를 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대면서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걸고 다른 이들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정욕과 이기심이 동기가 되어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울타리 밖에 있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요.

3. 울타리를 벗어난 자들의 초라한 행색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단 지파의 가족 중 600명이 무기를 들고 라이스로 가기 위해서 소라와 에스다올을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올라가서 유다 지파의 땅인 기럇여아림에 진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그곳의 이름이 마하네단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단의 진’이란 뜻이지요. 삼손이 처음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이후의 역사서에 종종 등장을 합니다.

‘단 지파의 가족 중 600’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 지파는 여러 가족으로 이루어진 지파가 아니라, ‘수함’이라는 한 사람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민26:42). 민수기에서는 단 지파의 인구가 장정만 6만 명 가량이나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군사 600명의 가족만이 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블레셋과 아모리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된 탓일 것입니다. 그러나 6만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겨우 600으로 줄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어떤 학자들은 단 지파의 모든 사람이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떠난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어찌 되었건 새 정착지를 정복하기 위해 떠나는 정복자들이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평화롭지 살지 못하고 급격히 그 수가 감소해야 하는 모양새나, 결국 약속을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하는 모양새나, 겨우 군사 600으로 정복전쟁을 해야겠기에 제일 만만하고 힘없는 곳을 공격하려는 모양새나, 너무나도 볼품이 없는 모양입니다.

단 지파의 초라한 행색은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난 백성들의 초라한 행색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됩니다. 그 결과는 초라한 행색을 야기할 뿐입니다. 물론 초라해진 모습으로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언제든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오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니라 막 나가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들의 결말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미리 스포를 좀 하자면, 그들은 라이스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의 온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성경의 끝자락인 요한 계시록에 가서는 이스라엘에서 단 이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그 비극의 발단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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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사탕을 들고 온다 (삿18:1-6)

* 사탄은 사탕을 들고 온다.

* 사사기 18:1-6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창백함.

사사시대의 종교적 타락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다음에 기록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사기가 기록된 시점이 사사시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왕정시대를 막 시작하는 시점이므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말을 삽입하고 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이건 왕정시대이건 이스라엘의 왕은 변함없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개인이 되었건, 민족이 되었건, 제 멋대로 살다가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미 17:6절에서 미가 집안의 종교적 타락의 이유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 기술한 바 있습니다. 왕되신 하나님을 떠났으니, 제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개인의 삶에 타락을 가져오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임을 18장에서는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단 지파는 자기들에게 할당된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힘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단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에게 제비를 뽑게 하여 땅을 분배한 바 있습니다. 단, 전쟁이 너무 길어졌기에 아직 가나안 거민들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땅을 분배하고 각 지파에서 각자에게 할당된 땅을 지속적으로 정복해 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당된 땅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일 경우, 땅을 받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을 분배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용기를 내고 부지럼을 내면 어김없이 취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지금 자신들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기는 커녕 가나안 거민들에게 밀려 하나님의 약속의 땅 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창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약해빠진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살고 있으니, 창백해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개인적인 타락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집단적인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점을 치는 사람들.

단지파는 지파의 모든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뽑아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합니다. 물론 단 지파 전체가 이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지파 내에서 외세에 밀려 터전을 잃은 가문의 사람들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파에서 선발된 다섯 명은 그들의 정착지를 찾으러 가던 중에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한 개인의 타락과 지파의 타락이 만나는 오묘한 접촉점이 드라마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유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가의 우상숭배가 단지파의 우상숭배로 확산된 것입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 가까이 있을 때에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청년의 사연을 물었습니다. ‘음성’을 알아들었다는 말은 그 억양이나 말투가 에브라임 사람의 억양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분배된 땅이 있었고 그 안에 머물러 살았으므로, 당시에는 타지에 가서 사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 청년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레위 청년은 미가가 자신을 제사장으로 삼았던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레위청년은 미가가 자신을 고용하여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다섯명의 단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다면 그것이 율법에 벗어난 가증스런 일임을 단번에 알아 차려야 했습니다. 한 개인이 돈을 주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성별하여 임명한다는 것은 제사제도를 제정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레위청년에게 자신들의 앞길을 물어봐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딱 봐도 거짓 제사장인데, 그들 역시 거짓 신자였기에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번영을 좇는 신앙은 하나님을 잡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앞에 펼쳐질 길흉화복을 미리 알고 싶어하는 마음의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여러 통로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들으려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번영신앙과 맞물려 버리면 교회는 그만 무당의 집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목적은 보다 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번영을 좇아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주 마귀의 밥이 되곤 합니다. 번영에 대한 욕구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한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저 자신의 앞길에 도움만 된다면, 이단이건 우상이건 가리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형통하고 번영하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복음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말지요. 성도는 번영을 꿈꾸면 안됩니다. 번영신앙에 물드는 순간, 하나님의 뜻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성도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세상의 번영 따위가 줄 수 없는 풍요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번영을 쫓아 다닌다고 해서 결코 번영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좇는 자는 돈으로 불행해지고, 힘을 좇는 자는 힘으로 불행해질 뿐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곧 번영입니다.

3. 사탄은 사탕을 들고 온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단 지파 사람들에게 레위청년은 뭐나 된 듯이 폼을 잡고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한 지파가 할당된 유업을 버리고 대적에게 쫓겨 하나님의 언약의 땅 밖으로 벗어나고 있는데, 평안할 것이라 말하고, 그 길을 여호와께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냥 삼류 점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양떼들을 진정으로 아끼는 참 목자라면, 절대 귀에 듣기 좋은 사탕발림의 설교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사는데도 하나님의 평안을 약속하는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목회자는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기 원하시는 말씀을 여과없이 전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역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 목에 풀칠하는 것이 목적인 삯군 사역자는 양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자기 맘대로 지껄이게 됩니다. 양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안위와 인기에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도, 뜻도 아니며, 그저 듣기 좋은 사탕발림일 뿐입니다.

