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


여호수아 새벽묵상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얻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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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꿈 (수 24:32-33)

*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꿈

* 여호수아 24:32-33; 창세기 50:25-26

 

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 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 50: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 본문

     요셉은 11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약 415년 동안을 장사되지 못한 채 관 속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 들어가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요셉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에는 가나안 땅에 그 시신을 묻었으나 요셉의 시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죽기 전에 한 유언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때에  자기의 시체도 가지고 가라고 유언했습니다. 야곱은 약속에 땅에 묻혀 후손들이 오기를 기다린 반면, 요셉은 후손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두 부자의 선택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그들은 죽으면서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약 4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대로 그 시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누리는 화려한 영화보다 아직 얻지도 못한 약속의 땅을 더 선한 것으로 여겼기에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스는 사후 약 415년이 지나서야 그토록 그리던 약속의 땅에 안치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자손들은 세겜에 요셉을 장례했습니다. 세겜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약간의 땅을 산 후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던 곳입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했던 그 추억의 장소에 묻혔습니다. 땅을 제비뽑기를 통해 분배했는데, 세겜이 요셉 자손의 땅이 된 것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죽은 후 마른 뼈가 되어서라도 그 땅을 얻고자 했던 요셉의 꿈을 이룸과 동시에, 요셉의 후손들이 조상의 꿈을 이루도록 세밀하게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호수아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르아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아들로서 여호수아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은 여호수아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시대인 사사시대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있습니다.

 

* 적용

1. 화려한 애굽이 아닌 소박한 약속의 땅을 택하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왕과의 차이는 그저 타이틀 뿐이었습니다. 왕이 누리는 모든 권세를 누리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을 골라 잡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땅은 고셴이었습니다. 땅이 기름져서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과 가장 근접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총리로서의 영화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더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그 눈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영화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결코 흩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편해질 수록 눈동자가 풀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풍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늘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 풍요와 번영을 주시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는 안락함에 빠져 꿈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요셉은 단 한번도 총리를 꿈꾼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에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요셉은 그 이름의 뜻처럼 “더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꿈꾸는 자에게 번영의 땅이 더불어 더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2.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요셉은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요셉이 소원했던 땅은 그저 땅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야곱처럼 죽은 직후 장사되는 대신, 가나안 땅에 그 후손들과 함께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걸고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 죽고 나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꿈, 그런 꿈들을 꾸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요셉은 노예 소년이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방주를 지을 때 노아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용기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드온은 겁쟁이였습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아둘람 굴에 모여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사람들은 모두 빚지고, 원통하고, 환란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꿈꾸는 그리스도인이 진정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 적용질문

1. 화려한 애굽과 소박한 가나안 중 어떤 것에 진정한 가치를 두십니까?

2. 하나님께서 막대한 재부를 허락하신다면 가장 먼저 돈을 쓰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3. 하나님 안에서 꾸고 있는 꿈이 있습니까?

4. 낮은 자존감과 일그러진 자아상으로 인해 꿈도 소망도 포기해버리진 않으셨습니까?

 

* 기도

     우리의 시선이 화려한 세상의 영광이 아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꿈을 꾸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해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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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충성하라 (수 24:29-33)

* 대를 이어 충성하라

* 여호수아 24:29-33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 백 십 세에 죽으매

30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 본문

     여호수아는 11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태어났던 여호수아는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종으로서 신앙 훈련을 쌓았고,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모두 감당하고 은혜롭고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의 기업 딤낫 세라에 있는 가아스 산 북편에 장사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기록입니다. 그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모두 나그네의 신분으로 가나안에 묻혔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묻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이스라엘은 더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이 말은 그 후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신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이 다음세대로 전달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 적용

1. 애굽의 종, 모세의 종,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의 인생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상승곡선을 그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종으로 태어나서 모세의 종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종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여호수아의 인생처럼 날마다 자라나가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에 마귀에게 그 생명이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우리 인생에도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의 종에서 모세의 종으로 옮겨가는 단계이지요. 인생의 광야를 걷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처럼 강력한 리더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리더들을 통해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훈련을 받는 이유는 또 다른 리더로 세워지기 위함입니다. 즉 모세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옮겨 가는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소명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큰 것일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명의 크고 작고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에 충실했는지 아닌지를 보십니다.

 

2. 우리의 본향, 하나님의 나라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매장할 땅이 없어서 막벨라 굴을 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자신의 기업 딤낫세라에 묻혔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무려 5백년이 흐른 뒤에야 성취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기업” 딤낫세라에 묻혔다는 말이 그래서 의미가 특별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그네가 아닌 주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본향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본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혼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사는 사람은 나그네 된 땅에 자신의 기업을 건축하며 삽니다. 본향으로 갈 때에는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본향에 건축을 하며 살았으므로 자신의 소유가 모두 그 자리에 있습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세상을 살아도 어떤 나라를 살았는가에 따라 그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캔쿤에 한달정도 여행을 가기 위해 그곳에 집을 사고 자가용을 사는데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누리기 위해서만 모든 시간과 돈을 쓰는 행위는 바로 그것과 똑같은 짓입니다.우리의 물질, 재능, 시간은 세상 나라를 누리는데 쓰여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쓰여지고 있습니까?

 

     3. 신앙은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있어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특출한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시종으로 두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그의 리더쉽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가 모세에게 부러워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와 함께 성막에서 기도하다가 모세가 떠난 후에도 성막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모세보다 오히려 더 많이 기도하고 매달린 사람이 여호수아였지요. 시간이 흐른 후 여호수아는 어느덧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와 다른 점은 그에게는 시종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모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신앙의 훈련을 쌓았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그 신앙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다음세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 대한 투자를 아껴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10년 후 공동체의 모습, 앞으로 20년 후 공동체의 모습을 내다보고 예측하면서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해야 합니다. 현재에 매여 급급한 공동체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꿈꾸는 자의 것이요,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세워 두셨습니다. 그 법칙은 하나님의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꿈을 심고 있습니까?

     다음세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음세대가 따라 배울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신앙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후배는 선배들의 거울입니다. 신앙의 선배로서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행동들은 한 공동체의 사고와 문화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다투기 좋아하는 공동체는 대를 이어 다툽니다. 충성하는 데에 열정적인 교회는 대를 이어 충성합니다. 신앙이 대물림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배들에게 어떠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 적용질문

1. 우리의 신앙은 한 발짝씩 성장하고 있습니까, 늘 그 자리에 있습니까?

2. 우리는 세상의 나라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습니까?

3. 다음세대를 향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4. 누군가에게 좋은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습니까?

 

* 기도

     한 번 사는 인생 나그네된 세상을 위해 허비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를 위해 심는 사람,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는 사람, 비록 작고 소박할 지라도 다음세대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읍니다. 이 모든 소망들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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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들었음이라 (수 24:25-28)

* 돌이 들었음이라

* 여호수아 24:25-28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 본문

     여호수아는 언약의 장소인 세겜에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언약을 세웁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 율례와 법도를 강론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한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고별사와 그 날에 행해졌던 전반적인 의식 등을 모두 율법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 하나를 취하여 상수리 나무 아래 세우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 갱신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세웠습니다. 기념비는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세워 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언약을 갱신하는 일을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 생각했기에 그 장소 역시 의미있는 곳을 골랐습니다. 그곳은 바로 세겜에 있는 상수리 나무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성소’라는 것은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은 당시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란 성막의 성소가 아니라 “성스러운 장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았던 야곱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곳, 그곳이 바로 세겜의 상수리 나무 아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없이 거룩한 장소이지요.

     여호수아는 바로 그곳에서 언약을 체결한 후 증거를 삼기 위해 큰 돌 하나를 취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돌이 맹세를 들었다”는 표현을 쓰면서 돌을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귀가 없는 돌까지도 백성들의 맹세의 말을 들었다면, 귀가 있는 사람이 그 언약을 못들은 것처럼 행하여 언약을 파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돌은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이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 돌을 바라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여호수아는 자신의 공적인 모든 임무를 모두 완수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자 분배받은 기업의 땅으로 돌려보냈으며, 자신 또한 자신의 기업인 담낫세라로 돌아가 평안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 적용

1. 언약은 오늘도 갱신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다시 언약을 갱신하였습니다. 모압에서 갱신된 언약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첫 해에 세겜에서 낭독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을 매번 갱신해야 했던 이유는 사람이 언약을 지킬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주님 앞에 늘 갱신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보며 묵상을 하는 이유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기도 하고, 우리의 신앙의 결단을 고백하기도 하면서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작심 삼일이면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않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삼일이 가기 전에 작심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 아래 자신을 조명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결단을 하고 나간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결단을 기억할 기념품을 마련하라

     세겜에 있는 상수리 나무는 언약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그리고 여호수아도 상수리 나무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념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세월이 가도 상수리 나무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돌을 들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결단을 했을 때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JAMA (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 All Nations)의 설립자이자 대표인 김춘근 장로는 콧수염을 기릅니다.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김춘근 장로는 간경화로 인해 1년 안에 죽는다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수염을 깎을 힘조차 없어 수염이 자라도록 방치했었습니다. 인생의 성공신화를 써가는 동안 하나님을 피상적으로만 믿던 그는 질병으로 인해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부르짖던 어느날 그는 “너를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병은 말끔히 사라지게 됩니다.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남은 여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자신의 결단을 늘 기억하기 위해 그는 콧수염을 자르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그 콧수염은 그와 하나님 사이의 기념비가 되어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억할 만한 통로나 수단이 있습니까?

 

3. 돌이 맹세를 들었다 (?)

     여호수아는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언약의 징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돌이 맹세를 들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귀가 없는 돌이, 아니 생명 자체가 없는 돌이 맹세를 들었다니 웃기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생물을 의인화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를 통해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언약과 신뢰가 우습게 여겨지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사상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돌마저 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을 나무가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언행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돌과 나무는 실제로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과 나무가 어디에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돌과 나무 앞에 서있듯,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사실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피조물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혀와 행실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누구보다도 강력합니다. 우리에게는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 흙 한줌마저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 적용질문

1. 매일의 묵상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거나 결단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까?

2.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결단을 기억할 만한 자신만의 기념비가 있습니까?

3. 주변에 널부러진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떠올리는 연습을 하고 계십니까?

