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옆을 걷는 사람들 (눅 23:26-31)

* 십자가 옆을 걷는 사람들

* 누가복음 23:26-31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1.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 하나를 소개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있듯이 그는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살다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잠시 방문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놀라운 기적의 사람이 처형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중들에 섞여 그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번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의 눈앞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붙들리신 이후로 심문을 받느라 잠을 한 숨도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온갖 구타와 매질을 당하시고, 채찍질로 인하여 몸은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찢겨져 나간 살점이 있던 자리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야말로 서있기만도 힘든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고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벼운 작대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로대 40kg, 세로대 60kg의 무거운 기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가차없이 가해지는 채찍질에도 도무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군인들은 십자가 행렬을 구경하던 건장한 청년 시몬을 불러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억지로” 말이지요. 그렇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의 첫만남을 대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을 특이한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막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 소개를 하는 것이지요.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입니다. 마가는 로마의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즉 구레네 시몬의 아들들은 로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루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루포는 로마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인 구레네 시몬의 부인 역시 바울의 영적 어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함께 지는 과정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통해 구레네 시몬은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후에 예수님을 위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아들 루포도 교회의 핵심적인 일꾼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한 가정의 구원을 가져온 것이지요.

 

2. 십자가의 영성이 실종된 시대 속에서 십자가 붙들기

현대의 크리스쳔들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교회를 고르는 기준은 십자가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리더들마저도 십자가를 지기 보다는 면류관을 쓰기를 기뻐합니다.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성도들이 모여 행복하게 교제하고 누리고 놀다가 한 세상 마감하는 것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를 찾을 때에 내가 질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없이 묻혀서 하는 일 없이 왔다갔다 하며 교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늘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감당이 안될 때에는 쉬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섬기는 물질이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과 힘듬을 모두 이해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에 기쁨이 없고 힘만 들다 할지라도, 그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자신이 회복에도, 하나님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 죽도록 섬겨도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욕얻어 먹을 것이 뻔한 일, 그런 일들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십자가는 숙명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상이지만, 가끔은 억지로라도 지고 가야 합니다. 처음엔 억지로였던 것이 결국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악용하여, 십자가를 버린다면, 진정으로 힘들고 고독한 그 십자가는 누가 지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탈진한 상태에서도 지셨던 십자가, 주님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십자가를 이제는 우리가 지고 갑시다. 십자가를 온전히 못 지겠거든 십자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따라갑시다. 십자가에 흘려진 피와 땀은 단 한방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은혜로 갚으십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옆자리를 지키는 여인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실 때 그 뒤를 따라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절대적 약자인 여인들이었습니다.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자신들을 찾아와 사랑으로 감싸주고, 삶의 무게를 덜어주었으며, 절망을 지워주신 그 분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분, 은혜를 베푸신 분이 땀과 피로 얼룩진 채 비틀거리며 십자가를 지고 걷다가 수도 없이 넘어지는 광경을 봐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여인들은 죄 없는 분이 학대를 당하고, 선하신 분이 십자가의 저주를 지며, 의로우신 분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닌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으로 울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에 대한 경고요, 회개에 대한 권고였습니다. 심판의 날이 올텐데 그 날에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 걱정할 것없이 자기 몸만 챙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차라리 산사태가 나서 자기들을 묻어 버리기를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가 너무 심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위하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자손들의 죄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있을 진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가르키고, 마른 나무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가르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신 것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그 죄들의 원 주인인 마른 나무같은 우리에게 가해질 진노는 도대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미 일차적인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날이 되면 이 경고는 다시 한번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 경고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영성과 하나님을 떠나는 아이들,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4. 오늘날 우리가 위하여 울어야 할 것들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울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르며 가슴을 치던 여인들처럼 예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의 가시 하나 하나, 예수님의 몸에 내리쳐진 채찍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의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것을 우리는 왜 가슴 아파합니까? 고통받는 한 인간의 아픔때문입니까, 그 아픔을 야기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까?

 

죄인인 우리에게는 죄가 하찮게 여겨지지만 절대선이신 하나님께 죄란 너무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공의를 행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죄를 진 죄인들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임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인생의 해가 저물고, 그 날이 오면 영혼에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쓰나미를 죄인인 인간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할 길은 오직 하나 은혜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법에 등록을 하는 자는 은혜에 의해 산다는 법입니다. 푸른 나무인 예수님께 가해졌던 진노와는 비교될 수 없이 참혹할 진노를 피하고 싶다면, 은혜의 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은혜의 법안으로 이미 들어와서 마른 나무에 임할 진노를 이미 피했다면, 우리의 눈물의 의미는 달라져야 합니다. 동정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사와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 결단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오르시는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울고 있습니까?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품어 보신 적이 없다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향한 감동이 죽어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그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아야 할 세가지의 물이 있습니다. 눈물, 땀, 피입니다. 주님을 위해 땀을 흘려 헌신하고, 피를 흘려 순종하기 전에 반드시 흘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물입니다. 죄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 죄를 용서받아 흘리는 감격의 눈물, 주님을 사랑하여 흘리는 사랑의 눈물, 주님을 향하여 살겠노라는 결단의 눈물로 우리의 심령이 촉촉히 적셔져야 합니다. 그 눈물없이 흘리는 땀과 피에는 열매도 기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헌신의 땀을 흘리고, 눈물이 있기에 고난의 피,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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