사탄은 늘 사탕을 들고 찾아옵니다. 달콤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달콤한 말을 찾아 헤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쓰고 아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촉구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탕을 들고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눈에 보기 좋은 것,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추구하면 그 끝은 반드시 흉측한 마귀의 손아귀 속임을 기억하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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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복음(?)을 버리라 (삿17:7-13)

* 내가복음을 버리라

* 사사기 17:7-13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

* 본문해설 및 적용

1. 그 성도에 그 목회자

사사기 17장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타락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보았듯이 미가는 자기 집에 산당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두었으며, 은으로 만든 신상을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법궤가 머물렀던 실로의 바로 옆 동네인 에브라임 산지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골라 하면서 신을 찾을 때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부르는 이름은 여호와인데, 모시는 것은 우상인 것이지요.

그런 미가의 집에 레위인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레위인들에게는 여섯 개의 도피성과 40여 개의 성읍을 각 지파에서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계 역시 각 지파에서 내는 십일조로 꾸려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레위지파에게는 따로 땅이 분배되지 않았고, 각 지파 속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기는 종교적인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의 청년에게는 자신에게 할당된 성읍이 있어야 했고, 그는 그곳에서 먹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유다 지파의 땅인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레위인 청년이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유랑 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지켜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싶을 정도입니다. 각 지파들은 레위지파를 먹여 살리라는 명령을 어기고 있고, 레위지파 사람은 사역지를 버리고 살 방도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은 현대 교회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전문적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 생계의 걱정없이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역자는 밑이 찢어지게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삶이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과해야 좋은 말씀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례를 적게 책정하여 일부러 가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통과시켜야 할 과정을 자기들이 통과시키려 드는 것이지요. 사역자가 여유롭게 생활할 만한 충분한 사례를 제공하지도 않고, 사역자에게 사례비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성도들이 고용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조금만 풍요로운 것 같으면 그만 시험에 들어서 그의 말씀이 귀에 들어 오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세태는 특별히 헌신을 강조하는 한인 교회가 단연 탑을 찍습니다.

목회자들 역시 타락한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많은 성도가 있는 사역지, 좀더 돈을 많이 주는 사역지를 찾아 헤매며, 인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곳, 자기 맘대로 성도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랑을 합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고용주가 아닙니다. 반대로 목회자는 성도의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성경교사이며, 동시에 영적 아비입니다. 성도나 목회자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전문적으로 사역을 하도록 구분된 사람일 뿐입니다. 성도 맘대로 하는 교회여도 안되고, 목사 맘대로 하는 교회여도 안됩니다.

성경은 일하는 소에게 재갈을 물리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적인 것을 공급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공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비량 사역자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사례를 받지 않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데 더 유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본인은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성도들에게는 사역자에게 알맞은 사례를 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역자들은 실제로 성도들에게 물질의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을 데려다 놓고 공짜로 부려 먹으려 한다거나, 쥐꼬리만큼 사례를 하면서 아무일이나 분별없이 부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재정이 힘들어지면, 사역자가 먹고 살수 있을까를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것도 상의도 질문도 없이 사역자의 사례부터 깎아대는 행위는 악하고 추한 일입니다.

목회자 역시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 비지니스의 성공에만 열을 올리면 안됩니다. 헌금 많이 하는 성도를 특급으로 치고, 자신에게 굽신 거리는 사람을 편애하며,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주물딱 거리는 등 행위들을 하다가, 조금 더 큰 교회에서 오라고 하면 사역지고 양들이고 모두 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2. 성도와 목회자를 잇는 것은 돈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

종교적 혼탁의 시대에 생계에 위협을 받던 레위 청년은 자신이 살던 베들레헴을 떠나 헤매다가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도 원래는 레위인들에게 할당된 성읍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레위 청년이 베들레헴에서 살게 된 것은 아마도 할당된 땅이 당시 블레셋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위인도 아닌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던 미가는 레위인이 자기 집에 방문하자, 자기 아들을 제사장직에서 폐위하고 대신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이는 미가가 제사장은 레위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면서도 제 멋대로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미가는 레위 청년에게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우두머리’란 뜻으로 남을 지도하며 권고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높여서 일컫는 말입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인 ‘코헨’에도 사람들을 이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레위 청년이 자기 집안을 위해 삶의 지침을 지도할 사람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지요. 그에 대한 대가로 사례도 넉넉히 책정을 해서 줍니다.

생계가 불안정하여 거처 없이 떠돌던 레위 청년은 안정적인 연봉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기자, 흡족해하며 미가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레위는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며 머물렀고 시간이 가면서 둘 사이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레위청년은 미가의 아들처럼 되었습니다.

레위 청년이 제대로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집안에 잘못된 신앙행태들을 고쳐야 했습니다. 집안에 있는 에봇과 드라빔과 은신상부터 치웠어야 했겠지요. 그리고 집안의 산당이 아닌 실로의 성막에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가는 레위청년으로부터 아비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자기 집안을 지도해달라는 의미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레위인으로 제사장을 삼으면 더 잘먹고 잘 살 것 같아서 레위청년을 고용했고, 레위청년은 밥 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잘못된 것을 지적할 생각도 않고 거기서 안주하면 살아갑니다. 아마도 레위청년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겠지요. 미가도 배울 생각이 없고, 레위청년도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둘 다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복과 돈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는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영적 아버지가 되고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전달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성도의 성화에 상관없이 복받으란 설교를 하고, 성도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복을 비는 기도를 줄구장창 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목회자를 만나면 같이 망할 뿐입니다. 사역자가 아무리 복받으라는 설교를 하고, 복을 비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목회자로부터 복받으라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올바른 가르침을 기대해야 합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자는 먹고 살기 위해 사역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사례비로 사역지를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사역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역지를 찾았다면, 생계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사역자입니다. 비록 사례가 적더라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을 게으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성도의 간극을 최대한 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은 미움을 사기도 하고, 비난을 받아야 하기도 하며, 쫓겨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역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과 영혼들을 위한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그러한 목회자를 만나기를, 그리고 자신들의 목회자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와 목회자가 미가와 레위청년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사이는 어차피 복과 돈으로 묶여진 사이이므로, 그것이 어긋나면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와 목회자를 잇는 연결선은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연결된 성도와 목회자는 환난과 곤고가 와도 결코 찢기지 않습니다.