 

* 기도

하나님은 어디에나 살아 계시고 그 신성과 능력을 모든 피조물에 심어 두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변의 풀한포기 돌맹이 하나를 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갈 수많은 기념비들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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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하나님 (수 24:19-24)

* 질투하시는 하나님

* 여호수아 24:19-24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23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 본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안일한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그것은 끊임없이 증명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기까지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의 불순종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여호수아는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강한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을 것임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도덕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 표현입니다. 즉 구별된 분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피조물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여겨질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들의 썩어진 영광으로 대체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않을 영광인데, 사람들은 나무, 돌 등의 썩어질 것으로 뱀, 물고기, 소, 사람 등의 썩어질 것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 대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한낱 피조물과 맞바꾼 셈이지요. 그것을 잘 아는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복을 내렸다가도 돌이켜 다시 화를 내리시고 심지어 멸하기까지 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거의 협박 수준이지요.  이스라엘이 정복한 가나안 땅에는 아직 몰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이 있었고, 그들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우상의 문화였으므로 이스라엘이 한 순간 방심을 하면 그들은 언제라도 이스라엘의 올무와 덫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여호수아는 위협적인 경고로 그들의 신앙을 바로 잡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신앙적 결단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정녕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확고히 다짐하고 맹세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맹세에 대해 스스로가 증인이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즉, 그 맹세가 어겨졌을 경우 스스로 유죄의 증인이 되어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라"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우상이란 나무, 돌, 철 등으로 만든 외형적 우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우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모든 내면의 상태들이 곧 우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 적용

1. 우리에겐 하나님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거룩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겨 내시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며, 세상 가운데에서 따로 구별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느날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뿐인 저의 모습이 묵상이 되면서 마음에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은 채 하나님께 “죄송해요 하나님. 잘 살고 싶은데, 엉망진창이네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순간 천정에 빛으로 알 수 없는 글씨가 새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글이었지만 적히는 순간 바로 마음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해석이 되어졌습니다. “달아보고 또 달아봐도 한참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용을 써도 나는 그저 죄인일 따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달아보고 재어보고 측량해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저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은빛 십자가가 마음에 들어오면서 글자들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모자라고 한참 모자란 나의 공로도 노력도 의도 모두 의미가 없어진 것이지요. 왜냐하면 십자가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눈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은혜였네요. 삶의 모습이 초라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도록 하나님만 바라볼께요.”

 

우리에겐 의로워질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있기에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니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별된 삶이 살아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이 좀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이것을 신인동형론적 (anthropomorphic) 표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라는 표현도 그 중 하나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인간의 용어로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 들을테니까요.

 

하나님의 질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그 백성은 연인이며, 부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순결을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람둥이를 애인으로 두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있는 순간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투성이고 하나님은 그저 한쪽 골방에 쑤셔박아 놓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골동품 취급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천대받아도 괜찮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다른 거룩한 분이십니다.

 

3. 우리 안의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향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선 순위에 놓고 있는 것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라도 거두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해지게 해야 합니다. 그 분은 달아보고 또 달아보아도 한참 부족한 우리를 그 분의 나라로 불러 들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에게서 거두어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우상처럼 되고 맙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인격을 닮지만, 우상을 사랑하면 우상을 닮아 갑니다. 이사야서에 그려진 우상은 크게 두 가지의 특성을 갖습니다. 1) 죽어 있습니다. 들을 귀가 없고, 말도 못하며,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면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꿈도 꿀 수가 없지요. 2)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여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그때에 우상 숭배자도 불길 가운데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끝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하나님의 복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우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끝은 마귀와의 연합이며, 장차 마귀가 받을 멸망과의 연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섬겨야 하겠습니까?

 

* 적용질문

1. 우리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감격하게 하십니까?

2. 하나님을 천대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3. 마음 속에 늘 하나님이 최고이십니까?

 

* 기도

     결코 하나님 곁에 머물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신 주님. 오늘 우리의 심령에 있는 우상들을 제하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키기 원합니다. 더럽고 추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주님, 당신이 질투의 하나님이신 것을 인하여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질투에 녹아 있는 그 사랑과 열정을 날마다 깨닫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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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으라 (수 24:8-13)

*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으라

* 여호수아 24:8-13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 본문

하나님께서는 요단 서편의 땅만 약속하셨지만 요단 동편 땅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원 플러스 원 특별 이벤트였던 셈이지요.  요단 동편 땅은 원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의 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강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감히 노예출신 오합지졸들이 범접할 땅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게 하셨기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아모리족의 거인들을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로부터 위협을 느낀 모압 왕 발락은 당대 최고의 술사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축복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대적들의 저주마저도 축복으로 바꾸어 그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강력한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때문이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칼이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벌을 통해 그들을 정복했습니다. ‘왕벌’은 히브리어로 ‘찌르아’로서 “찌르(면) 아(야)” 하게 만드는 독침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침을 가진 왕벌들을 잘못 건드려 군인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돕기 위해 자연을 마음껏 활용하셨던 하나님의 특성을 고려할 때, 왕벌은 문자 그대로 hornet을 가르킬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학자는 왕벌이 애굽 왕 바로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바로가 가나안을 먼저 쳐서 가나안 세력을 약화시켰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여러가지 형태의 모든 초자연적 기사들을 상징하는 대유적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왕벌이 가르키는 것이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칼과 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성읍이 필요하고 성읍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수고하지 않은 땅과 성읍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성읍들에 거하면서 자신들이 심지않은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 적용

1. 바이 원 겟 원 프리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지 않으신 요단 동편의 땅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 땅은 거인족 아모리 후손들이 살고 있던 땅입니다. 그 땅을 차지한 것은 역사에 두고 두고 회자될 정도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고 주변의 모든 나라들도 그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가질 엄두도 못내는 그 땅을 그저 원 플러스 원 이벤트처럼 간단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던져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항상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들을 덤으로 주시곤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벤트의 왕이십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선물로 주시고는, “써프라~~이즈” 하실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다 챙겨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행사장으로 우리가 찾아가지 앉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벤트를 벌여 놓고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우리는 우리들만의 굴 속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벌여놓은 이벤트 현장으로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사람만이 써프라이즈 뽜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2.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발락은 “황폐자”라는 뜻이고, 발람은 “파멸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마귀의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그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친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락과 발람이 그들을 향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주를 뿌리는 세력들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쓰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우리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기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듯이 우리를 향한 저주 역시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축복의 상징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지요. 그 십자가의 피가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백성의 표식이며, 의로운 왕이신 하나님은 그 백성의 고통을 결코 내버려 두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왕벌이 먼저 지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앞서 왕벌을 보내셔서 그 대적들을 치게 하셨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칼을 들고 이미 승리가 결정된 전쟁터를 누비며 기쁨의 칼춤이나 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가 결정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그 분께 전적으로 의탁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전쟁같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왕벌을 미리 지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승리가 결정된 고지를 마치 우리가 이기는 것 마냥 착각하면서 누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와 동시에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께서 하시도록 그분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4. 심지않은 포도원과 올리브 열매를 따먹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심는대로 거두는 것을 원칙으로 세워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심지 않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너스를 두둑히 주시는 분이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기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인가를 해서가 아니고, 거룩해서도 아니고, 그저 사랑하는 자이기에 그 사랑하는 자가 선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흡족해하는 것을 즐겨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풀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선물을 든 하나님이 손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입니다. 일종의 역설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대신 선물이 들린 손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매우 실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선물이 없어도, 댓가가 없어도, 그저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 분의 손에서 떨어지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에서 그만 눈을 떼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선 사랑, 후 선물”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많은 남자와 데이트 하는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여인이 만약 연인을 그저 루이비똥이나 걷지, 채널, 얼마니, 팔에감어 등을 들려주는 물주로만 생각하면 연인도 선물도 모두 잃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진정으로 연인을 사랑한다면, 자질구레한 명품들이 아니라, 아예 명품을 생산하는 회사까지도 주게 될 것입니다. 신데렐라를 꿈꾸는 허황된 드라마가 같은 얘기지만, 이 허황돼 보이는 스토리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스토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까?

 

* 적용질문

1. 하나님의 이벤트에 적극 참여하시나요?

2.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3. 하나님을 인생의 전쟁터에 대장으로 모셨습니까?

4. 하나님의 얼굴을 보십니까, 손을 보십니까?

 

* 기도

     하나님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끈적 끈적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예비하시고 써프라이즈 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꿈꾸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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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좀 보면 안될까요? (수 24:4-7)

* 우리도 좀 보면 안될까요?

* 여호수아 24:4-7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6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7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 본문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씨” 이삭을 주셨고, 이삭은 환갑이 되어서야 그것도 땀나게 기도하고 나서야 겨우 쌍둥이인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조촐하게 시작했습니다. 쌍둥이 에서와 야곱 중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에서는 세일산에 거주지를 차지한 반면, 야곱과 그 자손들은 자신들의 땅이 아닌 애굽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일은 에돔에 있는 험악한 산악 지대로서 이미 호리 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에서와 그 후손들은 그들을 쫓아내고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은 오히려 타향에 가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러니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창세기 46:2-4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다시 나오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 약속은무려  400년이 흐른 후에 성취가 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그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한 후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과 그의 자손 70명은 400년 후에 무려 300만의 거대한 민족이 되어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야곱 일행의 '입(入)애굽 사건'은 역설적으로 '출(出)애굽 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된 400년이 흘렀고 그동안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룬 반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은 심판이 결정될 정도로 죄악 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Go” 싸인이 떨어질 때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게 하셨습니다. 물론 애굽 왕 바로가 순순히 노예들을 놓아 줄리 만무했습니다. 아무리 바로라도 노예들을 저항없이 바로 놓아주면 바보이겠지요. 바로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통해 혼쭐이 나고 나서야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의 마음은 바로 바뀝니다. 바로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쫓습니다. 이스라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쯔아크”로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란 뜻입니다. 그들은 위기 상황가운데 “쯔아아악” 하며 입을 “쯔악” 벌린 채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바로 코앞까지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군대를 구름과 흑암으로 덮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빛가운데 있고, 바로의 군대는 흑암가운데 있게 된 것이지요. 그것은 복선이기도 했습니다. 얼마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를 좌우로 갈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생활의 흑암에서 건져 자유의 빛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애굽 군대가 뒤쫓아 건너갈 때에 그 물은 다시 합쳐졌고 그들은 죽음의 흑암가운데로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 앞에 모인 이스라엘의 리더들은 그들이 아직 어렸을 때에 이 모든 사실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신비로운 10가지 재앙들과 경이로운 홍해의 기적이 이들에게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눈 앞에서 펼쳐진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여러날 있었던 일 역시, 은혜의 역사의 하나로 기록을 합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불신앙으로 인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광야 40년의 생활을 형벌이라는 관점이 아닌 은혜라는 관점에서 회고를 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여러날을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먹을 것 마실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사방에 독을 가진 해충들과 맹수들이 득실대는 곳이 광야입니다. 불과 며칠 지나면 배고프고 목말라 죽던지 뭔가에 물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4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300만이 옷도 신발도 헤어지지 않은 채 말이지요.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받았고, 성막과 제사제도를 갖추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삶의 방식과 문화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마시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했으며, 광야에서 그들은 뱀과 전갈과 짐승들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맛보았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의 시간마저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적용

1. 우리의 시작은 미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밀물처럼 눈에 띄게 밀려 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미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다가올 때가 더 많습니다. 물결이 너무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때가 차면 걷잡을 수 없는 은혜의 파도가 되어 몰려 오게 됩니다. 우리는 잠잠히 그 분을 신뢰하며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림은 신앙의 다른 이름입니다.