3. 내가복음 (?)

미가는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에게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사장의 성별 의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가에게는 율법이고 뭐고 전혀 중요하지를 않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복과 형통과 번영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아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했겠지요. 아들 대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임명한 것도 율법대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레위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운 미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미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복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한낱 미신처럼 취급하는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우면 복을 주시는 그런 분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차를 사면 차사고 나지 말라고 차에다 안수기도를 하고, 유흥업소를 열어놓고 번영하기 위해 개업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기독교형 고사라고 할 수 있지요. 집안과 사업장에는 형통을 빌기 위해, 여기 저기 십자가와 각종 각양의 복받는 말씀으로 도배를 해놓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지요.

많은 사람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 외에 자신만의 복음서를 따로 기록하곤 합니다. 그 복음서의 이름은 바로 "내가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표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성경이요, 내가 곧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약한 사람은 세상을 사는 절대 기준이 없으므로 피치 못하게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내가복음"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 지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내가복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면, 그 다음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복받기 위해, 부자되기 위해, 잘 나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위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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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은 기독신앙이 아니다 (삿17:1-6)

* 기복신앙은 기독신앙이 아니다

* 사사기 17:1-6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사사기 기자는 1장부터 16장까지 사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다가, 17-18장에서는 종교적인 타락을, 19-21장에서는 도덕적인 타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으며, 종교적 타락이 결국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16장의 사사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순서에 따라 기술을 한 것이지만, 17-21장까지는 종교적 타락, 도덕적 타락이라고 시대상을 그려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즉 삼손 이후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그 시대의 타락상의 대표적 예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타락상으로 인해 가슴아파 하시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눈으로 보실지를 염두에 두면서 이후의 이야기들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1. 이름만 성도인 신앙.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미카예후’의 단축형으로 그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입니다. 이름만 놓고 보면 누가봐도 멋진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것도 무려 은 1100개를 훔쳤지요. 사사기 17:10절에 보면, 미가가 레위 청년이 자기 집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연봉이 은 열개와 의복 한벌이었음을 볼 때, 은 1100은 한 사람의 1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재물이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그 대단했던 삼손을 잡으려고 들릴라를 매수하기 위해 각자 썼던 돈이 은 1100개였습니다. 미가의 시대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런 거액의 재물을 눈 하나 깜빡 않고 호로록 하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정하고 거짓된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습니다. 자신이 하다가 망한 사업장을 대박 사업이라 속여 같은 성도에게 팔아먹고는, 새벽마다 밤마다 교회에 나와서 다음 사업장은 대박 아이템으로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남이 고생해서 해놓은 일을 도용해서 마음껏 쓰기도 하고, 세금을 속이기도 하며,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에 양심을 팔기도 합니다. 그래놓고 종교란에는 기독교라고 버젓이 쓰고, 명함에는 에스더, 피터, 대이빗, 쟈슈아 라는 이름들이 버젓이 붙어 있습니다. ‘미가예후’라는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오’라는 멋진 이름인데, 그에 대해 “여호와와 같은 이는 바로 나”라고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니 제 멋대로 사는 일에 꺼리낌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삶은 우상숭배자인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2.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사람을 저주하는 신앙.

거액의 돈을 도난당한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훔쳐간 자를 저주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신랄하고 살벌했던지 미가의 마음에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어머니에게 돈을 훔친 것이 자신이었노라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미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태도를 급전환합니다. 그동안 퍼부었던 저주가 아들에게 가게 생겼으니, 얼른 축복의 말로 바꾼 것이지요. 고대 근동에서는 신께 저주하며 탄원하면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 미신적인 신앙이 있었습니다. 입술을 통하여 나가는 말의 권세를 강하게 신뢰했으므로, 마음의 원을 품고 저주를 하면 저주가 이루어지고, 반대로 축복을 하면 복이 내려오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기도를 하면 내렸던 저주도 취소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지맘대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자신에게 해꼬지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 바로 옆에 앉아 벌을 내려달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저주하는 그런 기도를 도무지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 우리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신앙 역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고 신실한 사람이 그리 믿는다면 이해라도 됩니다. 자신의 삶이나 신앙은 개차반이면서, 무조건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벌할 것이라는 근자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쉽고 불편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도 동일한 피를 흘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의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아닙니다. 단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토로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놓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간구하는 것과 악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는 구분이 되어져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축복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축복한다고 복을 받을 것 같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은 번영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자식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전혀 찾을 생각을 하지 않다가, 자녀가 대학 갈 시점이 되면 갑자기 새벽기도마다 교회가 미어 터집니다. 목회자는 교회에 갑자기 기도의 불길이 퍼지는 것에 울컥하다가 이내 시험기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정신을 차립니다. 아무렇게 살면서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기독신앙이 아닙니다. 남은 저주하면서 자기 자식만 축복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닙니다.