 

2.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은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전조였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가나안을 주시면 되지  왜 병주고 약주냐구요? 하나님께서 관심이 있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인류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제시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못낳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이삭을 주셨고, 아이를 못 낳는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를 통해 야곱을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들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 속에는 수천년 후에 예수를 믿게 될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구속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전체의 구속을 상징하는 모형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사소한 up and down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애굽도, 바로의 군대도, 광야도 그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것일 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챙기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은 중지되었다고 믿으며, 그것을 가르칩니다. 자유주의신학의 침투로 인해 교회들을 덮어버린 이성주의와 물질주의가 교회와 성도들을 말아 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거부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고, 그런 교육을 통해 양산된 목회자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동화같은 사건일 뿐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기적도 맛보지 못한 채, 먼 옛날 어떤 이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박물관의 전시물을 보듯 열람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강요받아 왔습니다.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표본실의 박제처럼, 그 모양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어버린 자들로 살아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른 신앙을 갖게 됩니다. 홍해가 갈리우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를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경에 쓰여진 것만 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니, 이 얼마나 큰 믿음을 요구하는 것인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까지 우리를 과대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광야 속에서 불뱀과 전갈에 물려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를 안타까이 바라보십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바로에게 쫓겨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쯔아악” 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쯔아악”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에 먹을 것을 쥔 채, 그저 우리가 입을 벌리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눈으로 보았던 것을 우리도 눈으로 보면 안될까요? 그들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우리도 맛보면 안될까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갇혀 계신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나 우리들의 인생 안에서나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며, 기꺼이 우리에게 기적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제 입을 열고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아십시다. 주께로 피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시편 34:8).

 

* 적용질문

1. 광야같은 인생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으십니까?

2.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3.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한 영역은 없으십니까?

4. 오늘 하나님 앞에 입을 “쯔악” 벌려, “쯔아아악” 부르짖고 계십니까?

 

* 기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미미하여 보이지 않을 때라도, 앞이 막히고 뒤로부터 쫓김을 받을 때라도, 광야를 지나며 고통을 통과할 때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코 잊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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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건넌 자로 살라 (수 24:1-3)

* 물을 건넌 자로 살라

* 여호수아 24:1-3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 본문

여호수아는 한번으로 부족했던지 다시 한번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고별 연설을 합니다. 모임의 장소는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1)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첫 예배의 장소”이고 (창 12:6-7),

   2)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이후 크게 회개하고 우상들을 모아 묻어버린 “영적 부흥의 장소”이며(창 35:4),

   3)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을 새롭게 갱신 한 “언약의 장소”였습니다(수 8:3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세겜만큼 의미있는 장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의 리더들이 여호수아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보였다”는 표현입니다.  인간 여호수아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여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강 저편, 즉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반역의 장소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집안의 아들을 일방적으로 불러내어 강을 건너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것은 그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회고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달라고 자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을 뿐입니다.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말라 비틀어진 고목같은 자를 불러 ‘아브라함’이라 개명까지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불임에 이미 늙어버린 자를 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을 삼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사라가 장막 뒤에서 엿듣고는 비웃었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도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행위도 믿음도 그저 그런 자들, 하나님의 약속에 비웃음으로 응대하는 자들을 불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신 것은 그야말로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2차 고별 연설에서 그 은혜의 역사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 적용

1. 추억의 장소 세겜을 만들라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추억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세겜에 모인 것은 세겜이 바로 추억의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첫 만남의 장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킨 회개와 부흥의 장소,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한 서원의 장소 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흐려지고 심령이 상할 때마다 다시 한번 그곳을 회고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갱신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추억이 풍성한 그리스도인은 행복자입니다. 추억이 쌓일 수록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지는 횟수와 시간이 줄어들며, 결국 매순간 안연히 하나님의 품에 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이라

그리스도인의 만남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의가 되었건, 사적인 교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은 곧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하나님 앞에 모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끼리의 모임에 하나님께서 잠시 빠져주시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끼시면 재미가 없고 불편하게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끼시면 맘 편히 쌈박질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맛있게 씹어 댈 수도 없을테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아직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딜 가든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만남에 늘 하나님께서 동석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앉아 계신 자리에서 형제 자매를 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앉아 계신 자리에서 당파를 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도 형제자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 영적인 히브리인이 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 사람이라 불립니다. 히브리란 말은 물을 건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이 세워졌던 반역의 장소에서, 우상을 섬기던 패역의 장소에서, 죄악의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물을 건너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섬기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불러 홍해 바닷 물을  건너게 하심으로 구속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 강물을 건너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물을 건넌 민족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히브리인입니다. 우리 역시 물을 건넌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저편에서 죄악 가운데 살던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물을 건너게 하셨으며, 세상의 노예로 살던 우리로 하여금 예속의 물을 건너 자유케 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불러 저주의 물을 건너게 하심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의 물, 구원과 자유의 물, 유업의 물을 건넌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히브리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영적 히브리인에 걸맞는 삶이어야 합니다. 즉 물 건너편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역의 땅,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와 구별된 삶이어야 합니다. 억압의 땅, 구속의 땅 애굽과 구별된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 건너편의 삶을 산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품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에 걸맞는 언행을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에 있어서는 영적 히브리인을 주장하면서 삶의 모습에 있어서는 여전히 물을 건너지 못한 자로 산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입니다.

 

* 적용질문

1. 하나님과의 추억의 장소가 있으십니까?

2. 하나님 앞에 모이십니까, 하나님만 쏙 빼고 모이십니까?

3. 세상 물 건너편의 사람으로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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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에 채찍, 눈에 가시 (수 23:12-16)

* 알고보면 옆구리에 채찍, 눈에 가시인 것들

* 여호수아 23:12-16

 

12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13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15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16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 본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면 멸망하게 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선 아직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과 가깝게 교류하며 서로 결혼하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의 교제와 혼인을 강하게 금지하신 이유는 우상 숭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가까이 교제하고 혼인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으실 거라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좋니? 그럼 같이 살아라” 라는 것이지요. 가나안 족속들은 결국은 원수입니다. 가깝게 지내고 교류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남아 있으면 결국 이스라엘의 올무와 덫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때리는 채찍이 되고,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가 될 것입니다. 옆구리에 채찍과 눈에 가시라는 말은 모두 극심한 압제와 고통을 받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이 두 표현을 합하여 “옆구리의 가시”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언대로 하나님을 떠나 그들과 교제하고 혼인하다가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여호수아서 후에 이어지는 사사기는 온통 그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신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친히 목격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면, 징계가 임할 것이라는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말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나뉘어 축복과 저주의 말씀 하나 하나에 스스로  “아멘” 하며 화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약속된 대로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약속된 대로 징계도 반드시 내리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름다운 땅에서 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 등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 적용

1. 교제권

     누구와 교제하는가가 한 사람의 가치관과 습관, 심지어는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교제권의 문제 때문입니다. 늘 남을 험담하고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과 자주 어울리다 보면 마음 속에 미운 사람이 자꾸만 늘어납니다. 입만 열면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사람과 가까이 하다 보면 제법 그리스도인의 품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 어떤 시간을 보내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서로 결혼까지 하게 되면 그들의 사고 방식, 그들의 문화에 오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일으킨 가증스러운 문화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교제에 대해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전도를 위해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과의 교제권 안에 홀로 머물면서 오염되지 않을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유명 브랜드의 옷과 가방에 환장한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오래 교제하다 보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꼬질하게 느껴집니다. 얼굴을 변장시켜 버릴만한 화장술, 보톡스에 성형술을 가미한 그녀들의 얼굴을 매일 보다보면 거울 속에 비추인 나를 보며 “나도 한번?”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건강비법, 자녀교육, 요즘 핫한 연예인, 정신을 혼미케 하는 드라마 속 남주와 여주, 시어머니 매치기 등 하나님만 뺀 모든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교제권 안에서 하나님을 향했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세상을 향해 스르르 돌아가게 되곤 합니다. 한마디로 눈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전도가 목적이라면 믿는 사람들의 교제권 안으로 믿지 않는 분을 데려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마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2. 우상숭배의 본질, 자아

     여호수아 시대에 있어 전쟁이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곧 가나안 신들과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땅이 정복되었다는 말은 곧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풍요와 다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빠트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도 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배신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는 왠만하면 다 합니다. 그것만 제대로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번영과 풍요를 섬기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출세, 나의 번영, 나의 영광, 나의 자랑 등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그 우상들을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번영과 풍요가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번영과 풍요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번영과 풍요를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십일조를 할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창고를 채워준다니 합니다. 한마디로 돈놓고 돈먹기인 셈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3. 아름다운 땅에서의 멸절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반면 그곳에서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쫓겨 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될 것”을 세번이나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3은 완전수입니다. 세번 말했다는 것은 멸망에 대한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멸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나안은 그 땅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절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자유로와 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신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살면 징계는 도둑처럼 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옆구리에 채찍이 내리쳐질 때, 눈에 가시가 고통스러울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 안기는 것만이 예수 안에서 허락된 아름다운 땅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혹시 돌아가야 할 때는 아닌지요?

 

* 적용질문

1. 어떤 사람과 주로 어울리십니까? 다른 이들에게 좋은 교제권이 되고 계십니까?