3. 자식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팔아먹는 신앙

미가의 어머니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매일 버라이어티하고 드라마틱하게 저주의 기도를 했는데, 그 저주의 대상이 아들이 되게 생겼으니 큰 일이 난 것이지요. 얼른 말을 뒤집어 저주를 축복의 말로 바꾸었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그동안 쏟은 저주가 벌써 오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로만은 부족한 뭔가 찜찜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은을 다 드리기에 아까우니 그 중 200개만 드려 신상을 만들고 나머지는 아들에게 돌려 줍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린다면서 막상 은은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은이 아까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들에게 다 주기는 좀 찜찜하니 신상을 만들어서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위장을 했던 것입니다. 신상을 만든 것이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돈을 아들에게 준 것이나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형상도 만들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고작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의 형상 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상을 만드는 일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가증스러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롬 1:23).

미가에게 돈을 돌려 준 것은 괜찮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주겠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면서 아들에게 준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행위입니다. 아들을 향한 저주는 거두어야 겠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 뭔가를 바쳐야겠는데, 그 돈을 다 드리는 것은 아깝고, 그러니 은 200개 선에서 적절히 타협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은 200개 마저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식 복 받게 하고자 만든 신상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도무지 찾아볼 수없고 온통 내 돈, 내 자식 뿐입니다.

기독교를 타락하게 하는 가장 치명적인 신앙 형태는 아마도 번영신앙과 기복신앙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배제된 채, 자신이 주인이 된 신앙 생활이지요.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까지 통치하려는 반역이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번영신앙과 기복신앙입니다. 그 안에는 십자가도 없고, 무덤도 없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의 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고, 자신의 길을 터주는 램프 속 지니일 뿐입니다. 자신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40일 작정기도를 하며, 고작 화장실 칸 수 좀 더 늘려보고자 일천번제를 드린답시고 천일의 새벽 지성을 드리고, 입신양명과 무병장수를 위해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래 저래 하나님을 아예 찾지도 않는 사람들은 제쳐두고,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살펴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영광이란 도무지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거의 사과의 꼬다리 정도 있을까 말까 합니다. 이것은 기독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거짓 신을 믿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니도, 요술봉도, 도깨비 방망이도, 무당의 작두춤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도구로 삼아서도 안되고, 우리를 위해 마음껏 부리는 아랫것 정도로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십니다.

4. 선을 넘어서는 신앙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미가의 집은 하나님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실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실로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따로 집안에 신당을 만들어 놓고 자기 맘대로의 신앙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는 당시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실로가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소 가까이에 살면서도 자기 집 안에 산당을 만들 정도이니,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산당에 모셔 놓았습니다. 에봇은 금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로 짜 어깨에 걸치는 의복으로 대제사장들이 입는 예복이었습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지파이므로 에봇을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입지도 못할 에봇을 만들어 우상처럼 숭배한 것입니다. 아마도 미가의 집 사건은 기드온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봇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은 기드온 때이기 때문입니다 (삿 8:27).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서 전리품으로 취한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기념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기드온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음란히 섬기는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삿 8:27). 미가가 에봇을 만들어 자기 집 산당에 모셔 놓고 우상 숭배를 한 것도 아마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드라빔 (Teraphim)’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정의 수호신 상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동 지방의 각 가정에서 숭배되던 우상이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야곱의 아내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 나온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바벨론 왕이 점을 칠 때 이 드라빔을 사용했으며 (겔 21:21),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을 할 때에도 이 드라빔을 이용했습니다 (슥 10:2). 미가의 산당에 있던 드라빔도 아마 미가가 세운 제사장이 점을 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가의 제멋대로 신앙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제사도 제사제도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만 제사장직을 담당할 수 있도록 지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 출신인 미가가 자기 멋대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는데,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행위이며 죽어 마땅한 죄악이었습니다.

기복신앙은 항상 월권을 낳습니다. 인간이 중심이므로 하나님이 서실 공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예배도 삶도 모두 인간의 유익과 인간의 요구를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사상이 치명적인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6절은 사사기 전체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한 줄로 압축을 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이 왕이 아니고 인간이 왕이 되는 순간, 판단 기준은 무너지고 맙니다. 인간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스스로를 위해 살게 되면, 그 신앙은 이미 기독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 기독신앙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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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빛나는 삶 (삿16:22-31)

* 마지막이 가장 빛나는 삶

* 사사기 16:22-31

22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성도는 아픔 속에서 성장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삼손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삼손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다시 그와 함께 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뽑힌 채, 옥중에서 맷돌을 돌려야 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삼손은 평생 닫혀 있던 영의 눈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고, 그는 마지막 소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있기에 우리는 늘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성도가 뿌린 죄의 씨앗은 머리털이 깎이고 눈이 뽑혀야 하는 것 같은 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쓴 열매를 통해 성도는 자신의 벌거벗은 상태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쓴 열매를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 사용하지 못하면, 그 독으로 인해 자아가 일그러져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한다면 아픔은 성도의 영혼을 자라나게 합니다.

2. 성도의 미숙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블레셋 방백들은 자기들의 신이 삼손을 넘겨 주었다며 모두 모여서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 하였습니다. 블레셋의 백성들 역시 자기들의 신이 그들의 땅을 망쳐 놓고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원수를 손에 넘겨 주었다며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었을 때, 그들은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려고 옥에서 불러냅니다. 이에 삼손은 그들의 잔치상 앞에서 재주를 부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워진 삼손이 철저히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재주를 부리게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희롱한다’ (잠 26:19)는 의미를 갖지만, 노래와 악기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삼상 18:7, 삼하 6:5). 블레셋 사람들은 앞을 못 보는 삼손을 데려다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천하의 삼손이 근육은 울퉁불퉁해가지고 앞도 못 본 채,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는 성숙하지 못하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성도의 미숙함은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욕되게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이라고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곤이란 이름이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풍요를 원했던 그들은 ‘곡물의 신’을 원했기 때문에 이름을 다곤이라 붙였다는것이지요. 어떤 학자는 다곤이라는 이름이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왔다고도 주장합니다. 다곤 신상은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물고기인 인어의 모습을 했습니다. 해안가에 살았던 블레셋은 바다에 나갈 일이 많았으므로 인어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둘 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곡물이 되었건 물고기가 되었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곡물이나 물고기나 한낮 밥상 위에 올라와 인간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는데, 성도가 미숙하니 하나님이 아닌 그딴 것이 찬양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3. 마지막이 가장 빛나게 살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 삼손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을 주면서도, 삼손이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지요. 그때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그 집을 버티고 있는 기둥으로 자신을 데려다가 기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집에는 블레셋의 남녀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블레셋 방백들도 모두 모여 있었으며, 지붕에 있는 남녀만 무려 삼천 명 정도나 되었습니다. 주로 블레셋 지역에서 호기를 부리며 살았던 삼손은 블레셋의 집 구조에 익숙했습니다. 그는 눈이 뽑혀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부리는 재주를 보며 웃고 재잘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얼마나 어떻게 모여 있을지를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무너뜨리기로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기둥을 무너뜨리면 2층에 있는 자들은 떨어져 죽고, 아래층에 있는 자들은 깔려 죽게 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지요.

삼손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그의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 세 가지 명칭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부릅니다. 첫째, 아도나이입니다. 우리말로는 주이고 영어로는 Lord입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살았던 삼손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의 주인되신 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을 묶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도, 그들의 신인 다곤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라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원의 하나님을 일컫는 명칭입이다. 애굽에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앞선 사사들을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자신을 구원자로 세우신 그 구원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엘로힘이란 표현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신을 일컫는 일반적인 호칭인 엘로힘에 정관사 ‘하’를 붙여서 불렀습니다. 삼손은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닌 유일하신 참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짧은 호칭 속에 삼손은 자신의 모든 신앙과 절규를 녹여내고 있습니다. 삼손은 모든 것의 주인되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시며, 홀로 유일하신 그 하나님께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어서 그는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절규합니다. 그는 평생 자기 욕정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실패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마음을 돌이킨 그는 마지막 순간이나마 멋지게 쓰임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 한번만 나를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삼손은 집을 버틴 두 기둥을 한 손에 하나씩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소리치며 마지막 힘을 쏟아냈습니다. 그러자 집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있던 블레셋 방백들과 블레셋 백성들은 무너져 내리는 집과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게 되었습니다.

삼손의 일생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집을 한번의 힘으로 무너뜨릴 정도의 괴력을 받고서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두 눈은 떴으나, 영적인 눈이 가려진 채 살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졌던 그는 결국 육적인 눈마저 뽑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 자신을 즐겁게 하느라 인생을 소모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대적을 즐겁게 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야 했던 그는 순간적인 욕정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했던 그는 힘이 좋다는 이유로 두려운 것 없이 거들먹 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모든 영광을 잃고 영광은 커녕 오히려 대적에게 희롱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은 갈수록 빛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타락해져 갔고, 머리가 밀리고, 눈이 뽑힌 채 감옥에서 놋 사슬에 매여 맷돌을 돌리는 시련을 당하고 나서야 겨우 신앙의 눈을 떴습니다. 그의 인생은 마지막이 빛나는 인생이 아니라, 마지막만 빛나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마저 핏빛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삶은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적 모습은 물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성별되지 못한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닮았는지요.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반드시 삼손과 같은 불행한 결말로 우리를 이끌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판 삼손들은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사사시대의 삼손의 기도가 아니라, 그를 알기에 드릴 수 있는 현대판 삼손의 기도입니다.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게 하소서.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소서.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위해 살게 하소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빛나게 하시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혹시라도 빛을 잃을 때에는 속히 돌이켜 하나님의 빛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을 날마다 새롭게 회복하게 하시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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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눈을 감지 말라(삿16:6-21)

  • 영의 눈을 감지 말라.

  • 사사기 16:6-21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8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9 이미 사람을 방 안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줄들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하니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하니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2 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방 안에 매복하였더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14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세상의 유혹은 성도의 눈을 가린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지만 들릴라는 삼손보다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엄청난 양의 재물을 대가로 제시하자 들릴라는 그 제안을 받아 들입닌다. 들릴라는 삼손에게 그의 힘의 근원과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어리석은 질문을 받으면, 삼손은 당연히 들릴라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보니 삼손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손 역시 가볍게 대답을 합니다.

삼손은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삼손을 결박하면 힘이 빠져 보통 사람처럼 될 것이라 말합니다. ‘활줄 (예테르)’은 현악기의 현이나 활시위, 또는 동물의 심줄 등을 의미합니다.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을 내실에 미리 매복시켜 놓은 채, 블레셋 방백들이 갖다준 새 활줄 일곱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소리쳤습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그러나 삼손은 그 활줄을 불에 탄 삼 실을 끊는 것처럼 손쉽게 끊어버렸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자기를 희롱하고 거짓말을 했다고 징징대면서, 또 다시 무엇으로 그를 결박할 수 있는지 말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삼손은 이번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밧줄로 자기를 결박하면 보통 사람처럼 된다고 이야기 했고, 이번에도 역시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들릴라가 다시 징징대자, 삼손은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될 것이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전히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삼손은 세 번씩이나 반복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들릴라의 콧소리 속에 블레셋의 계략이 숨어 있음을 눈치를 채야 했습니다. 아마도 삼손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을 것입니다. 방 안에 세번씩이나 블레셋 사람들이 매복되어 있었는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처럼 보입니다. 또한 자신의 힘의 근원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들릴라를 보아도 쉽게 분별이 가능해 보입니다. 눈치를 챘건 채지 못했건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들릴라가 세번째 물었을 때는 머리털을 언급을 합니다. 나실인으로서 손을 대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하여 언급을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삼손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정욕은 늘 영의 눈을 어둡게 하여 분별력을 흐려놓고 맙니다. 마귀는 정욕을 타고 은밀히 들어와 죄인 듯 아닌 듯 알아볼 수 없게 조용히 사람을 잠식해 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는 괜찮지 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양보하고 내어주는 영역이 넓어집니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바로 튀쳐 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서서히 끓이면 죽을 때까지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듯 정욕도 그런 것입니다. 정욕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정욕에 자주, 그리고 오래 노출될수록 우리의 영적인 눈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2. 세상의 유혹 앞에서 ‘눈 한번 딱 감으면’ 안된다.