2.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3. 징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 기도

아름다운 만남과 좋은 교제권을 허락하여 주셔서 늘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교제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우리의 욕심, 우리의 뜻대로 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징계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시고, 속히 깨달을 수 있는 분별력과 민감함을 주셔서 주님의 품을 늘 찾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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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마디 (수 23:6-11)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여호수아 23:6-11

 

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7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9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본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지키고, 말씀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은 이후로 한 순간도 그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좌우명과 같은 말이 된 것이지요. 그 원칙을 따라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마지막 유언으로 이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기를 1)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게 가지도 말고, 2) 그 신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며, 3) 맹세하거나 그 것에게 섬기지 말고 절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가나안의 우상 문화와 철저히 분리되라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우상을 멀리 하는 대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고 말합니다. “친근하다”는 단어 “다바크” 기억하시지요?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다”, “찰싹 붙어 따르다” 그런 뜻입니다. “다바크”가 곧 “다복”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과거에 그렇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미래에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당 천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조심한다”는 말 “샤마르”는 “울타리를 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울타리릍 치고 절대로 그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말씀의 울타리를 치고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그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아는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설교를 하는 시점에서도 “힘써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 본문

1. 믿음의 후배들에게 남길 만한 말씀

     여호수아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리더가 되면서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씀에 따라 평생을 살다가 다음 세대에게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좌우명으로 품고 살아가는 말씀이 있으십니까?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때에 자녀들에게 또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해 줄만한 말씀이 있습니까? “카페트를 들춰 보면…내가 숨겨둔 비상금 5000불이 있으니… 사이좋게 나눠 가져라… 꼴꼬 닭” 뭐 그런거 말고, 평생 그들을 지켜주고 힘이 될 그런 말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겨줄 말씀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말씀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 “다복”의 비결 “다바크”

     “다바크”야말로 대대로 남겨줄 만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따르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요 “다복”의 비결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유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바크가 다복의 비결이었다는 것이 경험이 되어져야 합니다. 남에게 주어들은 얘기 말고, 성경에 나와있는 정답 말고, 실제로 다바크를 살았고, 그로 인해 실제로 다복을 경험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근하십니까? 하나님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습니까? 하나님만 졸졸 쫓아 다니십니까?

     하나님을 “다바크” 한다는 말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세상이 말하는 승리의 비결을 쫓지 아니하며, 세상이 최고로 여기는 것을 쳐다도 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쫓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세상이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되십시오. 돈과 명예와 기쁨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그것들이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되십시오. 비결은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다바크”입니다.

 

3. 일당 천의 꿈

     그리스도인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권세와 권능입니다. 권세란 다스릴 자격을 말하는 것이요, 권능이란 다스릴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왕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모두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이길 자격과 힘이 있습니다. 당당하십시오. 힘을 발휘하십시오. 세상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허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에는 일당 천의 파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당당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4.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고 하나님 사랑하기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오는 방식은 수천년의 역사동안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울타리를 침해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틈새 전략입니다. 말씀의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거나 낡은 부분을 공략해 들어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에게 마저 말씀을 들이대며 달려 들었던 것이 마귀 아닙니까? 인류의 첫 죄악도 결국 말씀의 울타리가 공고하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얼마나 안전합니까? 말씀을 얼마나 아십니까? 말씀을 얼마나 사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대상이 기뻐하는 것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실력자요, 말씀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좌우명이요 마지막 유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적용질문

1. 인생의 좌우명 같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2. 하나님과 세상 중 어느 쪽과 더 친하십니까?

3. 일당 천의 권세와 권능을 누리고 사십니까?

4. 말씀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말씀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며 사십니까?

5. 말씀을 따라 사십니까, 그저 지식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6.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을 벗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실력자가 되고 실천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기를 원합니다. 약속하신 일당 천의 권세와 권능을 풍성히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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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준비 (수 23:1-5)

* 밥 말고 죽을 준비하시오

* 여호수아 23:1-5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4  보라 내가 요단으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 본문

여호수아 23-24장은 여호수아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23장은 여호수아가 늙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리더들을 모아놓고 하는 고별 설교에 해당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강조하는  말로  고별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불러 가나안 땅을 주셨으며, 그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싸우셨을 뿐 아니라, 전쟁 후에도 주변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위협 당하지 않고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함께 하심을 절실하게 체험했던 여호수아는 숨지기 직전 지난 날 이스라엘에 미쳤던 하나님의 손길들을 회고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성 소리 따위에 성벽이 무너지게 하신 여리고 전투 (6:20), 우박을 떨궈 적들만 명중시키신 기브온 전투 (10:11), 태양과 달에 대한 빨간 신호등 (10:12,13) 등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너무나도 명료하게 가나안 정복 역사에 박혀 있었습니다.

    

과거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에 근거한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들을 이미 정복된 땅들과 함께 분배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땅들이 있지만 그동안 쭈욱 신실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쭈욱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분의 약속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 적용

1. 밥 말고 죽을 준비해야 하는 인생

인간에게 있어서 생로병사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입니다. 모든 인간은 늙고(로) 병들고(병) 죽게(사) 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살아야(생) 합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까? 심지어 어떤 분에게는 산다는 것이 사실은 가장  힘든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지를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즉 금생에서의 먹을 밥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밥이 아닌 죽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먹는 죽 말고,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인생이란 안개와도 같습니다. 오늘 건강했다가다 내일 훅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모세도, 승리의 대명사 여호수아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죽음이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았냐에 따라서 죽음 후에 있을 삶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열어야 하는 것이지만, 손잡이를 돌렸을 때 발견하게 되는 세상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손잡이를 돌리고 열어젖힌 문 뒤에는 과연 어떤 세상이 존재할까요? 중요한 것은 죽음 전의 삶은 순간이지만, 죽음 후의 삶은 영원이라는 사실입니다. 현명한 투자가라면 순간의 이익보다 영원의 소득에 투자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먹을 밥보다 죽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삶의 구석 구석에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에 미치라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 전반에 미친 하나님의 손길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우리의 인생 곳곳에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미쳐 있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거부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에 미쳐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받았던 여리고성의 은혜, 우박의 은혜, 해와 달이 멈추는 은혜를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이미 미치고 있는 하나님의 그 손길에 미치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잠언 8:17-18)

 

3.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만이 현재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현재에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만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 분이 만져지고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직 차지하지 못한 땅들을 반드시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근거는 바로 과거에 발견된 하나님의 신실함이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과연 혼자서 살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까? 그 증거가 너무 흐릿하다면, 오늘부터 또렷한 증거를 만드십시오. 현재는 미래의 과거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반드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삶을 마감하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에, 하나님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회고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심각한 처지에 놓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영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단 한번 뿐인 기회입니다.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드십시오. 그 추억이 곧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회없는 미래를 위해, 아낌없는 현재를 사십시오.

 

* 적용질문

1. 인생의 허무함을 얼마나 절감하고 계십니까?

2. 밥을 준비하는 인생이십니까, 죽을 준비하는 인생이십니까?

3. 여호수아가 미쳤던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삶에도 미치기를 원하십니까?

4. 오늘의 삶을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 기도

지난 날을 돌아볼 때에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전반에 미치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따스한 손길에 미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미치도록 하나님의 손길이 그리운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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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이유 업그레이드하기 (수 22:30-34)    

*     갈등의 이유 업그레이드하기

*     여호수아 22:30-34    

 

30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한 회중의 방백 곧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32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방백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러 회보하매

33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거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 하지 아니하였더라

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     본문

비느하스를 비롯한 진상조사단은 단을 세운 사건에 대한 두 지파 반의 해명을 듣고 매우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들은 두 지파 반이 하나님을 배신했다고 오해했으나, 오히려 여호와를 향한 두 지파 반의 열정이 그들 못지 않게 뜨거움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어느 한쪽이라도 자제력을 잃고 열심만을 앞세워 감정에 충실했다면, 끔찍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려 최선을 다했기에, 갈등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상대방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공동체 내부의 형제애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갈등이 해결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셔서 간섭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상 조사단의 소식을 들은 요단 서편의 백성들 역시 매우 기뻐했으며, 오히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백성들은 그 단을 ‘엣’이라 칭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먼 훗날,  ‘엣’은 요단 동편 지파의 후손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할 것이고, 요단 서편 지파의 후손들에게는 동편 지파가 그들과 하나임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

1.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조율되지 않으면 문제를 야기합니다.

결과적으로 요단 강가에 세워진 ‘엣’은 여호와 신앙과 공동체 의식을 위한 좋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세워진 좋은 조형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좋은 것’이 큰 불행을 초래하는 ‘악한 것’이 될 뻔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사전에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면 상의와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물단지가 애물단지로 둔갑을 해버리곤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독단은 그야말로 독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좋은 것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충분한 동의와 합의없이 시작된 일은 화를 부릅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프로그램이나 탁월한 제도가 아닌 바로 사람입니다. 잘 짜인 예배를 드리고, 빈틈없는 행사를 치뤄내도 그 안에서 사람을 잃는다면, 그것들은 실패한 것입니다.

 

2. 갈등의 이유를 업그레이드 해야 합니다.

요단 동편과 서편의 지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원인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원인은 여호와 신앙과 공동체의 연대감을 고수하려는 열심가운데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란 없습니다. 하지만 갈등의 원인은 공동체마다 다릅니다. 화내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화를 내는 원인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나뉘는 이유를 살펴 보면 첫 발단은 매우 사소한 것에서 출발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건축 과정에서 본당 바닥의 카펫 색깔을 결정하는 일로 분열하였습니다. 한쪽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붉은 카펫으로 하자 하고, 다른 한쪽은 푸른 초장을 상징하는 녹색 카펫으로 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양측 모두 나름 거룩한 이유를 들이 댔지만 바닥에 깔려 발에 밟히는 카펫의 색깔 따위가 갈등의 요인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보혈과 하나님의 푸른 초장은 카펫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심령 가운데 깔려야 하는 것임을 그들은 잊었던 것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점심에 도넛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하는 일로 분열하였습니다. 도넛을 먹자는 사람들은 식사를 간소화하고 그 시간에 성경공부를 하자는 것이었고, 밥을 먹자는 사람들은 영의 떡만 먹이고 육신의 떡은 가벼이 여기는 교회를 누가 찾겠느냐고 항변하였습니다. 양측은 서로 조율하지 못하고 결국 갈라지게 됩니다. 모두 거룩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결국 자기 고집과 아집이 들어있기 때문에 조율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무슨 일로 분노하는지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곤 합니다. 중국집에서 단무지 좀 늦게 갖다 준다고 화를 버럭 버럭 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동요도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과연 단무지 만도 못한 분이신가요?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 갈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비본질을 놓고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을 놓고 싸우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갈등의 근원에 자기 욕심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하다가 오해때문에 갈등이 생겨났다면, 갈등은 해소되어지기 쉽습니다. 그저 서로 이해하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의 이유와 갈등의 이유를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분노하지 말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 걸고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3. 갈등을 통해 오히려 하나되어져야 합니다.

갈등을 겪고 나면 그것이 결말이 난 후에라도 사람들의 마음엔 상처가 남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최소화 하는 것이 곧 교회의 실력이요, 그리스도인 개인의 실력입니다. 문제가 없는 공동체, 갈등이 없는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공동체가 있고, 갈등이 폭발하여 갈기 갈기 찢기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공동체의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실력있는 공동체는 갈등을 통해 더욱 하나가 되어집니다. 그 갈등의 원인이 아무리 거룩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지면 그 공동체는 패배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가지 갈등은 어떤 형태로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갈라서건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건 모든 갈등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의 끝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하는 것은 철저히 선택의 문제요, 실력의 문제입니다. 갈등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한가지 입니다. 그 갈등 가운데 하나님이 있게 할 것인지, 개인의 감정이 있게 할 것인지. 실력도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해 결정됩니다. 갈등의 중심에 자아가 존재하면 능력 부족이요, 갈등의 중심에 성령님의 운행하심이 계시면 능력 충만입니다. 갈등을 통해 하나가 되는지 분열이 되는지는 결국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있습니까?

 

*     적용질문

1.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했지만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했다가 오해를 불러 일으킨 적은 없습니까?

2. 주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무지입니까, 남북 통일이나 세계 평화입니까?

3. 사소한 이유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4. 우리의 갈등에는 하나님께서 운행할 여지가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감정만 난무합니까?

 

*     기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쉽게 분노하고 쉽게 갈등하는 쪼잔하고 째째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때마다 생기는 모든 갈등들 안에 내 생각, 내 판단, 내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과 운행하심이 있도록 우리를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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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로 인해 공격받을 때에 (수 22:21-29)

* 오해로 인해 공격받을 때에

* 여호수아 22:21-29

 

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23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혹시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27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 번제와 우리 다른 제사와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

28 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열조가 지은 여호와의 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

29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단 외에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고 오늘날 여호와를 좇음에서 떠나려 함은 결단코 아니니라 하리라

 

* 본문

요단 강가에 단을 쌓았다가 우상숭배자로 내몰린 두 지파 반은 부드럽고 차분하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답변을 합니다. 그들은 결코 9지파 반의 협박에 가까운 충고에 억울하다고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이외의 우상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일컫는 세가지 다른 명칭, 즉 “전능하신 자 (엘)” “하나님(엘로힘)” “여호와” 라는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순수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함도, 심지어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것을 맹세합니다. 두 지파 반이 단을 세운 이유는 시간이 흐른 후 요단 서편의 후손들이 요단 동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고 말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 혈연 공동체라는 확실한 증거의 표시로 단을 쌓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단을 쌓은 이유는 1) 요단 서편과 그들이 한 민족이라는 것과, 2) 요단 동편의 후손들이 배척되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될 상황을 배제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에 있는 제단과 똑같이 생긴 단을 만들어 놓고 혹시 미래에 우려한 일이 발생하면, 자신들이 한 민족이라는 것을 그 단을 증거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이 금한 것은 단이나 형상을 우상 숭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 전체를 다 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장난감 인형이나 교제보 모형 등은 제작이나 소유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구약에서도 전쟁의 승전비나 기념비 등을 쌓아 올리는 것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증거용으로 쌓은 요단 강가의 단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오해였을 뿐입니다.

 

* 적용

1. 의도와 상관없이 오해받을 때도 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사전에 소통이 없었기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관계 속에서 오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해 받을 때에 우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오해 했을 때는 “앗 실수” 하고 넘어가면서, 오해를 받았을 때는 억울해 미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오해하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2. 오해 받아서 공격 당했다고 노발 대발할 필요 없습니다.

오해를 받으면 그것은 오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방식으로 충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오해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로 상처가 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해를 받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고 이를 부득 부득 갑니다. 어떻게 복수를 할까 칼을 갈지요. 하지만 그것은 성숙한 크리스챤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성숙한 크리스쳔은 오해가 생기면 그것을 부드럽고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여 해소합니다. 진상을 밝혀내고 소락지를 질러대고 멱살을 잡는 등의 찌질한 행위를 통해 반격을 가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베이비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를 해결하고 공동체가 온전해 지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오해받을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헌신도 없으면 오해받을 일도 그만큼 줄어 듭니다. 하나님 때문에 오해 받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생길 수있는 일로 받아 들이십시오. 오해 때문에 공격 받을 때에 공격받은 일로 격해지지 말고 전체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십시오. 억울한 대로, 열받는 대로 대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수많은 오해를 겪으면서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 적용질문

1. 억울한 오해를 받았을 때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십니까?

2. 공동체의 유익과 자신의 감정 중 무엇을 우위에 두십니까?

3. 하나님 때문에 수모를 당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 기도

     우리는 가끔 오해해서 실수하기도 하고, 오해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오해를 받았을 때에라도 오해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오해를 상처로 받아들이고 분노로 대응하기 보다는 부드럽고도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넉넉함과 지혜로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하나님을 위해 오해받고 능욕받은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길 수있는 성숙함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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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라 (수 22:15-20)

* 신앙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라

* 여호수아 22:15-20

 

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16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17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19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

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느니라

 

* 본문

요단 동편 지파들이 대형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요단 서편 지파의 대표들은 즉시 요단 강을 건너 요단 동편의 길르앗 땅으로 갔습니다. 비느하스가 이끄는 진상 조사단은 요단 강가에 단을 쌓은 일이 하나님을 거역한 행위라고 책망했습니다. 비록 단을 쌓은 의도를 오해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 내용은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우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요단 강가에 단을 쌓은 일을 바알 브올 사건과 비교합니다. ‘브올의 죄악’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이라는 곳에 있을 때에 모압과 미디안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바알을 숭배하고 음행을 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24,000명이 죽임을 당한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당시 그 죄악의 중심에 있던 자를 직접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던 비느하스는 단을 쌓은 두 지파 반에게 이 사건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그 사건을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으며, 그날의 부정함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우상 숭배에 대한 경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비느하스는 “오늘 우상숭배를 하면, 내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진노는 두 지파 반 뿐만이 아니라 온 회중에게 임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요단 동편에 성막이 없어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요단 서편으로 옮겨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이미 땅 분배가 끝난 시점에 두 지파 반이 넘어오면 얻었던 땅의 일부를 다시 토해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해서라도 그것을 막기를 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지파 반의 죄악은 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회중에 대한 징계로 결말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패역한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간의 범죄로 인한 아이성 전투의 패배’였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악이 아간 한 사람에 대한 진노로 끝나지 않았다면, 두 지파 반 전체의 범죄는 얼마나 더 큰 진노를 불러 일으키겠느냐 하는 비느하스의 논리였습니다.

 

* 적용

1.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숭배에 그렇게 민감하실까요?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경배와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우상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태양도 달도 별도, 심지어는 하늘의 천사라 할지라도, 모두 피조물이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사람을 가장 귀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지요. 그런데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오히려 다스림의 대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은 갑자기 피조물의 영광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뱀이나 소의 조각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한낱 짐승의 영광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나무 한 토막을 잘라 절반은 땔감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우상조각을 만든 후 그것을 향하여 경배를 하는 행위”는 한심하고 가증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대신 돌맹이나 나무조각을  들고 와서 아버지라 부른다거나,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아버지라 부른다면 이 정신 나간 아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대상은 아버지 한분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 역시 우리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단 이외의 다른 단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단 이외의 다른 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단을 쌓기에 바쁩니다. 성공의 단, 명예의 단, 자랑의 단, 재물의 단, 번영과 풍요의 단, 안락의 단 등 그 종류는 셀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단들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동안 하나님의 단에는 불이 꺼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단에 불이 꺼져버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느낌도, 열정도,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단은 그저 여러 단 중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천덕꾸러기 단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단이 아닌 다른 모든 단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쳔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왕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단을 허물어 내릴 때에라야 단에서 얻고자 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3. 신앙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십시오

비느하스는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힘들거든 동편 땅을 버리고 서편으로 건너오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땅을 내주겠다는 것이지요. 요단 동편의 땅은 금싸라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도 보지 말고 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땅을 내어주는 손해마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에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느하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땅이 장애가 된다면 땅을 버리는 것입니다. 강이 장애가 된다면 강을 아예 건너가서 살면 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다면 과감히 잘라내고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것을 잃고서라도 놓치지 않아야 할 우리의 진정한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얻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으 무엇입니까?

 

 

* 적용질문

1.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2. 하나님의 단 이외에 스스로를 위해 쌓아올린 단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은 무엇입니까?

 

* 기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삶의 반경 내에 하나님의 단이 아닌 그 어떠한 단도 존재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정결한 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항상 친하여 알기 위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모든 환경과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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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합시다 (수 22:10-14)

* 말로 합시다

* 여호수아 22:10-14

 

10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 본문

요단 동편 지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단강 언덕에서 큰 단을 만들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만 언급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문(M.T.)과 70인역(LXX)에는 갓 지파가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와 맺은 약속을 무사히 완수하고,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던 그들은 요단 강 언덕에 이르자 만감이 교차하게 됩니다. 처자들을 뒤로 한 채 7년 간의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던 그들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 생사를 같이 했던 요단강 서편의 형제들과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 선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을테지요. 그들의 마음에는 갑자기 요단 서편의 형제들로부터 영영 끊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표징을 만들기 위하여 요단강가에 큰 단을 쌓아올렸습니다.

 

그들이 쌓은 단은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제단은 실로의 성막에 있는 번제단과 모양이 비슷한데다가, 그 규모 역시 컸으므로 나머지 지파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마치 요단 서편에 단을 쌓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자면 “가나안 땅의 맞은 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이 있는 곳의 건너편에" 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홉지파 반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다른 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단일성을 깨뜨리려고 한다며 분노를 하게 하게 됩니다. 정황 상 그들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12:4-14은 하나님의 제단이 오직 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규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규례는 제단이 우상숭배로 더렵혀지고 그 순결성을 잃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홉 지파 반에게 있어서 단을 쌓은 행동은 신성모독이요 가증한 범죄행위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결전에 앞서 마지막으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절단의 대표는 비느하스와 각 지파에서 뽑은 10명의 대표들이었습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바알브올 사건' 때에 이방 제사에 참여하고 간음 중이었던 시므리와 고스비를 보고 거룩한 분노로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게 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요단 강가에 세워진 단에 대한 의혹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비느하스만큼 적임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내전에 앞서 진상을 제대로 파악할만한 가장 확실한 일꾼을 세워 마지막 대화에 들어갑니다.