삼손에게 세 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삼손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 것은 모두 뻥이었다고 난리를 칩니다. 들릴라는 삼손에게 그의 힘의 비결과 그를 묶을 수 있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날마다 재촉을 했습니다. 이에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금 들릴라와 하나님 사이에서 번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머리털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나실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머리카락이 그의 신앙의 마지노선이었던 것이지요. 들릴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그 마지노선은 지켜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맙니다. 하나님이 아닌 들릴라를 선택한 것이지요. 삼손은 자기가 날 때부터 나실인이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으며, 만일 자기 머리를 밀면 자기 힘이 사라질 것이라 털어 놓았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진실을 말하는 것을 보고 블레셋 방백들을 불렀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들릴라가 세 번이나 실패하자 포기를 하고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이미 떠나버린 블레셋 방백들에게 아예 은을 가지고 올라 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라고 확신을 했던 것이지요.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 위에 누이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삼손을 괴롭게 해서, 그에게서 힘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들릴라는 이번에도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으려고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잠을 깬 삼손은 전과 같이 나가서 힘을 쓰려 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버렸기에 그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그렇게 허무하게 블레셋 사람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삼손의 힘이 삼손의 머리카락에 있었다는 오해입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이 아닌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머리카락을 미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하나님께서도 삼손을 떠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손이 하나님을 밀어낸 것이지요. 삼손의 힘이 빠진 것은 머리카락을 밀었기 때문이 아니라, 삼손이 들릴라를 위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삼손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는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는 머리털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 빼고는 나실인의 모든 서약을 어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머리털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쭈욱 영적으로 눈이 감긴 채, 거의 실눈 뜨고 살아온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나마 삼손이 스스로 정해놓은 마지노선을 인정해주고 지속적으로 삼손과 같이 해주셨습니다. 그래도 삼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고작 머리털 안 깎는 정도로 인정을 해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삼손은 결국 눈 딱 감고 마지막 마지노선까지 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마치 삼손과도 같습니다. 주일 성수 하나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모든 예배와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활동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영적 나실인으로서 성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서, 고작 종교활동 좀 열심히 한 것으로 자신은 거룩하다 착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정욕을 마주치면 눈을 딱 감고 그 선까지 넘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실눈뜨고 사는 순간에 예비되었다가, 눈을 딱 감는 그 순간에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의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인지 우리의 모든 언행 하나 하나마다 분별하려 애를 써야 합니다.

3. 마귀에게 눈이 뽑힌 채 노예로 살 것인가?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체포한 후에 그의 눈을 빼고 가사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놋 줄로 매고 감옥에서 멧돌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멧돌은 여인들이 콩물 국수 만들 때 쓰는 작은 멧돌이 아니라, 노예들이 돌리는 대형 멧돌입니다. 삼손은 지금 대적에게 눈이 뽑힌 채, 대적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멧돌을 돌리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고역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대적에게 눈이 뽑힌 채, 대적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볼 능력도, 세상을 읽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좇아 살았습니다. 마귀에 의해 영의 눈이 아예 뽑혀 버린 채, 마귀가 시키는 일을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사기 저자가 삼손의 실패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삼손을 통해 타산지석의 교훈을 주고자 함도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뽑힌 채, 노예가 되어 맷돌을 돌려야 하는 삼손의 모습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면 눈이 뽑힌 채 멧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많은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지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눈이 뽑힌 채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눈을 뽑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선택하기만 하면, 마귀는 우리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득달같이 달라들어 우리의 눈을 뽑고 자기의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귀가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들릴라 입니다. 귀엽고 , 섹시하고, 앙증맞고, 탐스럽고,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그 무엇인가로 덫을 놓는 것이지요. 그 덫에 빠지면 우리의 눈은 스르르 감기다가 이내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모두가 마지막 때를 얘기합니다. 제가 맨 처음 예수를 믿었던 20년 전에도 마지막 때란 얘기를 들었고, 제가 예수를 믿기 10년 전에도 마지막 때라는 이야기를 기독교인 친구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지막처럼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우리는 굳이 마지막 때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오지 않아도 결국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언제일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날에 우리가 정결한 신부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없이 앙상한 뼈대만 남은 모습으로 주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정결한 신부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가, 자신의 벌거벗음과 흉측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지금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을 맞이할 예복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영의 눈을 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하며, 지속적으로 공격해 오는 마귀의 덫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의 눈을 열어 지속적으로 자신을 점검하여, 진정으로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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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불 (삿16:1-5)

  • 두 개의 불

  • 사사기 16:1-5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 본문해설 및 적용

1. 꺼지지 않는 정욕의 불길

이방여인과의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뤘지만, 삼손의 여성편력은 사그러 들지를 않고 오히려 그 강도가 높아져 갑니다. 삼손은 가사에 가서 기생, 즉 매춘부와 잠을 잡니다. 이방여인과의 결혼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매춘부와 잠을 잘 정도로 삼손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범죄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시간이 흐를 수록 도덕적으로 타락을 향해 치달을 수 밖에 없음을 삼손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결코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정욕의 불길은 우리 욱체 안에서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의 종류의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욕의 불과 성령의 불입니다. 정욕의 불은 모든 인간이 가진 불인 반면, 성령의 불은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가진 불입니다. 두 가지 불 모두 태우는 힘을 가졌습니다. 정욕의 불은 우리 자신을 태워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은 우리의 정욕을 태워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의 불이 정욕의 불을 삼키지 못하면, 정욕의 불은 우리를 삼켜 버리고 맙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며, 삼손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들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정욕이 있는 곳에 은밀히 도사리고 있는 대적

가사는 블레셋의 다섯 도시 중 하나로서 블레셋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의 밭에 불을 질러 1년치 농사를 날려 버리고,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고, 1,000명의 군대를 몰살 시켰던 삼손은 이미 블레셋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호기롭게도 블레셋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가사에 가서 버젓이 분탕질을 치고 있습니다. 홀로 1,000명과 싸워 이겼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가사 사람들은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가 머무는 곳을 에워쌌습니다.