 

* 적용

1. 경솔한 행동은 갈등을 야기합니다

두 지파 반이 단을 세운 의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는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고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유월절, 칠칠절, 수장절 등의 3대 절기가 오면 중앙 성소에 참여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1년에 세 번은 중앙 성소로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공동체로부터 떨어지게 될 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요단 동편의 단은 세월이 지나면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을 여호수아와 요단 서편의 리더들에게 말하고 상의를 했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더 좋은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일으켜 갈등을 초래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공격을 당하곤 하지요. 오해를 하여 공격하는 쪽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는 오해를 살만한 언행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갈등을 통해 상처만 받고 미움만 안은 채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갈등을 야기할 만한 언행을 줄여 나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2. 소문과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사실과 진실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fact를 의미한다면, 진실은 사실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의도까지를 포함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은 진실과는 다를 때가 있습니다. 또한 귀에 들려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소문-사실-진실 간의 고리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소문은 항상 사실을 과장합니다. 사실 뒤에는 항상 사람의 숨은 의도와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소문만 듣고 섣불리 한 사람을 판단하고 공격을 감행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악하지만, 그 소문을 근거로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사람도 악합니다. 소문을 듣고 열받아 할 것이 아니라 소문 뒤에 있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소문이 사실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실이 다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사실만 보면 누가 봐도 공격 받아 마땅한 경우가 있지만, 그럴 때에라도 그 사실 속에 담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왜 그랬는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말 못한 사정은 없었는지. 그러고 나서 분노해도 충분합니다. 판단하기 전에 사실을 확인하고, 공격하기 전에 진실을 확인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갈등은 대화로 해결해야 합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진상조사단을 보낸 것은 전쟁을 막기 위함과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함의 두 측면이 모두 있었습니다. 악한 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대화는 갈등을 해소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갈등이 불가피할 경우 갈등에 대한 명확한 명분을 제시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갈등이 생깁니다. 많은 경우 갈등은 오해에서 생깁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오해가 풀릴 때가 많습니다. 대화하기 전에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고 달라들면 오해가 풀렸을 때에 오해해서 미안하단 얘기도 하기가 뻘쭘해집니다. 또한 사실만 가지고 지나치게 다그치게 되면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소문이 사실로 확인될지라도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귀를 열어 놓을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입이 하나인데 귀가 둘인 이유를 하나를 말하는 동안 둘을 들으라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곤 합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대화의 포인트는 말하는 것이 아닌 듣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이면에 있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말할 때도 또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면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갈등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이 막히면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늘 진심이 오가는 교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적용질문

1. 갈등을 야기할 만한 말과 행동을 자주 하시지는 않으십니까?

2. 소문만 듣고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않으십니까?

3. 눈에 보이는 사실만 가지고 상대방의 진심은 무시하시지는 않으십니까?

3.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먼저 귀를 기울이십니까?

 

* 기도

우리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갈등의 요소들을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소문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사실 이면에 숨기운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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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를 지킨 사람들 2 (수 22:5-9)

* 의리를 지킨 사람들 2

* 여호수아 22:5-9

 

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 본문

여호수아는 전쟁이 그치자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돌려 보냅니다. 요단 동편에 이미 땅을 얻었으나 끝까지 신의를 져버리지지 않은 자들을 칭찬하며 수많은 전리품을 손에 들려 보냅니다.  신의를 지켜 충성한 자들에게 여호수아 역시 신의로 답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들을 그들의 손에 들려 주면서, 그 땅에서 공평하게 나누라고 권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전리품을 형제와 나누는 일은 매우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의 공은 일선에서 싸운 군인들 뿐 아니라 후방에서 지원한 백성들에게까지도 동일하게 베풀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눈 여겨 봐야 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그들을 보내면서 땅 개간이나 영토 확장 등의 권고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섬길 것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모세를 통해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의 중심지로부터 강 하나를 끼고 있어야 했던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더욱 근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지키는 신의가 그 어떠한 일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호수아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적용

1. 의리는 의리로 갚자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자신들의 땅이 이미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형제들과의 신의를 지켜 선봉에 서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가정으로 복귀하는 그들에게 여호수아는 섭섭한 대접을 하지 않습니다. 넘치게 칭찬하고 격려하며, 풍성한 전리품을 손에 쥐어 줍니다. 공동체는 성도의 의무를 내세워 헌신을 강요만 해서는 안됩니다. 수고하고 헌신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칭찬과 격려와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섬김이 신바람이 나지 않고 번 아웃이 되는 이유는 섬김에 대한 인정과 칭찬은 없고 실수에 대한 질책과 비난이 난무하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자신은 손에 물 한방울 안 대면서도 섬기고 헌신한 사람들의 작은 실수를 보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섬김에 많은 회의를 불러 일으키곤 합니다. 또한 어제까지 함께 손잡고 동역했던 사람이 오늘 등을 돌려 비난의 칼을 들이대는 모습도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일에 대한 지나친 시기와 질투는 물론 너무 높은 기준을 들이대는 것도 섬기는 자의 힘을 빼 놓습니다. 리더쉽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보다는 하는 일없이 보고만 받고

 

크리스쳔은 믿음이 약하면 의리라도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함께 웃고 웃으며 손 잡고 일했던 사람에 대한 의리를 냉대와 비난과 험담 등으로 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격려하고, 칭찬해 줘야 합니다. 조금 실수가 있어도 조금 부족해도 잘한 부분 좋은 부분을 부각시켜 주며, 강점을 최대화시켜 주어야 합니다.

 

2. 의리는 모두에게 골고루 지켜져야 한다

전리품을 나누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원칙은 뒤에서 지원한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나눠 졌습니다. 일이 잘 되었을 때 그 열매를 자기만 홀랑 따먹으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일이 잘되고 나면 논공행상으로 난리를 피우고, 일이 안되었을 때에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느라 ‘폭탄 전가 게임’을 하는 등의 행위는 크리스쳔의 행위가 아닙니다. 품격있는 크리스쳔은 일이 잘되면 공을 형제에게 돌리고, 일이 안되면 자신이 책임을 지고 형제들을 보호하려 합니다.

 

공동체의 열매는 열심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돌아가야 합니다. “니가 뭐 한 거 있다고” 이런 말은 세상에서나 하는 말입니다. 공동체의 결속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부터 단단해지기 시작합니다.

 

3. 의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지켜져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친근히 한다'는 말의 히브리 단어는 ‘다바크’로서, ‘착 달라붙다’, ‘바짝 뒤따르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껌딱지가 되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공급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순간 하나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의리를 강조하고,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배신감을 느끼면서, 왜 하나님에 대한 의리는 그리도 가볍게 여기는 것일까요? 우리가 신의를 지켜야 할 첫번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신의가 잘 지켜지면 사람과의 의리는 자연스럽게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껌딱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부터라도 하나님께 “다바크” 하십시다. 이것 저것 안해 준다고 하나님을 “타박”만 하며 하나님을 떠났다가 세상에서 한대 터져서 “타박상” 입지 마시고, “다바크” 하셔서 세상 가운데 승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적용질문

1.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십니까, 비난하고 지적질하십니까?

2. 열심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열매를 나눠주며 선대하십니까?

3. 하나님을 타박하십니까, 하나님께 “다바크” 하십니까?

 

* 기도

     주님께 온전히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안에서 함께 형제된 이들에게 격려의 말, 칭찬의 말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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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를 지킨 사람들 1 (수 22:1-4)

* 의리를 지킨 사람들 1

* 여호수아 22:1-4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 본문

전쟁이 끝나고 땅분배도 모두 끝났습니다. 요단 서편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마무리 하고 요단 동편에 땅을 얻은 지파들이 드디어 그들이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은 요단 서편이었지만, 요단 동편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격퇴하는 바람에 요단 동편의 주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때 요단 동편의 광활한 초원이 탐스럽기 그지 없게 보이는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조릅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2 지파 반이 땅을 얻고 전쟁에서 빠져 버리면, 전력에 큰 문제가 올 뿐만 아니라, 남은 9지파 반의 사기도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과 약조를 맺습니다. 땅을 허락하되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하여 가나안 정복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 다시 돌아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모세가 떠나고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 그들과의 언약을 재확인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신들의 처자식들과 소유를 모두 남겨 놓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7년 동안의 전쟁 내내 최선봉에 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정복전쟁이 끝이 나고 요단 서편의 땅 분배가 끝나자 여호수아는 그들을 불러 칭찬하고 노부모들과 처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 적용

 1.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

이스라엘의 12지파들 중 두 지파 반이 먼저 땅을 얻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12지파 모두에게 주어진 공동체적 사명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사명에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두 지파 반은 이미 땅을 얻었으므로 굳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당장 자신의 이권이 결부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오히려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동체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한 개인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잘 예배드리고 자기 혼자 마음에 예수를 믿으면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면 되지 꼭 교회에 나와서 이꼴 저꼴 볼 필요가 있느냐 묻습니다. 가장 좋은 찬양팀을 골라 경배를 드리고, 가장 좋은 성가대의 찬양과 가장 맘에 드는 목사님의 말씀을 골라 예배를 드리며, 헌금은 불우한 이웃을 위해 따로 떼어 놓고, 축도는 존경하는 연세 지긋하신 목사님께 들으면 오히려 훌륭한 예배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것은 사실 개인이 아니라 교회, 즉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공동체로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면 거기에 맺히는 밀알들은 여럿입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벼 하나가 아닌 들판의 수많은 벼들을 모두 거둡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아닌 예배 공동체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자는 공동체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 합니다.

 

 2. 앞장서서 형제자매들을 도우라

요단 동편에 땅을 얻은 두 지파 반에게 있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은 사실 돌아올 것이 전혀 없는 헌신이었습니다. 잘 되어 봐야 남 좋은 일이고, 잘못 되면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기에 가장 선봉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눈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시절에는 성찬식을 할 때에도 한 그릇에 포도주를 담아 그것을 돌려 가며 마셨습니다. 지금은 위생 상의 문제와 절차상의 편의를 위해 각 잔에 미리 담아 두었다가 자기 잔을 받아 마시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 우리는 한 피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받은 성령도 하나인데, 우리는 전혀 하나가 아닙니다. 한 피를 나눈 형제 자매라는 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두 지파 반의 헌신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시간이 남으면 하는 소일거리로 전락해버렸고, 시간이 남아돌아 탱탱 놀며 온갖 취미를 즐기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섬기라고 하면 어느 새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변해 있곤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하는 지니가 되어 버렸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 바라던 소원은 어느덧 원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연애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연인의 교제 없이 선물만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무엇인가 얻어 갈 것이 없나 눈을 휘번덕거리며 찾습니다. 하지만 막상 뭔가를 얻어갈 만한 교회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얻어 갈만한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찌 보면 거지들만 득실거리고 음식은 없는 잔칫집 같은 곳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기쁨이 충만한 잔치집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음식과 풍악과 음료와 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선 순위를 점검하라

요단 동편에 땅을 얻은 두 지파 반은 가족들과 소유물들을 모두 요단 동편에 놓아 두고 7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전쟁이 끝나고 본진으로 돌아오면 장막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지파 반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매번 요단 강을 건너 왔다 갔다 할 수도 없었거니와, 본부의 지휘와 통제를 따르기 위해서는 본진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먼저 땅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7년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많은 순간 희생을 요구합니다.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현대의 크리스쳔들은 대부분 자신의 것을 먼저 선택합니다. 자신의 시간, 자신의 물질, 자신의 건강, 자신의 가정, 자신의 감정, 자신의 행복 등을 먼저 챙기고 남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여기 저기 떼어 놓다 보니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곤 부스러기마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번지르르하게 포장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어느 덧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보디가드나 능력있는 집사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 우선 순위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인가, 내가 먼저인가? 하나님의 일이 먼저인가, 나의 일이 먼저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가, 나의 일인가?