정욕이 있는 곳에는 늘 대적이 매복을 합니다. 마귀의 세력은 언제 어느때든지 우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특별히 우리의 정욕을 타고 공격의 틈을 노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은 항상 은밀히 매복한 마귀에게는 결정적인 틈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야 할 자리와 가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메인 사람은 가지 말아야 할 자리를 벗어나기 힘들어 합니다. 짜릿하고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짜릿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타락의 증거입니다. 성령의 불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죄의 자리는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곳입니다. 반면 정욕의 불길이 성령의 불길보다 큰 사람은 죄의 자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 되기 쉽상입니다.

3. 스스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둘러쌌지만, 삼손의 강대함을 잘 아는지라 삼손을 곧바로 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있다가 새벽이 되었을 때 삼손을 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밤은 깊었고, 문은 굳게 잠겨졌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매복 중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성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통째로 빼어버립니다. 잠겨 있는 성문을 열지 않고 아예 문을 달기 위해 박아 놓은 기둥을 문과 함께 뽑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에다 옮겨 놓아 버립니다. 헤브론은 가사에서 무려 2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곳입니다. 20마일은 베데스다에서 애난데일에 이르는 어마 어마한 거리입니다. 그런데 문기둥과 설주와 문을 짊어지고 그 긴 길을 굳이 걸어서 헤브론에 옮겨 놓습니다. 성문은 성읍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문을 뽑아 헤브론으로 옮겼다는 것은 곧 블레셋의 권세를 이스라엘 땅 헤브론으로 옮겨 버리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으려고 매복했지만, 눈 앞에서 삼손이 문기둥과 문을 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삼손은 보기좋게 대적 블레셋을 조롱했고, 상징적인 메시지까지 날리며 도발을 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어마어마한 힘은 다름 아닌 성령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땅의 매춘부를 찾아 잠을 자고 돌아다니는 삼손에게서 성령님으로부터 온 힘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서도, 이스라엘에게서도 그 사랑을 거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제 멋대로 살며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그 힘이 마치 자신의 힘이라도 되는 듯 거들먹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대상으로 머문다는 것은 참 마음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신만큼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제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참고 견뎌 줘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대적을 조롱할 권세를 주셨고, 대적의 문을 취할 권능도 주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일을 하는데 열정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랑을 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기에 바쁩니다. 그것이 늘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4. 정욕의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방

시간이 흘러 삼손은 소렉 골짜기의 한 여인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여인의 치마폭을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정욕의 불길을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매수했습니다. 삼손을 꾀어서 무엇이 그 힘의 근원인지, 어떻게 하면 삼손을 결박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은 천백 개씩을 약속합니다. 블레셋의 방백이 다섯명이니, 은 5천 5백이라는 어마어마한 재물로 들릴라를 매수한 것이지요. 들릴라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와의 사랑을 통해 행복해지기를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가 자신을 멸망하게 할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모릅니다. 들릴라는 은 5천 5백을 포기할 만큼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쫓으면, 그것이 자기 것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요. 그러나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행복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멸망으로 인도하고 맙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그것이 정해진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것을 쫓으면, 세상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혹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행복이 아닌 멸망의 뿌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쫓으면, 세상 것들이 쫄랑거리며 뒤를 쫓아 옵니다. 그리고 그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도록 돕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간단한 법칙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나방은 불길을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불길이 뜨거운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듭니다. 앞서간 나방이 불과 몇 초전에 불길에 휩싸여 타죽는 것을 똑똑히 보고도 불길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을 향해 달라드는 인간은 마치 불나방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정욕의 불길에 현혹된 채 살아갑니다. 그 불길 끝에는 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참담한 결과가 그만 유혹의 짜릿함과 달콤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불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정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고작 나방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유혹을 추구하다가 불길 가운데 타서 없어지는 존재가 되게 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의 꽃을 피우고, 영혼의 열매들을 맺게 하는 나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불길에 타죽는 나방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히는 나비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의 불길을 잠재우고, 우리 심령을 성령의 불길로 불타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정욕의 불과 성령의 불 중 어떤 불이 우리 안에 타오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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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맛레히, 엔학고레 (삿15:14-19)

  •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 사사기 15:14-19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성령의 권능은 모든 결박을 끊는다.

삼손은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으로 시작된 연쇄적인 복수극들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드디어 사사로서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한 삼손은 에담 바위틈 사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담바위에 있는 삼손을 공격하는 대신 유다의 레히 지방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삼손의 마음을 읽었던 것같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삼손을 잡을 수 없으니 삼손의 동족들을 동원한 것이지요. 어찌됐건 블레셋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유다 사람들은 3,000명의 군대를 구성하여 삼손에게 갔고, 동족들과의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 삼손은 순순히 포박에 응하였습니다.

삼손이 밧줄에 묶여서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이 그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직접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삼손이 동족들에게 묶여서 끌려오는 모습을 보자, 원수같은 삼손을 죽이고자 함성을 지르며 달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그를 묶었던 밧줄은 불에 탄 삼과 같이 되어 순식간에 훅 끊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삼손에게 절대적인 완력을 주셨고, 그를 묶고 있던 결박을 끊어 놓았습니다. 성령님은 모든 묶인 결박을 푸시고 자유를 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던 예수님을 그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묶고 있던 죽음의 결박을 풀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이후로 성령님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의 심령에 들어오셔서 죄의 사슬과 죽음의 결박을 끊어 놓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면서,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만 하면, 삶 속에서 성도들을 묶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결박까지도 순식간에 끊어 버리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심령과 삶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박이 풀리고, 사슬이 끊어집니다.

2. 성령의 능력은 사소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 놓는다.

삼손은 옆에 놓인 나귀의 새 턱뼈를 발견하고 그 턱뼈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그 자리에서 죽여 시체로 큰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나귀의 새 턱뼈’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귀의 턱뼈를 말합니다. 턱뼈가 아직 단단했으므로 무기로 사용하기에 딱 좋았다는 것이지요. 포박된 삼손을 보고 신이 나서 진격해오던 블레셋 사람들의 환호성은 이내 죽음의 비명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귀턱뼈는 아무리 단단해도 1,000명의 적을 섬멸할 정도까지 최첨단 무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삼손의 손에 붙들린 나귀턱뼈는 더 이상 죽은 짐승의 뼈조각이 아닌 궁극의 살상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삼손이 성령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개인의 향락을 일삼고, 고작 개인의 감정으로 복수극을 벌이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손에 붙들리자 그는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는 전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평범을 비범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평범하다 할지라도 성령에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만 하다면, 우리의 손에 붙들린 것들은 위대한 일을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 평범하기 그지 없고, 죽은 나귀턱뼈처럼 생명을 잃은 뼈조각 처럼 하찮게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성령님에 붙들려 있기만 한다면, 우리 손에 붙들린 나귀턱뼈는 우리의 대적 마귀의 세력을 섬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최첨단 무기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윌리엄 캐리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그가 외쳤던 그 위대한 일이란 누구나 기대하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그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3. 성령님을 자아로 가리지 말라.

홀홀단신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무찌른 삼손은 의기양양하게 2행 시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때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어로는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가 담겨져 있습니다. ‘나귀 (하모르)’와 ‘더미 (하모르)’가 동음이의어인 것입니다. 동음이의어의 운을 이용하여, ‘죽은 나귀의 턱뼈로, 천명을 나귀 한마리 죽이듯 쉽게 죽였다’는 표현을 압축한 재치 넘치는 시인 것이지요.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삼손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삼손은 승리를 기념하여 그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습니다. ‘라맛 레히’는 '턱뼈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 위대한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천명을 죽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삼손에게는 항상 자아가 문제였습니다. 자아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강했기에 그것이 늘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그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천 명을 내게 붙이셨도다”로 불려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기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자리에서 찾아 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다 보면 자신이 산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다만 높은 곳에 올라와 있을 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 자리를 내려가기만 하면 다시 눈 아래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일 뿐인데, 마치 자기 자신이 큰 산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자신이 가로채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 시점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힘을 빼는 작업에 들어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기진하고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상태로 몰고 가심으로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자극적인 말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자뻑은 자살이다.”

4. 인생의 갈증은 영적인 갈증을 위한 것이다.

싸움이 끝난 후 삼손은 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천명이 죽기까지 싸우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나귀의 턱뼈를 휘둘러대야 했겠습니까? 더구나 삼손이 싸울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원샷원킬로 휘둘렀다 해도 천번을 휘둘러야 하는 노동집약적 전투였습닌다. 삼손은 이제 대적 때문이 아니라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삼손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방금 전, 의기양양하게 “내가 천명을 죽였다”고 외치던 삼손의 입에서 드디어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구원을 베푸셨다”는 제대로 된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메튜 헨리는 삼손이 심히 갈증을 느낀 것은 무더위 속에서의 장시간 전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었다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승리가 삼손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갈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상황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한다면, 결론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과 조건을 통제하셔서 그 백성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삼손은 사사들 중에서 가장 긴 이야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하는 장면은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과 최후의 순간 마지막 힘을 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삼손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그의 삶은 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방황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셨지만, 정작 그 자신은 허망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삼손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자기 정욕을 향한 갈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어 느끼는 육신의 갈증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목말라 느끼는 영적인 갈증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갈증을 사용하시곤 하십니다. 인간은 육신의 갈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결국 하나님을 향해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 부르짖음이 은혜의 샘을 터지게 한다.

삼손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갈증 가운데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셨고, 그곳에서는 이내 물이 솟아나와 샘을 이루었습니다. 삼손은 그 샘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게 되었고,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엔학고레란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는 라맛레히의 승리보다 엔학고레의 부르짖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갈증은 사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갖게 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자주 하나님을 찾을 것을 원하시고, 더 오래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의 여정에 많은 갈증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 갈증으로 인해 죽을 것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르짖음은 은혜의 샘을 터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엔학고레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샘이 터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은혜의 샘은 갈증이 나서 죽을 것 같을 때에 찾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을 때만 부르짖어서 터쳐내는 몰로 근근히 살아가는 일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갈증나 죽을 것 같을 때에만 물을 찾는 사람은 늘 수족이 고생입니다. 갈증이 닥쳐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늘상 부르짖는 사람은 갈증으로 죽을 것 같지 않아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샘이 터지기를 기도하기 보다, 은혜의 강물 가에 아예 장막을 칠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시편 1편이 말하는 물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입니다.

엔학고레는 아예 물이 없는 광야로 보내심을 받아 그곳에 있는 영혼들을 구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개척할 때에 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럴 때에도 우리는 엔학고레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와 은혜의 강물을 이룰 것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엔학고레가 터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더 원하기는 그 엔학고레가 은혜의 강물을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은혜의 강물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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