 

* 적용질문

1. 나에게 있어서 교회 공동체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2. 형제 자매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앞장 서고 계십니까?

3. 하나님의 일과 개인의 일 사이에서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사십니까?

 

* 기도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 날 우리의 헌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종 부리듯 이용해 왔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공동체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행복, 자신의 가치만을 집중하며 살았던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동체로 돌려 주시옵소서. 남는 시간, 남는 물질, 남는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제 1의 우선 순위를 드리기를 원하오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우리라도 마음껏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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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is 뭔들 (수 20:7-9)

* 예수 is 뭔들

* 여호수아 20:7-9

 

7.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8. 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 본문

이스라엘 전역에 세워진 도피성 6개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단 서편에는 게데스, 세겜, 헤브론이 지명되었으며, 요단 동편에는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이 지명되었습니다.  도피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잠시 방문 중인 관광비자 소유자까지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도피성은 예수님을 상징하므로 각 도피성의 이름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적용해보기를 원합니다.

 

* 적용

(1) 게데스 – 예수는 우리의 의

 ‘게데스’는 ‘거룩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인에서 거룩한 자로 칭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능력 때문에 값 없이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말이 아니라 물리적인 말로 따로 성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성별되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을 거룩한 무리, 즉 성도라고 하지요. 흔히들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을 평신도라고 부르는데, 그 표현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모두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 거룩한 자로 구별되었습니다. 단, 거룩한 자로 구별되었으니 구별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성결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살아라”라는 말은 사실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고, 물리적 개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윤리적으로 표현하기 원한다면 “성결하게 살아라”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너무 따지는 것 같지요? 그러나 중요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가진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죄를 지어보신 적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비록 부끄러움 뿐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어느 장로님, 권사님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2) 세겜 – 예수는 우리의 힘

‘세겜’은 ‘어깨’ 또는 ‘등’이란 뜻입니다. 목 바로 아래쪽 등짝 부위가 바로 세겜입니다. 어깨는 힘을 상징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힘을 발휘하는 곳이 어깨이기 때문입니다. 어깨에 모든 정사를 메신 예수님께서 (사 9:6) 잃어버린 양이었던 우리를 그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눅 15:5). 예수님이 당신의 어깨에 우리를 메고 돌아오신 것은 그 분의 어깨에 있는 정사를 우리의 어깨에 올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의 힘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창조 시 인간에게 주어졌던 왕권이 회복됩니다. 그 왕권을 신약성경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바로 권세와 권능입니다. 권세는 “다스릴 수 있는 권한 (Authority to rule)” 입니다. 권능은 “다스릴 수 있는 힘 (Ability to rule)”입니다. 권세와 권능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3) 헤브론 – 예수는 우리의 중보자

‘헤브론’은 ‘교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6).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껏 우리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4) 베셀 – 예수는 우리의 요새

 ‘베셀’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요새는 적들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시 18:2) 라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마귀의 세력이 우리를 향해 덮쳐 올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안전은 보장됩니다.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렘 1:18-19).

 

(5) 길르앗 라못 – 천한 자를 높이시는 예수

길르앗에 있는 ‘라못’은 ‘높다’는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에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악하고 추한지요. 우리는 결코 높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티끌같은 자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근본 자체가 티끌입니다. 티끌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이상 티끌같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고 사들인 “예수님 짜리”들입니다. 더이상 “십원짜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시편 21:3). 할렐루야!

 

(6) 골란 – 예수 안에 있는 참 기쁨

 ‘골란’은 발음상 많이 화가 나 보이지만 사실은 ‘기쁨’ 또는 ‘희열’의 뜻입니다. 골란이란 그냥 평범한 기쁨이 아니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고 싶은 넘쳐오르는 기쁨을 말합니다. 환희라고 해야 할까요. 예수 안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로 인한 구원의 감격과 삶의 기쁨이 넘쳐 흘러야 합니다. 예수로 그 심령이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해 하게 됩니다 (엡 5:19).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 안에 있는 소망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예수 안에 있는 소망보다 크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126:2)

 

여기에서 “그 때”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올 때를 말합니다. 즉 구원의 때, 회복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반드시 회복의 때가 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통전적인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또한 영혼과 육신과 물질을 아우릅니다. 너무나도 지치고 힘드시지요? 골방에 머무르는 이 시간이 진정한 골방이 되게 하십시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보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눠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소망을 심령 가운데 채우실 것입니다.

 

* 적용질문

1.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정 도피성이 되고 계십니까?

2. 묵상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닿아오는 나의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3. 도피성의 각 이름들이 갖는 의미들이 삶 속에서 그대로 이루지고 있습니까?

 

* 기도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의로 말미암아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위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을 덧입습니다. 삶에 고통과 아픔이 밀려올 때마다 우리의 요새 되시는 예수에게로 피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티끌 같이 천한 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왕같은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에 왕이 가지는 진정한 기쁨과 감격이 넘쳐 흐를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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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 되신 예수 (수 20:1-6)

* 도피성 되신 예수

* 여호수아 20:1-6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 본문

땅분배를 마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지정할 것을 명하십니다. 도피성이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망하여 살 수 있도록 지정된 성읍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살인을 한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피살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 즉 “고엘”이 살인자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발적인 살인자 즉 고의성이나 미움이 없이 살인한 경우에는 피할 길을 보장해 주는 것이 도피성 제도였습니다.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에 3개, 요단강 서편에 세개 총 6개가 세워졌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어디에서 출발하건 하루만에 달음박질하여 도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폭이 무려 14미터나 되도록 잘 닦아 놓았습니다. 누구나 쉽게 피할 수 있도록 피할 길을 넓게 열어 놓은 것이지요.

 

도피성을 찾은 살인자는 일단 도피성의 장로들에게 성문 어귀에 있는 재판대에서 사고 내용을 말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일단 성읍 안에 거처를 마련하여 주고 공식적인 재판을 통해 고의성 여부를 판단합니다. 고의인 경우 고엘에게 살인자를 내어주고, 고의가 아닌 경우 도피성에 살 곳을 내어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실수로 살인한 자(오살자)는 도피성에서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도피성에서 나가면 피의 보수자가 죽여도 무방했습니다. 부지중에 한 짓이라도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자기도 피를 흘려야 한다는 원리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원리에 의해 대제사장의 죽음을 그를 대신한 죽음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오살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적용

1. 유일한 살길 도피성, 유일한 살길 예수님

구약 시대에는 동해보복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칼에는 칼의 법칙입니다. 남의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잔인해 보이지만 공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이었지요.  그러나 이는 공의이기도 했고, 더 큰 범죄를 막기 위한 방지책이기도 했습니다. 공격을 받아 이가 하나 부러진 사람은 이 하나로 보복하지 않습니다. 홧김에 가해자를 죽이기도 하지요. 살인자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사람은 살인자에게만 보복하지 않습니다. 홧김에 살인자의 일족을 살해할 수도 있지요.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동해보복법이었습니다.

 

아무튼 살인을 한 자는 동일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살자에 대해서는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오살자가 피의 보수자의 손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도피성으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빌미로 죽음의 사슬을 들고 우리를 덮치려는 피의 보수자가 있습니다. 그 보수자를 피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피성되신 예수님에게로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예수님은 우리의 피할 바위시요 방패시며, 도피성이 되십니다.

 

그런데 도피성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림자일 뿐이므로 둘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도피성의 경우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도피성 예수님 안에서는 그 어떠한 죄인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께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2.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도피성의 문

도피성의 문은 항상,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며, 결코 잠그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이르는 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누구에게도 잠겨지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자유인에게나 종에게나 제한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오건 임종 직전에 오건 상관없습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 죄로 붉게 물든 손을 들고 와도, 상처와 아픔을 가득 안고 와도, 미움과 증오로 쩔어서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3. 대제사장이 죽어야 살 수 있었던 곳

도피성으로 피한 자가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으므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피성 제도에서는 대제사장의 죽음을 오살자를 위한 피흘림으로 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어주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바로 자기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대속의 제사를 드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의 대속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피성임과 동시에, 희생제물이시며, 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몸으로 체험하여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질고를 아시기에 오늘도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대제사장께서 우리의 슬픔과 눈물을 외면하실 리가 있을까요? 문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끊임없이 도피성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오고 피의 보수자가 우리를 쫓아 오는 것은 대제사장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하나님께 투정을 부립니다. “왜 이렇게 고통을 허락하시냐고, 왜 날 이 모양 이 꼴로 내버려 두시냐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입니다. 마치 오살자에게 있어서 복수를 위해 달려드는 고엘이 숙명이듯 말입니다. 바로 그 숙명을 피하게 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오살자에게 도피성이 허락되었듯, 우리에게도 도피성이 허락되었습니다. 우리가 슬픔과 질고를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유는 열심히 그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도피성 되신 예수님에게로 피하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4. 하루면 갈 수 있는 도피성, 일초면 갈수 있는 예수님

도피성은 하루면 갈 수 있도록 여섯 곳이나 설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라 할지라도 도달하기 전에 고엘에게 잡히면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피성에는 실패의 위험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도피성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실패의 위험이 없습니다. 일초면 갈 수 있으니까요. 그저 마음을 예수께로 향하는 순간, 주님께로 트랜스포트 (transport)가 이루어집니다. 일종의 초고속 포털 시스템이지요.

 

우리는 삶에 쫓기고, 고통에 쫓기고, 상처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질병에 쫓기면서도 왜 도피성을 찾지 못할까요? 일초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우리는 그저 그곳에 도달하여 그 성안에 거하며, 그 성안에서 주어지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도피성은 그저 법적인 보호만 받고 땡전 한푼 없이 쫄쫄 굶어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터전을 열어주고 도망자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저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다이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는 뭔가가 “더” 있습니다. 우리는 “더” 구해도 됩니다. 우리는 “더” 누려도 됩니다. 우리는 “더”행복해도 됩니다. 절대자 예수가 우리의 도피성이시기 때문입니다.

 

5. 도피성을 벗어나면 죽음이 다시 찾아옴

오살자는 도피성을 벗어나면 안되었습니다. 도피성을 벗어나는 순간 고엘은 다시 오살자를 죽일 권리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의 품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품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의 피의 보수자 마귀는 우리를 덮칠 틈새를 얻게 됩니다. 늘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품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5.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초대형 대로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폭이 14m나 되었습니다. 큰 대로를 만들 일이 별로 없었던 당시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파격적인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 역시 그렇게 넓어야 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에게로 가는 길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맘에 드는 교회를 골라 잡으라고 교회들이 많은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교회 이기주의에 빠지면 안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흥해야 합니다. 교회끼리 서로 돕고 보살피며 위해 주며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도피성 예수에게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예수에게로 가는 길을 넓히라고 부르심을 받은 길들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 예수를 찾아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길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를 밟고 가면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게로 가는 길을 오히려 차단하는 장애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지나쳐 가는 그 길 끝에서 한 영혼이 예수를 만나는 귀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적용질문

1. 도피성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사십니까?

2. 우리의 모든 슬픔과 질고를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 모두 아뢰십니까?

3. 나는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 기도

우리의 요새시요, 우리의 피할 바위 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피할 성,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날마다 안연히 거하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결코 도피성 되신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안고 매순간 주저없이 예수님에게로 피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의 아픔을 씻기셨던 그 예수님의 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누군가에게 길이 되는 삶을 살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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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분깃, 딤낫세라 (수 19:49-51)

* 나머지 분깃, 딤낫세라

* 여호수아 19:49-51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 본문

땅분배가 순조롭게 마쳐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분배가 끝난 후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마지막으로 기업을 줍니다. 땅분배는 결국 갈렙으로 시작하여 여호수아로 마쳐졌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 때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두사람이 땅분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것은 그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땅분배는 곧 믿음과 순종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여호수아서에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은 ‘멸망의 씨앗’이지만, 믿음과 순종은 상급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분배받은 땅은 “딤낫 세라”였습니다. ‘딤낫 세라’는 ‘나머지 분깃(몫)’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땅을 나눠 가진 후 그 나머지 분깃을 여호수아가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의 땅을 분배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거할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리더로서 먼저 땅을 분배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땅을 주고 남은 땅을 받았던 것입니다.

 

딤낫 세라는 들어가서 그냥 살면 되는 그런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딤낫 세라는 훼파된 성읍이었고, 보잘 것 없이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딤낫 세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 여호수아는 먼저 그 성읍을 건설해야 했습니다.

 

* 적용

1. 진정한 리더는 딤낫 세라를 취한다.

여호수아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쳔 리더는 싸움에 있어서는 가장 선봉에 서며, 공을 나눌 때는 가장 뒤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배자와 지도자는 둘 다 수장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지배자는 싸울 때는 그 백성을 총알받이로 쓰지만, 지도자는 자신이 가장 선봉에 섭니다. 지배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몫을 차지하고 남는 것을 백성에게 주지만, 지도자는 백성에게 모두 나눠주고 남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합니다. 지배자는 가장 좋은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하지만, 지도자는 좋은 것은 백성에게 돌리고 서로 갖기를 꺼려 하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합니다.

 

진정한 리더는 딤낫 세라를 취합니다. 자신이 리더이거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크리스쳔 리더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정치체계와 헤게모니 구도를 결코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나눠주고, 맨 나중에 남는 것이 있으면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참된 리더입니다. 우리는 그런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운명은 많은 경우 리더에 의해서 좌우되곤 합니다. 배의 운명이 선장의 자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진정한 리더는 가장 좋은 땅을 취하지 않는다

크리스쳔 리더는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훌륭한 리더는 위임분공에 철저합니다. 위임, 즉 각 구성원들의 특성에 맞게 임무를 부여하여 공동체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분공, 즉 공을 나누는 일입니다. 공동체의 협업으로 열매를 얻었을 때는 그 공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배분이 되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을 나눌 때에 참된 리더는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것, 아직 개척이 필요한 것, 다른 이들이 선뜻 탐내지 않는 것, 그것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리더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 심령에 가득차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리더가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삽니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리더는 결코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깨끗해야 하고, 자신의 욕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스스로 리더가 되라

리더라는 것이 꼭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리더 얘기를 자꾸 하니 “오늘 묵상은 나랑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특정 리더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 맛을 잃은 세상에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리더란 단어는 응당 크리스쳔이란 단어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쳔은 남들을 먼저 배려하고 남는 것을 자기가 취하는 자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쳔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양보하고, 누구나 선뜻 갖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취하는 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힘들어서 꺼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일을 해도 표도 안나고,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한 것도 없이 욕만 먹는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반면 별로 한 것도 없이 유세를 떨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칭송받고 인정받기 위해 남이 한 일을 자신이 한 일처럼 위장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한 잘못이 아닌데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며, 십자가를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자리를 찾아 다니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뺀질 뺀질 모든 일을 피해 다니면서 누릴 것은 받아 누리다가, 조금만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들을 지적질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진정한 크리스쳔은 기꺼이 손해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취해야 하고, 누군가가 자신보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은 죽어도 못 봐주는 성정을 가졌다면 우리 마음의 주인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때문에 손해보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힘이 없어서, 소심해서 어쩔 수 없이 손해 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힘도 능력도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십니다. 썩을 것을 잃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영원한 것을 누리는 사람이 됩시다.

 

* 적용질문

1. 사심없이 구성원들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리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2.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십니까, 사소한 것에도 자기 욕심을 부리십니까?

3. 남들이 꺼려하는 자리를 좋아하십니까, 자기 이름이 드러나는 자리를 좋아하십니까?

4. 진정한 크리스쳔이십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고 주님 말씀 따라 살려고 하지만, 내 안의 속사람은 나의 욕심을 따라 살라 말합니다. 많은 순간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다른 사람보다 편해지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속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손해보며, 십자가를 지며, 짐을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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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파, 탁월하나 하나님께 잊혀진 자 (수 19:40-48)

* 단지파, 탁월하나 하나님께 잊혀진 자

* 여호수아 19:40-48; 창세기 49:16-18; 신명기 33:22

 

(수19:40)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수19:47)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수19:48)  단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촌락이었더라

 

(창 49: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창 49: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 49: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신 33: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 본문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맨 마지막으로 단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단 지파가 받은 기업은 블레셋에 접경한 부분으로 아직 정복되지 못한 땅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 안팎에는 강한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땅을 취하는데에 박차를 가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정복된 땅만을 가지고는 유다 지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인 64,400명이 살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정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던 그들은 결국 북쪽의 메롬 물가 쪽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레센'을 쳐서 정복한 후 그 이름을 단이라 불렀습니다. 레센은 라이스의 다른 이름입니다. 라이스는 다스리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싸움에 능한 단이 그곳을 취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기에 그들은 600명의 전사만으로도 그 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평화로운 땅을 침범한 단의 이 의롭지 못한 행동은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단에게 예언할 때에  “길의 뱀이요 첩경(샛길)의 독사라"하였고, 모세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라"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샛길의 독사처럼 그들은 갑작스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마치 바산에서 뛰어나와 덮치는 사자 새끼와도 같았습니다. 바산은 라이스가 있던 지역이었으며, 라이스 바로 위에는 바산이라는 산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비옥하여 먹이가 많았으며, 그에 따라 당연히 사자들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 바산에서 뛰쳐 나오는 사자처럼 단은 급작스럽게 라이스를 덮쳤던 것입니다.  

 

* 적용

1. 재능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쓰이는 방식이다.

단은 독사와 사자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용사요 전쟁에 능했습니다. 그들은 그 능력을 가지고 그들에게 허락된 땅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포기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된 땅을 취하는 대신, 허락되지 않은 땅을, 그것도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공략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설설 기고, 약한 자에게는 막 대하는 뱀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야곱으로부터 뱀이라는 예언을 받았으나 그들 스스로 그것을 싫어하여 자신들을 상징하는 깃발에는 뱀대신 독수리를 새겨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하는 행동은 독수리가 아닌 뱀이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데 썼습니다. 샛길의 독사가 갖은 힘이 주어졌으나, 그 힘으로 독사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

 

2. 은혜를 원수로 갚지 말라

그들의 잘못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를 취하러 가는 길목에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우상을 빼앗아 갔습니다. 미가의 집은 그들이 라이스를 정탐하러 갈 때에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곳입니다. 그들은 대접을 받는 동안 그곳에서 신상을 발견하였고, 라이스를 치기 위해 다시 올라가는 길목에 미가의 집에 들러 그것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던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지요.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 늘 옆에서 힘이 되어줬던 사람을 한 순간에 등지고 앞에서 상처주고 뒤에서 험담하는 일들이 크리스쳔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교회 안에서 깊은 친구를 사귀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함께 생명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 오히려 세상 친구보다 못한 관계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도 성도들이 일반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악해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싫건 좋건 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부딪힐 일이 많아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고작 세상 사람들이 비교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는 세상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함께 웃으며, 함께 즐거워 했던 사람을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순간에 공격하는 행위는 세상에서나 하는 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가져야 합니다.

 

3. 영성이 무너지면 도덕도 무너진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탈취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닌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그 조각 덩어리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첫번째 지파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들의 죄악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단은 분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여로보암이 우상을 세웠던 두 장소 중 하나입니다. 여로보암은 10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세울 때에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 대신 그것들을 섬기게 합니다. 단은 스스로 우상을 세웠던 장소였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우상을 세웠던 장소가 되고 만 것이지요. 하나님의 귀에 대고 스테레오 돌비 시스템으로 외친 셈입니다. “난 당신 백성 안 할 거야!”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떠난 영적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무뎌지면 반드시 도덕적 타락으로 치닫게 됩니다. 기준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두 돌판 중 첫째 돌판을 지켜야 둘째 돌판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해주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십계명을 요약한 두 계명은 한 계명인 셈입니다. 따로 노는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4.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되고 말 것인가?

결국 단 지파는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뱀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에 인침을 받은 12 지파의 이름 속에서 단의 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파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멀리 요한 계시록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역대상에 나열된 족보에도 단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록 속에서 지워 져버린 것이지요. 단 지파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단지파의 이름이 영원히 삭제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단도 결국은 회복되어 땅을 분배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겔48: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억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파처럼 그 이름이 아예 기억되지 않다가 선택되었으니 겨우 회복되는 수준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살아 생전 주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아무런 업적도 없이, 그저 구원받았으니 겨우 이름이 회복되는 수준에 머무르는 비참한 꼴이 되면 안될 것입니다.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가면 우리가 주님을 하루 이틀 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치열하게 분투하여 하나님이 기억에 각인될 만한 멋진 신앙의 추억들을 만들어 두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렷한 추억으로 살고 있습니까, 흐린 기억으로 살고 있습니까?

 

* 적용질문

1.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나만의 재능은 무엇입니까?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계십니까?

2. 샛길의 독사처럼 막다른 길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습니까?

3. 함께 웃고 함께 손을 잡았던 사람, 심지어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을 상처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4. 하나님께 기억될 만한 일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기도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왔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첩경의 독사처럼 형제 자매를 공격하고 상처주었던 일들을 또한 돌아보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일을 멀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하여 하나님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힘주시고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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